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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0/134)
  • 20화

    아파라.

    예상치 못한 통증에 코를 문지르던 레그리아가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뚝.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이마에 떨어졌다. 그 뜨거운 액체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건지 몰라도 눈이 마주친 남자는 너무나 슬퍼 보였다. 제 슬픔에 빠져 금세라도 쓸쓸히 목숨을 버릴 수도 있을 것처럼, 그렇게 가련하다.

    아마 어깨까지 내려온 은빛 머리칼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한순간 시선을 앗긴 채 굳어 버리고 말 정도로 처연한 미남은 앞을 막은 채 비키지 않았다.

    “……비트리체.”

    아, 많이 울었나 보다. 목소리까지 쉰 걸 보면.

    언젠가 동생이 그런 말을 한 적 있었다.

    “우는 남자는 최악이지만, 예쁘게 우는 미남은 합격이야.”

    그땐 그게 무슨 말이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름다워.’

    우수에 찬 보랏빛 눈동자는 갓 만개한 수국처럼 물에 함빡 젖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저만을 응시하며 소리 없는 울음을 뚝뚝 흘리고 있는 걸 지켜보자니 가슴이 괜히 아파야 할 것 같다.

    저 남자의 고통에 공감해 주는 게 어떤 대단한 의무처럼 느껴지게 하는 얼굴이었다.

    모든 철학자들이 저렇게 생겼다면 철학자들은 그렇게까지 고독하지 않았을 텐데.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도 않은 채 나타난 남자에게선 벼랑 끝에 선 듯한 절박함이 물씬 흘렀다. 누구라도 발을 멈추고 저 붉어진 눈가에 대해 연유를 물어야만 할 것 같아.

    분명 키가 큰 남자인데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것도 재능이었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세비레이크 경!”

    에오스의 외침에 레그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눈을 맞추고 있었던 걸까.

    분명 몇 초밖에 안 되는 짧은 찰나였을 텐데, 그 순간이 꼭 영원 같았다.

    “아무리 신성 기사라 하셔도 지금 이곳은 엄금 구역입니다. 그걸 알고 계실 텐데요!”

    비트리체와 꿈속에서 만나 잠도 자지 않고 언어를 습득한 결과, 그녀는 어느 정도 말뜻을 알아들을 수는 있게 되었다. 허나 고작 한 달 만에 말까지 잘할 수는 없지.

    그래서 레그리아는 우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마치 환상 속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하던 남자의 눈에 천천히 이지가 깃들었다. 그러더니 에오스에 의해 몇 발 뒤로 물러서게 된 그녀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찬물 세례라도 맞고 단꿈에서 깬 사람처럼 시선이 차갑다.

    꼭 그녀가 제 뺨을 후려치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상처 입은 눈이 하도 고독하여서. 그래서…. 레그리아는 어쩐지 저 남자가 싫지 않았다.

    외로움이라면 그녀 역시 잘 아는 종류의 감정이었으므로.

    “비트리체가 아니군요.”

    마치 배신자를 향해 짓씹는 듯한 한 마디가 복도를 스산히 울렸다. 등골이 쭈뼛할 정도로 원한 어린 어조에 에오스의 경계심이 높아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나를 해칠 것 같진 않아.’

    저 남자, 울고 있잖아. 여전히.

    언제나 여유롭고 느긋한, 진심 따위는 반 푼어치도 없이 구는 라히크만 보다가 저렇게 온 감정을 드러내며 길 잃은 아이처럼 우는 남자를 보니 신선했다.

    게다가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라히크의 기운이 광활한 대지를 지배하는 맹수의 어슬렁거림 같다면 이 남자의 것은 아주 달랐다.

    얼마나 깊은지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 얼음 바다.

    수많은 생명을 감추고 있는 그 차가운 바닷물에 떠 있는 적요한 빙산.

    그는 누구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존재할 뿐.

    “이분은 레그리아 님이십니다. 예비 황태자비께 예를 갖추세요, 경! 제아무리 기사 단장이라 하셔도 더는 무례를 참아 넘기지 않겠습니다.”

    에오스의 어조가 점점 더 단호하고 살벌해졌다. 남자의 출입을 막지 못한 경비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와 옆에 섰으나 누구도 쉬이 손을 뻗어 연행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것만 해도 이 남자가 가진 권한이 막대하다는 건 알겠다.

    레그리아는 오간 대화를 곱씹다가 문득 어떤 단어를 기억해 냈다.

    기사 단장.

    “표드르 이안 세비레이크…?”

    그녀의 부름에 남자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었다.

    “…그리 친밀한 척 부르지 마십시오.”

    쌀쌀맞기도 해라.

    제멋대로 다가오더니 비트리체가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이제는 적대한다. 만약 저럴 거라고 비트리체가 미리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무척 당혹스럽고 화가 났으리라.

    ‘그렇지만 표드르. 아니, 세비레이크 경이 왜 저러는지 나는 알고 있어.’

    비트리체는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중에선 세비레이크 경에 대한 것도 있었다.

    둘은 결혼하기로 내정된 소꿉친구 사이였다지. 어려서부터 늘 함께였다고.

    심지어 어린 세비레이크 경은 소심하고 유약하여 또래에게 곧잘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 겉모습으로는 전혀 상상이 안 가지만, 어쨌거나 그런 세비레이크 경을 비트리체가 몇 번이고 구해 줬다던가.

    제겐 그런 상대가 없으나 만약 있다면 분명 충격을 크게 받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몸을 차지했다는 이방인이 밉기도 할 테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게 부당히 화를 내는 걸 오래 참아 줄 생각은 없지만.’

    레그리아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러면 물러설 줄 알았는데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가까이서 올려다본 그의 아랫입술은 완전히 터져있었는데, 그걸 보니 비트리체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긴, 왜 온 건가요?”

    투박하지만 비트리체와 함께 열심히 연습했던 문장이 잇새로 흘렀다. 세비레이크 경은 여전히 표정이 딱딱한 채였는데 온 진심을 다해 대답하기 싫다는 기운을 풍겼다.

    “제 하나뿐인 친우의 몸을 빼앗은 이가 나타났다 하여 보러 왔습니다. 그럼 이만.”

    원망을 짓씹던 세비레이크 경은 애써 정중함을 주워 담아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그에 에오스는 퍽 안심하는 기색이었으나 레그리아는 이대로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탈출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자다.

    라히크와 같은 신성 기사. 그녀는 증오하더라도 비트리체의 몸은 증오할 수 없을 남자.

    “기다려요. 비트리체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벨리그레엄어가 조금만 더 익숙했어도 이런저런 말을 더 붙여 부드러이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이게 최선이었다.

    부디 매정하게 돌아서지 않기를 바랄 뿐.

    ‘반드시 라히크가 없는 지금이어야 해.’

    지금 그녀의 일상은 지나치게 단조로웠다.

    세비레이크 경은 라히크가 완벽하게 통제하여 물살 하나 일지 않는 호수에 던져진 단검이다.

    아직까지는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이 배워야 하니 초조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이제 슬슬 떠날 길을 찾고 싶었다.

    앞으로 다섯 달 남짓.

    그 안에 도망치지 못하면 꼼짝없이 황태자비가 되어야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라히크의 아내가 되어 숨 막히는 지배 속에서 살아가게 되겠지. 노예가 되거나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궁금해요. 저는 그녀를 기억하고 싶어요.”

    서른 밤, 서른하나의 낮.

    그 기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레그리아는 이제 라히크가 얼마나 통제광인지 안다. 그가 있었더라면 세비레이크 경은 결코, 결코 이 안까지 들어오지 못했으리라. 경계가 많이 강화되어 어디든 경비병이 서 있는 요즘이니까.

    ‘아니, 어쩌면 세비레이크 경도 그 사실을 알고 참다가 이제야 찾아왔을지도.’

    확실하게 라히크가 신황청에 올 수 없는 날이 언제인지 세비레이크 경은 알고 있었던 거다.

    ‘그에겐 정보가 있어. 내게 꼭 필요한 정보가.’

    오래 서 있는 건 힘들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는데도 세비레이크 경은 침묵했다. 아마 갈등 중이겠지.

    에오스가 눈짓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물리고 복도가 완전히 비워졌을 때쯤.

    레그리아는 일부러 휘청거렸다.

    “아…!”

    “비체!”

    이러면 놀라서 다가올 줄은 알았지만 역시 비트리체의 이름을 부르는구나.

    아무리 비트리체가 사람도 다 이용하라고 하긴 했지만 약간 미안해진 그녀는 조심스럽게 가슴을 밀어내며 자세를 바로 했다.

    “저는 레그리아예요. 비트리체에 대해… 부디 들려주세요.”

    그녀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던 얼굴에 서서히 금이 갔다.

    금세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한 보랏빛 눈동자에 끝내 습기가 어린다.

    그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다정스레 닦아 주며 레그리아는 빌었다.

    부디 세비레이크 경이 그녀의 탈출 열쇠가 되어 주기를.

    하지만 그는 그대로 떠나 버리려 했다.

    ‘아, 안 돼!’

    그 일이 벌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레그리아는 멀어지는 세비레이크 경을 향해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마자 눈앞이 핑글 돌더니 의도치 않은 정신 접촉이 일어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레그리아는 표드르의 내면세계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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