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34)
  • 7화

    견습 신관들의 주요한 임무 중에는 모르말라를 캐 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말려서 가루를 내는 것이 여간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타의 씩씩거림에 기숙사 안은 조용해졌다.

    다들 이성적으로는 신성인을 욕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소환 의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불러들인 신성인은 대대로 황태자비가 되었다. 비주기적으로, 갑작스레 강림하고는 하는 신성인들과는 급이 달랐다.

    그렇지만 하필이면 그 사나운 여자의 몸에 들어갈 건 뭐란 말인가.

    통로인으로 관에 눕혀지기 전 준비 의식 때를 떠올리던 몇몇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오만하고 독한 여자에게 뺨을 맞지 않은 견습 신관을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숨소리 하나만 잘못 내도 어찌나 역정을 내는지.

    이 세상이 모조리 제 발아래에 있다는 것처럼 굴던 무도한 영애다.

    그런데 이상한 건 사제 님들은 물론이고 주교 님들까지도 그 여자에게 쩔쩔매며 기분을 맞추려 들었다.

    여기 있는 견습 신관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신황청 내에서 자란 고아들이다. 아는 거라고는 오직 신황청 내부의 계급뿐. 바깥세상의 신분이나 계급, 평민이 어떻게 대우받는지에 대해서는 알려 줄 이도 가르쳐 줄 자도 없었다.

    애초에 통속 소설이나 신문 같은 것은 반입이 엄금되므로 최소한 부제 급이 되기 전까지는 스스로 현실을 배워 나갈 창구조차 없음이다.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건 대주교 님이고 그다음으로 무서운 건 기숙사 사감 사제님 정도.

    그러다 보니 오욕으로 점철된 바깥세상의 영애에게 신을 모시는 고귀한 몸인 자신들이 어째서 빌빌 기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감 사제님이 태도를 주의하여 모시라 하였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샐쭉하니 눈을 뜰 뿐.

    “있잖아, 그 몸 주인 말이야. 듣자 하니 제 동생의 한쪽 눈을 불에 지져 버렸다던데.”

    “그래서 벌을 받아서 통로인이 된 거잖아. 소공작을 해치려고 해서.”

    “사교계 최고의 미인이면 뭘 하겠어? 성격이 그 모양인데.”

    “그래서 친구도 없다잖아. 가문에서도 포기했대.”

    누군가 키득거리며 유명한 소문을 주워 삼켰다. 그때 준비 의식을 도와 드렸던 다른 영애가 몰래 해 준 이야기였다.

    신성인이 차라리 좀 더 나은, 황태자비에 어울리는 육신에 강림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에 안 들지는 않았으리라.

    “게다가 이젠 치장도 모자라서 의식 준비도 도우라니.”

    “…너무하긴 하지. 매일 아침 뜨거운 물로 목욕할 수 있게 물을 긷는 것도 모자라 거룩의 샘 의식 준비까지….”

    그냥 평소처럼 청소와 빨래, 물을 긷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다.

    거룩의 샘에서 황태자와 그 짝이 될 신성인이 몸을 씻고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데, 그걸 위해 견습 신관들은 종일 장미 가시에 손을 찔리며 꽃잎을 뜯고 꽃장식을 만들어야 할 터였다.

    그것도 심지어 원래 하던 일들을 다 해내면서 잠을 덜 자서.

    “그, 그래도 신성인이시잖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좀 나을 거야.”

    셀린의 비호가 차디찬 공기 속을 맥없이 떠돌았다.

    그렇게 견습 신관들이 불퉁한 얼굴로 침대에 파고든 날로부터 얼마 뒤.

    초겨울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흐린 날이었다.

    * * *

    “에오스. 알엔, 아베르타.”

    “쟈, 레그리아 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던가.

    본래도 집 밖을 자주 나다니는 생활은 아니었던지라 방안에 갇혀 있기만 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걸을 수는 없다지만 어느 정도 컨디션이 회복되어 가만히 있어도 미친 듯이 졸리진 않게끔 되었을 때쯤.

    그녀는 항시 제 곁을 지키는 그림자 같은 중년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에오스’가 이름. ‘쟈’는 아마도 ‘네’와 같은 말인 듯했다. ‘샤’는 경칭이나 존중의 의미로 붙이는 것 같았고.

    그러나 에오스는 라히크에게 대답할 때는 조금 다르게 말했다.

    “쟈즈, 바라켄 샤즈.”

    아무래도 비교군이 하나뿐인지라 확실하지는 않아도 말 뒤에 ‘즈’를 붙이면 좀 더 공손한 의미가 되는 것 같다. ‘바라켄’은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고.

    그녀는 그렇게 써 둔 종이를 들고 다시금 찬찬히 훑어 내렸다. 그 외에도 알아낸 몇 가지 기본적인 단어들이 있었다.

    누가 와서 언어나 문자를 가르쳐 준 것은 아니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귀를 열면 들리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반복해서 말하는 문장들. 씻다, 자리를 옮기다, 창문을 열다와 같은 말은 이제 곧잘 알아들었다.

    ‘아, 시원해. 오늘은 비가 내리는구나.’

    알엔 아베르타.

    창문을 열어 줘.

    워낙 에오스가 조용히, 빠르게 말을 해서 단어를 뽑아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집요하게 주의를 기울여 끝내 성공했다.

    단 한 마디라도 의사소통이 되기 시작하니 어찌나 기쁘던지. 뿌듯한 마음에 몇 번이고 입속으로 외웠더랬다.

    에오스는 그녀가 명확한 발음으로 창문을 열어 달라고 하자 소스라치게 놀란 낯을 했다.

    그러더니 제 이름 뒤에 샤를 붙이지 말라는 듯 ‘에오스 샤’라고 말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 게 아닌가.

    그것으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이곳에 라히크의 손님으로 있다. 라히크보다는 아래에 있지만 시중인보다는 높은 위치.

    그러니 라히크 외의 것에 위협을 당할 일은 없었다.

    ‘그것만 해도 다행인 것으로 여겨야지. 일단은.’

    불안하지만 그렇게 버텨야 한다.

    이곳 사람들은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저를 위협할 수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면 불리해지는 건 그녀 자신뿐.

    ‘어제와 오늘은 라히크가 오지 않는 모양이네.’

    식사야 차려져 있었지만 그걸 먹으라고 강요하며 은근한 압박을 주는 시선이 없으니 살 것 같았다.

    라히크는 그녀의 입안으로 사라지는 음식물과 그걸 씹는 모양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기행이 한두 가지도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는 있지만….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정중하게 노크를 하더니 무어라 말을 했다. 그러자 에오스의 낯에 믿을 수 없게도 기쁨과 즐거움이 동시에 스몄다.

    에오스는 표정 변화가 적은데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러는 거지?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오늘은 신황청의 정원에서 티 타임을 갖자고 전하시네요. 계속 안에만 계셔서 답답하셨지요? 티 타임을 가지시면 환기가 되실 거예요. 비록 비가 오지만….]

    에오스는 이제 그녀를 배려하듯 천천히 말을 했다. 무슨 말인지는 여전히 전혀 모르겠으나 레그리아는 ‘티-텐’이라는 반복되는 단어를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 단어에 대해 곱씹기도 전, 에오스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머리를 위로 높다랗게 틀어 올린 장년 여성이 들어왔다. 엄청난 양의 드레스가 걸린 행거를 가지고.

    행거마다 달린 작은 깃발이 유독 눈에 띄었다. 진한 보라색 바탕에 바늘 두 개가 교차하고 있는 간결한 문양. 그리고 바늘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어떤 문자.

    그녀는 그걸 유심히 보았다.

    그건 알파벳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축하드립니다, 레그리아님. 이건 벨리그레엄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의 최신 작품들이랍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처음으로 방 밖을 나오게 되셨다고 신경을 많이 써 주셨네요. 분명 행복한 황태자비가 되실 거예요.]

    뭔가 설명하려는 에오스의 음성에 즐거움이 배어난다.

    지금까지 에오스가 입혀 준 건 편안하기 그지없는 원피스 형태의 잠옷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려하긴 하되 누가 봐도 불편한 옷이 잔뜩 들어오자 그녀는 도무지 좋은 척을 할 수가 없었다.

    낯선 복장의 사람들이 제 앞에서 굽실거리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제 옷이라는 것 같은데.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닌 걸 가져와 들이미니 당연하게도 거부감과 부담감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녀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어서 이게 다 누구의 돈으로 샀을지 예상이 된 탓이었다.

    그런데 막 머리를 흔들어 거부를 표하려던 레그리아의 시야에…… 뭔가 아주 이상한 것이 박혀 들었다.

    ‘개 목걸이?’

    아니겠지.

    하지만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다시 보아도 저쪽 쟁반에 놓인 건 개목걸이가 맞았다. 물론 그녀의 표현이 과격한 것이고 여기서는 일반적인 장식품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건 왜 가져온 거야?

    레그리아는 분홍색, 빨간색, 검은색, 흰색 등의 오색찬란한 가죽 목걸이를 심란하게 바라보다가 에오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 우선 오늘 티 타임에 입으실 드레스부터 고르시는 게 좋겠어요. 이건 어떠신가요?]

    에오스는 평소보다 조금 더 흥분한 게 맞는 듯했다. 두 눈을 무섭게 번득이며 화려한 드레스를 이것저것 들어 보이는 모습에 레그리아는 떨리는 입꼬리를 매만졌다. 너무 싫은 티를 내지 말자. 말이 통하지도 않으니까.

    다만 너무 많다고, 한 벌만 고르겠다는 의사는 표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가 존재하던가.

    그녀의 모친께서는 밥 한 끼, 샴페인 한 잔에도 다 이유와 값이 붙는 거라 말씀하셨다. 그러니 밥값을 하기 위해서는 동생을 잘 돌봐야 한다고.

    아마 그런 이야기를 가장 처음 들은 게 11살 나이였던가?

    모친께서 그녀의 재능 없음을 아시고 모든 지원과 혜택을 끊어 버리기로 결정하신 날이었으리라. 제 방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갖은 옷을 멀거니 바라보며 자신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았다.

    제 몫이었던 옷 중 가장 아꼈던 토끼 귀가 달린 원피스가 눈앞에 떠올랐다. 모친은 그걸 버리고 똑같은 것으로 동생에게 사주셨다.

    이후, 그녀는 옷 한 벌 갖는 것도 눈치를 보며 몇 번이고 망설이며 여쭈어야 했었지. 아니면 동생에게 찾아가 안 입을 옷이 있으면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을 하거나.

    ‘이 드레스들도 똑같아.’

    그녀에게 어떤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준 것일 테다. 라히크가 그녀를 보는 눈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 말은 결국, 사랑이 거둬지면 제 것이 아니게 될 옷이라는 의미.

    “됐어요. 어딘가 데려나가고 싶은 모양인데, 잠옷을 입고 나갈 순 없으니까 고르긴 하겠지만… 한 벌만. 한 벌이면 돼요.”

    레그리아는 서둘러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뭘까. 그녀가 그러자마자 에오스와 그 옆의 아마도 드레스점의 주인일 여자가 동시에 몹시 기쁜 낯을 하는 게 아닌가.

    [모두 다 마음에 든다고 해 주시다니! 이 미텐바움, 예비 황태자비 전하의 너그러움에 탄복하였습니다! 장신구 쪽은 아예 보여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모두 원하신다 하셨으니 위층의 드레스 룸에 가져다 두도록.]

    [예, 에오스 님.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하답니다.]

    무언가 의사소통이 잘못된 건가?

    한 벌만 고르겠다고 했는데 왜 저렇게 기뻐하는 거지?

    레그리아는 수상쩍은 눈으로 에오스를 바라보다가 문득 어떤 가정을 했다.

    ‘아, 어쩌면 에오스는 내가 한 벌만 고르기를 원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티는 못 냈지만.’

    그렇다면 정말로 다행이다. 레그리아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뱉으며 제게 열렬하게 말을 건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오늘 티 타임에 입고 나가실 것은 이 녹색 입생티나 천으로 만든 건 어떠실까요?]

    산처럼 많던 드레스를 뒤쪽부터 차례대로 다시 가져 나가는 걸 보니 제대로 의미가 통한 것 같기는 하네. 묘한 뿌듯함이 가슴 속을 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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