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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134)

10화

이건, 그녀가 하려던 말과 비슷했지만 말투가 완전히 달랐다.

‘의미가, 이해가 돼?’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기묘한 일에 레그리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소녀들도 마찬가지인지 긴장감이 대기를 타고 뻗어져 나갔다.

“빨리 안 튀어와? 너. 내가 얼굴 기억 못할 줄 알지. 똑바로 서.”

의지를 벗어난 손가락이 길게 뻗어지더니 매부리코 소녀를 향해 까딱였다. 몹시도 거만한 자세로.

[아, 어떡해! 신성인이 아닌가 봐!]

[저 말투는… 미친개, 아니, 영애잖아!]

[어떻게 된 거야, 셀린! 네가 분명 로에르멜 영애가 신성인의 선택을 받았다며!]

작은 소동이 일었다.

공포에 질린 새파란 얼굴들이 이제는 하나같이 매부리코 소녀를 향하고 있었다. 네가 대장이니 얼른 가라는 듯이.

[오늘 셀린이 제대로 약초를 캐지 못하고 몇 개나 손상시켰기 때문에 벌을 준 것뿐이에요. 전 반장이니 벌을 줄 권리가 있어요.]

매부리코 소녀가 가슴을 쭉 펴더니 가시 돋친 어조로 무어라 했다. 그러더니 그녀의 앞에 와서 서서도 뻣뻣한 목을 숙이지 않으려 했다.

철썩.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손바닥에 작열감이 일더니 소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불시에 얻어맞은 소녀는 이를 갈더니 눈에 불을 켰다.

“건방지기도 해라.”

피식.

분명 제 것이지만 제 것 같지 않은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그러더니 손이 또다시 멋대로 움직였다.

철썩!

아까보다 더 아프겠다 싶을 정도로 거센 소리가 났다. 온통 젖은 채인지라 마찰력이 좋은 탓이다. 후려 맞은 매부리코 소녀의 뺨은 금세 부풀어 올랐다.

‘아냐.’

레그리아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그녀가 하려던 게 아니다. 때릴 생각 같은 건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제발 선처를 베풀어 주세요!]

[함부로 입을 놀려서 죄송해요…!]

[시, 신성인이 아니신 줄 몰랐어요. 진짜예요!]

몰려온 소녀, 소년들이 아우성을 쳤다.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휙. 또 손이 치켜 올라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이 그녀의 손목을 휘감아 당기는 듯한 불쾌한 기분에 욱 헛구역질이 인다.

지금 그녀의 몸을 삐걱삐걱 움직이고 있는 건 분명 다른 존재였다.

“너희에게 주어진 임무가 부당하다 느꼈다면 지시한 자를 들이받아야지. 만만하다 싶은 쪽을 후벼 파는 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이것 또한 몹시 충격적인 일이었다. 분명 그녀의 머릿속으로 문장의 의미가 떠올랐으나 입 밖으로 튀어 나간 건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였다. 라히크가 쓰고 에오스가 쓰는 언어.

너무 놀라서 기절할 것 같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는 듯했다. 놀라고 싶은 그녀와 화를 내고 싶은 안면 근육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는 탓에 피부가 당겨오기까지 한다.

미쳐 버릴 것 같은데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줄 이도 없었다.

입을 다물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입술은 강제로 벌어져 말을 쏟아냈다.

“전하께 말씀드려. 건방진 자들은 내가 직접 교육했다고.”

[네, 레그리아 님.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뚝.

언제 왔는지 익숙한 에오스의 대답과 동시에 무언가가 끊겨 나간 기분이 들었다. 무력감과 탈력감이 온몸을 휩싼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그녀를 부축한 에오스가 찬바람이 이는 음성으로 날카롭게 외쳤다.

[뭣들 하는 짓이냐! 어디 감히 신성인께 말을 거는 거지? 너희가 그럴 주제가 되었던가?]

[그게…….]

[듣기 싫다! 오늘 이 일은 대주교께 알리겠다. 너희 중 그 누구도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감히 귀하신 분의 눈을 어지럽히다니, 당장 무릎 꿇지 못할까!]

서릿발 같은 호통이었다. 그녀조차 오싹해질 정도로 화를 내는 모습에 레그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푸들 소녀를 훑었다. 아까부터 저러고 있어서 체온이 많이 떨어졌을 텐데. 이제 보니 왜 아까 저 아이가 눈에 확 들어왔는지 잘 알겠다. 다른 아이들은 우비 같은 걸 입고 있는데 저 애만 아무것도 걸치지 못했다.

저것도 일종의 심술이었겠지.

레그리아는 빗속에서 무릎 꿇는 아이들을 착잡하게 바라보다가 에오스의 팔을 가만히 흔들었다.

“저 애, 내게 데려와 주면 안 될까?”

[네, 레그리아 님.]

“저 애. 혼자 우비도 못 걸치고 있는 아이 말이야.”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던 에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셀린. 귀하신 분께서 너를 부르신다. 가까이 와라.]

[네, 네! 아, 알겠습니다.]

푸들 소녀가 황급히 일어서더니 비틀거렸다. 다리에 쥐가 난 탓이리라.

반면, 다른 아이들은 다 같이 꿇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레그리아는 푸들 소녀의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 주고는 에오스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제 그만 하고 다들 들여보내는 게 어떻겠느냐는 신호였다.

그녀에게 욕을 한 건 전혀 화가 나지도 않았고, 어쨌든 누군가가 제 몸을 조종하여 때리기까지 했으니 되었다. 여기서 일을 마무리 지었으면 한다. 다들 저 빗속에 오래 있어서 감기에 걸리기 직전일 텐데.

‘게다가… 너무 피곤해.’

방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일에 휘말렸다.

아마 그녀에 대해 안 좋은 여론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원해서 이곳에 있는 것도 아닌 그녀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들리는 이상한 목소리. 이상해진 머리 색. 이상해진 다리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세계…….’

자꾸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가정이 머릿속을 배회한다. 그걸 하나의 생각으로 만들어내지 않는 건 그러면 그 생각에 사로잡힐까 봐.

이건 내 몸이 아니다.

하나 끝내 생각을 해 버리고 말았다. 생각에 고삐를 달 수는 없으니.

‘미칠 것, 같아. 진심으로.’

탁. 에오스의 단단한 손이 그녀를 잡았다.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급히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레그리아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 알아듣지를 못한다.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이게 다 뭔지, 누가 좀 알려 줬으면. 다른 세계래도 믿겠다고, 외계인에게 잡혀 있는 거라고 해도 그렇구나라고 할 테니까. 제발 알려 줘!’

열 개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붉은 머리칼이 한 움큼 와락 잡혔다. 오늘은 자극이 너무 심했다. 참아 넘길 수 있는 것도 한두 가지 정도까지지.

레그리아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못 견디겠어. 못 견디겠……!

그때였다.

[꺄아아악!]

촤아악!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오늘 일어난 그 어떤 사건보다도 더욱 비현실적인 광경이 시야를 어지러이 물들였다.

저건 또, 뭐지?

[도망쳐!]

[뭐야! 왜 저러는 거야!]

[살려 주세요!!!]

새빨간 피가 물안개처럼 번져나간다. 그러다 바닥에 후드득 떨어져 풀을 적색으로 물들였다. 아우성, 비명. 비명과 아우성. 그리고 단말마. 혈향.

[아아아악!]

레그리아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상황을 깨달은 에오스가 찻주전자를 무기처럼 들고 제 앞을 가로막았으나 안 보이는 건 아니었다. 아니, 시야는 반을 가려도 소리는 가릴 수가 없지 않나.

[어, 어, 어떡해! 치, 침입자다! 침입, 자! 피하셔야 해요. 시, 신성인을 노리고 오, 온 거예요!]

푸들 소녀가 그녀를 안아 들어 보려고 애를 쓰다가 등 뒤를 보고 흠칫 놀랐다. 쿠키가 담겨 있던 3단 트레이에서 손대지 않은 디저트가 후드득 쏟아진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망가진 것들을 밟다가 미끄러질 뻔한 소녀는 이내 트레이를 움켜쥐고 막아섰다.

“하, 하하. 아하하.”

검은 옷을 입은 학살자의 숫자는 일곱 명이었다. 도망치는 아이들의 등을 무심하게 베어내며 그녀를 향해 똑바로 다가온다. 칼에 묻은 피는 붉었으나 별것도 아닌 것처럼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이 모든 게 아주 느리고 긴 과정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고작 해 봐야 몇 초 정도에 일어난 일.

레그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충격을 심하게 받으면 몸이 굳는다던가, 정신이 멈춘다던가.

방금까지 살아있던 생명의 숨이 꺼지는 걸 가장 안전한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는 건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덧 고개를 제자리에 두지 못한 채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쨍그랑!

무차별적인 학살자가 던진 단검이 그녀의 발치에 와서 박혔다. 본래라면 가슴을 노리고 던진 것이나 에오스가 찻주전자로 막아 경로를 비튼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실 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분명 오실 테니 걱정 마십시오.]

에오스의 얼굴이 낯설었다. 꼭 군인처럼 무감정하게 가라앉은 표정.

거멓게 죽은 눈으로 상황을 더듬던 레그리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푸들 소녀를 당겨와 안았다.

[어엇!]

“여기 있어. 너라도, 너라도 지켜 줄 테니까.”

죽었다. 많이 죽었다.

그녀의 근처에 불려와 있었던 매부리코 소녀는 창백해진 채로 기둥 뒤에 웅크리고 있었고, 간신히 도망친 아이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다친, 피가 흐르는. 피가 온통… 흘러 적신.

‘죽는다!’

놈들이 발소리조차 없이 동시에 달려드는 장면이 느리게, 느리게 보였다. 두 눈을 꾹 눌러 감은 레그리아는 그 죽음이란 것이 제 목을 찌르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해서 이 상황이 끝나고 다들 살 수 있다면, 그래도 좋았다. 이제 지쳤어. 지쳤으니까.

“…….”

쏴아아아.

빗소리가 더더욱 굵어졌다.

죽었다면 저런 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

하지만 분명 다가오는 걸 봤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간신히 눈을 뜬 그녀는 이번에도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도했다.

한 사내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동시에 달려드는 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베어나간다. 서걱, 뼈가 썰리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었다. 레그리아는 이제 추위를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뱀처럼 기어오른다.

콰득, 제게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자의 목을 비튼 라히크는 마지막 하나마저 처리한 뒤 검을 늘어트렸다.

쓰러져 꿈틀거리는 육신들 사이에서 홀로 선 그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모습으로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목에는 여전히, 그녀가 걸어 주었던 분홍색 개목걸이를 찬 채로.

그 광경은 우스꽝스러웠고 믿기지 않았으나… 현실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뼈가 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레그리아.”

칼을 털어내 검집에 꽂은 라히크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는 동안 에오스가 그녀의 품에서 소녀를 빼내어 갔다.

[충격을 크게 받은 모양이구나. 가엾게도.]

“…….”

[쉬이. 오늘은 울어도 좋다. 달래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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