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34)
  • 17화

    * * *

    햇살이 다정하게 닫힌 눈꺼풀을 어루만졌다. 움찔거리다가 스르르 눈을 뜨자 연녹색 동공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레그리아는 자신이 지금 샘에 누운 채로 떠 있는 상태임을 알아차렸다.

    이 샘은 염분이 많기라도 한 건지 앉으면 앉아지지만 또 누워버리면 수면에 누울 수도 있다는 걸 어제 라히크를 통해 배웠었지.

    높은 곳에 난 창을 통해 쓸려 내려오는 햇볕을 맞던 레그리아는 울컥하고 말았다.

    “…망할 놈.”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옆에 있지도 않아?

    “나쁜 새끼. 기만자. 못돼먹었어, 아주.”

    꿈에서 비트리체를 만나느라 잠시 잊고 있었으나 정신을 차리자 몰려오는 건 억울함이었다. 말이 완벽하게 통하는데도 그녀를 그냥 내버려 뒀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역시 괜히 믿었어.”

    아무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아픔이나 배신감이란 결국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해서 마음을 여는 게 아니었는데.

    “그건 내 이야기인가?”

    그때, 웃음기가 어린 음성이 샘 위로 툭 떨어졌다. 라히크다. 눈만 데로록 굴려 쳐다보자 그의 손에 음식이 담긴 쟁반이 들린 것이 보였다.

    “너무하는군. 아침 식사를 챙겨 왔더니 면전에서 욕을 듣고.”

    “너무해? 당신이 너무한 게 뭔지는 알아?”

    “어제의 실수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

    실수?

    라히크가 낮은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샘에 들어왔다. 아예 상의를 입고 있지 않은 탓에 그을린 피부에 쏟아지는 햇볕이 황금으로 이뤄진 조각상을 보는 것처럼 근사하기…는커녕.

    레그리아는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너무 골을 내지 말라. 그런 것도 귀엽기는 하지만.”

    “이거 놔.”

    “놓으면 홀로 걸을 수도 없으면서.”

    “그건…!”

    합.

    성질을 내며 주먹으로 어깨를 때렸지만 돌아오는 건 딸기였다. 탐스럽고 커다란 과육이 입안에 들어오자 레그리아는 잠시 멈췄다. 과일은 이곳에서 거의 유일하게 먹을 만한 음식이다. 화를 내는 것도 먹어야 할 수 있으니 일단 이건 먹어 주겠지만… 그녀는 뒤끝이 긴 사람이었다.

    “신성어를 할 수 있다는 걸 밝히지 않은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음이니.”

    “그 이유가, 읏, 뭔데.”

    딸기를 다 씹어 삼키고 나자 아랫입술을 어루만지던 라히크가 또다시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확 깨물어 버리려고 하자마자 엄지를 빼냈는데 이번에는 더욱 기함할 만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스스로 핥는 게 아닌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보고 있자 라히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신성인이 몇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지,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 모든 걸 종합하여 판단을 내린다. 어느 계급의 신성 기사와 맺어져야 옳을지를. 물론 너는 황태자비로 예정되어 있었으니 의례적으로 한 절차라 생각하면 된다.”

    어이가 없다.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수록 피가 식는 느낌. 그렇다면 에오스가 그녀를 보고 판단하는 시험관 같은 존재였다는 것 아닌가.

    물론 이들이 그녀에게 모든 걸 밝혀 줄 이유도, 그래야 하는 의무도 없다고 말한다면 대꾸할 거리가 없었다. 다만… 다만.

    그저 배신감이 들 뿐.

    샘에서 나와 앉혀주는 대로 방석에 자리한 그녀의 어깨에 라히크가 얇은 가운을 둘러 주었다. 그녀는 이토록 기분이 나쁜데 반대로 그는 아주 상쾌하고 신나 보이는 것도 그녀의 속을 배배 꼬이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내가 내면이 꼬인 걸 조금이나마 풀어 둬서 그런 걸까.’

    비트리체는 그걸 전부 다 풀면 라히크가 그녀의 발치에 엎드리게 될 거라 장담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이쯤 되니 그 장면을 꼭 보고 싶어지는걸.

    “네가 원하는 대로 거울을 봤어. 그러니 이제 말해줘.”

    “내게 그리 당당히 요구를 하는 건 세상에 너밖에 없음이다.”

    “말 돌리지 마. 얘기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알고 있다. 라히크가 알려 주지 않으면 그녀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중요한 물음에 어떠한 답도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설 기어도 알려 주지 않을 건 똑같잖아?

    라히크는…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 라히크는 미친놈이었다. 하나 멍청하지는 않아.

    제 앞에서 간살스레 놀리는 혀를 뽑았으면 뽑았지. 차라리 강직하여 부러지고 마는 나무를 좋아할 인간이다. 끝까지 부서지지 않는 바위를 보며 감탄할 자였다. 그러니 그는 낭창하니 휘어지는 버들가지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꺾는 맛조차 없는 얇은 가지가 무에 그리 좋아서.

    레그리아는 제 태도를 고수하기로 했다.

    라히크가 그녀를 봐주고 있다는 점쯤은 이미 깨닫고 있기에. 그렇다면 뭐가 됐든 자신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든다는 걸 테니까.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던 라히크가 느리게 입을 움직였다. 가슴 어귀가 어질해질 정도로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첫째. 여기는 대제국 벨리그레엄의 신성지다. 신성지는 우트가르드라 부르며 가장 최초의 신성인이 등장한 곳이다. 그 전설을 기리기 위해 신황청이 세워진 장소이기도 하지.”

    “신성지? 신성인…?”

    “네가 그 신성인이다. 둘째. 네가 입은 그 육신은 통로인이라 부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귀로 말이 들리기는 하는데 언뜻 이해가 바로 되지는 않았다. 분명 비트리체도 저 용어를 썼었지.

    그녀가 미간을 좁히자 라히크가 빗금이 진 부분을 문지르며 느른히 말을 이었다.

    “셋째. 네가 살던 세계를 신성계라 부른다. 거기에서 온 이들을 일컬어 신성인이라 칭하지. 여기는 네가 살던 세계가 아니다.”

    내가 모르는 세계. 낯선 땅.

    미지의 장소.

    비트리체에게 두루뭉술하게나마 이야기를 들었기에 충격은 반감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고.

    “그러니까… 내가, 아예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로 온 거라고. 전혀 모르는 곳에… 영혼만?”

    혼잣말이 맥없었다. 이번에 라히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똑같은 질문에 몇 번이고 답을 해 주긴 싫다는 듯 그저 그 오만하고 뻔뻔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스윽 들어 올릴 뿐.

    수용은 오롯이 그녀 혼자만의 몫이다.

    “그러면, 그러면 나 외에도 또 있다는 거야?”

    “그래.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신성인의 총 숫자는 1,862명. 한 해에 아무리 적어도 한 명에서 두 명 정도는 나타나는 편이다.”

    “!”

    라히크의 얼굴엔 거짓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비트리체의 말대로 그녀를 ‘황태자비’에 올리고 싶어 한다면, 이런 걸 거짓말하진 않겠지.

    “넷째. 통로인이란 특별한 신성인을 이 세계에 불러들이기 위한 제도로, 모두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다. 한 세대에 치러지는 소환 의식은 단 한 번. 모두 일곱 명의 통로인을 마련하고 신성인의 선택을 기다리지.”

    “내가, 선택을 했다고? 이 몸을…?”

    “그래.”

    대답은 간결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입을 열다가 그대로 다시 닫았다. 지금은 그저 들어야 한다. 정보를 모으는 게 우선, 판단은 나중의 일.

    “넌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 이번 세대에 공식적으로 소환된 신성인은 오직 너 하나. 너 외에 나타나는 다른 신성인들은 너와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레그리아.”

    “…….”

    “이름을 부여하는 건 특별한 행위지. 넌 앞으로 이 세계에서 레그리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을 끝으로 이제 그들 사이의 간극을 채운 건 침묵이다.

    라히크는 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꼭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된다는 것처럼 고요히 응시할 뿐.

    레그리아는 소리 지르고 발을 구르며 부정하는 대신 홀로 사유했다. 어지럽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 실상 그녀에게 중요했던 건 그것 하나뿐일지도 모른다.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럴 수 있는 수단 자체가 없다. 여기에, 있어도 좋다.

    매번 그녀를 보며 혀를 차곤 하던 어머니도, 손가락 하나로 그녀를 부려 먹던 동생도. 떼쓰는 것을 일일이 들어주다 지친 제 모습을 돌아보며 역겨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비트리체에게 들은 이야기를 완전히 확인받은 레그리아는 떨리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랬다. 지금 그녀의 안에 차오르는 감정은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환희였다.

    그러다 문득 레그리아는 깨달았다. 라히크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데, 그러면… 이곳에 그녀 외의 한국인들이 많았다는 건가?

    라히크는 우리 세계의 언어를 어디까지 할 수 있지?

    “한국어를 배운 건.”

    “벨리그레엄의 황태자는 기본적으로 언어를 일곱 가지 이상 익혀야 한다. 개중 신성어도 포함되어 있었을 뿐.”

    “신성어라고. 한국어가. 그럼 이건?”

    차분히 시선을 바로 잡은 레그리아가 평소 결코 사용하지 않던 욕설을 내뱉었다. 제 동생이 전화 통화를 하며 몇 번이고 쓰곤 했던 말. 그녀는 단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 없던 저질스러운 말이었다.

    [fuck you.]

    엿이나 먹어.

    해방감에 잔뜩 부푼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라히크의 미간이 꿈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