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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34)
  • 14화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풍덩.

    물 튀기는 소리와 함께 라히크는 그녀를 안은 채 등부터 샘에 빠져들었다. 그의 몸 위에 레그리아를 얹은 채로. 그러자 무어라 조잘대던 입이 딱 다물려 그를 기껍게 만들었다.

    앞으로 10년은 더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의 모르말라 가루를 이 샘에 통째로 풀라 지시하였다. 에오스에게 보고 받은 바로는 아마 충격을 받아 무력감에 빠진 듯하다고 하니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긴장이 완화되어 훨씬 좋아질 터였다.

    아마 다리도. 딱딱하게 굳은 근육이 풀어질 테니까.

    “깜짝 놀랐잖아! 이거 놔!”

    “싫은데.”

    “하. 좋아, 뭐가 됐든 이제 똑바로 말해. 네가 나를 납치했어? 아니면… 아니면 어머니의… 사주라도 받은 거야?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해 준 거야…….”

    점점 커질 거라 여겼던 목청이 끝으로 가니 오히려 사그라들었다. 마치 묻기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아하. 레그리아의 본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챈 라히크는 눈썹을 까딱이며 그녀의 얄쌍한 허리를 휘감아 제 몸에 당겨 붙였다. 오랜만에 안은 몸은 여전히 부드럽다. 로에르멜 공작과 독대해 입씨름을 하느라 고생스러웠던 며칠이 보상을 받는 기분.

    우아한 목덜미에서 단내가 풍긴다. 그걸 들이마시자 맞닿은 아랫도리에 숫제 불이라도 붙은 듯하였다.

    “글쎄. 그래 보이나?”

    “난 여기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뭐든… 말해 줘.”

    부디.

    그렇게 애원할 듯 말 듯 하던 입술이 이내 꾹 닫혔다. 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그걸 보던 라히크는 짧게 혀를 찼다.

    미련한 것이 건방지게도. 안긴 채 애원하며 가련한 어깨를 구슬피 떨기라도 할 것이지. 하여간에 눈치도 없고 애교를 부릴 줄도 모르는 계집이다. 몸의 주인이었던 그 미친 여자와 전혀 다른데도 이럴 때면 비슷하게 겹쳐 보이기도 하여 심기가 불편했다.

    저를 위해 금괴 천 상자 분량의 모르말라 가루마저 아낌없이 쓰게 하였건만.

    “다들 네게 잘 대했을 텐데. 혹 태도가 불손했던 자가 있다면 말하라. 교체할 테니.”

    옷이 얇은 탓에 손아귀 아래에 젖은 맨살이 그대로 느껴졌다. 자연스레 입맛이 다셔지는 느낌이 우스워 라히크는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냈다.

    보아라, 네 꼴을. 너는 짝에게 휘둘리지 않겠노라 그리 자신하더니 지금 확실히 발정하고 있지 않으냐.

    아직 짝을 맺은 것도, 몸 한 번 섞은 적도 없을진대 여자의 미련함을 귀엽게 보고 있다. 이건 실로 우스웠으나 우습지 않기도 했다.

    앞으로 짝이 되면 얼마나 더 휘둘리게 될지 눈에 선하여.

    내일부터 벌어질 그들 관계의 변화를 짚어 나가던 라히크는 이내 눈빛을 차게 식혔다.

    필요에 의한 관계일 뿐이다. 그는 종속을 하는 자여야지 종속당하는 자여선 안 되었다.

    “교체라니… 기가 막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지 마. 그리고 다들 내게 잘 대해 줬어. 최소한 너 빼고는. 그러니 교체 같은 말을 할 거면 널 교체해.”

    “그건 어렵겠는데. 나는 대체할 수 없는 귀하신 몸이라.”

    “……그런 말을 지금 진심으로 뱉은 거야?”

    저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씩씩거리는 뺨에 평소와 달리 열기가 올라 있다. 샘의 물은 뜨겁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더운 편이기 때문이겠지. 아니면 그와 같이 흥분해서든지.

    라히크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대충 그러한 생각이나 했다. 이 샘과 비슷한 것을 당장 황궁 내의 별지에 지으라 명해야겠다고.

    어차피 그의 경멸하옵는 부친에게는 지금 실질적인 권한이나 힘 따위는 없었다. 미친 짓이나 벌이고 연회나 열까.

    황궁은 그의 손아귀에 있다.

    그 하나는 명확한 사실이므로 갑자기 멀쩡한 땅을 파서 샘을 만들라 한들 반항할 자는 누구도 없었다.

    “예쁘군. 네 붉은 머리.”

    “그러니까 빨리 말하란 말이야. 여긴 어디고, 나는…… 어?”

    몸을 바로 해 앉은 라히크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안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물을 함빡 머금은 꽃잎 같은 것을 쥐었다. 갓 태어난 맹수의 새끼를 만지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는 마땅히 그리 대우받을 자격이 있으니.

    레그리아는 예쁨받는 게 이상하고 어색하다는 듯 그의 손길에 몸을 움찔거렸다.

    그래, 이 여자는 티가 났다.

    한 번도 저를 품는 남자에게 사랑받아 본 적 없는 티가.

    “흥분하지 마라. 보채지 않아도 차근히 알려 줄 것이다.”

    “붉은… 머리는, 내 머리가 아니야. 난 원래 흑발이니까. 이것도 묻고 싶었어. 내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 짓도.”

    이제 현실을 맞닥뜨리게 해야 할 순간이기는 하다. 더 이상의 말장난은 시간 낭비일 뿐.

    거룩의 샘이 있는 공간은 물의 열기로 인해 희뿌연 수증기가 들어차 있었다. 물 위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가루와 함께 허브를 비롯한 각종 약재 그리고 꽃잎을 띄워두는 게 관례다.

    그래야 신성인이 ‘제 얼굴을 샘에 들기 전, 비춰 보지 못할 테니까.’

    지금은 샘에 들었으니 이제 모든 게 끝났다.

    라히크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금빛 물방울을 엄지로 둥글게 훔쳐냈다.

    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지내던 여자. 이 정도 수위로 제 감정의 속살을 드러내 보인 건 이번이 처음.

    진실을 알면 너는 어떤 눈을 하며 무너질까.

    가학적인 악취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아니, 실은 오래전부터 심술궂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혼자만 발정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부터겠지.

    라히크는 부들거리는 장미 꽃잎 같은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차라리 처음부터 모르말라 가루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를 상상했다. 경계심이 팽팽하게 살아 있는 편이 좀 더 빠르게 의존을 끌어낼 수 있진 않았을지.

    황태자로서의 의무나 책임. 앞으로 해야 할 일들. 그 모든 게 그를 옥죄는 족쇄가 되어 행하지 못한 일은 그저 아쉬움으로만 남아 있었다. 물론 그런 제약 장치조차 없었더라면 지금쯤 그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친놈이라도 되어 있었을지도.

    [네가 찾는 거울은 이 샘의 바닥에 깔려 있다.]

    “알아듣는 말로 말하랬지.”

    “어서 말을 가르쳐야겠구나. 거울을 보고 싶다면 샘의 바닥으로 내려가라 하였다.”

    “뭐?”

    “직접 물속에 밀어 넣는 수고를 해야 믿겠나.”

    말은 이리 하였으나 라히크가 바라는 건 그녀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어차피 아직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으니 그에게 부탁을 하기를 원한다. 애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숙이고 들어오기를.

    그러나 레그리아는… 그의 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했다.

    * * *

    “없기만 해 봐.”

    라히크의 냉엄한 표정을 마주한 레그리아는 고집스레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라히크는 이따금 저런 눈으로 사람을 보았다. 언제고 원하기만 한다면 으깨 버릴 수 있다는 듯 소름 끼치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그게 그녀가 절대 라히크에게 속지 않는 이유였다.

    그가 보여 주는 호의 따위는 언제고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일 뿐. 매달려선 안 돼.

    지금도 봐.

    그녀가 혼자서 걷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샘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지 않는가. 심지어 가장 애타게 원하는 걸 미끼로 삼아서.

    어쩌면 라히크는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을 풀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그녀는 한 순간 중심을 잃고 고꾸라질 것이다.

    ‘솔직히… 그러고 싶어 보여.’

    언뜻 보여 주는 그의 얼굴은 잔악했다.

    자상하게 안아 주는 게 아니라 물속에 머리를 밀어 처넣고 물거품이 차오르도록 괴롭히고 싶어 보인다. 다정하게 머리칼에 입 맞추는 게 아니라 머리채를 움켜쥐고 강압적으로 입술을 앗고 싶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다.

    이쪽에서 먼저 자극하지만 않으면, 최대한 매너를 지키려 하는 것이다.

    ‘교육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라히크의 모친께 존경을 보낸다. 한국어를 할 줄 알면서도 지금까지 내내 한마디 대꾸조차 해주지 않았던 나쁜 놈을 인간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 두신 점에 대해 박수를 드릴 수밖에.

    “후우.”

    레그리아는 긴장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저 아래에 거울이 있을지도 모른다. 저 아래에…….

    하지만 없을 수도 있다. 라히크가 그녀를 조롱하기 위해 던진 말일 수도.

    그의 못된 점은 이렇게 망설여도 결국 그녀가 스스로 물속에 머리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음을 안다는 것에 있었다. 지금 아니면 거울을 다신 보여 주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가장 먼저 얼굴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헛소리라고 증명받고자 하였다.

    라히크의 뻔뻔한 낯짝을 노려보던 레그리아는 정말 싫었지만 하는 수 없이 그의 어깨를 지지대 삼아 천천히 일어섰다. 부드러운 손가락 아래에 단단한 근육이 잡힌다. 오랜 세월을 바쳐 단련해 온 자의 육체는 그녀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만약 내가 다른 몸에 들어오기라도 했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진짜라면….’

    차라리 이 새끼 몸에 넣어 주지 그랬어요.

    레그리아는 잠깐 신을 원망하다가 그대로 미끄러졌다. 물방울이 튀어 나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샘은 깊었고 라히크가 앉아 있던 자리 아래로 계단이 세 개나 더 있다.

    샘 안으로 빨려드는 저를 보는 라히크의 눈에 잠깐이지만 분노 비슷한 것이 스쳤다.

    뭐가 되었든 지금까지 저를 기만한 남자 아닌가. 제 의도대로 그녀가 행동하지 않아 화가 난 거라면, 기껍다.

    ‘한 방 먹였어.’

    제게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기에 바닥에 닿은 레그리아는 최대한 두 팔에 힘을 주고 몸을 밀었다.

    라히크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지 샘의 중앙, 그 바닥에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아마도 거울이겠지. 인어는 꼬리라도 달렸지 멀쩡한 다리가 있는데도 쓰지 못하니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고작 여기에서 저기까지일 뿐인데.

    아직까지는 거울보다는 라히크 쪽이 더 가깝다. 라히크를 붙잡고 흔들어 저기로 데려가 달라고 하면 그리 해 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싫어. 저 못된 놈에게 의존하지 않을 거야.’

    아주 조금은, 좋은 사람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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