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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4/134)
  • 24화

    * * *

    “데이트 하지.”

    다음 날, 라히크는 또다시 아침부터 찾아왔다.

    황태자라는 게 그렇게 편하고 할 일이 없는 자리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식사는 마쳤다고 들었다. 보여 줄 곳이 있으니 바로 이동하는 게 좋겠군.”

    “……알겠어.”

    데이트를 청하는 남자치고는 태도가 영 글러 먹었지만, 레그리아는 그 점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저것만 해도 라히크가 많이 숙였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자존심 강한 데다 늘 우월한 삶을 살아온 자다.

    그런 그가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형식상으로라도 데이트를 하고 나서 결혼하겠다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까.

    ‘일단은 고분고분하게 굴면서 내 삶을 찾을 길을 구해야 해.’

    누군가는 보석이 가득한 화려한 삶을 꿈꾸리라. 또 누군가는 권력을 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그냥 소박하고 아담한 집에서 적당히 벌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을 뿐이었다.

    라히크 같은 감당하기 버거운 남자 말고 다정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마음 여려 다친 동물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말이야.

    손해 보며 살아도 좋으니 타인에게 칼을 꽂지 못하는 순한 사람이 좋다.

    그런 점에서 라히크는 어떻게 봐도 탈락, 탈락, 탈락이었다.

    “이쪽으로.”

    아직 걷는 게 온전하지는 않다.

    절뚝이는 다리로는 라히크의 걸음을 쫓는 게 너무 버거워 레그리아는 벽을 짚은 채 간신히 걸음을 떼어 놓아야만 했다.

    “여기를 돌면… 쯧. 거기서 대체 뭘 하는 거지?”

    “너무, 빨라.”

    옅게 숨을 헐떡이는 그녀를 향해 라히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기에 속에서 분이 울컥 차올랐다.

    “네가 느린 것이다. 그 다리는 대체 언제 멀쩡해지는 거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직 의사가 쓰는 용어들을 알아듣기엔 무리다. 검사를 하러 들어올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기만 하는 것을 어쩌라는 건지.

    그녀의 원망에 찬 시선을 받던 라히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늘한 얼굴로 고개를 슬쩍 틀었다.

    그게 꼭 산책이 끝난 뒤,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강아지를 보는 듯한 눈빛이라 기분이 묘했다.

    “참으로 손 많이 가는 계집이로다.”

    “뭐?”

    “영광으로 알아라. 이토록 내 품에 자주, 여러 번 안긴 여인은 없었으니.”

    “헉!”

    분명 복도 저편에 있었는데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라히크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더니 또다시 멀미가 날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입을 틀어막은 채 꾸역꾸역 치솟는 토기를 가라앉히려 노력하던 레그리아는 이 망아지 같은 남자에게 과연 배려라는 걸 가르칠 수 있을지 암담해졌다.

    “이걸 봐라.”

    “잠시, 잠시만.”

    레그리아는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며 라히크의 팔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이건 꼭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두 번 다시는… 나를 그렇게 멋대로 낚아채서 달리지 마.”

    “뭐라?”

    “내가, 우욱, 당신 어깨에 토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나는 물건이나 짐짝이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무식하게 옮기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것까진 뱉지 못해 삼켰다.

    라히크는 몹시 못마땅해 보이긴 했으나 벽을 향해 돌아서서 계속 헛구역질을 하는 그녀를 보더니 한숨과 함께 고개를 까딱였다.

    “안 되는 것도 많군. 알겠다.”

    안 되는 게 아니라 당연한 거잖아!

    마치 그녀가 무리한 요구를 했는데 선심을 써서 들어주겠노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지만 레그리아는 스스로를 추슬렀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저건 거대하고 못됐고 성질이 고약한 표범 비슷한 것이다.

    혼자서나마 그렇게 여기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제 다 했으면 여길 봐라.”

    “하아, 뭔데 그래.”

    “악기를 갖고 싶다 하지 않았나. 무얼 좋아하는지 몰라 전부 다 준비하라 하였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허리를 펴자 라히크가 눈앞에 자리한 새하얀 문을 열어젖혔다.

    하도 환한 볕이 쏟아져 들어와 눈살을 찌푸리던 레그리아는 문득, 그 햇살이 닿는 곳에 자리한 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피아노?”

    “칠 줄 아는가 보군.”

    “…응, 알아.”

    이 세계에 빙의해 온 신성인들이 긴 역사 동안 여러 문화를 전파하였기에 이곳에도 피아노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굳이 피아노라고 지목하지 않고 악기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했던 건,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은 마음과 영영 멀리하고 싶은 마음.

    그 두 가지가 상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떡하니 그랜드 피아노를 받게 되니 마음이 영 이상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쉽게 표현이 되질 않는 기분. 먹먹함에 느리게 안으로 들어서자 라히크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어 왔다.

    “이 방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현악기를 두었다. 왼쪽은 악보실이고. 원한다면 교습 선생을 붙여 주마.”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비틀거리던 레그리아는 새하얀 피아노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이다가, 다시 닫았다.

    선생은 필요치 않다.

    긴 세월 동안 그녀가 한 노력은 수도 없이 많았다.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워서 치면 조금이라도 더 잘 칠까 싶어 아등바등하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혹 피아노가 아닌 다른 악기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가야금까지 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끝은 피아노였다.

    증오하고 사랑하고 원망하고 집착한 단 하나뿐인 상대.

    “네 것이다.”

    라히크가 슬쩍 등을 밀었다.

    미는 대로 밀려 나간 그녀는 주춤하며 피아노의 건반을 쓸어 보았다.

    둥.

    낮은음 건반을 하나 잘못 누르는 바람에 방 안에 소리가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떼려 했으나 어느새 다가온 라히크가 그녀의 손등 위로 깍지를 끼어 얹었다.

    “칠 줄 안다고 하지 않았나. 한 곡 연주해 보지.”

    “아니, 나는….”

    “망설이지 말고.”

    라히크의 제안은 너무나 달콤했다.

    사실 건반을 한 번 눌러 보았을 뿐인데 벌써 손끝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인다. 그것만 해도 그녀는 이 피아노가 얼마나 조율이 잘 된 값비싼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귀한 것으로 연주하면 분명 설레겠지.

    ‘동생만 이런 피아노를 칠 수 있었으니까.’

    가슴이 터질 듯 쿵쿵 뛰어댄다.

    고백하자면 레그리아 역시 이 정도로 좋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 지금 풀리려고 한다.

    이 밉살스러운 남자 덕분에.

    “……고마워.”

    자그맣게 중얼거린 레그리아는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길쭉한 의자는 어두운 녹색의 벨벳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너무나 편안했고 앉은키도 딱 맞았다.

    마치 그녀만을 위해 맞춤 제작을 한 것처럼.

    “신성계의 음악에 대해 배워 알고 있는 편이다. 어디 한번 연주해 보라. 실력을 알고 싶으니.”

    피아노에 기댄 라히크가 턱짓을 했다.

    고맙다가도 거만해서 주둥이를 한 대 때리고 싶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그러나 이 피아노는 확실히 그가 준 것이 맞았고, 레그리아는 거기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했기에 군말 없이 건반에 손을 얹었다.

    지금은 어쩌면 누군가 등을 밀어주는 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건 당신이 잘생기기라도 해서 쳐 주는 거야.”

    “그것참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라히크가 잘생긴 눈썹을 까딱였다.

    이 피아노가 들려줄 첫 곡으로는 뭐가 좋을까.

    짧게 고민해 보지만 사실 답은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손가락이 부드럽게 건반을 오간다.

    얼마 전 있었던 세비레이크 경과의 아쉬운 만남이 그녀의 손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발디, 겨울 2악장.”

    “맞아. 정말 잘 아네.”

    “무슨 뜻으로 그 곡을 연주한 거지?”

    “무슨 뜻이 있겠어. 지금이 겨울이니까 겨울을 연주한 거지.”

    조용히 선율을 즐기는 듯하던 라히크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레그리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곧바로 가을 3악장으로 넘어갔다.

    어느새 자신이 미소 짓고 있음은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계절을 뜻하는 곡 외에는 없나?”

    “뭐가 좋을까. 좀 더 진지한 것?”

    손은 어느 정도 풀렸다.

    이 다음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곡을 택해도 되겠지.

    레그리아는 길게 숨을 내뱉고는 달빛을 어루만지는 듯한 곡을 거침없이 흘려내기 시작했다.

    느려야 할 부분에선 느리게, 빨라야 할 부분에서는 빠르게.

    기교 없이 정직한 연주는 어찌 보면 화려한 맛도 없이 수수하고 둔하였으나 그게 바로 그녀라는 사람이었다.

    곡선보다는 직선이 좋다. 에둘러 가는 것보다는 음악이라는 걸 그 자체로 직면하고 싶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천재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피아노를 치는 게 너무 좋으니까.

    세상에 오롯이 피아노와 저, 둘만 남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때도 있었다.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아도 되도록.

    그녀의 구원, 그녀의 가족, 그녀의 연인, 그녀의 친구. 그 모든 것이 피아노다. 오직 이것만이 자신을 이루는…… 제아무리 피하고 달아나고 싶어도 끝내 쫓아와 옭아매고 마는 것.

    “잠깐.”

    그런데 홀린 듯 연주를 하던 도중이었다.

    어디서 얇은 지휘봉을 가져온 라히크가 팔짱을 낀 채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지휘봉을 느긋이 움직여 새끼손가락을 툭 치는 게 아닌가.

    “버릇이 잘못 들었군. 누가 그렇게 할딱거리는 개처럼 연주하라 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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