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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134)
  • 12화

    “지금 중요한 건 퀴제가 내놓으라 떼쓰는 돈이 아니라, 누가 의뢰를 할 빌미를 주었는지다.”

    목에서 개목걸이를 뺀 라히크가 에오스에게 그것을 대충 넘겼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든 에오스는 이내 그의 의관을 정리해주었다.

    “예상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하도 많아서 곤란한데.”

    라히크가 턱을 쓸었다.

    비트리체 로에르멜은 적이 많다.

    원한을 가진 자를 하나하나 세다간 끝도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앙심을 품은 자들을 줄 세우면 테피론 강을 한 바퀴 두를 수도 있을 거란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늦든 빠르든 이런 일이 한 번은 일어났을 터였다.

    그녀의 몸에 신성인이 깃들었음이 알려진다면.

    “에오스. 이 일은 모스그라토 대공을 따르는 자의 소행으로 소문을 내라. 여관장들과 견습 신관은 물론이고 모두가 그렇게 떠들고 믿도록.”

    “명 받잡습니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최대한 이쪽에 유리하게 판을 짠다.”

    거룩의 샘 의식 전까지는 결코 새어나가서는 안 될 정보다. 애초에 레그리아의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시킨 것 또한 이 일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서였다.

    현재까지 로에르멜의 딸이 신성인이 되었음을 아는 건 대주교와 견습 신관. 여관장들.

    그리고 황제와 로에르멜 공작이 있다.

    대주교는 그를 거스를 간이 없고 견습 신관이나 여관장들은 외부와의 연락 수단이 일체 존재하지 않으니 언뜻 보면 쥐새끼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래, 언뜻 보면.

    “아까 레그리아에게 대거리를 하던 계집이 있다 하였지.”

    “예. 이름은 아니타. 견습 신관 전체를 이끌고 있는 반장이며 출세에 강한 욕심이 있는 성품이라 합니다. 실제로 신학 수업 성적은 늘 우수하다고 하더군요.”

    “미행을 붙여. 그렇게까지 건방지게 굴 수 있는 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벨리그레엄 제국을 가르는 세 개의 권력.

    그를 주축으로 가을 숲의 레스노 후작가가 강력히 지지하고 있는 황태자파.

    여름 울타리의 로에르멜 공작가를 주축으로 하여 겨울 망루의 세비레이크 후작가가 속한 중립파.

    그리고 눈엣가시 같은 봄 늪이 있다.

    봄 늪의 모스그라토 대공가.

    현 황제의 동생. 그에게는 숙부 되는 자.

    지지 세력이 약하되 모스그라토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충분히 강력했기에 좌시할 수 없는 무리였다.

    황제파도 대공파도 모두 중립파의 귀족들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로에르멜은 가장 탐나는 치즈나 다름없었다.

    야망이 강한 데다 의뭉스럽기 짝이 없는 공작은 지금까지 어느 세력의 산하에 들어갈지 정하지 않고 있었으나 딸이 황태자비가 되는 이상 앞으로의 행보는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

    그걸 막고자 한 누군가의 소행이겠지.

    명분상으로는 모스그라토일 확률이 높을 테지만 대공이 그럴 만한 성품이었더라면 저리 지지 세력 하나 없이 영지에 처박혀 살지는 않을 터.

    ‘암살을 의뢰한 범인은 중립파 중에 있다. 중립파가 분열하여 일부가 황태자파에 넘어가는 걸 저어한 자의 소행으로 보는 게 맞다.’

    애초에 로에르멜 공작은 황태자파나 모스그라토 대공파로 넘어갈 의향이 없었다. 로에르멜을 주축으로 하여 중립파의 규모를 키우려 했지.

    그러니 제 딸을 같은 중립파의 영식과 일찍이 짝지어 준 게 아니던가.

    헌데 로에르멜의 딸이 황태자비가 되어 버리면 중립파 전체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이건 공작을 따르며 제 잇속을 챙기는 이들 중 누군가의 독단 행동으로 보는 게 옳았다.

    “전하, 그리고…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때, 에오스가 그를 조심스레 불러왔다. 이걸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다.

    라히크는 눈썹을 까딱이며 잠시 기다려주었다.

    “아까… 레그리아 님께서 벨리그레엄어를 유창히 쓰셨습니다.”

    “뭐라?”

    “그리고 대거리 하던 그 어린 견습 신관을 스스로 벌하셨습니다.”

    “그 여자가?”

    “예. 무엄한 말이오나 꼭… 비트리체 님을 뵙는 듯 하였습니다.”

    라히크의 구두가 복도 한 가운데서 우뚝 멈춰 섰다.

    잠시 턱을 쓸며 생각을 잇던 그는 해당 건에 대해 로에르멜에 직접 가서 알아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즈, 즈어어어언하! 오셨습니까아아아!”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주교가 바닥에 오체투지 한 채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신황청 내에서 예비 황태자비가 암살된다면 그 책임은 모두 대주교가 물어야 한다. 돈방석에 앉아 희희낙락하다가 걷어차여 지옥에 떨어지게 생겼으니 두렵기도 할 테지.

    이 사건으로 대주교는 더더욱 몸을 사릴 테니 신황청 쪽을 확실히 눌러 놓을 수 있기는 하였다.

    불쾌한 것은 만약 공작이 여기까지 계산을 한 거라면 공작에게 놀아나는 중이나 다름없다는 거다.

    “죽여 주시옵소서어어어!”

    “죽여 달라?”

    “저의 불찰이옵니다. 당장 병력을 늘려 주변 경계를 강화하고 누구도 함부로 오갈 수 없도록 하겠사옵니다! 거룩의 샘 의식을 며칠 앞두고 이게 무슨 일인지, 실로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쿵, 쿵!

    대주교가 카펫에 머리를 박았다. 하지만 박아 대는 부분이 유독 다른 곳보다 부풀어 있는 걸 보니 아프지 않도록 안에 미리 솜이라도 채워둔 모양이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라히크는 서늘한 음성으로 단 한 마디만을 명했다. 이 멍청한 것과는 더 말을 섞고 싶지도 아니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모르말라 가루를 꺼내 샘에 풀어라. 예비 황태자비가 충격을 크게 받았으니 일부는 지금 가져가겠다. 오늘부터 의식 날까지 매일 목욕 때마다 쓰게 해야겠어.”

    “……예?”

    “반문은 허하지 않겠다. 지금 당장 폐하께 말씀드려 네 놈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 죄인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만.”

    “아, 아닙니다! 드, 드려야지요. 암, 드려야지요! 그런데 값은…….”

    “네 목을 치면 값이 되겠군.”

    “헉! 아닙니다!!! 무, 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아니, 바치겠사옵니다!”

    대주교가 허둥거리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원하는 바를 이룬 라히크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신황청은 해당 약초가 신성의 숲에서만 자란다는 것을 빌미로 10kg마다 열 배 무게의 황금을 요구해 왔다.

    한 번은 버릇을 잡을 생각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해결이 되었다.

    레그리아가 신황청 부지 내에서 습격을 받은 것 하나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소득이 있으니 기분이 좋아야 할 텐데 실로 좆같군.’

    레그리아.

    언제나 무표정으로, 이따금 그를 향해 귀찮음에 가까운 기색을 내보이곤 하던 그 시건방진 태도에 파랑이 일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완전한 의존은 오직 그녀 스스로 그의 손에 쥐여 주어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비밀리에 로에르멜에 다녀오겠다. 의식 날 돌아오겠군.”

    “다녀오십시오, 전하.”

    “그날까지 레그리아가 침실 밖을 나가는 일은 없도록 하라.”

    라히크의 입매가 무섭게도 굳었다.

    * * *

    아침에 일어났을 때 라히크는 없었다. 그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며칠. 그게 환상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맥없는 기대가 들 때쯤.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졌다.

    “오늘도 라히크는 오지 않아?”

    [곧 오실 거예요. 하지만 오늘 뵈실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레그리아 님.]

    “그래, 무슨 말인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밖엔 못 나가는구나.”

    레그리아는 미련 어린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첫 외출이 마지막 외출이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라히크가 바빠서 오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질 않고 에오스는 허락 없이 그녀를 나가게 해 줄 인물이 아니다.

    ‘또 나갔다가 같은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젖은 풀 위로 떨어지던 붉은 피를 떠올리던 레그리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툭. 오래된 나무 창틀에 뺨을 기대고 말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찾아드는 건 무기력이었다.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평화롭다. 먹고, 자고, 에오스를 졸라 몇 가지 단어를 추가적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실로 아무것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는 무리가 이 건물 안팎에 있음을 알게 된 이상 함부로 나다녀서 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설명을 요구해도 알아듣지도 못하니 대체 뭘 더 할 수 있을까.

    창틀은 전나무로 만들어진 건지 이렇게 오래되었으면서도 미약한 향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까슬하게 일어난 부분을 쓸던 그녀의 동공이 힘없이 굴렀다.

    에오스는 걱정이 됐는지 어제 셀린을 데려와 무사한 것을 보여 주었다. 푸들 소녀의 이름을 다시 알게 된 레그리아는 과자를 먹이고 돌려보냈다. 하도 무기력하여 무엇에도 나서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 애를 괴롭히던 아이들은 그날 많이 죽었을 테니…….

    어?

    “라히크!”

    너무 놀라서 서지 못한다는 사실도 잊고 벌떡 일어설 뻔했다.

    숲을 헤치고 뜰에 나타난 건 분명 라히크였다.

    그날 이후로 아예 오질 않아 야속하다 싶었는데 얼굴을 보니 반가움이 훅 밀려온다.

    햇살 아래 서 있는 라히크는 마치 그 모든 태양 볕을 이끌고 다니는 남자 같았다.

    “레그리아.”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실내에서도 잘생겼다는 건 당연하였으나 금빛 햇살을 온몸에 받고 있는 얼굴은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레그리아 님, 오늘입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라히크의 모습을 좇는 그녀에게 에오스가 정중하게 읊조렸다.

    [거룩의 샘 의식을 무사히 치르게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제 의식복을 고르실 시간입니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내밀기에 고개를 돌렸는데… 에오스가 들고 있는 건 그때 그 란제리였다.

    * * *

    ……아무리 그래도 이걸 진짜 입힐 줄은 몰랐는데.

    이번만큼은 거부해도 소용없다는 듯 에오스는 너무나 단호한 표정을 했다.

    노을이 지도록 이어진 고집 싸움에서 진 것은 결국 레그리아 쪽이었다.

    흰 피부 위를 슬쩍 가릴 듯 말 듯 한 란제리를 입은 그녀는 지금 제 꼴이 너무나 우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거, 동생 방에서나 많이 보았지 제가 입을 거라곤 상상도 못해 봤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분주한 느낌이지?’

    오늘따라 복도를 오가는 발소리가 여럿 들린다. 이건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징조였다.

    [가마에 오르시면 샘이 있는 곳까지 가시게 될 겁니다.]

    불안해하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유추해 보고 있는데 문을 활짝 연 에오스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자세를 낮추고 바깥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나가라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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