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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134)
  • 13화

    이걸 입고?

    ‘가운을 둘러 주긴 했다지만 설마.’

    아직 걸을 수 없으니 그건 아닐 것 같다. 그도 아니면 여기서 자리를 옮기겠다고 하는 걸까?

    복도에선 어딘가 엄숙한 듯하면서도 흥겨운 바람이 불어왔다. 변화를 암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로운 향이 금세 방 안에 들어찼다.

    이제껏 목욕조차 이동식 나무 욕조를 방 안에 들여 해 왔던 그녀이기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새롭게 느껴졌다.

    ‘혹시… 혹시 지금이라면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난데없이 훅 끼쳐 든 기대감이었다. 사실 걷지 못한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을 뿐, 그게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평생 걷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염려했으나 발목의 힘줄이 끊기거나 한 건 아닌 듯해서 일단 참고 있었다.

    하루하루 몸이 나아지는 걸 확연히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인내의 근거가 되었고.

    “스스로 일어서 볼래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에오스가 안절부절못하며 제게 손을 뻗는 게 보였으나 그녀는 고집스레 도움을 거절했다.

    가느다란 다리는 오랜 시간 걸은 적 없는 것 같았다. 근육이라는 게 도통 없는 것처럼 종아리엔 그 흔한 알조차 배겨 있지 않다. 핏줄까지 들여다보일 만큼 하얗고 투명한 피부 역시 햇볕을 받은 적 없음을 알려 주었다.

    ‘설마 이게 내 몸이 아니라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건… 아냐. 생각하지 말자.’

    의심스러웠으나 그녀는 생각을 하다가 말아 버렸다.

    만에 하나 진짜 그렇다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아서.

    도무지 제 것 같지 않은 다리를 심란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

    풀썩.

    넘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침대의 매트리스를 짚고 일어선 그녀는 갓 태어난 산양처럼 비틀거렸다. 그런 꼴로 한 번. 두 번. 그리고 다섯 번째.

    이번에도 끝내 3초를 넘기지 못하고 기우뚱한 몸이 앞으로 넘어진다. 다가올 충격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익숙한 통증 대신 누군가의 단단한 품에 뺨을 대야만 했다.

    [엉망진창이로군. 꼴리게 하려던 거라면 성공이다.]

    며칠 들었다고 그새 귀에 익은 음성. 라히크였다.

    못마땅함이 그득 묻어나는 목소리에 조금 움츠러들었으나 그녀의 허리를 둘러 안는 팔은 다정했다. 문제는 지금까지는 한 번도 이렇게 마주 보고 푹 안겨 본 적 없다는 거지만.

    어색한 마음에 일단 밀어내고 보자 라히크가 쭉 뻗은 눈썹을 실긋이 일그러트렸다.

    [거부하지 말라 하였을 텐데.]

    무슨 투덜거림인지는 몰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녀가 떨어져 나가는 게 싫어 보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왜 하필 오늘따라 가벼운 차림을 하고 나타난 거야?’

    훈장이 빼곡히 박힌 제복은 어디다 뒀는지 라히크는 아까 보았을 때와 다른 차림이었다.

    여전히 단정하게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있으나 재킷이 없다. 흰 바지, 얇아서 안이 거의 비쳐 보일 수준인 흰 셔츠. 그리고… 걷어 올린 팔뚝.

    그녀와 같이 온통 흰색 일색인 차림인데 이상하지 않은 건 그의 몸이 믿을 수 없으리만치 건장하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무슨….’

    동생이 만나는 남자들은 집의 수영장에서 웃통을 벗고 수영을 해댔다.

    보려고 본 것은 아니나 하필 그녀의 침실은 2층이었고 수영장 바로 위쪽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햇살을 즐기는 걸 포기하고 창문을 완전히 닫고 커튼을 치지 않는 이상 남자들의 우락부락한 몸이 시야에 담길 수밖에는 없었다.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히크는, 그녀가 흘긋흘긋 본 적 있던 그 어떤 풋내기들과도 달랐다.

    그에게서는 막 여물기 시작하는 사내 특유의 풋내가 나지 않는다. 이미 익어 완숙한 사내였으며 그러한 매력을 감추지도, 드러내어 과히 자랑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부끄러워하거나 수줍어하지도 않으며 외려 시선에 익숙한 자.

    스스로가 매혹적임을 지나치게 잘 알고 이용하는 어른 사내.

    그랬기에 오히려 뺨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 건 그녀 쪽이었다.

    [가마는 됐다. 예비 황태자비는 내가 모시겠다.]

    [예, 황태자 전하.]

    에오스가 또 ‘쟈즈, 바라켄 샤즈’라고 했다. 무심코 입속으로 외고 있자니 엷은 웃음기가 묻은 시선이 그녀의 입술께에 어렸다.

    [그게 아니지. 넌 내게 경어를 쓸 필요 없다. 오직 모후와 너, 단둘만이 그럴 수 있지.]

    “뭐라는 걸까, 정말.”

    “말끝에 ‘즈’를 붙일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왜… 잠깐. 잠시, 당신!”

    풀잎을 닮은 연녹색 눈동자가 배신감과 충격으로 크게 떠졌다. 방금까지 끈적하게 두르고 있던 무기력을 완전히 날려 보낸 모습이 훨씬 산 사람 같아 보였다. 보기 좋아 라히크는 피식거리며 그녀의 허리를 고쳐 안았다.

    “한국어! 할 줄 알잖아요? 지금까지 알면서 날 속였어!”

    [내가 모른다고 한 적이 있던가?]

    “한국어 할 줄 알잖아! 소통이 되는 말로 해요!”

    [싫은데.]

    라히크는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모후께서 늘 ‘몹시 성격 나빠 보인다’라고 탄식하신 바로 그 미소였다.

    “왜 이런 천 쪼가리를 입힌 건지 당장 말하지 못해요? 여긴 어디고! 나는 왜, 왜 여기에 있고. 다, 다리는 왜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건지. 당신은 누군지! 말해!”

    늘 차분하던 낯이 깨진 건 처음이었다. 시뻘건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기라도 한 듯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피가 몰려 붉어진 두 뺨이 괜스레 달아 보여 한 입 깨물어 보고 싶었으나 라히크는 참아 주기로 하였다.

    그래, 어쩌면 이 얼굴이 보고 싶어서 부러 신성어로 대답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휘둥그레 떠진 눈가엔 기어코 배신감 어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러나 결코 떨어트리지는 않는 게 이 여자의 자존심이었다.

    울며 안겨들면 편할 텐데, 고집이 세기도 하지.

    라히크는 입속으로 혀를 차고는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어딜 가는…… 꺄악!”

    그들이 나오는 줄 알고 가마를 메려던 남자 견습 신관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라히크는 이미 레그리아를 안아 든 채 복도 끝에 이르러 있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신성 기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축복이다.

    가마를 타고 어쩌고 할 바에 그가 안아 지하로 내려가는 쪽이 훨씬 빨랐다.

    “이, 이 파렴치한!”

    그가 언어를 알아듣는다는 걸 알게 된 뒤, 레그리아는 연한 빛깔의 입술을 열어 몇 번이고 욕을 해댔다.

    “불한당! 납치범! 나쁜 놈!”

    헌데 한다는 욕이 고작 일곱 살짜리 어린애보다 더 나을 것도 없어 웃음이 터질 뻔하지 않겠는가.

    [다 했나.]

    거룩의 샘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미세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놓은 라히크는 레그리아가 넘어지지 않도록 제 팔로 단단히 고정한 뒤 상체를 슬쩍 숙여 얼굴을 살폈다.

    오는 동안 울어 댔는지, 아니면 눈물을 어디론가 떨궜는지 눈가만 붉어졌을 뿐.

    레그리아는 더 울지 않고 있었다.

    그건 좋은 신호다.

    라히크는 시도 때도 없이 울어 대는 것은 인간이든 짐승이든 혐오하였으니.

    “여기는 거룩의 샘이라 불리는 곳이다.”

    “저 좋을 때만 알아듣게 말하지.”

    “믿어라. 여기에서 밤을 보내고 나면 내일 아침부터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테니.”

    “심지어 유창하게 할 줄 아네…?”

    이를 박박 갈며 저를 노려본들 무서울 리가 있나.

    라히크는 레그리아의 허벅다리 아래로 팔을 넣어 편하게 안아 들었다. 최소한 들쳐 업히는 것보다는 나았는지 레그리아는 저항하지 않았다.

    어쩌면 말이 통한다는 안도감 때문에 마음을 놓은 걸지도 모르겠다.

    라히크는 날 때부터 정치질에 재능이 있는 자였다. 상대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거나 구슬리는 건 숨 쉬듯 쉬운 일.

    그의 모든 말에는 당장 보이지 않는 뜻이 있으며 한 마디 한 마디를 계산하여 내뱉는 게 당연한 삶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머리를 거쳐 판단을 내리지 않고 본능적으로 입을 벌렸다.

    분명 레그리아를 좀 더 고립하려고 했었는데. 누구와도 말이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워할 때쯤. 그때가 되어 말을 건네고자 하였다.

    그녀가 확실하게 그에게만 의존하게끔 만들기 위해서.

    그런데.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건데? 뭘 하면 내가 묻는 것들에 답을 줄 건데?”

    화가 난 게 확실한 옆얼굴을 보던 라히크는 이 딱하고 연약한 생물에게 처음으로 연민 비슷한 것을 느꼈다.

    하필이면 로에르멜의 딸에게 깃들어서는 편할 수 있었던 삶이 꼬였구나.

    [몸을 담그고 모든 불결함을 씻어 내릴 것이다.]

    “씻다? 여기서? 누가? 내가?”

    [같이.]

    저를 가리키는 건방진 손가락을 꺾는 대신 부드럽게 감아쥔 그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것을 밀어 넣어 깍지를 꼈다.

    어차피 이토록 가벼운 계집 하나 안는 것은 한 팔로도 충분하였으니.

    “잠시만, 이거 온천이잖아. 여기에 설마 같이 들어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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