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의 몸이 경직되는 게 느껴진다.
가까이 붙는 게 정말 싫겠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에오스의 감시 없이 전달한단 말이야.
“제가 비트리체를 만난 건 사실이에요. 믿어 줘요.”
“…지금 그 이야기. 다른 사람에게 한 적 있습니까.”
“없어요. 비트리체가 비밀로 해 달라고 했으니까요. 다만 경께는 전해 달라고 했어요.”
“그렇습니까…….”
너무 꼭 붙어 있다 보니 지금 세비레이크 경의 표정이 어떤지 보이지 않는다. 레그리아는 숨이 막혀 살짝 떨어지려 했지만 돌아온 건 그 반대의 상황이었다.
그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은 것이다.
그 너른 가슴에 완전히 뺨을 댔을 때, 레그리아는 뭔가를 깨달았다.
‘울고 있구나. 이 남자.’
이를 악물고 있는지 겉으로 새어 나는 소리 하나 없었으나 레그리아는, 레그리아만큼은 잘 알았다.
그럼에도 저 뺨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 있을 것임을.
“울어도 돼요.”
그래서였다.
이용하겠다는 생각이나 이걸로 빚을 더욱 추가하겠다는 계산 없이, 그냥 손을 뻗어 등을 토닥여 준 것은.
“저도… 그렇게 많이 울었어요. 소리 내지 않고. 자랑은 아니지만.”
“…….”
“비트리체가 많이 소중했던 거죠? 미안해요.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서.”
하지만 저도 이런 땅에 이런 방식으로 오고 싶진 않았어요.
그 말은 삼킨다.
레그리아는 이제 황태자비가 얼마나 대단한 지위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걸 포기한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비꼬고 비난할 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음도 알았다.
저들이 선망하는 자리를 가져 놓고 함부로 내려놓는다며 화를 내겠지.
세비레이크 경 역시 속내를 밝히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굳이 말을 다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우는 남자를 달래고 있자니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곳에서 한 번도 운 적 없구나.’
이 세계에 온 뒤로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다. 화는 냈어도.
그 또한 자기방어의 일종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내게 희망이라는 게 있어서 울지 않았던 걸까.’
우는 건 무력할 때 하는 일이다.
더는 무엇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절망, 혹은 좌절을 쏟아내는 행위라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 그녀는 울 이유가 없었다.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해도 괜찮은 세상이 생겼다.
가족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 죽어 가듯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
이미 한 번 자기 자신을 스스로 죽어 가도록 둔 적 있던 그녀로서는 살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가 두렵지 않았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습니다.”
“비밀로 할게요.”
얼마 뒤, 그가 눈가를 닦아내고자 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레그리아는 입고 있던 실내용 드레스의 프릴 소매로 무른 눈가를 조심히 닦아내 주었다.
“살려 줘서 고마워요. 제가 아니라 비트리체의 몸을 살리고 싶었던 거겠지만 그래도요.”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네에?”
몸이 이제 충분히 더운걸.
찌릿찌릿하던 피부도 괜찮아진 것 같고 잘 보이지는 않아도 아마 손끝의 찬기도 없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뭐가 끝난 게 아니라는 걸까.
“겨울 망루 가문이 내면에 품고 있는 냉기를 가벼이 보면 안 됩니다. 저희는 그 냉기만큼이나 온기도 함께 가지고 있기에 균형이 잡히지만 외부인은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
“저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금은 외부에서 온기를 흘려 넣어 잠시 주춤한 것뿐입니다. 곧 2차 파동이 밀려올 겁니다.”
세비레이크 경의 잠긴 음성은 심각했다.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헉…!”
그리고 다음 순간.
레그리아는 몸을 활처럼 휘며 헛숨을 크게 들이켰다.
쿠웅!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정도로 심장이 한 번 크게 뛰더니… 그대로 멈추었다.
수천 개의 얼음 조각이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제기랄, 정신 차리십시오!”
귓가에 어른거리는 목소리가 다급했으나 레그리아는 꺼져 가는 정신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아, 이게 몇 번째 기절이더라…….
* * *
세비레이크 후작가는 겨울 망루라 불린다.
제국 벨리그레엄의 최북단에는 일명 ‘돌아올 수 없는 땅’이라는 금역이 존재하는데, 세비레이크 가문이 긴 역사 내내 그곳을 지켜왔다.
오래전에는 망루 하나만을 세워서, 그 뒤에는 성벽을 쌓아 올려서.
영지 자체가 중앙 사교계와 많이 떨어져 있기도 하고 대부분의 땅이 쓸모없고 척박하여 매해 곡식 걱정이 가득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의 표정에서 근심이 사라졌다.
어린 나이에도 확연한 변화인지라 어째서인지 궁금했는데, 풍요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름 울타리의 가주가 바뀌면서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게 이유였다.
두 가문의 자녀.
표드르 이안 세비레이크와 비트리체 로에르멜의 결혼을 은밀히 내정하는 것을 담보로 하여.
신성 기사가 짝이 아닌 이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성 기사가 짝과 정식으로 결혼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유서 깊은 고위 귀족일수록 신성인은 첩으로 두고 결혼은 정치에 기반하여 하는 일이 권장되었다.
그러므로 표드르는 더더욱 비트리체를 거역할 수 없었다.
언제고 어떤 신성인에게 빠져들게 될지 모르는 그는 아내 될 사람 앞에서는 늘 죄인이어야 마땅했다.
비트리체는 짜증 나게 굴지 말고 연애를 하라며 걸핏하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곤 했지만 고지식한 표드르는 비트리체가 아닌 여자를 알아갈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살냄새가, 원래 이런 건가?’
살짝 뒤척거릴 때마다 피어오르는 이 달큰한 내음은 대체 뭔지.
비트리체는 향수를 자신을 감추는 방패로 사용했다.
아주 어릴 때, 최소한 두 사람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나게 된 그 시점부터도 비트리체는 약점을 보이지 않고 상대를 교란시키는 법을 알았다.
게다가 그녀는 결코 자신의 거리 안에 누군가를 들이는 법 없었으므로 표드르는 약해진 비트리체를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러니까… 이렇듯 얼어 죽어 가는 여체를 안고 있을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원래 이렇게 부드러운 건가?’
표드르는 진심으로 의아했다.
신성 기사는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 없다. 신성인을 어머니로 둔 누구나 특별한 축복을 타고 태어나니 성별의 나눔이 중요치 않지.
그러니 신성 기사단의 절반이 여성이었으되 그는 한 번도 그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기사는 기사일 뿐.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간혹 연회장에 가면 그에게 추파를 던지는 영애들이 있기는 했으나 표드르는 모두에게 똑같이 목석처럼 대했다.
눈길 한 번 깊이 마주친 적 없으며 대화조차 길게 섞은 적 없었다.
비록 비트리체는 이 남성, 저 남성을 오가며 화려한 연애를 즐겼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비트리체면 충분했으니까.
어릴 때부터 결혼하기로 구두로 약속이 된 사이. 그가 충실해야만 하는 상대. 굶어 죽어 가던 세비레이크의 백성들을 살려 준 여름 울타리의 딸.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하아… 추워…….”
“곧 괜찮아질 겁니다.”
“너무…….”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거세다. 저러다가 턱뼈에 금이라도 가면 어쩌나 싶어 고심하던 그는 결국 그녀의 이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깨물 것이 필요하다면 다치느니 그의 손을 무는 편이 낫다.
저러다간 턱뼈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이는 상하게 될 테니까.
‘자리를 뜰 수는 없다.’
2차 파동이 닥쳐온 그녀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했다. 한순간이라도 온기를 불어넣는 걸 멈추면 그대로 피부 표면까지 얼어붙어 버릴 정도로.
그를 낳으실 적에 어머니께서 이런 상태가 되셨다고 들었다. 피마저 얼어붙으셨다고.
표드르는 만에 하나 자신의 짝이 냉기에 파묻혀 죽어 가면 어떻게 응급 처치를 해야 하는지를 강박적으로 배우며 자랐다.
첫째, 곁에서 결코 떠나지 말 것.
둘째, 온기를 한 시도 멈추지 말고 불어 넣을 것.
셋째, 육안으로 괜찮아졌다고 하여서 가볍게 여기지 말 것. 2차 파동은 잠시 괜찮아진 직후에 나타난다.
배우기만 했을 뿐 실제로 겪을 일 없었던 것이다.
허나 오늘 그 배움이 빛을 발했다.
‘살릴 것이다.’
이 이름 모를 여자가 분명 그리 말했지. 비트리체가 제 안에 살아 있다고.
그렇다면 육신을 최대한 보호해야 마땅했다.
“내가 결혼 같은 걸 할까 보냐.”
그건 비트리체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었다.
* * *
“기사 단장이 찾아왔다지.”
“벌써 들었어? 사신이 와서 바쁘다더니.”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레그리아는 그다지 유쾌하지는 못한 상황에 처했다.
세비레이크 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죽진 않아 다행이라지만 심한 목감기에 걸렸는지 편도가 따가웠다. 씻고 싶었으나 도저히 일어설 힘이 없어 뜬 눈으로 있었는데 잠시 뒤.
라히크가 갑작스레 들이닥쳤다.
그래, 그건 들이닥쳤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등장이었다.
그리고 라히크는 아까부터 벽난로에 팔짱을 낀 채 기대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요조히 지내라 했을 텐데. 한 달도 채 가지 않아 남자를 들였나?”
“헛소리할 거면 가. 의심 많은 남자는 질색이야.”
“예비 황태자비께서는 안 되는 것도 많으시지.”
라히크는 오늘따라 기분이 아주 나빠 보였다. 평소보다 한 열 배쯤.
그게 사신들과의 일 때문인지 아니면 온전히 세비레이크 경의 급작스러운 방문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하룻밤 내내 안긴 채 잠들어 있었다는 건 들키지 않은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