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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21/134)

21화

* * *

‘춥다.’

깜빡. 몇 번 눈을 깜빡여 시야를 맑게 한 그녀가 제일 처음 느낀 건, 어마어마한 추위였다.

‘여긴, 너무 춥네.’

얼어붙을 듯한 온도에 레그리아는 제 팔을 스스로 꽉 움켜쥐었다.

라히크가 아닌 자의 내면세계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히크가 아닌 신성 기사를 본 적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숨만 쉬어도 입김이 하얗게 얼어 부서지는 이곳은, 광활한 호수였다.

“……아.”

고개를 든 그녀는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반짝거리는 호수는 완벽하게 얼어붙은 상태다.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자 너무 미끄러워서 그녀는 최대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저 끝에, 성이 보였으니까.

완파되어 버린 얼음 성이.

‘엉망이로구나.’

어둠에 물들지 않은 걸 보면 광기가 돋은 건 아닌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멀쩡하다는 건 아니고.

레그리아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부서진 얼음 조각과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벽을 보았다.

라히크의 것이 엉키고 꼬인 금빛 실타래라 풀어내야 한다면 이건 다시 쌓아 올려야 마땅하겠구나.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쉽사리 깨달은 그녀는 일단 얼음 조각을 하나하나 끼워 맞춰보기로 결심했다.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이었어. 라히크와 정신 접촉을 한 건. 그런데도 라히크는 내게 태도가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있지.’

그러면 세비레이크 경도 비슷하지 않을까.

게다가 이건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 번 접촉되어 연결된 이상, 누구도 강제로 끊을 수 없다. 그랬다간 둘 다 정신이 망가져 폐인이 될 수 있으니까.

라히크에게 소식이 들어간다 해도 오늘은 오지 못하겠지. 사신들이 온 첫날이니 저녁엔 연회가 시작될 거다.

라히크가 빠질 수 없는 연회가.

‘내면세계에서 내가 가장 오래 있었던 기록은, 6시간쯤.’

있는 힘껏 시간을 끌자.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쌓아 올리는 거야. 이 무너진 성벽을.

레그리아는 맨 손이었고 제아무리 현실이 아니라 해도 얼음의 차가움은 온전히 느껴졌다. 커다란 덩어리 몇 개를 들어 올리는 것만 해도 벌써 손끝이 발갛게 변해 버렸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조차 얌전히, 시키는 대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비트리체는 매일 그녀에게 속삭였다.

착하게 살지 말라고. 숙이고 지내지 말라고.

그건 몸을 내어준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그녀는 그 속삭임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 * *

“으…….”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내면세계의 파동을 느끼고 성벽 쌓는 일을 멈춘 레그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자마자 보인 것은 에오스의 걱정스러운 얼굴…일 줄 알았는데, 아니다.

시야에 들어찬 것은 어둠.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세비레이크 경이었다.

그는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우두커니 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그러자마자 콜록거리며 기침이 터져 나와 레그리아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다시 누울 수밖에는 없었다.

몸이 으슬으슬하다. 열병이기라도 한 걸까.

‘춥다. 너무 추워.’

내면세계에서 있었던 일이 현실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친 걸까?

그런 사례가 있긴 하다고 교육관에게 배우기는 했지만 실제로 겪는 건 꽤 겁이 나는 일이었다.

“왜 그렇게 무모합니까?”

그때였다.

“그 몸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숙녀분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 화가 많이 났구나.

강제로 정신 접촉을 당하는 걸 거부하는 신성 기사들은 수두룩하다고 배웠다. 어쨌거나 신성인을 내면에 들이게 되면 일부라도 종속이 되기 마련이니 그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론 상성이 극도로 맞지 않을 경우엔 정신 접촉을 시도하더라도 곧바로 튕겨 나온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상황을 보니 그 반대인 모양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지금이 밤이라는 걸 알려 준다.

어쩌면 라히크와의 접촉 한계 시간을 우습게 뛰어넘은 걸지도.

“몸은… 괜찮, 나요?”

“지금 제 몸을 걱정하는 겁니까?”

울음 많아 보이던 보랏빛 눈동자가 지금은 맹렬한 분노로 차 있었다. 스산한 어조에 등골이 오싹하였으나 이미 죽도록 춥기에 크게 영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에오, 스는.”

“지금은 새벽 네 시입니다. 바깥에서 스스로 지키고 선 것 같은데, 방금 잠들었군요. 기척이 바뀌었으니.”

“아아.”

그녀와 세비레이크 경 사이의 연결을 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 널리 알려서도 안 되니 스스로 경비를 자처한 모양이다.

레그리아는 상체를 옆으로 살짝 돌려 쏟아져 나오는 기침을 베개로 막았다.

내뱉어야 할 것을 반은 삼키고 반은 억누르며 뱉으니 목구멍이 얼얼하게 따갑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잔기침을 이어 나가는 그녀를 보던 세비레이크 경이 별안간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지금 제가 하는 행위는 저 역시 원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제 친우의 몸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돕는 것뿐. 그러니 어떤 착각도 하지 마십시오.”

뭘 하려고 하기에 저렇게 새침하게 변명을 늘어놓을까.

의아해하는 그녀의 앞에서 세비레이크 경이 정말 죽도록 싫다는 듯 이를 악물고…… 옷을 벗었다.

누가 보면 그녀가 강제로 벗긴 줄 알 만큼 굳은 표정으로 상의를 벗어낸 그는 이내 침대 가까이 다가와 같은 말을 한 번 더 읊조렸다.

“결코,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목숨을 구해 주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열을 나눠 드리는 것뿐이니.”

몇 번이고 다짐을 받던 세비레이크 경이 이내 이불을 들추었다. 혼몽한 정신 속에서도 제 손가락 끝이 새파랗게 변했음은 알 수 있었다.

동상에 걸렸구나.

그런데 옷은 왜 벗은 거지?

“…겨울 망루의 사람들은 타인에게 온기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세비레이크 경이 상당히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레그리아는 ‘직접적’이란 표현에 주목했는데, 그제야 왜 그토록 원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고 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

“저와 정신 접촉을 하는 건 위험합니다. 반드시 준비된 상태에서 세비레이크령에 자라는 특별한 풀을 달여 마신 뒤에 해야 하는 건데, 그리 멋대로 들어오셔서는.”

“아.”

“이미 몸속 깊숙이 냉기가 침투한 상태이니 대안이 없습니다. 그래도 싫다면 밀어내십시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

내면을 안정화시키고 나면 조금은 태도가 부드러워지던데 이 사람은 전혀 아니구나.

그건 조금 아쉽더라도 아주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비레이크 경의 성격을 다 파악한 건 아니라지만 그는 기사 단장이다. 무뚝뚝하고 고지식하고 정의로운 성품이라면 제 기운을 정리해 주다 동상에 걸린 여자를 모른 체하진 않겠지.

야멸찬 태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쩌면 오늘 일을 앞으로도 마음의 빚으로 달아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흐으!”

뜨거워!

그런데 그가 침대 위에 올라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찰나였다.

맞닿은 피부가 데기라도 한 듯 따가웠다. 너무 아파서 저도 모르게 기어나가려 하자 세비레이크 경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가만히, 계시라 했습니다. 지금도 숙녀분의 장기는 얼어붙고 있는 중이니.”

동상 말고 굳이 장기가 언다고 표현하니 두려움이 배가 되었다.

협박은 잘 먹혀들어서 바르작대던 걸 멈추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픈 게 안 아픈 것으로 되진 않았다.

“그리 미련하게 몇 시간이고 내면세계에 머무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흐, 보통, 은. 얼마나.”

딱딱.

이가 부딪치기 시작한다. 그제야 레그리아는 장기가 얼고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명확하게 이해했다.

그녀는 지금 산 채로 얼음 동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20분이 한계입니다. 그 이상은 권장하지 않기도 하고, 길어도 30분을 넘지 않도록 합니다.”

“그런, 데.”

“그런데 숙녀분께서는… 하아. 지금 대체 몇 시간이 지났는지는 아십니까.”

골치가 아프면 내버려 두고 가도 될 텐데. 저렇게 싫어 죽겠다는 티를 내면서도 허리를 감은 손을 풀지 않았다.

쿵.

쿵.

레그리아는 그의 맨 가슴과 맞닿은 등을 통해 흘러드는 심장 박동에 안도감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 그가 바라는 건 그녀가 아니다. 비트리체겠지.

이 가슴의 고동 역시 그녀가 아닌 비트리체를 향한 것이리라.

“…….”

십 분쯤 흘렀을까.

이제 드디어 입술 사이가 떨어져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양기는 어마어마했기에 레그리아는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래서 그녀는 아까는 채 하지 못했던 대화를 시도했다.

“내가 결혼 따위를 할까 보냐.”

“그게 무슨.”

침묵 속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에 그가 반문했다. 혹시 누가 엿듣고 있을 수도 있으니 레그리아는 몸을 돌려 세비레이크 경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떤 성적인 의도를 갖고 있는 건 전혀 아니었다.

만약 문틈에 귀를 바짝 붙이고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해도 이렇게 가까이서 속삭이는 이상 결코 훔쳐 들을 수 없을 테니까.

“비트리체가 전해 달라고 한 말이에요.”

“!”

“믿기지 않겠지만… 저는 비트리체의 의식을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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