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34)
  • 8화

    [입생티나 천은 겉으로 볼 땐 다른 천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아주 튼튼하답니다. 혹시 밟히더라도 찢어질 일이 없지요. 오히려 드레스를 밟아서 수모를 주고자 한 적수를 미끄러지게 만듦으로써 큰 부끄러움을 안겨줄 수 있는! 이를테면 비밀 무기와 같은 것이에요!]

    드레스점의 주인일 여자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내민 옷은 어쨌거나 한 벌이었다. 의사소통이 이뤄진 게 확실하다는 증거에 레그리아는 안도했다.

    [아, 물론 녹색이니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만요. 녹색을 이 정도로 곱게, 그것도 아무런 독성 없이 뽑아낼 수 있는 건 전국에 이 미텐바움 의상실뿐이랍니다! 다른 의상실의 녹색 드레스는 모두 독성이 있어요. 물론 예비 황태자비 전하께서 그러한 싸구려를 걸치실 일은 결코 없지만요.]

    “그래요, 그걸로 할게요.”

    부드러운 녹색 천으로 이루어진, 몸의 곡선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디자인된 드레스는 자질구레한 장식 없이 깔끔하여 취향에 맞았다. 덜 비싸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걸 들이밀까 싶어 레그리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 얼굴만 한 사이즈의 리본이 여러 개 달린 드레스 같은 건 못 입을 것 같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면 몰라도 그녀처럼 어둡고 칙칙한 이에게 저런 건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 정도가 딱 좋다.

    이목을 끌지 않고 과하지도 않은. 다른 것보다는 저렴할 드레스.

    -쯧.

    그때였다.

    레그리아는 갑작스레 귀를 파고드는 혀 차는 소리에 놀라 우뚝 멈춰 섰다.

    이 방 안에는 지금 세 사람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고, 레그리아는 혀를 찬 적 없다.

    ‘하지만 너무 선명해.’

    뭔가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한 투였는데. 잘못 들은 건 아니다. 레그리아는 자신을 향한 경멸이나 한심하다는 듯한 조롱. 그도 아니면 혀를 차는 행위에 익숙했다. 11살 나이부터 들어온 것이 그건데 어찌 착각할까.

    모친께서는 한 번씩 그녀를 불러 연주를 시키셨다.

    마치 그녀의 안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재능의 부스러기라도 찾아보겠다는 양 두 눈을 날카로이 뜨신 채로.

    숨 막히는 상황에서 떨리는 손을 억지로 부여잡아 한 곡을 끝내고 나면 돌아오는 건 늘 저런 소리였다.

    “쯧.”

    그래서 잘못 들을 리 없는 것이다.

    레그리아는 긴장한 채로 아랫입술을 질겅 물다가 제게 다가오는 에오스에게 흔들리는 시선을 보냈다.

    [레그리아 님, 그러면 이번엔 이쪽을 봐주십시오.]

    이제 다 끝났다면 혼자 쉬고 싶은데.

    하지만 그때, 에오스가 천으로 덮여 감춰져 있던 행거를 끌고 왔다. 제 앞에서 천을 벗겨내는데 거기 걸린 것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저, 저게 뭐야?’

    앞섶이 깊게 파여 가슴골이 완전히 드러나는 건 물론이고 얇은 시폰 같은 재질의 천이 허리와 허벅지 부근을 덮고 있다. 중요 부위는 불투명한 천이지만 나머지는 하늘하늘하여 피부가 다 비치는 것이라 도무지 남사스러워 입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잠옷은 평범했잖아. 저런 란제리는 무슨 용도로 내미는 거지?

    [이쪽의 옷은 찬찬히 보시고 골라 주시면 나중에 거룩의 샘에 가실 때 입혀드리겠습니다.]

    에오스가 내게 무어라 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개 목걸이가 곱게 담긴 함에 대한 충격에 이어 이 옷 역시 대단히 그녀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이건 어떠신지요? 샘에 들어가는 것이다 보니 최대한 덜 달라붙을 만한 디자인이 좋다고 들었는데 저도 의식복은 입어본 적이 없어 어떤 게 좋을지….]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오스는 개중 가장 야한 옷을 골라 들이밀었다. 그것도 그다지 자신 없는 어조로.

    결국 그녀는 나머지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흔들 수밖에는 없었다.

    만약 드레스와 란제리, 둘 중 고르라는 의미라면 무조건 전자다. 불편하고 힘겨워도 드레스를 입고 말지, 미쳤다고.

    [음, 그럼 이건 차후에 고르시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지금은 정원에 나가셔야 하오니 외출 준비를 도와드릴게요.]

    연속되는 거절에 지쳤는지 에오스가 한발 물러섰다. 그다음은 환복이었다.

    [팔을 들어 올려 주세요, 네! 그렇게요. 드레스를 입혀 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화장도 해 드리려 합니다.]

    어쩌다 보니 옷을 얻어 입게 되었네.

    한숨짓던 그녀의 귀에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다 끝났나?]

    [예, 황태자 전하.]

    에오스가 입술에 뭔가를 발라주던 걸 놓고 얼른 공손히 물러섰다. 한 겹 문을 사이에 놓고 듣는 음성인데도 뱃속이 어릿한 것 같아 레그리아는 들키지 않기 위해 입매를 눌러 표정을 고정했다. 최대한 무심하게, 무엇도 드러나지 않게.

    제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남자의 목소리가 고막을 녹이는 것처럼 달다 하여 쉽사리 경계를 풀어서는 안 돼.

    방금 그런 변태적인, 태어나 한 번도 입기는커녕 가까이 가 본 적 없는 물건과 옷까지 보았지 않은가.

    [흐음.]

    문가에 기대어 선 라히크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훑어 내렸다. 뜻 모를 목울림을 내면서.

    [역시 별로군.]

    “당신이 사서 입혀 놓곤 마음에 안 드나 봐요.”

    [그런 셈이지. 넌 엉망인 게 더 어울려.]

    라히크의 입매가 비틀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공손하다 못해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이고 있는 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따로 주문한 게 있을 텐데. 그걸 가져와라.]

    [예, 예. 전하. 여기 있습니다.]

    달칵.

    레그리아는 제 앞에 놓이는 함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나뭇결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 테이블 위를 차지한… 개목걸이 다섯 개.

    지금 이걸 끼우겠다는 건가 싶어 기가 탁 막힌 찰나. 어느샌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와 마치 품 안에 가둬놓듯 상체를 숙인 라히크가 흰색 개목걸이를 툭툭 쳤다.

    [잘 어울리겠어.]

    “뭐라고요?”

    [피부가 희니 다른 색도 괜찮겠지만… 내 취향은 이쪽이라.]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라히크가 정신이 나갔다 하더라도, 아닐 거야.

    불안감이 뒤섞인 눈으로 올려다보자 라히크의 입가에 만족감이 진하게 어렸다.

    [그리 보채지 마라. 모두 네 것이니.]

    “잠깐만요. 이건 싫어요. 싫다니…… 흣!”

    따끔한 통증이 인다. 라히크가 그녀의 귓바퀴를 깨문 것이다.

    딸깍.

    그와 동시에 목에 가죽 목걸이가 채워졌다.

    여기엔 거울은 물론이고 유리창조차 없어 아무리 지금 제 모습을 비춰 보고 싶어도 무리다. 레그리아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싶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이게 없이는 나갈 수도 없다. 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냐.]

    에오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포기했다. 그래, 도와줄 리가 없지. 여긴 라히크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이런 걸 하지 않는데 그녀에게만 채운다는 건 확실한 악취미였다. 어쩌면 이제 정말 몸을 강제로 취하겠다는 신호일 지도. 그도 아니면, 여기저기에 내돌려져서 유린당할지도 모른다.

    여태까지는 회복될 때까지 기다린 것뿐이지.

    한번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양손으로 있는 힘껏 목걸이를 당겼으나 그럴수록 더욱 죄어들기만 할 뿐. 손을 뒤로 뻗어 목덜미의 피부가 발갛게 되도록 풀려고 해보았으나 이음새가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풀 수가 없었다.

    [안 되지. 네 몸은 내 것이다. 손상시키지 말라.]

    라히크가 여유롭기 그지없는 손길로 그녀를 말렸다. 그러더니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다정히 넘겨 주는 체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용을 써도 풀리지 않는 목걸이에 레그리아는 이를 악물었다가, 깊은숨을 내뱉으며 몸에서 힘을 뺐다.

    그래, 안 되는 건 안 되겠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하나 더 있다.

    “당신도 해.”

    제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손을 뗀 레그리아는 눈앞에 있는 네 개의 개목걸이 중, 분홍색을 집어 들었다. 자세히 살피니 양쪽으로 잡아당겨 벌리면 떨어지고 채울 때는 딸깍 소리가 나도록 힘을 주어 끼우면 되는 구조인 듯했다.

    “그래. 분홍색 잘 어울리겠네. 나한테 이걸 걸어야겠으면 당신도 걸어.”

    레그리아가 생긋 웃었다. 이걸 목에 건 순간부터 이성이 반절 정도 날아가 존대는 내다 버렸다.

    라히크는 그녀가 뭘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흥미로운 눈빛이었는데, 레그리아는 일단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짓을 했다. 마치 흰색 말고 분홍색으로 바꿔 달라는 듯이 한 손에 든 채로 팔을 뻗자 라히크는 순순히 몸을 숙여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녀는 번개처럼 손을 움직여 라히크의 목에 이 빌어먹을 흉물을 채워 버렸다.

    [세상에!]

    [맙소사, 전하.]

    그런 그녀의 행동에 제일 먼저 비명을 지른 건 드레스점의 주인이었다. 놀란 듯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건 에오스였고.

    하나 레그리아는 그런 둘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라히크를 돌아보며 한 번 더 생긋 웃어 주었다.

    “잘 어울려. 예쁘다, 우리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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