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34)
  • 4화

    기가 막히게 잘생긴 얼굴로 남의 혀 따위를 왜 어루만지는 걸까.

    뭐가 그리 흐뭇한 건지 라히크는 이럴 때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깨물자니 애매했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라히크는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자다.

    늘 잘 갖추어진 제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훈장이 달려 있었다. 화려한 남성용 목걸이를 하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브로치를 하기도 하는데, 어찌 되었든 결론은 모조품이 아닌 진짜 보석을 착용한다는 점이었다.

    모친과 동생은 연주회가 끝나고 파티를 돌 때면 늘 선물을 받아 왔다. 그중에 보석과 귀금속류가 있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이 진짜였으나 이따금 가짜도 섞여 있었기에 그걸 알아보고 정리하는 게 그녀의 일상 중 하나였다. 그러니 오늘 그의 브로치에 박힌 루비가 얼마 정도의 값일지 또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것을 장인에게 개인 의뢰하여 달고 다닐 수 있는 부귀함이라면 사람 몇 정도 묻어 버리는 것 역시 일도 아니겠지.

    지금은 제게 호의적이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불신이나 미움을 산다면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과장이 아니라 앞으로 그녀의 삶이나 생명마저도 라히크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납치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 첫 번째. 납치범을 자극하지 말 것.’

    얼굴을 보지 말라는 게 두 번째긴 하지만, 그건 이미 물 건너갔으니 첫 번째 법칙이라도 잘 지키는 게 좋다.

    ‘역시 이곳 언어를 조금이라도 배워야겠어. 그런 다음 탈출할 길을… 찾는 거야.’

    사실 그동안은 자꾸 졸음이 쏟아지는 탓에 생각을 이어서 차근히 해 볼 겨를이 없었다. 뭐만 했다 하면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이미 잠에 빠져 꿈속을 헤맸다.

    딱히 수면제 같은 걸 먹이는 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몸이 정말 좋지 못한 걸지도.

    ‘그래도 오늘은 컨디션이 훨씬 나아.’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눈치껏 상황을 알아봐야 할 듯했다.

    언어가 안 통하면 몸짓으로라도.

    “여기는 어디예요?”

    ‘여기’를 표현하기 위해 팔을 둥글게 모았다가 ‘어디’를 표현하기 위하여 검지를 관자놀이에 대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는 동안 라히크는 몹시 흥미롭다는 낯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말이 통하지 않는 게 그녀만 답답할 리가 없다. 라히크도 똑같이 답답할 것이다.

    ‘가장 희망적인 가정으로는, 우연하게 사고를 당한 나를 주웠을 수도 있지.’

    그리고 자신의 거처로 데려왔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물론 그렇다고 휴대전화를 모르는 건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상에는 상상 이상으로 놀라운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아직까지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를 다스리며 백작 같은 지위를 가진 채 문명에서 떨어져 중세 시대 그대로 사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아니면 그저 그런 놀이를 하고 싶은 거든지.

    뭐가 되었든 작은 거라도 알아내고 말겠어.

    “종이와 펜을 줘요. 그림으로 물어볼게요.”

    [그림이라. 꽤 머리가 돌아가는군. 영리한 것은 싫지 않아.]

    “종이는 있을 것 아니에요. 이렇게 평평한 거요. 그 위에 펜으로…. 하아.”

    동생이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했을까. 아마 울고 불며 난리를 쳤을 테다. 그녀가 그러지 않는 건 철저한 감정 통제 훈련에 의한 학습이었다.

    “감정을 감추고 동요하지 마라. 천재가 아니면 그렇게라도 마음을 다스려야지.”

    “함부로 울지도, 웃지도 마라. 너 때문에 네 동생이 영향을 받아 콩쿠르를 망치기라도 하면 어쩔 테냐?”

    “쓸모없는 년! 내가 누누이 말했지. 네 동생은 옆 사람의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네 동생 앞길이나 막지 말아야지!”

    지금도 상흔처럼 떠도는 말들은 고막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천재 피아니스트인 모친. 모친을 뛰어넘는 불세출의 천재로 불리는 동생. 그 사이의 쓸모없는 그녀.

    그렇게 꼴 보기 싫거든 어디서 혼자 살든가 말든가 내버려 두면 좋을 텐데, 그녀에겐 운신의 자유조차 없었다.

    “나, 언니가 없으면 피아노를 못 쳐요….”

    콩쿠르에 나간 동생이 생에 처음으로 멀거니 앉아 건반을 하나도 누르지 못하고 돌아온 수치스러운 날이었다. 동시에, 모든 것이 북받쳐 혼자 욱욱거리며 울며 몸을 숨긴 그녀의 14살 생일이기도 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감시 속에서 살았다.

    동생이 차를 바꿔 가며 신나게 운전을 하고 다닐 때 그녀는 운전면허도 딸 수 없었다.

    동생이 여름만 되면 집 근처 호수에서 수영을 할 때 그녀는 홀로 집 안에 있어야만 했다.

    그녀의 가치라고는 오직 동생을 위하는 데 있었으니까.

    아마 그래서 이 모든 게 그리 어색하거나 미칠 것 같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감정 통제 훈련을 받아온 그녀는 적당히 체념하고 상황에 스스로를 맞추는 데 익숙했다. 상황이 유리컵이라면 그녀도 딱 그만큼 몸을 접고, 상황이 와인 잔쯤 된다면 그녀 역시 넘치지 않을 만큼만 팔을 벌리는….

    ‘아.’

    문득, 그녀는 입을 벌렸다.

    ‘그런데 왜 나는 가족에 대한 건 기억하면서 내 이름은 떠올릴 수가 없는 거지?’

    순간 누군가 명치를 거세게 친 것 같았다.

    그녀는 제 생애에 대해 집착적으로 기억했다.

    언제나 감정에 동요가 없어야 했으므로 큰 자극 없는 삶을 살다 보면 결국 어제 하루와 오늘 하루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나아가 작년과 올해 역시 차이가 없다. 그런 하루하루를 조금이라도 다르게 살아내려는 발버둥이 일기였다.

    그녀는 일기를 썼고, 쓴 일기를 다시 읽었다. 그렇게 제 보잘것없는 삶에 스스로라도 의미를 쥐여 주려 노력했다.

    풀꽃이나 다름없는 인생이라 하더라도, 장미나 백합처럼 화려하고 멋진 꽃이 아니더라도 가꿔 주고 싶었다.

    너도 예쁘다고. 너도 괜찮다고. 그렇게 스스로 다독이면서.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아무 보람도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엉망진창이다. 스스로에 대한 건 잊었으면서 가족. 가족에 대한 건 이토록 선명하다니.

    “레그리아.”

    그때, 라히크가 그녀를 나지막이 불렀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못마땅한 듯 저를 훑어 내리는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 라히크가 주변에 선 자들에게 무어라 지시했다.

    [종이와 깃펜을 가져와라. 모르말라 잎으로 내린 차도 가져와. 요즘 잘 섭취하지 않더니 효능이 떨어진 것 같으니.]

    [예, 전하.]

    잠시 눈치를 보고 있자니 제 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건 처음 보는 질감의 종이와 깃펜. 그리고 어디로 보나 잉크가 들어 있는 나무 재질의 통이었다.

    처음으로 의사소통이 이뤄졌다는 사실에 그녀는 허우적대고 있던 충격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말이, 통해!’

    지금까지 해 왔던 손짓, 발짓은 모두 무용하였다. 그런데 며칠간 이뤄졌던 시도가 드디어 성과가 있자 가슴 속에 감동 비슷한 것이 싹을 틔웠다.

    가져다준 나무 잉크통이 너무나 우아해 한순간 기분이 확 좋아진 것도 이유였다.

    “혹시 지도가 있어요? 아니면 지구본이라도. 여긴 어디쯤이에요?”

    순식간에 종이에 세계 지도를 대충 그려낸 그녀는 그걸 거꾸로 돌려 라히크 쪽으로 내밀었다. 이 신기한 변화에 목소리가 흥분으로 좀 더 높아졌다는 건 인식하지 못한 채였다.

    “당연히 호주는 아닐 테고, 미국도 아닌 것 같은데. 동유럽이 맞나요? 체코? 루마니아? 그도 아니면… 불가리아?”

    그러나 열심히 움직이는 입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시선 깊숙한 곳에 묻어나는 열기를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까부터 그는 대답 하나 없는데 혼자 말을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것도.

    ‘듣기 좋군.’

    목구멍이 달아오르는 통증 속에 실니의 독이 그득 들어차는 느낌이다.

    먹잇감을 단숨에 녹여 삼키는 마수인 실니의 독은 전쟁 시에 늘 주요하게 쓰이는 무기였다.

    라히크는 목을 꽉 옥죄고 있는 단추를 끌러내며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치 전투를 하기 직전처럼 옷 속의 근육이 부푼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바지가 팽팽해졌다.

    “저기, 거울이 보고 싶어요.”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 건지 반짝이는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었다. 저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었다고 금세 꼬리를 흔드는 모양이…….

    참으로 다루기 쉬운 계집이었다.

    본래 저 몸의 주인과는 달리.

    “얼굴을 비춰 보는 거요. 제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러면 이름이 기억날 것 같은데…….”

    여자가 쓰는 말은 가짓수가 꽤 되었다.

    이 땅과 신성계가 비슷한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것은 많은 연구를 통해 증명된 지 오래다. 이 땅의 귀족이 품위를 위해 타국의 언어를 배우고 익히듯, 신성계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 그들은 신성인이 몇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며칠간 두어 지켜보는 것으로 태생이 어떠할지를 유추하여 새 신분을 정해 주고는 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합격이었다. 최소 네 가지 유형의 신성어를 유창히 쓰는 데다 추가적으로 두세 가지 정도는 서투르게나마 사용한다 하였나.

    이 세계에서도 언어를 그렇게 많이 배우는 자는 황족이나 언어학자, 둘밖에 없었다. 물론 언어학자 역시 귀족 태생이고.

    신성계에서도 교양 있는 집안 태생이라면 많은 것을 빠르게 배워낼 테지.

    하필이면 여름 울타리의 로에르멜에서 바친 육신에 깃든 건 불만족스러웠으나 그도 뒤집어 생각하면 차라리 잘 되었다. 이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쥐새끼처럼 중립을 유지하던 로에르멜 공작가를 확실하게 황태자파로 끌어들일 수 있는 이유였다.

    [거울은 거룩의 샘 의식날 보여 줄 것이니 조금 더 참아라.]

    그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으려는 모양새가 귀엽다. 미간에 살며시 진 주름이나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눈꼬리 같은 게 어찌나 앙살맞은지.

    집짐승을 키운 적은 없으나 만약 키운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저를 올려다보는 물기 많은 연녹색 눈동자가 잔학한 식욕을 돋운다.

    이윽고 그는 느리게, 느리게. 빠끔히 벌려진 입술 사이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어라 조잘거릴 때마다 움직여대는 작고 귀여운 혀를.

    “듣고 있어요? 라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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