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34)
  • 9화

    * * *

    ‘혹시 여긴 도자기나 유리가 없는 건가?’

    약간의 소란 끝에 녹색 드레스를 입고 정원으로 나온 레그리아는 아무도 없는 돌 테이블 앞에 혼자 앉아 있는 중이었다. 목에는 여전히 개목걸이를 차고, 뚱한 표정으로.

    라히크는 그녀의 항의에 웃음을 터트렸는데 그 상황 속에서 웃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그러더니 개목걸이를 찬 채로 나갔다. 그녀의 것 또한 풀어 주지 않았고.

    그래도 라히크도 똑같은 꼴이 되니 덜 억울하기는 하였다.

    ‘비가 계속 내리네….’

    등받이가 있는 의자는 마찬가지로 돌로 이뤄진 재질이라 불편했지만 이게 바깥을 보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에오스가 허리에 받칠 쿠션, 방석, 무릎 담요에 망토까지 다 챙겨주어 그다지 춥지 않기도 했고.

    [전하께서는 대주교와 논의 중에 있어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곧 오실 겁니다.]

    에오스가 그녀에게 뭔가를 전하려고 애를 썼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부디 너무 무거웠다는 욕은 아니었으면 싶었다. 걷지 못하는 그녀를 안아다 날라준 것이 에오스니까.

    처음에는 너무 놀라 버둥거렸는데 다행히도 에오스는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짐짝 좀 얹었다는 투로 사뿐히 걸었을 뿐.

    ‘이제 한 시간쯤 지났나.’

    똑, 똑.

    머리 위에 펼쳐진 지붕을 타고 빗물이 떨어져 내린다. 이 훌륭한 석조 건축물은 중앙의 테이블을 기준으로 아주 웅장한 조각이 양각된 기둥이 사방에 있었고, 그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주두에는 작은 사람들이 새겨져 있고 딱히 화려한 꽃이나 과일 같은 건 없는 걸로 보아 아마도 고딕 양식에 가깝다.

    이곳에 앉으면 한눈에 들어오는 건물 역시 첨탑의 위용이 하도 대단하여 태풍이 불어 닥치면 꺾이진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으니 고딕 양식으로 지어 놓은 건물이 맞긴 하겠지.

    전체적으로 정이 가지 않는 형태다.

    자신이 머물던 공간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된 그녀는 눈가를 찡그렸다.

    돈이란 돈은 다 발라 지은 티가 나는 오래된 성당 비슷한 것. 성당이라고 딱 칭하긴 어려운 게 어느 성당 앞에 이토록 광활한 뜰과 숲이 있단 말인가? 십자가나 고행하는 수도승 같은 조각은 보이지 않기도 하고. 그러면 그냥 성이라는 소리인데…….

    골치 아프다.

    경찰 등의 공권력이나 어떠한 행정력도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가설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었다.

    혹 탈출에 도움 되는 거라도 있을까 하여 꼼꼼히 살폈지만 그런 건 전혀 없는 듯했다. 아직까지는.

    그녀가 확실하게 알게 된 건 성을 중심으로 커다란 나무 하나 없는 넓은 뜰이 둥글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는 전부 다 숲이라는 것뿐이었다.

    [차를 좀 더 드릴까요?]

    “고마워요, 에오스.”

    나무 찻잔에 담겨 있던 물은 이미 다 식어 빠진 지 오래다. 여기서 주는 차는 눈을 감고도 못 먹어줄 맛이었기에 딱히 더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바깥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자 했다. 다시 들어가면 언제 또 나올 수 있게 될지 모르니까.

    [어머, 차가 너무 떫어졌네요. 새로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계시겠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곧 오실 거예요.]

    에오스가 곤란한 기색으로 찻주전자를 내보였다. 그녀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러자 에오스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찻주전자를 든 채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까부터 바라켄이라고 하는 걸 보면 라히크가 나오게 허락했다는 말 같은데.’

    그렇게 홀로 멍하니 생각에 잠기던 그때였다.

    수풀이 바삭거리더니 한 무리의 소녀들이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소녀처럼 예쁘게 생긴 소년들도 한 무리 있었다.

    [아, 진짜 짜증 나!]

    [왜 비 오는 날에도 이걸 캐야 하냔 말이야!]

    [나 봐. 발목까지 다 젖었어.]

    다들 뭘 하고 돌아온 걸까. 저 애들은 여기서 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보고 있자니 뭔가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 소녀들 중 하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주 푹 젖어 보기만 해도 가여운 모습이다.

    테이블에 차려진 건 별 건 없지만 그래도 나눠 먹으면 좋겠다 싶어 손짓을 하려던 레그리아는 문득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주 심술궂은 목소리에 멈칫하고 말았다.

    [하, 이건 뭐야?]

    꼭 말을 알아들어야만 무슨 뜻인지 아는 건 아닐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욕 같은 것. 혹은 선명하게 불타오르는 적의 같은 거나.

    살면서 하도 인종차별을 많이 당했더니 저런 건 익숙하다 못해 간지럽지도 않았다.

    ‘쿠키, 안 줘야지.’

    내밀려던 호의를 다시 거둬들인 레그리아는 담담했다. 딱히 상처받지도 않았고, 제게 쿵쿵거리며 걸어오는 소녀에게 겁을 먹지도 않았다.

    [무슨 개 같은 걸 목에 차고 있는 거야?]

    [우린 이렇게 힘들게… 힘든데. 신성인은 저렇게 편하게……. 밉다, 정말.]

    [얘, 얘들아. 말이 너무 심한 거 같아. 알아들으시면 어쩌려고 그래. 응?]

    대놓고 짜증을 부리는 몇몇 아이들 옆에서 어떤 소녀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말리려고 하는 게 보인다. 가만히 지켜보던 레그리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갈색 곱슬머리에 오동통한 장밋빛 뺨. 순하게 내려간 눈꼬리. 푸들 비슷하게 생긴 소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첫날 눈을 뜨자마자 마주친 아이니까 기억에 남아 있어.

    [야! 보자보자 하니 넌 배알도 없니? 저 멍청한 신성인을 잡아서 출세라도 하겠다 이거야?]

    [그게 아니잖아, 아니타! 저분도 혼란스럽고 힘드실 거야. 야, 약초를 캐는 건 우리 일이고… 저분한테 화, 화풀이하면 안 돼.]

    [말이나 더듬지 마, 머저리야!]

    시끄러워라.

    그녀에게 적의를 표하던 애들 중 가장 기가 세고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녀가 푸들 소녀를 향해 화를 벌컥 냈다. 그러더니 어깨를 팍 밀쳐버리는 게 아닌가.

    ‘저런.’

    푸들 소녀가 가지고 있던 바구니가 바닥을 뒹굴었다. 안에 들었던 풀이 사방으로 쏟아졌으나 누구도 돕지 않는다. 마치 이런 일이 익숙한 것처럼.

    다리가 멀쩡했다면 가서 도와주었을 테지만 그녀는 혼자서 설 수 없었다.

    [저것 봐. 저 신성인은 너한테 관심 따위 코딱지만큼도 없거든? 수발 사제가 될 거란 기대 따위는 버리지 그래? 네깟 게 뭔데 나보다 먼저 사제가 돼?]

    [아, 아니타….]

    [신성인이 목에 뭘 차고 있는지 잘 봐. 개목걸이야. 신성인과 같이 있고 싶거든 너도 똑같아져야겠지? 짖어 봐.]

    무릎 꿇은 푸들 소녀를 둘러싸고 악에 받친 소녀들이 무리를 지어 섰다. 소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팔짱을 낀 채 뒤에서 방관할 뿐.

    그 구도로 레그리아는 너무도 쉽게 누가 저 아이들의 대장인지 알 수 있었다. 푸들 소녀 하나를 괴롭히는 걸로 모두가 결속 중이로구나. 참, 세상은 어찌 이리 똑같은지. 전 세계 어딜 가도 저러한 모습은 늘 있었다.

    인류가 무리 지을 때 가장 필요한 게 공동의 적이라 하던가.

    그러나 인류 단위에서 점점 더 작아질수록 필요한 건 적이 아니라 피해자였다.

    [내, 내가 짖으면… 그러면 그냥 들어가는, 거야. 응? 아니타.]

    [그래, 한 번 짖어 봐. 이 비 오는 데서 제대로 못 짖기만 해봐. 들어가서 어떻게 될지 기대하라고. 언제까지 네가 신성인을 감싸고도나 보자.]

    에오스가 돌아올 때가 됐는데.

    레그리아는 고개 숙인 푸들 소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웬만하면 에오스가 돌아올 때까지 상황이 유지되었으면 한다.

    아마 에오스는 저 아이들이 푸들 소녀를 괴롭힌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그녀에게 욕을 한 건 화를 내겠지.

    주인이 손님이라 인정한 사람을 고용인이 괴롭히는 사건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기 마련이다. 푸들 소녀가 몇 마디 증언을 하기만 해도 규율에 따라 처벌을 받을 터였다.

    ‘그러고 나면 푸들 소녀는 가능한 한 다른 쪽으로 배속을 변경해 주었으면 하는데.’

    같은 곳에 두어 봤자 계속 저런 보복을 당할 테니.

    말이 안 통하긴 해도 오늘 어떻게든 의사소통이 되기도 했으니 한 번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던 그때였다.

    “멍. 멍…!”

    푸들 소녀가, 짖었다.

    살짝 충격을 받은 레그리아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추적거리는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어지고, 꽃 한 송이 없는 너른 뜰에서는 풀 비린내가 물씬 일어난다. 몇몇 소년들은 이 상황이 불편한지 떠나려는 몸짓을 보였으나 소녀들은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한 명의 죄인을 단죄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나마 뒤쪽에 있는 일부 소녀들은 비를 막으려는 듯 머리를 감싸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하며 죄책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으나 딱 한 명. 매부리코를 지닌 금발 소녀만큼은 끝까지 꼼짝도 않고 푸들 소녀가 짖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는 못 봐주겠어.’

    - 씨발, 더는 못 봐주겠네.

    어?

    또다. 또 그녀의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 생각과 거의 동시에.

    그러더니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의지를 벗어났다. 아니, 몸도, 얼굴 근육도, 성대조차 통제를 빼앗겼다.

    누군가에 의해.

    멋대로 입술이 벌어진다. 혀가 움직이고, 목구멍이 울렸다.

    “야. 너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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