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34)
  • 11화

    “라히, 크.”

    [그래.]

    “라히크, 이게. 이게 다… 어떻게 된 건지.”

    [되었다. 생각하지 마라. 넌 나를 의지하기만 하면 되니까.]

    손가락 끝이 애처롭게 떨렸다. 라히크는 그녀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어 능숙하게 들어 안았다.

    따뜻하다. 레그리아는 저도 모르게 라히크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그건 살기 위한 본능적인 발버둥 같은 것이었다.

    추워서, 너무 추워서.

    [가자.]

    그래서 레그리아는 라히크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마셔라, 안정이 될 거다.]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열이 들불처럼 들끓었다. 너무 더웠는데 동시에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춥기도 했다.

    이불 속에서 이를 사려 물고 있던 레그리아는 라히크가 내미는 차의 냄새를 맡곤 눈을 크게 떴다. 꿀차다. 지금껏 주곤 했던 맛없는 차와는 질적으로 다른, 너무나 달콤한 향에 얼어붙고 부서졌던 마음 어귀가 어루만져지는 기분이었다.

    [옳지.]

    라히크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며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뒤, 나무 컵을 다시 가져갔다. 레그리아는 힘없이 손을 늘어트리며 초조한 눈으로 커튼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에오스가 덧창도 닫아 두었다지만 언제 덜컹하고 열릴지 모른다. 그리고 또 그런 놈들이 찾아올지 몰랐다.

    ‘불안해.’

    눈을 감고 있던 뜨고 있던 아까의 상황이 계속 재생된다. 고장 난 것처럼 그 외의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진정한 것 같으니 가 보겠다.]

    라히크가 무어라 하더니 몸을 돌렸다. 레그리아는 파랗게 질린 채로 걸어 나가는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자들을 상대한 라히크. 그러고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지. 어떻게 진검을 쓸 수 있는 건지, 분명 죽였는데. 누군가를 죽이고도 어찌 그리 태연할 수 있는 건지.

    모든 걸 묻고 싶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법처럼 아까 그녀의 몸을 지배했던 누군가가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또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레그리아는 문고리까지 잡은 라히크를 부르고 말았다.

    “저기, 라히크.”

    우뚝. 한 번의 부름이었을 뿐인데 그가 멈춰 섰다. 그걸 보며 망설이던 그녀는 끝내 입을 열었다.

    오늘은, 혼자 있기가 너무 힘들다. 내일부터는 추스를 테니까….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너무 우습게도 여전히 분홍색 개목걸이가 그에게 달려 있었다. 그녀의 것은 풀었는데 그는 여전히 차고 있는 것이다.

    말이 되는 말은 아니지만 그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든다. 이 모든 게 다 우스운 장난이나 연극 같이 느껴져서.

    [잘하였다. 앞으로도 그리하거라.]

    “읏.”

    [착하지.]

    문고리를 놓은 라히크가 느긋하게 걸어 침대 한쪽에 앉았다. 근육질의 상체를 슬쩍 숙인 채 저를 훑어 내리는 눈길이 금세 불편을 야기했으나 그래도 레그리아는 그에게 떠나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부른 것 외에 안겨든다거나 손을 잡는다거나 하는 일 역시 없었지…만?

    “뭐, 뭐 하는 거야!”

    [재워 주는 거다. 음흉한 생각 하기는.]

    라히크가 그녀의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침대는 넓었고 몸을 부딪칠 일은 없다지만 지나치게 가깝다. 이건 움직일 수가 없어서 안겨 다닌 것과는 다르지 않나.

    “저리 가!”

    [아직 큰 소리를 낼 힘이 있다니. 기세가 좋군.]

    “아…!”

    [자거라. 널 해칠 자는 누구도 없으니.]

    라히크의 몸이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에게 딱 달라붙었다. 그가 가진 온기가 차게 식은 레그리아의 몸을 데운다.

    레그리아는 몇 번 더 반항하였으나 그러다 결국 포기했다.

    온기는 싫지 않다.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누군가와 같이 자 본 적 없기에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싫지가 않아.

    두 팔을 꽉 잡고 쓸어내리고 있자니 라히크가 단단한 팔로 허리를 둘러 안아왔다. 그에게 푹 안긴 자세로 잠이 올까 싶긴 했으나 의외로 몇 분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오늘… 고마워. 구해 줘서….”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는 하고 싶었다.

    레그리아는 제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바르작거리며 속삭임을 이어 나갔다.

    “잘 자…….”

    [푹 자거라.]

    목덜미에 메마른 입술이 닿았다. 움찔하긴 했지만 그녀는 굳이 밀어내지 않고 그냥 두었다.

    수마가 견딜 수 없이 거세게 몰려왔다.

    ‘라히크는 좀 정신이 이상한 것 같고, 어딘가 미친 것 같지만.’

    그래도 그녀를 구해 준 사람이다. 이렇게 같은 자리에 누워서도 손을 가슴이나 아래로 옮기지 않는 걸 보면 본의가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다.

    지금 그녀는 너무나 약해져 있는데 그걸 파고들어 나쁜 짓을 하려 들지 않으니까.

    ‘하긴, 라히크가 여자에 굶주렸을 것 같지 않기도 했어.’

    그 란제리 같은 것들은 다른 여자들에게 줄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제 것이라고 혼자 착각한 것뿐이겠지. 상식적으로 라히크가 소통도 안 되는 그녀에게 왜 그 많은 것들을 안겨 준단 말인가. 애인도 아닌데.

    레그리아는 절대 약자였다.

    오늘 그 사실을 끔찍하리만치 제대로 깨달았다.

    그런데도 라히크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그렇게까지 무도하게 굴지는 않았지.

    ‘다 믿고 기댈 순 없어.’

    그렇지만… 라히크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믿음 이전에 라히크는 그녀의 살길이었다.

    이 모든 소란 끝에 남은 선명한 사실 하나.

    ‘나는 라히크 없이, 여기서 살 수 없어.’

    * * *

    색, 새액.

    고요해진 방 안에 괴로운 숨소리만이 퍼져나갔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앓는 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졌다.

    라히크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있는 그녀의 미간을 문질러 펴주고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졸음기 따위는 전혀 없는 얼굴은 얇은 막을 하나 씌운 듯 냉랭했다.

    “시체는.”

    “퀴제에서 회수인이 왔습니다.”

    “신전 측 피해는.”

    “확인하여 보니 견습 신관들 중에 죽은 자는 없습니다. 심히 다치기는 하였으나 회복이 불가능할 수준은 아닙니다.”

    “과연 그 퀴제답군. 결코 공짜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다지.”

    “예, 전하. 아무래도 목표는 레그리아 님이었던 듯합니다.”

    복도를 걸으며 라히크는 에오스에게 보고를 받았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대주교가 뜬눈으로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 지금쯤 엉덩이에 불이 난 채로 덜덜 떨고 있을 얼굴을 떠올리니 조소가 샜다.

    “퀴제의 회수인이 죽은 소속 암살자에 대한 보상금 요구서를 두고 갔습니다.”

    “주어라.”

    라히크는 간결히 답하며 에오스가 꺼내드는 양피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퀴제>.

    그건 제국 벨리그레엄의 뒷골목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암살단이었다. 무릇 암살을 업으로 삼는 단체라면 음지에 은밀히 숨겨져 있기 마련인데 현 퀴제의 주인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단체를 양지로 올려 이렇듯 뻔뻔하게 영업을 하였지.

    그들은 철저하게 죽여 달라는 의뢰를 받은 목표물만을 노렸고 그 외는 다치게는 해도 절대 목숨을 앗지 않았다.

    헌데 퀴제의 가장 어이없는 점은 타 암살 단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업을 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암살 의뢰를 하면 의뢰금을 받았고, 성공 시에는 성공 추가금을 받았다.

    거기까지는 다른 단체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러나 의뢰 실패 시, 퀴제에 소속된 암살자들의 목숨값을 계산해 암살자를 처리한 자에게 직접 받아 간다는 점이 실로 악랄했다.

    그게 다 현재 퀴제를 거머쥐고 있는 주인이 수전노이기 때문이다.

    ‘그놈은 그걸 직원 복지라고 불렀지.’

    돈이라면 동전 하나를 줍기 위해서라도 오물 바닥에서 구를 자. 돈 안 되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 천박한 망아지 같은 놈.

    퀴제의 주인인 가볍고 징그러운 새끼를 떠올리던 라히크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돈을 주지 않으면 딱 죽지 않을 만큼만 귀찮게 따라붙을 거다. 돈이 걸리면 악독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으니 주어 버리는 게 낫다.”

    퀴제의 그 말도 안 되는 영업 방식이 통하는 이유는 유능한 암살단은 귀족의 삶에 필수 불가결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제국 내의 세력이 분리되어 격돌을 앞두고 있을 때는 더욱더.

    암살에 실패하면 보통의 암살단은 와해를 각오해야 하나 퀴제는 다르다. 막대한 부와 강력한 통제력으로 집단 전체가 한 몸처럼 움직이니까. 그런 점이 암흑세계에서 그들의 그림자를 더더욱 키우는 양분이 되었다.

    처음엔 퀴제의 비즈니스 방식에 대해 분해하며 항의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지독하게 뒤쫓기며 피폐한 삶을 근근이 이어 나가다 보니 모두 맞서는 걸 포기해 버렸다. 제일 오래 버틴 자가 5년 정도였던가.

    물론 퀴제는 그 5년간 죽은 조직원의 목숨값과 미행하느라 들었던 모든 돈에 이자를 35%씩이나 붙여 받아냈다.

    암살할 수 있는 실력이면 귀한 물건을 훔쳐 가면 그만인데, 그들은 도둑이 아니기에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던가.

    대신 하녀로, 하인으로, 정원사로, 마부로, 길거리 상인으로, 떠돌이 음유시인으로. 변장에 변장을 거듭하여 나타나 돈을 요구했다.

    그토록 악착같은 퀴제의 주인은, 라히크의 친애하는 이복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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