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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134)
  • 15화

    심지어 오늘은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고까지 생각했었는데.

    ‘내가 잠시 정신이 이상해졌던 게 분명해.’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그녀는 모르는 것뿐이고 라히크는 아는 것뿐이라는 게 화가 났다.

    처음부터 말해 줄, 수도, 있었잖아!

    태어날 때부터 우월하다는 듯한 그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방 먹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게 뒤늦게 아쉬웠다.

    ‘조금만… 더!’

    팔이 아려온다. 꺾인 각도 탓에 손목 또한 아팠다. 숨은 막혔고 괴로움이 들이닥쳤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내 도착하여 빌어먹을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볼 수…… 있었다.

    “!”

    장인이 소중히 다룬 예술품과 같은 미모였다. 커다란 녹색 눈동자. 매혹적으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반듯한 눈썹이 대조를 이룬다. 결점 하나 없이 흰 피부며 얼굴에 전체적으로 흐르는 부유함은 몸의 주인이 어떠한 고생도 해 본 적 없음을 드러냈다. 붉은 머리칼 위로 일렁이는 물살이 신비로움을 더하여 꼭 지금 이 순간이 신화 속 일부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래, 아름답다.

    그러나 이건… 그녀가 아니었다.

    “컥.”

    순간, 충격 탓에 물을 잘못 삼키고 말았다. 남겨두었던 호흡이 일시에 증발하며 레그리아는 따가운 목을 움켜쥐고 허우적거렸다.

    아마 라히크가 보고 싶어 하였을 미약한 생물의 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지금의 그녀일 테지.

    하나 흐려지려는 의식 속에서도 레그리아의 머릿속을 스친 한마디는 이건 제 몸이 아니라는 시시한 발악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그녀는 좀 더 다른 것에 집중했다.

    ‘이 샘의 물맛, 에오스가 늘 주곤 하던 차의 맛과 같아. 그리고 식사에 뿌려져 있던 정체 모를 향신료와도…!’

    지금까지 입욕제를 먹여 온 건가?

    그때였다.

    촤아악!

    귓바퀴를 타고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숨을 쉬지 못해 죽어가던 그녀를 라히크가 마침내 건져 올린 것이다.

    “컥, 커헉…!”

    “물을 토해내라. 미련스럽기는.”

    눈이며 코, 목구멍 모두가 따가웠다. 게걸스레 공기를 집어삼키던 그녀는 그러다가 또다시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폐부가 물에 절여지는 기분이다. 토악질이 나기도 했고 머리가 멍해서 두통이 일기도 했다.

    맛, 물맛이…….

    한 번도 입에 담아 보지 못한 욕설을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머리꼭지가 홱 돈다는 표현이 옳을 만큼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얼마나 멍청하게 여겼을까.

    어디까지 바보로 보고 있었을까.

    “옳지. 다음부터는 못할 것 같거든 고집 피우지 말라. 혀는 부탁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

    라히크가 그녀를 짜증스레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가 쏟아내는 기운이 그녀의 젖은 몸에 눅진하게 들러붙었다. 어딘가 모르게 굉장히 초조한 것 같지만 지금 그녀는 죽다 살아난 사람이니 대답 정도는 하지 않아도 될 테지.

    싫지만 기대는 게 편하니 실컷 이용해 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레그리아는 그의 가슴팍에 뺨을 댄 채 고개를 숙여 가쁜 숨만을 몰아쉬었다.

    스스로 저 아래에 내려가 진실을 확인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라히크는 그녀를 시험하고 싶어 한다. 하나 죽이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걸 이제 어느 정도는 확신했다. 정확히는 라히크의 본성에 대해 확신하는 것이다. 죽일 거였으면 일찍 없앴을 테니까. 아니면 그날 구해주지 않았든가.

    “맛이 이상, 해.”

    “맛?”

    물을 토해내는 와중마다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집중하던 라히크의 눈썹이 실긋이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러던 그는 얼마 뒤, 짧게 웃음을 토해냈다.

    “설마 이 샘의 물맛을 말하는 건가.”

    “너도 먹어 봐. 얼마나 맛, 없는지! 커헉!”

    “아아. 그러니까, 지금 저 바닥의 거울을 보아 네 외양을 확인하였음에도 고작 한다는 말이 물맛이라.”

    “지금까지 나한테 먹여 온 게 뭔지 당장 말해. 나한테, 나한테. 입욕제를… 먹인 거야?”

    어질하다.

    부스러기 같은 정신을 최대한 부여잡으며 추궁했으나 뭐가 그리 우스운지 그는 끝도 없이 피식거렸다. 동시에 이 공간을 통째로 지배하고 있던 자욱한 기운에도 전율이 일었다. 아주 웃겨 죽겠다는 듯이.

    이상하게도 레그리아는 눈에 보일 리 없는 그 기운이란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처음 이 샘에 들어왔을 때와는 분명 뭔가가 조금 달라졌다. 일전에 라히크와 입맞춤을 하였을 때 느꼈던 바로 그것. 그게 지금은 너무도 선명하여서 손으로 잡으면 잡힐 것도 같았다.

    ‘내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레그리아는 두 손을 펼쳐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충격을 받아야 하나? 울거나 소리 질러야 마땅한가. 하나 다리가 손이 팔이 머리칼이 내 것이 아닌데 어찌 모를까. 그저 방어 기제로 부정하고 있었을 뿐.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것만 해도 한 발짝을 나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통제되는 정보 속에서 그녀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최소한 제 몸이 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았는가.

    레그리아는 이 상황이 조금도 기쁘거나 즐겁진 않았으되 스스로를 조금은 대견히 여겨 주기로 했다.

    라히크에게 매달려 애원하지 않아서, 그에게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꼴로 스스로 안겨들지 않아서.

    다행이다.

    약해 보이지, 말자. 앞으로도 라히크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말자. 더는 농락당하지 않을 거야.

    깜빡.

    눈앞이 점멸한다. 머리가 빙빙 돌아 그녀는 이제 더는 의식을 유지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아, 어둠이란 어쩌면 이렇게 달콤한지…….

    * * *

    “헉!”

    여긴 어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난 그녀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암흑이다. 말 그대로 깨끗한 어둠.

    분명 방금까지는 촛불이 밝혀진 온천에 있었는데…?

    ‘아, 꿈인가?’

    자각몽이라니,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상한 게 한두 가지도 아니니 이제 이쯤은 그러려니 할 만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후우…….”

    깊게 호흡을 들이마셨다가 짧게 토해냈다. 그래도 여전히 가슴 속에서 들끓는 이 감정은 사라지질 않는다.

    그래, 그녀는 쉽게 포기하는 자였다. 상황을 바꾸려는 노력을 크게 하지 않았고 체념에 익숙했다.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자신의 사상이 옳다며 주장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물이 흐르는 대로 살았다. 유속에 맞추어서.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소중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보잘것없어도 언제나 소중했기에 몇 번이고 혼자 울었던 거겠지.

    아무리 초라하다 해도 유린당해도 좋은 생은 없지 않나.

    “믿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도 믿어선 안 되는 거였는데!”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 아주 조금이라도 믿은 제가 등신이지.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을 내리쳤다.

    동생이 너무 힘들게 하면 몰래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 이런 식으로 혼자 감정을 쏟아내곤 했었다.

    실컷 소리를 지르고 나면 좀 나아져서. 다시 모든 것에 맞춰서 살 수 있게 되어서.

    “라히크 바라키엘 벨리그레엄…….”

    또 뭘 알고 있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낱낱이 밝혀내고 말겠어.

    꿈에서 깨기만 하면. 그러기만 하면….

    그때였다.

    “아, 내가 안 좋을 때 왔나?”

    어떤 목소리 하나가 귀를 파고들었다. 머리에 열이 몰린 상태에서도 흘려들을 수 없으리만치 또렷한 음성.

    “안녕.”

    언제 나타난 걸까.

    그녀는 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손을 대고 꽃받침을 하고 있는 미인을 올려다보았다.

    슬쩍 휘는 눈꼬리가 야살스럽기 그지없다. 그 아래 존재하는 녹색 눈동자는 방금 본 것과 같았으나 훨씬 당당했고 한계 없어 보였다.

    한순간 말문이 막힌 그녀는 입만 뻐끔거렸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감정 풀이 장면을 들킨 것도 부끄러웠지만 그보다는 이 사람. 몸 주인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트리체 로에르멜이라고 해. 구면이지?”

    “그때, 내 몸을 조종했던 게.”

    “그래. 나야.”

    비트리체가 손가락을 살짝 흔들며 달콤하게도 웃었다. 같은 여자이고 지금은 심지어 그녀의 몸이 되었는데도 홀려 버리고 말 만큼 매력적인 자태였다.

    “참아야 한다는 건 알았는데, 아. 그땐 진짜 못 참겠더라고. 자, 일어날래?”

    “이게 대체….”

    “네가 궁금해하는 것, 다 말해 줄게. 일단 이 칙칙한 내면세계부터 다르게 바꿔 볼까?”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선 비트리체는 정말 화려한 차림이었다. 머리에 쓴 보닛엔 큼지막한 꽃송이가 달려 있었고 가슴골이 깊게 파인 금빛 드레스를 입었다. 문제는 가슴만 파인 게 아니라 등허리까지도 트여 있다는 점이었다.

    “자, 앉으렴.”

    비트리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주변이 확 밝아지더니 테이블과 의자가 생겨났다.

    나무나 돌로 이뤄져 있는 게 아니라 눈부실 정도로 예쁜 유리 재질이어서 그녀는 다시 한번 기가 막혔다.

    “응,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거기엔 유리가 없지. 네가 얼굴을 비춰 보고 놀라서 경기를 일으키면 안 되니까 차단하느라 그런 거야. 놀랍게도 넌 지금 내 몸에 빙의를 한 거거든.”

    짝짝짝.

    비트리체가 황홀한 눈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자, 이 나라 최고의 미녀에 빙의한 기분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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