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34)
  • 19화

    어젯밤, 라히크는 레그리아가 기절하는 것과 동시에 함께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놀랄 정도로 푹 잠들고 만 것이다.

    게다가 서둘러 몸을 살피니 내부의 기운이 완벽하게 안정되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 쪽에서 정신 접촉을 한 적은 없다.’

    그렇다면 그 말은 레그리아가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신성인은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신성 기사의 내면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걸 보고 정신 접촉이라 일컬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했다. 신성 기사가 먼저 접촉을 하여 신성인을 자신의 내면에 들일 수도 있다.

    허나 어제의 일은 분명 그가 레그리아의 힘에 휘말린 것이었다.

    ‘평소보다 몸이 훨씬 가볍군.’

    그간 힘을 쓸 때마다 머릿속에 벌레 한 마리가 심겨져 꿈틀거리는 듯했었다. 그 벌레가 그를 갉작갉작 먹어 치우는 듯한 기분은 실로 역겨웠지.

    신성 기사들은 힘을 쓸 때마다 각기 다른 고통에 시달린다.

    누군가는 뜨거운 불에 계속 타오르고 있는 듯한 통증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천 길 바닷속에 처박혀 숨을 쉬지 못하는 것 같다고도 한다.

    개중에서도 라히크의 고통은 광증을 유발하기에 가장 걸맞은 종류였다.

    “…악기를 좋아해.”

    “마련해 드리지. 하지만 고고한 자존심을 가지셨으니 관객은 직접 모으고 싶을 테고.”

    “놀리지 마. 친한 척 굴지도 마. 난 아직 나한테 그간 입욕제를 먹인 걸 용서한 적 없으니까.”

    “혹 모르말라 가루를 말하는 건가.”

    레그리아만 있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짝 같은 거추장스러운 걸 맺지 않아도 그녀가 옆에서 이렇게 있어 주기만 하여도 그는 아주 돌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라히크는 그녀의 입속에 딸기를 몇 번 더 넣어 주며 먹는 양을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새끼 새처럼 입을 벌릴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는 혀를 본 것이지만.

    그러다 레그리아가 더 먹지 않겠다며 고개를 흔들자 그는 살결이 조금도 내보이지 않게 꽁꽁 싸매어 안아 들었다.

    “오해는 풀고 넘어가야겠지. 그건 입욕제가 아니다. 약초를 말려 빻은 가루일 뿐. 본래 식용이다.”

    “……말도 안 돼. 그렇게 맛없는 걸 먹고 살아?”

    “앞으로는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게 네게 희소식일지도 모르겠군. 그건 네가 이 세계에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 먹인 것뿐이다. 약초라 하지 않았나.”

    레그리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직접 겪고 나니 라히크는 심히 너그러워졌다. 어떤 앙탈을 부려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레그리아가 떠나겠다거나 없어지지만 않으면 그는 무엇이든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너, 너 이거 뭐야?”

    그때였다.

    안아 든 그녀의 발등이 그의 아래에 와 닿았다. 하필이면 아침이라 완벽하게 곧추세워진 그곳에.

    레그리아는 그대로 기겁하며 피하려 했는데 그러다 오히려 발등으로 그의 낭심을 꾹 누르고 말았다.

    “이 흉물스러운 거, 당장 못 치워?”

    라히크는 이를 악물며 태연을 가장하려 노력했다. 그녀의 조그마한 발가락이 오른편으로 휜 것을 따라 더듬어 오르지만 않았어도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라히크는 눈매를 좁히며 으르렁거리듯 대꾸했다.

    “신성계의 단위로는 9인치쯤은 될 텐데.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누가? 내가? 기가 막혀!”

    레그리아가 입을 떡 벌렸다. 진심으로 황당해 하는 듯 비스듬히 벌어진 입술 속에 불그스름한 혀가 숨어 있다. 그걸 눈에 담다 보니 결국 아래가 아플 정도로 당기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나직하게 읊조리던 라히크는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고 처음으로 고민이란 것을 했다.

    이상한 일이지.

    이제껏 그에게 달려드는 여자는 셀 수 없이 많았고 라히크는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 좋으려고 하는 짓인데 미혼의 황태자가 거절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않나.

    연회장에서 잘 차려입고 만나 은근한 눈짓을 주고받은 뒤 뒤쪽 복도에서 치마만 서둘러 걷어 올리고 행위를 치르거나 야외 정원도 꺼리지 않았다. 무릇 황가의 정원이란 가림막이 되도록 일부러 길러 둔 잎 넓은 나무 몇 그루가 있기 마련이다.

    그 안쪽에서 치러지는 낯 뜨거운 한낮의 정사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다 드러나더라도 벨리그레엄에서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이다.

    벨리그레엄 사교계는 보수적이고 딱딱하며 제 욕망이 없는 척 고고하게 구는 아리툼 따위와 다르니까.

    이따금 아리툼 제국에서 사신이 올 때면 그들을 모욕하기 위해 라히크는 풍만한 여인 서넛쯤을 옆에 낀 채 회의장에서 즐기기도 했다.

    “교육관이라고 했지. 교육관은 내가 지금 쓰는 언어를 쓸 줄 알아?”

    “그래.”

    “잘됐네.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

    아래가 서면 아무나 찾으면 될 일이다.

    헌데 지금은 저를 향해 최대한 밉살스럽게 말하려고 애써서 입을 놀리는 이 여자가 아니면 굳이 동하지 않았다.

    레그리아는 침실에 두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다른 여자를 품으면 그만이거늘 그러기가 싫다니.

    짝이 생기면 제 짝 아닌 다른 이에게 세우지 못한다는 낭설은 들었으나 짝이 되기 전에도 이런 줄은 몰랐다.

    “얼른 안 가고 뭐해? 나 추워. 옷 갈아입을 거야.”

    타닥타닥.

    에오스가 제대로 관리하는 침실 안은 훈기로 가득했다. 난로가 타오르는 앞에서 저리 뻔뻔하게 말하는데도 예쁘구나 싶은 건 왜인지.

    “요조하게 지내라.”

    라히크는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이전에 어떤 남자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는 불문에 부칠 테니. 앞으로는 그 말간 낯으로 다른 자를 홀릴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엄포를 놓는 스스로가 낯설다.

    레그리아는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라는 표정이었으나 라히크는 제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으름장을 놓아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계집이나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혹여 제 눈앞에서 정부를 들이는 꼴을 보면 어떻게 뒤집어질지 모르겠으니.

    어느 정도 소란은 있었으되 이렇게 거룩의 샘 의식이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한 달이 흘러, 앙상한 잔가지의 달이 다가왔다.

    * * *

    가만히 있어도 코가 시린 아침이었다.

    레그리아는 양손으로 도자기 컵을 쥐곤 난롯가에 앉아 잠시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벽난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글거리는 열기에 몸이 노곤하다.

    얼마 전에는 세상에 눈이 잔뜩 내려 발목까지 쌓였는데 그 탓에 바깥 산책을 할 수 없는 것이 약간의 불만이었다.

    이제 겨우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나갈 수가 없다니.

    거룩의 샘에서 보낸 하룻밤 뒤부터 다리에 갑자기 힘이 돌아왔다. 고작해서 서 있는 정도고, 느리게라도 걸으려면 누군가의 부축을 반드시 받아야 했지만.

    하루에 한 시간씩은 재활 치료를 받고 있으니 어쩌면 곧 뛸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런 희망적인 기대가 있었다.

    탈출이든 뭐든, 걸을 수 있게 되어야 할 수 있을 테니.

    “정말 놀랍습니다. 이토록 언어를 빠르게 익히시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

    그녀의 뒤에 선 에오스가 말총 빗을 가져와 불그스름한 머리칼을 사락사락 빗겨 주었다. 칭찬에 무심히 대꾸한 레그리아의 눈길이 벽난로에 가 닿았다.

    마른 장작 위에서 뛰노는 불꽃이 매혹적이다.

    조금 있으면 교육관이 들어와 오늘의 수업이 또 바쁘게 시작되겠지만 지금만큼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도 좋았다.

    “라히크는.”

    “오늘은 오시기 어려우시다 전하셨습니다. 동부 7왕국 측에서 사신이 와 직접 맞이하셔야 하니 아마 며칠간은 오시지 못하실 듯합니다.”

    “그렇구나.”

    그간 그녀가 배운 건 꽤 많았다. 이 나라 벨리그레엄의 정치, 문화, 경제에 관한 것들은 물론이고 외교에 대해서도 공부해야만 했다.

    그녀가 살던 곳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에도 나라가 제법 많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두 개의 제국이었다.

    벨리그레엄과 아리툼.

    그들은 오랜 세월 서로 숙적 관계였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비스듬하게 끼어 있는 것이 세 개의 부족으로 분할되어 있는 초원 연합국.

    교육관은 이들을 일러 문명을 알지 못하는 미개한 야만족이라 평했다.

    그 외에 벨리그레엄 근처에 붙어 있는 일곱 개의 왕국이 바로 이번에 사신으로 왔다는 대륙 동부의 7왕국이다.

    그 외에는 아예 대륙에 속하지 않은 사막 섬왕국이 있는데, 그들과는 교류할 일이 거의 없다고 하던가.

    어찌 되었든 ‘신성 기사’가 중요한 이유. 넓혀서 ‘신성인’이 그토록 대우받는 이유는 바로 아리툼과의 전쟁 때문이라고 하였다.

    인간을 넘어선 힘을 발휘하는 신성 기사들은 벨리그레엄이 강력한 이유다. 하지만 그들은 힘에 대한 대가로 광기에 시달리는데, 그걸 막아 줄 수 있는 게 신성인뿐이라나.

    ‘내가 보았던 바로 그 꿈틀거리는 뱀 같았던 거. 그게 광기에 물들어 있다는 표시였던 거야.’

    각 신성 기사의 내면은 모두 다르게 생겼으나 공통점은 하나였다. 신성 기사가 미쳐갈수록 그 내면이 새카맣게 변해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게 된다는 것. 그리고 신성인은 정신 접촉이라는 행위를 통해 신성 기사를 멀쩡해지게 만든다.

    ‘짝이 되면 자신의 짝인 기사 한 명만을 더욱 깊게 정화시킬 수 있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여러 명의 신성 기사를 동시에 정화시킬 수 있으나 완벽하지는 못하다.’

    마침 어제 배운 내용이다.

    레그리아는 이 부분이 앞으로 살아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라히크와 절대로 짝을 맺어서는 안 돼.’

    그러면 벗어날 수 없게 되니까.

    “수업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비척거리며 일어선 레그리아는 에오스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반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발목을 질질 끄는 것에 가까웠으나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안 됩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막아!”

    “막으라… 컥!”

    그런데 그때였다.

    막 문을 나서려던 그녀의 코가 웬 거대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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