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세비레이크 경에게 안긴 모습을 보였다면 라히크는 아마 저렇게 평온하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다.
라히크는 꼭 샘 많은 어린아이 같아 제 장난감이 다른 이의 손을 타는 걸 내버려 둘 성정이 아니니까.
“미리 경고하지. 나는 바람피우는 걸 용납할 생각이 없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남자를 전혀 모르는 그녀로서는 바람을 피워 본 경험은 당연히 없었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비트리체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남편감은 이 남자 저 남자를 다 만나본 다음 제일 괜찮은 놈으로 골라야 한다고 하지만 레그리아에게 연애란… 귀찮기만 한 환상 속의 무엇이었다.
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굳이 해야 하나 싶은 그런 것.
결혼하고 싶은 이상형은 있지만 연애하고 싶은 이상형은 딱히 없었다.
동생은 늘 그런 그녀더러 목석에 멍청이에… 또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여자로서의 매력이 전혀 없다고 했지.
레그리아는 내심 동생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남자라도 애교스럽고 유혹적이고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여자에게 더 시선이 갈 것이다.
저같이 수수하고 눈에 띄지 않는 데다 촌스럽고 말재간조차 없는 여자가 아니라.
“…바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피우겠지.”
“그렇게 매도하면 불쾌한데. 제 짝을 두고 눈을 돌리는 자는 없다.”
“누가 짝을 해 준대?”
“……실로 한마디도 안 지는군.”
에오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레그리아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과 종이를 앞에 놓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라히크가 저를 노려보는 시간이 삼십 분이 넘어가자 그녀는 이제 깃펜을 들어 어제 외웠던 단어를 한 자 한 자 복습 중이었다.
라히크가 성질을 부린다고 해서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출 생각은 전혀 없다.
연애 놀음 하자는 게 아니라 황태자비가 되라 하지 않았나.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주는 건데 왜.
“다른 남자와 정신 접촉을 하지 마라.”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네가 헤프게 구니 그런 일이 벌어진 거겠지.”
“내가 무슨…!”
며칠은 바쁘다더니 갑자기 찾아와서 저를 매도하기나 하다니. 황태자 자리라는 게 그리 바쁠 것 없는 일인 줄은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긴 숨을 내뱉으며 입을 다물었다.
목 안쪽이 아프다. 라히크와 쓸모없는 입씨름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형편없이 굴지 마. 그런 말이나 하러 온 거면, 알겠으니 돌아가.”
어차피 질 싸움이다. 괜히 화를 내서 기력 빼지 말자.
아닌 게 아니라 머리가 울리고 있었다. 입맛도 없고 몸이 축축 처지기만 하니 다시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사람을 앞에 두고 눕는 짓만큼은 할 수가 없어 간신히 허리를 세우고 있는 것뿐이지 아프단 말이야.
뜨끈히 열이 오른 머리를 짚던 레그리아는 라히크가 또 입을 벌리는 걸 보곤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
그리고 방 안에, 끔찍한 적막이 찾아들었다.
* * *
‘돌겠군.’
숨 막히는 정적 속, 라히크는 제 앞에 앉은 여자를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벌써 10분인가. 아니면 20분쯤은 지났을지도.
여자는 환장하게 고집이 셌다.
유순한 척 고분고분한 척 굴다가도 뭔가 하나가 수틀리면 저렇게 홱 성질을 낸다.
황권이 강한 이 나라에서 감히 황태자인 그 앞에서 저리 방종할 수 있었던 사람이 또 있는가.
그와 몸을 섞은 적 있는 영애라 할지라도 말 한마디, 몸짓 한 번까지도 조심해야 마땅했다.
하물며 아직 황태자의 침상을 한 번 데운 적조차 없는 계집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헌데.’
어째서 벌을 내리고 싶지 않은 건지.
저 앙상한 턱을 붙잡아 제게 시선을 고정하도록 강제하고 싶다. 엉엉 울도록 만든 뒤 눈알에 고인 즙을 핥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라히크는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벽난로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찔하면 견고히 유지해야만 할 이성이 뚝 끊길 것만 같아서.
맹세컨대 라히크는 무소 떼처럼 내달리는 성욕에 제어를 가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씨는 뿌리라고 있는 것이고 훌륭하기 그지없는 물건을 내버려 두는 것도 아까운 일이지 않나.
그런데 저 나무토막같이 구는 여자가 뭐가 그리 예뻐서 한 달째 수절 중인 건지.
시도 때도 없이 서는 것을 혼자 처리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눈만 감으면 저 고약한 여자를 어떻게 해야 침대로 끌고 가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나 하다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는 요즘.
레그리아는 그런 그를 알기라도 한다는 듯, 혹은 어떻든 상관조차 없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겨울 망루나 지키는 그 어린 새끼 앞에서도 저런 감흥 없는 표정이었을지.’
고작 두 살 차이 날 뿐이지만 표드르 이안 세비레이크를 실컷 비하한 라히크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초조함과 분노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자와 내 내면세계는 어떻게 달랐지?”
“……?”
“상성이 잘 맞았다고 들었다. 설명해.”
신성인과 신성 기사의 정신 접촉은 상성이 좋을수록 이어져 있는 시간이 길었다.
상성이 나쁘면 아주 짧거나 혹은 뭘 해보기도 전에 튕겨 나오고는 한다.
100년쯤 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성 기사와 완벽하게 상성이 맞아떨어지는 이적을 발휘한 신성인이 한 명 있었으나 그녀에 대한 것은 전설로만 내려왔다.
긴 역사상 단 한 명뿐이었기에 전설인 것이다.
“그냥, 내가 고집스러웠을 뿐이야.”
“고집?”
“당신의 내면은 성질 더러운 고양이가 털실을 가지고 놀다가 아무렇게나 뭉쳐둔 것처럼 생겼어.”
허.
짤막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라히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런데 세비레이크 경은, 그냥 부서진 성이었어. 그래서 다시 쌓아 올린 것뿐이야.”
“그래, 그걸 밤새도록 했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나도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
앵돌아진 옆얼굴이며 조잘대는 입술이 탐스럽기 그지없다.
저 얇은 손목을 낚아채 책상에 눕히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인데 이상하게도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는 것보다 그저 지켜보고 싶은 건 왜일까.
구한다 하여 답을 들을 수 없는 문제이기에 라히크는 그저 시선을 내리꽂기만 했다.
레그리아의 연녹색 눈동자에, 오뚝한 콧날에, 창백한 광대뼈와 사슴처럼 매끈하여 화살을 박아 넣고 싶은 목에.
그러고 보니 저것이 웃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혹 그 새끼 앞에서는 웃었을지.’
찰나, 명치가 아플 정도로 배알이 뒤틀렸다.
동시에 배꼽 아래에서 열불이 치솟는다.
이건 뭐 발정 난 짐승도 아니고 육신이 삼등분 되기라도 한 건지.
머리와 가슴, 아래가 각기 다른 언어를 내뱉으며 아우성치는 듯한 기분.
라히크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색욕에 휘둘리는 머저리라 여겨 본 적 없었다. 그에겐 모자랄 것 없었고 여자는 언제나 넉넉하였으니.
“네가 그랬지.”
“무얼?”
“자신이 없느냐고.”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온 이유 하나다.
실컷 주무르고 만지지 않고서는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
“거래를 제안하지.”
“거래?”
“네가 그토록 수성에 자신이 있다면, 이쪽도 가장 자신 있는 무기로 상대해야 옳지 않겠나.”
내내 다른 곳을 향하던 시선이 끝내 제게로 향하는 것을 보자 뱃속이 눅진해지는 기분이다. 극도의 만족감과 애타는 감각이 동시에 그를 긁어내렸다.
헛소리든 뭐든 지껄여서 저 시선을 자신에게 붙박여 두고 싶다.
웃지 않는 건 상관없었다.
우는 게 더 꼴릴 테니.
“섹스를 제외한 모든 스킨십을 허용하도록. 그래도 네 그 잘난 벽을 무너트리지 못할지 두고 보지.”
“내가 안 넘어가면?”
“그토록 싫어 죽겠다는 계집에게 어찌 귀한 자리를 줄까.”
괘씸하기는.
무얼 원하는지는 몰라도 그게 황태자비 자리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
귀하고 좋은 것을 안겨 주겠다는데도 어찌 저리 미련한지.
라히크는 짤막하게 혀를 차고는 기한을 정하기로 했다. 그래야 그동안은 제 마음대로 해도 거부할 수 없을 테니까.
“지금부터 100일. 그 안에 황태자비가 되게 해달라고 빌게 해 주지.”
* * *
“전하, 말씀하신 악기를 모두 들였습니다.”
“안내하라.”
잠시 뒤, 레그리아의 침실을 빠져나온 라히크에게 에오스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라히크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셈을 할 줄 모르는 건지 멍청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제 짝이 될 남자에게 안겨 속살거리는 어디 신성인이 한둘일까.
레그리아처럼 특별히 소환된 이가 아닌 다른 신성인들은 좋은 지위 한 번 얻어 보겠노라 그리 기를 쓰건만.
첩으로 들인 신성인에 의해 본부인이 쫓겨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만큼이나 무엇이든 안겨 줄 수 있거늘.
‘실로 질리는 계집이다.’
어찌 저리 귀먹고 눈먼 것이 황태자비로 온 건지,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음이었다.
“우선 피아노실은 따로 만들었습니다. 오른편에는 바이올린이나 첼로, 하프 같은 현악기를 두었고 왼편은 악보실로 구성하였습니다.”
“잘했다.”
그러나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레그리아를 위해 갖고 싶다 말한 악기가 가득한 방이나 선물해 주려고 하는 자신이었다.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