소설리스트

25화 (25/134)
  • 25화

    “개…?”

    움찔한 레그리아는 연주를 멈추었다. 기분이 상한 것도 있지만 무언가를 꿰뚫린 듯한 느낌에 심장이 덜컥한 탓도 있었다.

    “누구에게 연주를 배웠나.”

    “처음에는 모친.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이후부터는 선생님이라고 부를 존재는 없었어. 그냥 동생이 한 번씩 와서 가르쳐 줬지. 내 버릇을 고쳐 주거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기도 하면서.”

    적선하듯이.

    불쌍한 개에게 뜯다 만 갈비를 주는 것처럼.

    말투에 빈정거림이 묻어나고 있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라히크가 건드린 부분은 그녀가 늘 아파 감추고 싶어 하는 영역이었으므로.

    그런데 불편해 하는 그녀의 기색을 눈치챘을 텐데도 라히크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동생이 피아노를 잘 쳤나 보군.”

    “응. 천재였어.”

    “천재라.”

    “그 애는, 절대음감을 가진 건 당연하고… 피아노의 요정이라 불렸어. 그 애의 연주는 너무 자유로워서 그 칭호를 부정할 수조차 없었지.”

    “그게 부러웠나?”

    “응. 엄청. 너무 부러웠어.”

    “그래서 갇혀 버렸나.”

    “음, 그것도 맞아. 갇혀 버렸지. 언젠가부터 그 애가 치는 것 이상으로는 연주할 수가 없게 된 거야. 영영.”

    이런 내가 우습지?

    레그리아는 제 손을 펼쳐 보이다가 그대로 말아 쥐었다.

    피아노, 다시 치는 게 아니었어. 그냥 모른 체할걸. 기억나지 않는 척할걸…….

    후회는 까끌거리는 모래알 같았다.

    과분한 걸 탐내어서 결국 이렇게 창피를 당하는구나.

    얼굴이 홧홧하여 당장 의자에서 일어서야만 할 것 같았다.

    이깟 재능 가지고 이런 좋은 피아노를 칠 생각을 다 하다니. 주제도 모르고, 어울리지도 않게.

    “이 재능을 가지고 어째서 어울리지도 않는 방식으로 연주하나 싶었더니.”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라히크의 말은 비슷하지만 전혀 달랐다. 그녀의 재능을 칭찬하는 게 아닌가.

    레그리아는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 피아노에 대해 알아?”

    “연주보다는 가르치는 게 취향이다만, 모르진 않지.”

    혹시 피아노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냥 무조건 잘 친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약간 미심쩍어 그렇게 물었으나 라히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히 답했다. 그러더니 그녀의 옆에 서서 스윽 허리를 굽히곤 건반에 손을 얹었다.

    “너 역시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다. 네 동생이었다던 이가 정답만은 아니지.”

    “그건 알아.”

    “천재를 눈앞에서 보면 대부분 주눅 들고 휩쓸리게 된다. 그게 네 잘못은 아니야.”

    이상한 일이다. 저 나직하고도 담담한 한마디가 어째서 위로같이 들리는지.

    언제나 제 잘난 맛에 살아왔을 듯한 인간인데 그녀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지금 라히크의 얼굴에 어려 있는 것은… 분명 천재에게 가려져 본 적 있는 자의 그것이었다.

    레그리아가 지난 세월 내내 지어왔을 표정이 찰나의 순간, 그에게도 엿보였다.

    ‘나야 노력형 범재에 불과했지만 라히크는 아마 영재였겠지.’

    허나 영재여 봤자 진짜 천재의 발끝에는 미치지 못한다.

    천재들은 본디 경지가 다른 이들이니까.

    그녀의 시선을 받던 라히크는 금세 표정을 고쳤다. 순식간에 마치 한 겹 가면을 덧씌우듯 오만하고 거만한, 평소의 얼굴이 된 것이다.

    “얌전히 있으면 벨리그레엄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소개시켜 주겠다. 네 동생의 그림자를 지워내기만 해도 네 연주는 믿을 수 없이 달라질 거다.”

    베토벤의 월광.

    장난치듯 그 곡의 서두를 연주하던 라히크가 몸을 바로 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레그리아는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다시 배우면 연주가, 달라질 거라고?’

    그런 말은 누구에게도 들은 적 없는데.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동생의 연주를 따라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건 스무 살 어귀였다.

    다른 선생님을 찾아 레슨을 받고 싶었어도 다들 모친과 동생의 후광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토록 훌륭한 연주자가 둘이나 곁에 있는데 뭐 하러 다른 사람에게 배우려고 하느냐는 핀잔이나 들었지.

    그렇게 그녀는 체념을 익혔다.

    스스로 연구하는 것을 멈추진 않았지만 천재에게도 코치는 필요하다.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줄 스승이 있다면 재능에 날개를 단 격이지.

    ‘달라질 수만 있다면 나도 달라지고 싶어.’

    그녀의 양 발목을 잡고 있는 늪은 벗어나려 발버둥을 칠수록 더더욱 깊이 빠져들기만 했다.

    동생의 독주회에 따라다니느라 작은 콩쿠르 하나조차 나갈 수 없었던지라 레그리아는 자신이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동생에게, 모친에게 찾아가 기분이 좋아 보일 때 조심스레 한두 가지 물어보고 고쳐보고 그랬을 뿐.

    “곧 신황청 내에 후작 이상의 고위 귀족만 모아서 너를 미리 소개하는 자리를 가질 거다. 황태자비로서 사교계에 나갔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예비 연습이라 여기면 된다.”

    “응.”

    “그때 슈만 부코바즈가 와. 올해 70세가 된 꼬장꼬장한 노인네지만… 틀림없이 이 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다. 내 피아노 스승이기도 했고.”

    연주를 들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게끔 만든 건 라히크가 내보이는 존경의 표시 때문이었다.

    저 방종하고, 제멋대로에 이따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남자가 스승이라 부르며 인정한다.

    얼마나 대단한 분일지 벌써부터 두근거리고 기대가 되었다.

    “저기. 고마워, 라히크.”

    “이제야 웃는군.”

    “어…?”

    “계속 그리 웃어라. 찡그리고 있지 말고. 사교계는 냉엄한 곳이다. 웃음이 무기가 되고 견고한 성이 될 테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히크가 손을 뻗어 뺨을 둥글게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답지 않게 친절한 설명을 해 주기에 레그리아는 이번만큼은 톡 쏘아붙이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트리체도 꿈속에서 여러 번 경고한 내용이다.

    표정을 언제나 신경 쓸 것. 감정을 내보이지 말 것.

    하지만 라히크는 모를 것이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짜증이나 신경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건 라히크가 유일하다는 것을.

    레그리아는 사람 간에 선이 있다고 생각했다.

    라히크가 그 선을 넘나드는 짓을 하도 하기에 예의 차리는 걸 포기했을 뿐, 다른 이들에게는 라히크에게 하듯 대할 생각이 없었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겠지. 언제고 그랬듯이.

    ‘아, 그러고 보면… 그러게. 난 라히크 앞에선 미소조차 짓지 않는구나.’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은 레그리아가 제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만약 신경 쓰고 있었다면 조금은 미안하다…가도 그날, 샘에 빠져 죽을 뻔했던 걸 떠올리면 미안함이 싹 가셨다.

    “피아노는 됐고, 이제 이쪽을 구경하겠나.”

    라히크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흰 제복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는 훈장이 빼곡히 박혀 있다. 저런 무거운 걸 달고 다니면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게 신기하였다.

    저런 게 황족으로서의 기품이겠지. 날 때부터 배우는 것.

    “여기 있는 현악기 중에선 어떤 걸 잘 다루지?”

    “첼로를 좋아해.”

    “맞춰 보지. 네 동생이란 아이는 바이올린을 연주했겠지.”

    “어떻게 알았어?”

    “모든 게 너와 반대일 거라 예상했을 따름이다.”

    고작 몇 마디 들은 걸로 예상이 되는 걸까.

    고개를 갸웃하던 레그리아는 조용히 첼로가 놓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첼로엔 귀여운 리본이 묶여 있었다.

    그걸 매만지다 풀어낸 그녀는 이내 활을 쥐고 가벼운 곡을 연주했다.

    15분 내에 끝나는 아주 짧은 곡을 끝내자 가만히 듣고 있던 라히크가 턱을 문질렀다.

    “그게 좋겠군. 피아노 실력은 차후에 공개하도록 하고, 첼로부터 우선 선보이는 게 낫겠어.”

    “내가 연주를 해야 해?”

    “황태자비로서 네가 얼마나 교양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자리다. 말이 서투른 건 상관없지만 다리는 반드시 그전까지 다 나아야 해. 춤을 춰야 하니. 그리고 악기를 하나 연주해 보이는 게 좋겠지.”

    “춤? 내가 춤까지 춰?”

    “나와 추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으로 어떤 걸 해야 하는지 들은 레그리아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엄청난 몸치인데 어쩌면 좋지.

    다리가 낫는 것만도 힘든데 춤까지 춰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새카매졌다.

    “걱정할 것 없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난 춤을 춰 본 적 없단 말이야.”

    “몸에 힘을 빼고 내게 맡겨. 그러기만 하면 된다.”

    말은 쉽지.

    입을 비죽이던 레그리아는 한숨을 내쉬곤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걸렸던 문제였다.

    “내 치장을 도와줄 아이 하나가 더 필요해.”

    “에오스로 충분할 텐데.”

    “에오스 말고, 소녀로. 견습 신관 중에 봐 둔 아이가 있어.”

    셀린.

    그녀를 지켜 주려 했던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땐 제 상황도 그다지 좋진 못했기에 챙겨 줄 수 없었으나 지금은 다르니까.

    “그때 그 사건 때 네 근처에 있던 견습 신관을 말하는 건가?”

    “맞아. 이름은 셀린이야. 그때 셀린은 나를 지키려고 했었어.”

    레그리아는 활을 내려놓고는 라히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셀린을 그녀의 곁으로 데려오고 싶은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는 고마웠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정신을 좀 차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셀린이 아마 견습 신관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을 것 같았고.

    그리고 세 번째로는.

    ‘에오스는 좋은 사람이지만, 믿을 수 없어.’

    라히크의 사람이니까.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사람이 필요하다.

    입이 조금 가볍고, 그녀를 동경하고, 잘 대해 주면 감동을 받을 만큼 아직 어린 참새.

    셀린은 그러기에 제격이었다.

    “흐음. 해 달라고 하니 해 주기가 싫은데.”

    “어떻게 해야 들어줄 건데?”

    라히크가 저렇게 뻗댈 것은 이미 예상했기에 레그리아는 차분히 물었다.

    하나 맹세코 그가 이렇게 말할 줄은 알지 못하였던 게 그녀의 패착이었다.

    “먼저 키스해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