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34)
  • 16화

    “이해가 잘, 가지 않아. 남의 몸에 들어왔다는 게.”

    “쉽게 생각해. 거기 신황청의 꼰대들이 1,000일 동안 픽픽 쓰러져 나가면서 기도를 올린 거야. 그래서 너를 불러들인 거지. 여기서 ‘어떻게’라는 물음을 가지면 피곤해져. 그냥 그렇구나 해.”

    말은 쉽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낼 수도, 어떤 대꾸를 할 수도 없었다.

    이 몸은 그녀의 것이 아니다. 비트리체라는 눈앞의 이 여인의 것이지.

    그렇다면 그녀는… 졸지에 남을 내쫓고 몸을 차지한 격이 되지 않은가?

    “원래는 이렇게 너랑 내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건진 모르겠네. 뭐, 내가 아주 지랄맞아서 지옥에서도 쫓아낸 모양이지.”

    비트리체는 발랄했다.

    어딜 어떻게 봐도 죽음에 슬퍼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후련해 보였지.

    “일단 내 존재는 비밀이다? 그때 내가 흥분을 못 참고 나서는 바람에 에오스가 눈치를 채긴 했겠지만… 그래도 두 번 그러지 않으면 돼. 물증은 없으니까. 오직 심증뿐이지. 그리고 심증 싸움에선 시치미 잘 떼는 쪽이 원래 이겨.”

    “비밀로, 할게.”

    “고마워. 우린 참 잘 맞는다니까? 정말 닮았어.”

    그럴 리가.

    그녀는 곧바로 부정했다. 지금 자신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눈. 하지만 찻잔 하나 들어 올리는 것부터가 다르잖아.

    비트리체에게는 타고난 우아함이 있는 듯했다. 기품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말씨를 험하게 쓴다고 하여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신성인은 마련되어 있는 몸의 주인과 가장 비슷한 몸에 들어가니까. 아직 너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신황청. 신성인….”

    그게 뭔지 명확하게는 몰라도 눈치껏 알아들었다.

    그러던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 둘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의미가 통한다는 것을 말이다.

    ‘꿈이라서 그런가?’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당황과 충격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녀는 스스로 허벅지를 꼬집어 정신을 차렸다. 묻고 싶은 게 많다. 알고 싶은 것도.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질문은 이거였다.

    “난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음, 글쎄. 그건 나도 방법을 모르겠네.”

    “……그렇구나.”

    기합이 들어갔던 어깨가 다시 늘어트려졌다. 비트리체는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곤 아름다운 얼굴을 바짝 붙여 눈웃음을 지었다.

    “굳이 돌아가야 하니?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어?”

    “이유?”

    “난 네 기억을 모두 봤단다. 소중한 이는 없지 않니.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 말이야. 그런 게 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좀 더 거칠게 저항하며 탈출로를 찾으려고 했겠지. 움직이지 않는 다리 핑계를 대지 않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비트리체의 말은 조목조목 다 맞았다.

    가족? 가족은 그녀에게 고통만을 주는 존재였다. 모친도 동생도 할 수만 있다면 보지 않고 평생 남은 세월을 살아가고 싶다.

    수영장까지 딸린 드넓은 2층집, 억 소리 나는 차. 보석 브로치.

    그런 것 따위는 한 번도 갖고 싶었던 적 없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적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녀가 진정으로 가지고 싶었던 건…….

    “자유. 자유잖아.”

    비트리체가 속살거렸다. 꿀 바른 치즈를 얹어둔 덫처럼, 그건 너무나 유혹적인 단어였다.

    “여기선 네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데 왜 굳이 돌아가려고 해?”

    “…….”

    “그런 곳에 돌아가느니 여기서 찬찬히 깨달아 봐. 이 예쁜 얼굴로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무엇까지 해 볼 수 있을지.”

    비트리체가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살며시 쓸어 넘겨 주었다. 그러더니 뺨을 쿡 찌르는 게 아닌가.

    “그리고 좀 더 웃고 말야. 넌 너무 웃지를 않아.”

    “아.”

    “네 마음대로 살아. 미친년처럼 웃고 즐기고, 그렇게 화려하게. 내가 그랬듯이.”

    감정이 차오르면 꾹 눌러 삼키는 삶이었다. 단 한 번도 뱉어 본 적 없다.

    그녀는 어항 속 물이었지 밤하늘에 제멋대로 터지는 폭죽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몸,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계. 가족이 없는 곳.’

    여기라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 그들은 서로 모여 숙덕거릴 땐 네 욕을 하고 돌아서서 의상실에 달려가 말하겠지. 너처럼 만들어 달라고.”

    주변이 휙 바뀌더니 같은 얼굴을 한 두 사람은 이제 함께 서 있었다. 거울을 앞에 놓고.

    “내가 의식이 유지가 되는 동안은 다 가르쳐 줄게. 웬만한 것은. 낮엔 황태자비가 되는 공부를 하고 밤엔 꿈에서 나와 만나서 실전을 배우렴.”

    “황태자비?”

    “그래. 넌 황태자비가 될 거야.”

    그건 엄청 높은 지위잖아.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카페 알바 정도를 하고 싶은 거지 그런 대단하고 불편한 지위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몸이 다 낫고 나면 머무는 곳에서 나갈 수 있는 게 아니었나?

    “그 황태자비라는 거, 안 하면 안 되는 거야?”

    “음… 글쎄. 노예 계급으로 팔려 가고 싶지 않으면 해야 할 거야. 황태자비 자리를 걷어차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만약 그렇게 되면 황궁에선 반드시 널 죽이려고 할 거란다. 그래서 새 황태자비를 불러오려 하겠지.”

    “……그런데?”

    “그런데 아깝잖니. 기껏 신성인이 왔는데 내다 버리기엔. 그러니 누군가 반드시 널 죽었다고 공표해 두고 노예 딱지를 붙여 온갖 질 나쁜 신성 기사들에게 내돌릴 거란다.”

    신성 기사.

    이번에도 또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꿈에서 깨도 잊지 않도록 단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적어두고 있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비트리체가 어깨에 뺨을 비볐다.

    “하아. 너랑 자매로 만났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미안해.”

    “사과를 왜 하고 그러니. 네가 원해서 내 몸에 들어온 것도 아닌 것을. 자, 걷기나 하자.”

    또다시 주변이 일렁이더니 거울이 사라지고 그 앞에 길이 생겼다.

    비트리체는 먼저 몇 걸음 앞으로 가더니 뒷짐을 지고 섰다.

    “날 따라해 봐.”

    “자세를?”

    “그래. 그리고 앞으로는 미안해도 사과하지 않는 버릇을 들이도록 해. 사과를 하는 건 죄를 인정한다는 뜻. 인정하면 보상을 해 주어야 하게 되니까. 그리고 귀족들은 쉽게 사과하는 사람을 먹잇감으로 삼는단다.”

    “…그건 어떤 건지 잘 알아.”

    “그래, 그러니 다행이지. 금세 적응하게 될 거야, 너는.”

    허리에 힘을 주고 어깨를 편다. 남자들만 어깨를 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여자도 턱을 치켜들고 가슴을 살짝 앞으로 내밀고, 그렇게 당당하고 오만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면.

    그건 사교 모임 어디에서나 똑같이 적용되는구나.

    “아, 찾았다.”

    그때였다. 새카만 벽면을 쓸던 비트리체가 뭔가를 확 잡아챈 뒤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뱀?”

    아니, 굵은 줄인가?

    그녀는 망설이다가 일단 그것을 잡았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찬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분명 시커먼 색이었던 주변이 그녀가 잡은 부분부터 시작해 깨끗한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밝아지던 그건 이내 온 사방을 밝히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두웠던 주변은 어디로 갔는지 그저 화사하기만 했다.

    “역시. 네가 하니까 한 번에 되네.”

    “이게 다 뭔데?”

    “그 밉살스러운 놈의 배배 꼬인 속. 넌 이제부터 그놈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이것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게 될 거야.”

    “…이걸 다 풀어야 한다고?”

    그녀는 질린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건 마치 출구가 없는 미로 같았고 동시에 엉겨 붙은 실타래 같았다.

    이걸 왜 풀어야 하는 걸까.

    “이걸 다 풀어내면 그놈이 미친 짓을 덜 할 거야. 아, 장점이 있기는 해. 이걸 풀어 놓을 때마다 그 녀석은 네게 종속될 거란다. 마지막엔 발치에 꿇어 질질 짜기나 하겠지. 그 꼴을 꼭 봐야 하는데.”

    비트리체가 아쉽다는 듯 입술을 핥았다.

    여전히 자세하진 않은 설명이었으나 그녀는 느낌으로 이해했다.

    “이걸 풀어내라고 나를 부른 거란 뜻이구나.”

    “정답. 똑똑하기도 하지.”

    “넌 못하는 일이고?”

    “신성 기사의 내면에 진입할 수 있는 건 신성인 뿐이야. 난 너와 같이 있어서 보게 된 것뿐. 신성 기사의 내면은 다 다르게 생겼다고 해.”

    신성 기사라는 건 한 명이 아니구나.

    대화 속에서 정보를 유추하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아까는 굵은 끈 같았던 것이 이제는 금색 실타래가 되었다.

    이걸 살살 달래 가며 조금씩 풀어나가면 언젠가는 다 풀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달아날 길을 찾기 전까지는…….”

    “황태자비를 하기 싫니?”

    “아, 싫다기보다는 내겐 너무 버거워. 부담스럽고.”

    딱 잘라 대답하자 비트리체가 흐응 하며 콧소리를 냈다. 약간 멋쩍어진 그녀는 일부러 화제를 전환했다.

    “가족에게 뭔가, 남기고 싶은 말 같은 건 없어?”

    “내가 말했잖니. 우리는 닮은꼴이라고.”

    그럼 없겠구나.

    그런 것까지 닮을 줄은 몰랐는데.

    “아, 그래도 친구는 있지. 표드르 이안 실버레이크.”

    “친구?”

    “응, 그런데 표드르는… 워낙 고지식하기도 하고. 통로인이란 제도를 극도로 혐오하거든?”

    “응.”

    “그래서 너한테 괜히 화풀이를 할 거란 말이야. 그럼 당황하지 말고 배에 힘 딱 주고 이렇게 말해. 그렇지, 턱을 좀 더 치켜들고.”

    “어떻게 말해?”

    “느닷없이 연약한 영애를 겁박하다니! 그러고도 경이 기사인가요?”

    “음, 이 얼굴로?”

    전혀 연약해 보이지 않는데.

    어느새 실타래는 그녀의 품 안에 가득 안길 정도로 풀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실타래가 다시 꼬이지 않도록 잘 돌돌 감아서 바닥에 내려놓는 그녀의 등에 대고 비트리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도 아니면 그냥 내가 결혼 같은 걸 할까 보냐. 그렇게 말해도 돼.”

    “전해 줄게. 언젠가 만나게 되면.”

    꿈의 시간은 짧구나.

    주변에 진동이 울리더니 실타래들이 점점 사라졌다.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라는 듯이.

    비트리체 역시 그걸 느꼈는지 눈가를 찡그렸다.

    “이건 진심으로 하는 충고니까 새겨들어 줄래?”

    “들을게.”

    “절대 황태자비가 하고 싶지 않다는 말 따위, 입 밖에 내지 마렴. 네 지위를 유지하며 사람을 만나고 네 편이 되어 줄 자를 구해. 네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건 다 이용해야 한단다. 설령 그게 사람이더라도.”

    “응.”

    “라히크 바라키엘 벨리그레엄. 그는 무서운 자야. 역대 황태자 중에서도 강하다고 일컬어지지. 그자를 길들이는 게 좋아.”

    줄이자면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트리체가 안심했다는 듯 후 하고 숨을 뱉으며 다시금 웃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 행복을 누려보렴. 받아낼 수 있는 건 악착같이 다 받아내. 넌 그럴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가졌으니까. 더는 불행에 스스로를 처박으며 살지 마렴.”

    비트리체의 말은 마치 노래 같았고 주문 같았다.

    “그러고도 네가 모든 걸 다 알고 싶어진다면, 그때 알려 줄게.”

    “무엇을?”

    “이 세계의 추악한 진실을.”

    비트리체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나를 봐서라도 실컷 즐겨. 이 세계의 밝은 면을.”

    툭.

    비트리체가 벼랑 끝에 선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떨어지는 동안엔 비트리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참, 죄책감 같은 시시한 감정. 갖지 마렴. 난 자의로 네게 몸을 넘겨 준 거니까.”

    마지막 한마디만이 귓가에 남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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