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34)
  • 3화

    오만한 어투였다.

    크게 벌어진 그녀의 눈을 알아차렸는지 사내가 피식 웃었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처음으로 웃음기를 담은 순간이었다.

    사내는 물병에 따라붙는 그녀의 눈길을 재미있다는 듯 응시하더니 그대로 보란 듯, 물을 머금었다.

    아니, 물병을 보여 준 건 주겠다는 뜻이 아니었던 건가.

    그녀는 조금 억울해졌다.

    ‘아예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물을 좀 달라고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그렇게 고심하던 그녀는 그리하여 사내가 상체를 기울이며 쥔 아래턱을 엄지로 슬쩍 눌렀을 때조차 무슨 일이 이어질지 예상치 못했다.

    “흐으…!”

    순간, 물이 뜨거운 입술을 통해 흘레붙듯 새어들어 왔다.

    펄쩍 뛰기라도 할 듯 열기 어린 접촉이었다.

    온몸이 경직될 만큼 놀랐으나 그럼에도 물은 반가워 입가에 줄줄 흐르는 것도 모른 채 허겁지겁 받아 마시자니 이내 대가를 받겠다는 듯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을 가르며 침입했다.

    몸처럼 혀도 굳지는 않았는지 얽혀드는 감각이 지나치게 생경했다.

    혀뿌리부터 샅샅이 집요하게 훑어내며 입천장을 살살 간질이는 그 모든 행위가 처음이었다.

    열기를 빼앗기는 것만 같아 몸부림치고자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여전히 낯선 향이 저를 짓누르고 있는 탓이다.

    ‘숨이 모자라.’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더니 이내 눈앞이 팽팽 돌았다. 손가락 끝이 침대 시트를 그러쥐다가 힘없이 떨렸다.

    머릿속이 향기에 짓눌려 곤죽이 된 듯 혼몽하다.

    정신이 나갈 듯한 아찔한 감각이 뒤섞여 혼란을 야기했다.

    처음 보는 사내와 농밀한 키스를 한 것보다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제 안으로 밀려드는 잔학한 기운이었다.

    ‘이건, 뭐지?’

    평생 동생의 수발을 들며 하녀처럼 지내 온 탓에 연애 한번 한 적 없다지만 확실했다.

    이건 그냥 평범한 키스가 아니다.

    그저 혀를 섞는 접촉이 아니라 마치 영혼의 일부가 섞이는 듯한 선연한 감각. 숫제 제 안에 잠겨 고여 있는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갈고리로 긁어 올리는 듯 이상야릇한 기분이었다.

    “읏!”

    아랫배가 꼬이고 호흡이 말라붙는다. 딱 죽을 것 같은 느낌에 저도 모르게 바르르 떨자 사내가 잠시 떨어져 나갔다.

    [혀를 놀릴 줄 모르는군.]

    그걸로 끝이라 여겼는데 착각이었다.

    입맞춤은 길고 집요했다. 금발의 사내는 몇 번이고 물을 머금어 흘려 넣어주며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입속을 유린했다.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노려보자 우습다는 듯 입매를 비틀 뿐, 조금도 미안해하거나 민망해 보이지도 않았다.

    미친 게 틀림없어.

    [레그리아.]

    “!”

    [네 이름은, 앞으로 레그리아라 하겠다.]

    마지막 호흡 하나까지 싹싹 긁어가겠다는 듯 악착같이 타액을 빨아내던 키스 뒤에 불현듯 떨어진 한마디는 그녀의 혼란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배부른 만족감을 띠고 있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그 어조에 어린 풍요만큼은 전해진다. 마치 궁핍하던 자가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듯, 오래 굶주린 맹수가 다리 저는 먹잇감을 노려 기어코 포식하는 듯한 말투.

    그래, 이때부터였다.

    남들보다 보잘것없어도 애써 가꾸어 온 인생이, 미력한 발버둥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예 송두리째 부서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이름이 레그리아로 정해진 이 날부터였다.

    * * *

    무도한 금발의 사내는 끔찍할 정도로 잘생긴 미친놈이었다.

    그렇게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 외모다. 매서운 눈빛과 세상 모든 것을 발아래 두고 있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마저 사내에게 흠집을 내지 못했다.

    다들 사내가 그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 때문이겠지.

    과장 한 점 없이 고백하건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본 미친놈의 미친 얼굴은 한순간 그녀의 얼을 빼놓았다.

    이자가 강제로 입맞춤만 하지 않았더라면 얼굴에 홀렸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녀는 사내의 본성을 간파했다.

    그는 찢어발기는 자다.

    꼼짝도 못하는 몸만 아니었더라도 멀리 달아나 피했을 텐데.

    “레그리아.”

    “레그…리아.”

    “라히크 바라키엘 벨리그레엄.”

    “라히, 크.”

    그렇게 며칠이 지나며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는 집요했다. 몇 번이고 그녀를 가리키며 레그리아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일러 라히크라 하였다. 그게 이름이라는 걸 알아듣지 못할 수가 없을 만큼 수십 번 되풀이해서.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레그리아가 되었음을 알았으나 그게 본래 제 이름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을 해보아도 진짜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제 얼굴이 어떠했는지, 목소리는 어땠는지 같은 것도.

    다만 확실한 건 그녀는 염색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흑발이라는 것.

    헌데 지금 그녀의 머리칼은 붉은색이었다. 어둠마저 살라 먹을 정도로 짙붉은 것.

    제 머리채를 쥐고, 주름 마디 하나 없는 손가락을 비틀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물었으나 누구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 하는 수가 없지. 당장은 레그리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수밖에.

    사내, 라히크가 그녀를 레그리아라고 부르니 주변의 여자들도 모두 그리 칭했다.

    여자들은 처음 보았던 그 소녀와 비슷한 나이대거나 혹은 장년층이었다.

    모두 발소리조차 없이 걸었고 늘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었다. 거의 웃지 않았고 말을 걸지 않으면 먼저 입을 여는 경우는 없었다.

    첫날 그 소녀가 특이한 경우인 듯 보였다.

    다만 다 똑같은 옷을 입었기에 이곳의 직원이라는 건 알았지만 아무리 봐도 간호사나 간병인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시중인.

    그들에 대해 표현할 단어가 그것 외에는 더 생각나지 않는다.

    “레그리아.”

    라히크는 첫날 이후 다행히 두 번 다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첫날은 몸도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고 정신도 혼미해 대응하지 못했다지만 한 번 더 그랬다간 혀를 깨물어 버리려고 몇 번이고 의지를 다졌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어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대신 그는 기이할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했다. 정확히는 ‘기묘한 방식’으로 집착한다고 해야 하나.

    아침에 눈을 뜨면 같은 옷을 입은 시중인들이 들어와 돌처럼 굳은 그녀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러고 나면 몸을 주물러 주는 시간이다.

    거기까지 끝나고 나면 식사 시간인데 라히크는 매일 침실에서 아침을 함께 먹었다. 가까이 앉아 이런저런 것을 권하지만 입맛이 돌지 않아 앞에 놓아준 것을 깨작대고 있자면 그는 미미하게 입매를 굳혔다.

    하지만 차려 준 성의를 봐서 먹고자 해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다.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눈치를 보며 생활한 지 닷새째.

    첫날은 간신히 팔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사나흘이 흐르며 푹신한 쿠션을 댄 침대나 소파에 앉아 있을 수는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제 발로 걸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안아서 위치를 옮겨 주어야만 한다. 발가락에도 딱히 감각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느낌상 의사로 보이는 안경 낀 장년 여성이 매일 오후에 들어와 몇 분씩 진찰을 보았는데, 그러고 나가면 시중인들이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었으나 그다지 소용이 있진 않았다. 최소한 그녀가 느끼기에는.

    그런 상황이 답답하여 서려고 남몰래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나 침대에서 혼자 일어서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게다가 방 안에서 그녀의 기척이 조금만 바뀌어도 시중인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치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어 그러나 했지만 이제는 확신한다. 이건 감시였다.

    온건한 형태의 감시.

    그런데 어떻게 식사가 편할까.

    심지어 하나같이 뭔가 마땅히 기대한 맛이 아니었다. 소금도 아니고 후추도 아닌데 톡 쏘면서 묘하게 신맛이 도는 이 향신료가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요리마다 뿌려져 있어 혀에 닿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쉽게 비유하자면 빻은 방아와 고수를 레몬즙에 뒤섞은 다음 치즈 맛이 강하게 도는 시저 소스에 넣어 뿌린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거기에 트러플 오일 세 방울 정도.

    라히크는 아무렇지 않게 먹는 걸 보면 그녀를 고문하려는 게 아니라 이 지역 고유의 조리법인 것 같으니 그냥 먹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도 사실 하루, 이틀까지였다.

    이제는 도저히 삼키기가 힘겨워 최대한 그 소스가 묻어 있지 않은 구운 야채와 묽은 수프 정도만 눈치껏 골라 먹었다.

    그런 그녀를 훑어 내리는 라히크의 시선은 하루가 갈수록 서늘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서 키우는 짐승이 식사를 거부하면 걱정스럽다 하던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했더니.]

    스푼을 든 채 갈 길을 잃고 잠시 가만히 있었더니 라히크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움찔할 수밖에 없을 만큼 또렷한 한숨에 섞인 것은…… 의외로 귀찮음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실로 그러하구나. 이리 까탈스러운 계집이라니.]

    손을 뻗은 라히크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들린 스푼을 가져갔다. 더 먹지 않으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기껏 준 먹을 것을 남기면 아예 굶길까 봐 극도로 긴장했으나 다행히 노기를 띤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몸에 깃든 지 닷새는 되었으니 이제 슬슬 과일을 먹여도 되겠지.]

    제 뺨을 엄지로 덧그리며 다정한 어투로 속삭이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하다. ‘살을 찌운 다음 잡아먹어야 하는데’라고 했어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잖아.

    식사가 끝났음에도 라히크가 움직이지 않으니 그녀 역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벽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시중인들이 빠르게 식기를 치워 식탁으로 쓰이는 테이블이 곧 비워졌다.

    멍하니 텅 빈 공간을 보고 있자니 갑작스레 햇볕이 들어 방 안을 따스하게 달구었다.

    마치 아무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이곳에도 해는 뜬다.

    아직까지 여기가 어느 나라인지, 지구본으로 따지면 어디쯤에 있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도 부근은 아닌 것 같았다. 따뜻한 겉옷을 걸치고 있지 않으면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만큼 기온이 서늘하니까.

    알게 된 또 다른 사실들은 이 방 바깥은 시커먼 숲이라는 점.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 건물 외에 다른 것은 없는 것 같다는 점.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극진하기 짝이 없다는 점 정도였다.

    앉을 수 있게 되자 눈에 보이는 사람은 전부 붙잡고 질문을 했지만 누구에게 어떤 언어로 물어도 다들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한국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심지어는 아랍어에 잘 모르지만 서투른 라틴어 단어까지 던져 보았으나 모조리 실패다. 발음으로 유추하건대 스페인어도 아닌 것 같은데.

    휴대전화나 공중전화를 들고 전화를 하는 동작을 취해 보여도 알아듣지 못했다. 못하는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어리둥절해 하는 듯 보여 몇 번 시도하던 그녀는 일단 잠정적으로 포기를 했다.

    지도라도 보면 좋겠다 싶어 뭔가를 펼치고 읽는 시늉을 하여도 돌아온 건 읽지 못할 글자가 빼곡하게 차 있는 책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고립.

    다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잘 대해 주려는 태도가 엿보이는 여자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어느 정도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여기는 혹시 이 남자의 개인 소유 성인가? 사유지?’

    대체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는가’는 차치하기로 했다. 그저 ‘여기가 어디인지’나 알았으면 좋겠다.

    당연히 병원은 아니고, 그녀를 납치해서 불법적인 일을 벌이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 아직까지는.

    외국에는 의외로 아직까지 작위 제도와 그 권력이 유지되는 지역이 실존한다. 아마도 그런 곳 중 하나라고 여기고는 있는데…….

    “레그리아.”

    흰 장갑을 낀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덧그렸다. 이어지는 말들은 역시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부른다는 건 알았기에 고개를 들자 갑자기 차갑고 촉촉한 것이 입술에 대어졌다.

    느낌상 과일 같아 입을 벌리자 자른 딸기 조각이 손가락과 함께 쑥 들어왔다.

    또다.

    이게 바로 그녀가 생각하는 기이한 행태였다.

    [옳지.]

    굳어 있는 그녀의 혀끝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진 그는 이내 손을 빼고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같은 짓을 반복한다.

    엄지로 뾰족한 부분을 살살 달래다가 혀뿌리 아래쪽부터 슬쩍 쓸어 올렸다. 이 행위를 제발 멈춰줬으면 좋겠는 건 이럴 때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함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간지러운데 어디가 간지러운지 명확히 짚을 수가 없다. 허리가 꼬여들 뿐.

    ‘이… 이 혀 도착증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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