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34)

1화

1. 포박(Ergreifung)

악마가 가로되, 저기 너를 열망하는 자가 있으매 곧 네 명의 기사이니라.


금빛 말을 탄 자가 있되 그 이름은 정복이라 하며

흰 말을 탄 자가 있되 그 이름은 기근이라 하며

푸른 말을 탄 자가 있되 그 이름은 전쟁이라 하였으며

검은 말을 탄 자가 있되 그 이름은 죽음이라.


정복은 섬기는 척

기근은 배부른 척

전쟁은 평화인 척

죽음은 볕 속에서도 숨 쉬는 척을 하여 날짐승의 곁을 맴도니


너로 말미암아 그들이 절망하겠구나.


자, 아이야!

부는 바람에, 솟아오르는 땅아지랑이에, 고여 흐르는 물에 대고 속삭이거라.

건져 올린 네 손아귀엔 무엇이 들었느냐?

* * *

어둠을 헤집는 바람 소리가 화살 맞은 짐승의 내달림처럼 소란했다.

동굴 벽을 기는 벌레를 내쫓아 주던 모닥불이 기어코 꺼진 건 남자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걸 알았기에 레그리아는 메마른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몸을 좀 더 옹송그렸다.

그러면 피부를 따끔하게 물어 대는 이것들이 조금이라도 덜 달라붙을까 싶어서.

“…….”

불빛 한 점 없는 암흑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몰랐던 일이었다.

알 필요도 없었지. 아무리 어둡다고 한들 어디에나 빛이 존재하는 곳에서 살았으니까.

그때가 그립나?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땅이 못 견디게 싫다는 것 하나.

꾸역꾸역 집어삼킨 울음이 멋대로 차오를 때면 레그리아는 우는 대신 제 앞을 지키듯 앉은 남자의 등을 살폈다.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미세한 열기. 주변을 밝혀 주던 불이 사라진 탓에 윤곽을 눈으로 더듬어 살펴야 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남자의 벗은 등에 새겨진 상흔들을.

또한, 저 흉터 많은 거대한 남자가 무력한 그녀를 이곳에 둔 채 저 혼자 달아나지 않을 것임도 열기로써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위험을 열기와 냉기로써 구분할 수 있었고, 그건 레그리아가 가진 유일한 능력이었다.

만일 그러한 것조차 구분하지 못했더라면 레그리아는 진작 미쳤을지도 모른다.

낯선 세계에서 내 편이 되어 줄, 믿을 만한 자와 아닌 자를 분간하는 건 설탕과 소금을 맛보지 않고 분간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기실, 이 모든 상황이 고작 그 정도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 봤자 쓸모없는 기대일 뿐이니 곧 놓았지만.

남자는 말이 없었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그저 조용히 눈을 뜰 뿐.

꺼진 모닥불과 반쯤 타다 만 장작을 살피던 남자가 돌연 몸에 힘을 주고 그 거대한 덩치를 빳빳하게 부풀렸다.

저 바깥에 뭔가 있는 걸까.

인간이든 마귀든 짐승이든 간에 무슨 상관이겠나. 제겐 반갑지 않은 상대인 것은 같았다.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함인 듯 남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혼자 남은 레그리아는 행여 제 숨소리가 새어나가 저 밖의 무엇에게 들킬까 싶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음 같아서는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기어들어 가 숨고 싶다.

그러나 남자는 그게 좋지 못한 판단이라 답했다. 도망자를 잡는 쉬운 방법 중 하나가 숨을 쉴 수 없도록 동굴 쪽으로 연기를 피우는 거라고.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튀어 나가게 되는데 정신이 없는 상태로 붙들리면 그걸로 끝이라 하였다. 그래서 동굴 입구 쪽에 머물러 추격꾼의 기척을 빠르게 살피는 게 낫다고.

레그리아는 이러한 종류의 도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에 그저 수긍할 수밖에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남자는 강인했으며 전사였고 그녀가 달아나고자 하는 존재의 적이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 하였던가. 친구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잠시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상대까지는 된다.

무엇보다도 이 남자는 그녀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녀는 이곳, 아니, 이 세계 자체의 이방인이지만 남자는 제국의 이방인일 뿐이니…….

“!”

바깥을 확인하러 다녀온 남자가 어느 순간 그녀의 앞에 섰다.

눈을 홉뜨며 놀란 레그리아는 살갗에 오소소 돋는 소름을 쓸어내리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남자가 저렇게 내려다볼 때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그녀를 지켜 주는 남자. 추격꾼에게서 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내.

대저 수컷이 원하는 바는 한 가지일 테지만 다행히도 그는 불한당이 아니었다. 아랫도리를 아무렇게나 놀리는 자도 아니었고.

그의 물건은 오직 한 여자에게만 세운다 했던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한 명의 반려만을 열렬히 원하는 건 그들 부족의 명예이며 자긍심이었기에, 지금 와서 아무리 레그리아가 허연 다리를 내놓은 채 부끄러움도 없이 쓰러져 있다고 한들 그녀를 강제로 취하고자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남자가 원하는 건 도움을 대가로 다리를 벌리는 수치스러운 일 따위가 아니다. 비록 시선은 타는 듯하였으나….

“가야 한다.”

“응.”

짧은 대화. 레그리아는 울지도, 떼를 쓰지도, 잠을 많이 자지 못하였다고 투정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가 판단하고 그녀는 따른다. 그게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규칙이었다.

남자가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을 빠르게 정리하는 동안 비칠비칠 일어선 레그리아는 물집이 잡힌 데다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신발 끈을 옥죄었다.

아프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통증이 손끝을 덜덜 떨리게 만들었으나 그보다도 잡혀서 그곳으로 도로 끌려가는 게 더 무서웠다.

정확히는… 그자의 앞에 산채로 내던져지는 게 공포스러웠다.

‘그자는 사람이 아니야.’

아직 레그리아가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의 차이에 대해 모를 때였다. ‘그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 뒤에는 그래도 그자가 실상은 아주 나쁜 놈은 아닐 거라고, 그리 믿어 보려고 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사람 아닌 것이 사람 거죽을 쓰고 있을 줄은.

“간다. 북서쪽.”

남자의 속삭임에 레그리아는 절뚝거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걸었다. 그런 그녀를 흘긋 보던 남자가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것을 내쉬더니 몸을 숙였다.

“업혀라.”

“내 발로….”

“잡힐 거다.”

“…….”

민망함과 두려움, 불안함과 초조함.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큰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남자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레그리아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능할 줄은 몰랐다.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인간에 불과하긴 하였으나 이곳에서마저 이럴 줄은.

그녀가 가족에게 인정받고자 발버둥 치며 한평생 배워 왔던 것들, 동생의 반이라도 따라가 보라는 말들에 애써 노력하며 익혀 온 지식은 여기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 연약해 빠진 몸뚱이조차 그녀의 것이 아닌데 더 말해 무엇 할까.

그림자를 살라 먹을 듯 짙붉은 머리칼이 남자의 어깨 너머로 흩어졌다.

간지러울까 싶어 서둘러 머리채를 정리한 레그리아는 이걸 빨리 잘라 버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모두 그자 때문이다. 그자가 긴 머리가 좋다고 한마디 한 것 때문에 여관장들은 결코 그녀의 머리를 잘라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손닿는 곳에 날카로운 날붙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식사 시에 있어야 할 나이프조차 그녀의 자리엔 놓이지 않았으니.

그 모든 게 그녀가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애초에 믿은 적도 없었으나 차근히 되짚어 보면 진위를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녀 이전에 소환되어 온 누군가가 칼을 들고 날뛴 적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고마워.”

레그리아가 얌전히 업히자 남자는 턱을 까딱였다. 그 다음 느껴진 건 바람이었다.

지금껏 기다려 준 것이 무색하게 남자는 인간을 뛰어넘은 속도로 숲을 내달렸다.

나무의 잔가지가 뺨을 긁어내리자 레그리아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잔잔한 땀방울이 맺힌 남자의 목덜미에 코가 닿는다. 이런 접촉까지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그를 제대로 붙잡지 않아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최소한 중상일 테니.

레그리아는 그 정도로 멍청한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잔불 냄새….’

근육이 조밀하게 짜여 목덜미마저 단단한 그에게서는 기분 나쁘지 않은 체취가 났다.

드넓은 초원, 온몸이 바짝 말라붙을 듯한 햇볕, 그 사이를 오가며 풀을 씹는 가축들. 막힌 곳 하나 없어 시원하게 불어 닥치는 바람 냄새와 타다 남은 불씨 같은 것. 그리고 그러한 일상을 지키는 기쁨을 아는 자의 절제 된 강함이 배여 있다.

열아홉 씨족이 함께하는 남자의 부족은 <투악>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고대어로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뜻이다.

강하기 때문에 남을 짓밟는 게 아니라 그 힘으로 누군가를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

사실 남자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유롭게 되자마자 그녀를 버려 두고 혼자 달아났더라면 벌써 숲을 빠져나갔겠지.

그러나 남자는 쓸모없는 레그리아를 지켜 주었다. 약속을 깨트리지 않았다.

‘이런 남자가 수호하는 부족이라면 거기에 몸을 의탁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자신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찮을 테니까.

게다가 정치적인 문제도….

거기에 간다고 한들 그녀는 환영받지 못한다. 오히려 도와준 남자를 곤란에 빠지게 할 뿐이다.

‘골칫덩이가 되긴 싫어.’

그러니 남자의 도움은 이 숲을 빠져나갈 때까지. 그 후에는 알아서 살아내야 한다. 이 끔찍한 세상을, 혼자서.

막막한 마음에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의 어깨에 뺨을 대자 남자의 근육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분명 성가시겠지. 도대체 얼마 걸었다고 제 발로 움직이지도 못하나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잘 해내고 싶었어.’

신성의 숲. 신황청. 신성인. 알지도 못하는 언어와 먹어 본 적 없는 향신료들. 그 수많은 규칙, 규칙, 규칙들.

그리고…….

레그리아는 자조하며 시선만 위로 올렸다. 휙휙 지나가는 머리 위 풍경 사이로 네 개의 초승달이 보인다. 겹치면 완벽하게 들어맞을 듯 똑같은 모양의 달은 꽃처럼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당연히 지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들 그곳에 자신을 기다려 줄 가족은 없다.

이곳에서 벗어난다고 한들 이 세계에서 그녀가 있을 곳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떠나야만 했다.

여기만큼은 아니었으니까. 끝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살아나가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여기만큼은 아니다.

그게 레그리아가 이 위험천만한 도망을 감행한 이유였다. 그자가 잡아 와 인간 이하의 대우를 하며 가둬 둔 이 남자까지 풀어 주면서.

“위험해!”

찰나, 등줄기가 오싹했다. 바람을 타고 그악스러운 기운이 세차게 실려 온다. 그녀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몸을 숙였다.

파르르!

한 걸음 앞에 있던 나무에 화살이 박혀 거세게 떨어댔다. 끝이 금빛 깃털로 다듬어져 있는 값비싼 종류다.

황태자만이 쓸 수 있는, 제아무리 세가 강한 마귀라 할지라도 숨통을 단박에 끊을 수 있다며 그자가 자랑한 적 있던 그 물건.

만약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더라면, 이 남자가 투악 족 최강의 전사여서 황태자와 같은 수준의 무위를 지니지 않았더라면… 방금 그녀는 굴러떨어져 삽시간에 잡히고 말았겠지.

그 뒤의 일은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레그리아는 있는 뺨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을 손등으로 훔치곤 있는 힘껏 남자의 목을 껴안아 매달리며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신이시여. 신이 있다면 오늘 한 번만, 도와주세요.’

오늘은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 강제로 소환당한 지 반년이 되는 날.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자들의 계획대로라면 오늘 레그리아는 황태자의 침대 위에서 정신 나간 것처럼 울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순결한 제물이 되어, 마침내 그 순결을 잃었겠지. 그리고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미쳐갔으리라.

하지만 레그리아는 그러는 대신 다른 남자의 등에 업혀 달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확실하게.

황태자를 자극하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도망치려거든 꼭꼭 숨어라. 머리터럭 하나 내보이지 말라. 잡히거든 발목을 으스러트린 뒤 네 배 속이 불어 터지도록 씨를 뿌릴 테니.”

느른하면서도 포만감 어린 사냥꾼의 음성이 귓가를 배회한다.

황태자의 추격꾼에게 쫓긴 지 13일째.

레그리아는 차츰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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