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로써 레그리아는 라히크가 영어도 알아듣는다고 확신했다.
‘뭔가 몰래 적고 싶을 때 절대 한국어와 영어를 사용해선 안 되겠어.’
만에 하나라도 어떤 상황이 발생한다면 말이다.
지금은 괜찮지만 여기가 낯선 세계라면 모든 것을 조심해야 마땅했다. 다행히도 그녀에겐 조심성이 있었고.
“속된 말은 앞으로도 쓰지 말라. 신성어로 된 욕설을 알아듣는 신민도 있다.”
“알겠어. 나도 평소에 잘 쓰진 않는 단어야.”
“내일부터는 담당 교육관이 배정될 것이다. 밤이 지나면 묵는 침실도 옮겨 주지. 거룩의 샘 의식까지 마친 이상 완전무결한 예비 황태자비가 되었음이니, 언제고 네 신분을 자각하도록 해.”
그 이상의 논의는 필요치 않다는 듯 딱 자른 선언이었다. 예비 황태자비. 그 말이 뜻하는 의미를 그녀는 안다. 왕과 왕비가 실존하는 나라를 여러 군데 다녔으니까.
그러나 그게 제 몫의 자리가 될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은 꿈에서도 없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라히크와 결혼을 한다고?’
종합해 보자면 이 세계에서 그녀를 어떠한 수단을 통해 불러들인 것이다. 라히크와 결혼시키기 위해서.
그제야 그녀는 그 비싸 보이던 드레스들에 대해 이해했다. 제게 과할 정도로 굽실거리던 태도들도 모두 알겠다. 에오스가 그녀의 눈짓이나 손짓 한 번에 입안의 혀처럼 굴어준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지.
동시에 그녀는 떠올렸다. 샘의 물맛을.
묘하게 고약하고 톡 쏘는, 두 번 다시 혀에 대고 싶지 않은 맛을 내는 걸 왜 내게 자꾸만 주었을까…….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농락을 당할까.
‘비트리체의 말대로, 여기서 당장 거부해선 안 돼.’
안전하려면 일단 받아들이면서 이 세계에 대해 배워야 한다. 가르쳐 준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하도 의아하여 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당신이 무슨 매력이 있어서 내가 결혼을 해야 돼…?”
움찔.
빵으로 손을 가져가던 라히크가 그대로 멈추었다. 레그리아는 그의 옆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멈추지 않고 덧붙였다.
“당신은 잘생겼어. 근사하고, 높은 지위를 가졌지. 아마도 부유한 것 같고. 내게 줄 수 있는 게 많다고 할 거야. 예를 들면 안전이라거나. 반대로… 내가 거부할 시 어떻게 될 거라고 협박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런데.”
“하지만 그뿐이잖아.”
남편으로서 제일 중요한 게 없지. 인성.
살면서 결혼을 할 거라고 기대해 본 적은 없다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그녀의 조건은 단 하나였다. 최소한의 인성은 있는 소박한 사람일 것.
라히크는 인성도, 소박함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널, 남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아. 특히 내가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음을 알면서 빤히 쳐다만 보고 있던 건… 아예 후보 탈락이고.”
담담한 어조였다. 딱히 흥분하지도, 원망치도 않는다. 왜 어제 잡아 주지 않았느냐고 투정 부리듯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존재하는 사실을 무감히 나열하였을 뿐.
“신성계에서는 연애를 한 뒤, 청혼을 받아서 결혼해. 황태자비라면 신분은 같을 텐데 어째서 강제로 약탈당하듯 결혼을 당해야 하는 거야? 여긴 원래 그런가? 그렇다 한들 난 이곳 사람이 아니니 받아들일 수 없어.”
“…….”
“아니면, 결혼하기 전에 내 마음 하나 얻어낼 자신이 없다는 거야?”
“하.”
묵묵히 듣고 있던 라히크의 입이 열리자 차가운 실소가 샜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가진 게 쓸 만한 몸과 얼굴. 지위와 부유함뿐이라?”
“그래. 당신이 가진 건 그것뿐이야. 그리고 그건 나한테 매력이 되지 않아.”
넌 매력적인 남자가 아니다.
한평생 수컷의 우두머리로 군림해 온 자에게 툭 던져진 한마디는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시건방졌다.
“신성인은 본디 제 기질과 가장 닮아 있는 몸을 선택한다더니.”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금빛 눈동자가 맹수의 그것처럼 번득인다.
마치 당장이라도 뜯어먹고 싶다는 듯이.
그러나 레그리아는 꿋꿋이 버텼다. 버틸 수 있었다. 그가 굴복을 요구하며 그녀가 샘에 빠져드는 걸 그저 지켜보았을 때를 떠올리면 가라앉았던 화가 다시 샘솟으니까.
“누더기를 걸친 채로도 온 세상이 제 발아래 있을 거라는 양 굴던 오만한 계집이었다. 헌데 그 하는 양이 하도 당당하여…….”
“…….”
“꼭 한 번쯤은 목을 비틀고 싶었더랬지.”
느릿한 시선이 포식자의 그것인 양 그녀의 경동맥을 더듬었다. 이건 경고다. 기어오르지 말라는.
이윽고 테이블을 짚으며 상체를 숙인 라히크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몸을 틀어 피하기도 전, 그가 매끄러운 살결을 혀로 쓸어올렸다.
“맥박이 느리군.”
“그게, 왜?”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라…….”
“어차피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잖아.”
레그리아는 차분하게 그의 기세를 받아냈다. 어슬렁거리듯 그녀의 주변을 포위하며 맴도는 기운은 아까부터 그러했다. 마치 떠보기라도 하는 듯이.
어떻게 들으면 미친 소리 같으나 그녀는 이제 정말로 ‘기운’의 걸음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위협은 하되 그건 포식자로서 숨 쉬듯 나오는 으르렁거림에 불과하다. 그는 딱히 달려들 생각이 없었다. 그랬으면…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거룩의 샘 의식을 치르면 황태자비가 될 신성인은 위험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더군.”
“흣.”
이 덩어리진 기운을 말하는 건가?
그런 게 있으면 미리 말을 해 주면 참 좋을 텐데 이 밉살스러운 남자에게 배려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
강제로 결혼을 당한다면 평생이 그럴 터다. 황태자비씩이나 되면 산골에 몸을 숨길 수도 없을 테니까.
지금도 보라, 라히크는 앞과 뒤의 추가적인 친절한 설명 따위는 잘라버리고 그저 제 할 말만을 내뱉었다.
이런 남자와는 살 수 없다. 설령 그와의 결혼이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패라 하더라도 이런 대우를 감내하며 지낼 마음은 없었다.
‘탈출할 거야.’
비트리체의 조언대로 지위를 유지하며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녀의 편이 되어 줄 이가 단 한 명쯤은 있겠지.
‘예를 들면, 표드르.’
비트리체의 친우라던 그 이름을 기억한다.
그는 이 ‘제도’를 싫어한다고 했어. 그렇다면 라히크의 적수일 확률이 높다.
거기까지 계산한 레그리아는 한숨을 내뱉으며 그의 몸을 밀어냈다. 그러자 라히크가 여린 살결 위로 이를 세웠다. 잘근, 씹히는 기분에 그녀는 눈가를 찡그렸다.
“라히크 바라키엘 벨리그레엄.”
이름을 불렀으나 멈추지 않는다. 기어코 둥근 상흔을 남기고야 말겠다는 듯 더욱 거세게 빨아올릴 뿐. 이대로라면 숫제 목덜미 전체에 울혈이 맺힐 기세다.
그녀는 언젠가 반드시 라히크에게도 이런 통증을 똑같이 돌려주겠노라 속으로 다짐하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나한테 사과해.”
이건 도박이자 도발이었다.
그녀의 지위가 라히크를 상대로 어디까지인지 알아보는 것.
“그리고 난 당신에게 죽을 때까지 반말 쓸 거야. 존대를 듣고 싶으면 당신이 먼저 존대해.”
* * *
같잖은 주도권 싸움을 하자는 건가.
한평생 들어본 적 없던 사과라는 단어가 귓가를 배회하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귀엽다 귀엽다 하였더니 버릇이 없군.
집짐승은 어릴 때 길을 들여 두지 않으면 주인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는다는 신문 사설을 읽은 적 있다.
그가 개인적으로 황궁 후원에 풀어 기르는 맹수들은 힘의 논리 앞에 굴복했다. 그가 더 강하기 때문에 주인으로 인식하고 따른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날 것의 생태계를 지배하나 라히크는 원시적인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사소한 팔씨름 하나까지도 그는 언제나 이겼다.
그가 황태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강하기 때문에.
다만 듣기로는 맹수에 비할 수 없이 약한 종류의 생물이 외려 위아래를 모른다던가.
그때 그 사설을 쓴 놈은 약하기에 오냐오냐 키우는 방식이 문제라며 주장을 해댔었다.
물론 무려 사설씩이나 되는 것이니 실제로 애완동물에 관한 이야기일 리는 없고, 집짐승은 초원 연합국을 이르고 주인은 벨리그레엄 제국을 빗대어 황제의 외교 정책을 비꼰 것이었지.
그때 라히크는 해당 사설에 깊이 공감했다.
버릇없이 키워서는 안 되지. 아무리 예뻐도 선이 있는 법이다.
대충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싫지 않군.’
화가 나도 될 법한 상황이다.
그에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는 건 오직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두 분뿐. 부친은 정신 빠진 늙은이가 되었고 모친은 돌아가셨으니 실상 세상에 누구도 없는 것이다.
만약 저런 말을 지껄인 게 그가 손수 이름 붙인 레그리아가 아니었더라면 즉시 목을 꺾었으리라. 지금도 저 목을 조르고 싶은 욕망은 있으나 죽이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성적인 것에 가까웠다.
구미가, 당긴다.
“좋아하는 게 있습니까?”
“뭐?”
“무릇 사과엔 진심이 담겨야 할 터인데, 빈껍데기 사과를 받아봐야 화만 더 돋우겠지. 그럴 바에 원하는 것이라도 줄까 합니다만. 예비 황태자비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