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 함께 걷는 길
지금도 기억이 선명했다.
햇빛을 머금은 바람이 부드럽고 따스하던, 꽃과 초록 잎이 싱그럽던 봄날, 그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섰던 그때를.
어린 티가 역력한 통통한 뺨과 유달리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작년에 우리 학교에 입학한 친구 아들이야, 인사해.”
교수로부터 소개를 받은 뒤에야 이해했다.
갓 스무 살이 된 대학 신입생. 그야 어려 보일 만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대화를 방해하지 않도록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들과 마주 선 그를 자연스럽게 무시한 채 교수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일찍 준비를 하는 편이 낫지. 미리 전공 분야도 정하고, 지도 교수도 만나고.”
“…….”
“전에 이사장에게 들었는데 성실하게 공부하는 성격이라지? 이사장은 자네가 원하면 유학도 보낼 생각이라던데. 예전에는 MBA 유행 때문에 유학이 대세였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네. 국내 대학원에서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어. 국내 기업에서는 오히려 국내 학위가 유리할 때도 있고.”
작년에 입학했다면 올해 학부 2학년.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는 적극적이었다.
학부생에게 대학원 진학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이유는 대충 두 가지 정도였다. 다른 교수나 연구 분야에 빼앗기기 아까울 만큼 출중한 인재거나 아니면….
‘…학생의 미래는 알 바 아니고 연구생 할당량과 재정 지원에 눈이 멀었거나.’
다른 교수는 모르지만 이 교수의 목적은 틀림없이 후자였다.
몇 십 년 전에 경제 분야의 베스트셀러를 냈고 유명세로 방송에 출연도 했지만 그 뒤에 다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방송 출판계에서는 물론 학계에서도 서서히 잊혀져 가는 중이었다. 그의 유명세를 믿고 투자를 했던 외부 기업도 재정 지원을 끊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겹쳐져서 한때 골라서 제자를 받았다던 그도 이제는 없는 제자를 만들어야 하는 처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학부 2학년생에게 대학원 권유를 할 줄은 몰랐는데.’
강의 때보다 의욕적으로 이야기 중인 교수의 너머로 학생의 얼굴이 보였다. 희고 작고 동그란 얼굴에는 곤란한 빛이 역력히 어려 있었다. 2학년이라지만 이제 겨우 봄. 실제로 대학을 다닌 기간은 겨우 1년 남짓한 스무 살 어린 청년이 아버지뻘 되는 교수에게 난색을 표명하기는 어려웠다.
‘그 점을 이용해서 붙잡고 있는 거겠지.’
교수가 얼마나 절박하건, 학생이 얼마나 곤란하건 남 일이었다. 그러니 자료나 챙겨서 빨리 떠나자. 이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던 찰나 그와 학생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교수님.”
“으응?”
“학생이 아직 교수님 말씀의 중요성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은데요.”
교수는 드물게 참견한 제자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우선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도움을 주시죠. 그러면 교수님이 하신 귀한 조언도 훨씬 깊이 와닿을 겁니다. 아무 데서나 들을 수 있는 조언이 아니니까 학생이 신중히 받아들이도록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흥적인 데다 내용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저 교수가 좋아하는 ‘깊이’라거나 ‘귀한’ 그리고 ‘도움’ 같은 말을 반복해 조합했을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빈말이었지만 교수에게는 잘 먹혔다.
“물론 그래야지. 그러면 어디 보자, 뭘 어떻게 더 도와줄까?”
“이 분야의 대표 저서들을 추천해 주시죠. 그것부터 읽고 생각한 후에 귀한 말씀을 되새길 시간을 주고요.”
말의 끝에 그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아 학생에게 내밀었다. 교수의 책상에서 가장 가까운 책장 칸에 연달아 스무 권 남짓 꽂혀 있던, 20년 전 교수가 냈던 베스트 셀러였다.
“제 추천 도서입니다.”
“어허, 사람 민망하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교수는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쓴 책이라서가 아니라 나쁜 책은 아니지. 절판되어 구하기 어렵지만 아직도 복간 요청이 많아, 허허허.”
학생은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했다. 교수의 자화자찬을 10분 정도 더 들은 후에 일어선 그는 다음에는 책을 읽고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그는 먼저 연구실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났다.
“저기요!”
고개를 돌린 그는 달려오는 학생을 보았다.
“아까는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저기… 성함이.”
“서도헌.”
도헌이 이름을 밝히자 학생은 웃었다.
“도헌이 형이시구나. 저는 이의준이에요.”
첫 소개에 대뜸 ‘형’ 소리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도헌이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의준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냥…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의준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가 들고 있던 교수의 저서를 본 도헌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책 한 권으로 시간은 오래 못 끌 겁니다.”
“네?”
의준이 고개를 돌렸다. 놀랐는지 큰 눈이 더 커 보였다.
“거절은 분명하게 하세요. 몇 년 동안 오늘처럼 괴롭힘당하지 않으려면.”
이 말을 끝으로 도헌은 몸을 돌렸다.
후회가 빠르게 밀려들었다. 왜 참견했을까.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으니 상관없지만.’
이때만 해도 설마 다음날 도서관 앞에서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도헌이 형, 안녕하세요.”
“……?”
도서관을 나서자마자 그와 마주친 도헌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도헌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저… 어제 연구실에서 뵌 이의준인데요.”
“…압니다.”
도헌은 겨우 대답했다. 의준은 웃었다.
“같은 학교니까 다음에 또 뵐 날이 있겠지 했는데 설마 오늘 바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자신과 반대되는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를 보며 도헌은 혼란해졌다. 의준이 왜 그에게 말을 걸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잠깐 시간 되세요?”
종교 권유일까. 의심을 품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의준은 음료수를 사겠다며 그를 도서관 앞 쉼터로 이끌었다.
“어제는 감사했어요.”
자동판매기에서 뽑은 캔 음료를 들고 벤치에 마주 앉은 직후 의준은 이렇게 인사했다.
“두 번이나 감사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는데.”
“저한테는 그럴 만한 일이었어요.”
의준은 웃었다.
“교수님은 저희 아버지 친구셔서… 종종 권하실 때 딱 잘라 거절하기 어려웠거든요.”
“…….”
“사실은 종종이 아니라 매우 자주였지만요.”
도헌은 음료수를 마시며 의준의 이야기를 들었다. 덕분에 10분 만에 그에 대해 제법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 공부를 잘하는 의준을 자랑스러워하셨다는 것. 부친은 의준이 학자의 길을 걷기 바란다는 것. 대학은 물론 유학과 대학원에 대해서도 본인보다 부모님이 더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것, 등등.
“그런데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서… 그냥 듣고 넘겼거든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걱정이 되셨는지 교수님에게 의논을 하셨대요. 그래서 교수님이 어제 절 불러서 대학원 진학을 강하게 권하신 것 같아요.”
“…….”
“아버지도 교수님도… 저 때문에 안 해도 될 걱정을 하셔서….”
“교수님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학생의 진로 상담은 그분 일이기도 하니까.”
남의 일에 참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음료수를 얻어먹고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그래서 도헌은 입을 열었다.
“그 교수님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대체로 교수님들은 학생이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하면 반기는 편이에요. 개중에는 학생 개개인의 장래나 분야의 유망성 같은 건 접어 두고 끌어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택과 결정은 자기 몫이에요. 그 이후의 삶은 교수가 아니라 본인이 책임져야 하고.”
“…….”
의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헌은 아차 했다.
“…괜한 이야기를 했군요. 참견할 일이 아닌데, 미안해요.”
“네? 아뇨, 아뇨! 그게 아니고요.”
의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선택과 결정이 자기 몫이라는 말에 감동해서요.”
“상식적인 말인데 감동을 합니까?”
“그렇죠, 상식적인데. …어른에게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어서요.”
“여섯 살 차이로 어른 소리를 듣기는 그런데요.”
“여섯 살…이요? 형 몇 살이신데요?”
“스물여섯입니다. 그쪽은 스물이죠?”
“헉.”
명백히 나이를 듣고 놀란 표정이었다. 도헌은 왠지 상처받은 기분을 느꼈다.
“…노안이라 미안하군요.”
“앗, 아니에요. 그래서 놀란 게 아니고… 아니, 놀라기는 했는데.”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변명을 하다 말고 의준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먼저 나이를 물어볼걸.”
“괜찮습니다. 초면에 나이부터 따지는 것, 별로 안 좋아해요.”
그 말에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요. 아, 그런데 저희 초면 아니에요. 어제 만났잖아요.”
“…….”
맞는 말이기는 해서 반박하지 않고 음료수를 마셨다.
“역시 제 인생이니 제가 결정해야 옳겠죠. 그러려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고민도 해야 할 텐데….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살았나 싶네요.”
의준은 이렇게 말한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도 1년이나 다녀 놓고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제가 뭘 하고 싶은지도, 그리고 전공이 저와 맞는지도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네?”
그를 향한 의준의 시선을 느끼며 도헌은 말을 이었다.
“겨우 1년 공부했을 뿐이잖아요. 이제 2학년 1학기, 이제야 전공다운 공부를 시작할 즈음인데… 당연히 고민될 수밖에요.”
“…….”
“다들 그렇게 고민하고 선택해요. 선택과 결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민을 해야 하는 법이고. 서두를 필요 없어요. 대학은 4년이나 다녀야 하고, 대학원 진학 여부를 결정하는 데까지 최소 2년 정도 시간이 남았으니까.”
어울리지 않게 충고랍시고 길게 이야기하는 데는 아무 의미 없었다. 그저 음료수를 얻어먹은 값이었다. 그뿐이었다.
“천천히 생각하고 많이 고민해요. 그쪽에게는 시간이 많으니까.”
말을 마친 후 도헌은 남은 음료수를 마셨다. 의준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더니 질문이 들려왔다.
“형은 언제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정하셨어요?”
“처음부터요.”
“처음? 대학교 올 때요?”
“입학 전부터.”
“엄청 빨리 결정하셨네요.”
감탄조로 들려온 말이 마치 직전에 한 조언과 다르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듯해서 도헌은 입을 열었다.
“나는 그쪽과 경우가 다릅니다. 가급적 오래 학생으로 남기 위해 선택한 길이니까요.”
대답 직후 도헌은 후회했다. 마지막 말은 안 하는 게 나았다. 지금까지 동기나 교수는 물론 가족에게조차 밝히지 않았던 속내를 이런 데서 내뱉다니, 미쳤나 보다.
“학생이 좋으신가요?”
생각지도 않은 질문이 날아드는 바람에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입니까?”
“네? 어… 아, 아뇨! 학생을 좋아하냐는 게 아니라, 형이, 학생 신분으로? 지내고 싶으신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도헌은 오해의 소지가 있던 자신의 질문에 황급히 보충 설명을 하며 두 손을 내젓는 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서 저렇게 부지런히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있구나. 맥락과 상관없는 부분에 감탄이 솟아났다. 어느새 불쾌한 기분은 사라지고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상한 기분이군.’
도헌은 입을 열었다.
“학부 시절에 공부도 괜찮겠다 싶어서 대학원에 와 본 겁니다. 그럭저럭 할 만해서 계속하는 중이고.”
“학부 전공도 지금 전공하고 같으세요?”
“학부 전공에서 세부 전공으로 넘어왔어요.”
“아, 그러면 경제 수학 과목도 들으셨겠네요.”
“그야 전공 필수니까요.”
“으, 저는 이번 학기부터 들을 예정인데 걱정되네요. 수학 정말 못하거든요.”
“강의 잘 듣고 복습하면 할 만해요. 고등학교 때 입시 공부하듯.”
“고등학교 때도 수학을 제일 못했거든요.”
“…이 학교에 올 정도면 어느 정도 했을 텐데요?”
“아, 수학 점수 때문에 떨어질 뻔했어요. 이상하게 숫자하고는 친해질 수 없더라고요.”
의준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시계를 확인했다.
“엇, 벌써 시간이 이렇게…. 강의 시작하겠네. 형, 저 가 볼게요.”
도헌은 의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부하시는데 너무 오래 방해했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음료수 잘 마셨어요.”
“뭘요.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의준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에 몸을 돌렸다. 급히 도서관 길을 빠져나가는 그를 보며 도헌은 다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뭐지?’
몸을 돌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중에 음료수 캔을 버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멈춰 서서 쓰레기통을 찾으려던 그때 뒤에서 누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
고개를 돌린 도헌은 깜짝 놀랐다. 먼저 떠났던 의준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아, 죄송, 해요… 형.”
의준이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연락처, 알려 주시면, 안 돼요?”
학부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정보 교환의 의미도 없을뿐더러 선후배 교류도 귀찮았다. 무엇보다 의준과 연락처를 교환하면 아까처럼 의미 없는 대화에 시간을 낭비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그래요.”
대답을 내뱉은 직후 스스로도 놀랐다. 이성의 판단과 정반대의 대답은 누구의 결정인가.
의준이 휴대 전화를 꺼냈다. 그의 전화를 받아 들고 키패드를 또박또박 눌러서 자기 전화번호를 입력한 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도헌의 휴대 전화에 의준의 연락처가 표시되었다.
“와, 됐다.”
의준은 환하게 웃었다.
“그럼 가 볼게요, 형. 공부 열심히 하세요.”
“그쪽도요.”
“그쪽이 아니라 의준이에요.”
의준은 이렇게 말한 후에 몸을 돌렸다.
“나중에 봬요, 형!”
다시 멀어지는 의준의 등을, 이번에는 끝까지 지켜본 후에 도헌은 도서관에 들어섰다. 여전히 기분이 이상했다. 불쾌함과는 다른, 낯선 감정이 솟아올랐다.
‘드문 경험을 해서 그런가?’
열람실로 향하던 도중에 화장실에 들어간 도헌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멈춰 섰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흠칫.
그 얼굴이 너무 낯설어서 도헌은 몸을 떨었고, 그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
사방이 어둑어둑했지만 그가 있는 곳은 침실이었고,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꿈이었나?’
자각과 동시에 시선을 품 안으로 향했다.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코끝에 닿는 감촉과 고요하고 규칙적인 숨소리 그리고 따스한 체온이 동시에 느껴졌다. 의준은 그의 품에 잠들어 있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의준의 머리카락 사이에 입술이 닿았다.
‘옛날 꿈을 꾸기는 처음이군.’
품 안의 의준은 스물아홉 살. 꿈속의 의준은 스무 살.
벌써 9년 전의 일이었다.
‘의준이하고 만나고 그렇게 오래되었구나.’
의준의 첫인상은 아이 티를 벗지 못한 동그란 얼굴에 유달리 큰 눈동자를 지닌, 말 많고 잘 웃는 남자였다. 눈에 확 띄는 미남은 아니었지만 호감 가는 외모를 지녔고 웃는 얼굴이 무척 밝아서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대체로 비슷한 이미지지만.’
9년의 세월이 지나며 통통했던 볼이 매끈해지고 생김새나 체격도 어른스러워졌다. 하지만 때때로 도헌 앞에서 보이는 웃는 얼굴에서는 여전히 스무 살 시절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웃는 얼굴에 감정이 움직였다. 그 감정이 사랑임을 자각하기까지는 몇 개월이 걸렸지만.
‘첫눈에 반했던 건지도.’
도헌은 팔에 힘을 주었다.
“으음….”
품 안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헌은 아차 하고 팔을 풀었다. 의준이 얼굴을 찡그린 채 눈을 떴다.
“…형?”
“미안. 나 때문에 깼구나.”
“아니에요… 지금 몇 시예요?”
“글쎄. 잠시만.”
도헌은 사이드 테이블 위에 두었던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오전 여섯 시. 평일이면 몰라도 오늘 같은 휴일에는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좀 더 자도 돼.”
시간을 알려 준 후에 도헌은 의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의준은 도헌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 신기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
“옛날 꿈이요.”
의준이 대답했다.
“꿈에 학교에 갔는데, 도서관 앞에서 형을 봤어요. 대학원생 시절의 형이요. 그런데… 제가 형한테 말을 걸고 있더라고요?”
대학생인 자신이 대학원생인 도헌과 대화하는 모습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멀리서 지켜보던 꿈이었다.
“신기하더라고요, 꼭 남이 된 기분?”
의준은 키득키득 웃었다.
“와… 그렇게 보니까 알겠던데요? 제가 진짜 형을 귀찮게 했다는 거요.”
“그랬던가?”
도헌은 의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때의 나였다면 상대가 귀찮은데 참고 만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죠, 형은 단호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러면 보기보다 덜 귀찮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의준의 이마에 도헌의 입술이 닿았다. 의준은 눈을 살짝 감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 제가 갑자기 하소연해서 당황했었죠?”
“…놀라기는 했지.”
도헌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에게 진로 상담을 했던 후배는 없었으니까.”
“이상하네. 형은 말도 잘 들어 주고 적절하게 조언도 해 주셨는데.”
“다가오기 어려운 분위기 때문이었겠지.”
대학과 대학원 재학 시절, 도헌은 유달리 외모에 무심했다. 사이즈가 큰 티셔츠나 체크셔츠 그리고 청바지를 입고 머리는 덥수룩해서 눈을 거의 가리는 데다 유행에서 벗어난 두꺼운 테 안경을 낀, 면도도 잘 안 하고 웃는 일 없던 키 큰 남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들에게 그는 무해한 외톨이였다.
“쓸데없는 인간관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 나름 편했어.”
“그랬구나.”
의준은 도헌의 어깨를 슬쩍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제가 운이 좋았네요.”
“왜?”
“눈치 없이 형을 귀찮게 했는데도 받아 주셨잖아요.”
오후 12시에서 1시 사이, 점심시간과 겹친 공강 시간에 도서관에 가면 늘 도헌이 있었다. 도헌은 그 시간대에 도서관 앞 작은 휴게 공간에서 책을 읽으며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샌드위치나 빵에 라테 한 잔.
친구들과 지나갈 때는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혼자일 때는 종종 멈춰 서 말도 걸었다. 처음에는 앞에 선 채로 한두 마디. 그러다가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되었다. 대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중에는 일부러 그 시간에 도헌을 만나러 도서관으로 향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뻔하게 굴었네요.”
“뭐가?”
“그렇잖아요. 보통 남자가 남자를 만나러… 매일 같은 시간에 도서관에 찾아가지는 않으니까요.”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꽤 노력했다. 인사 한두 마디 이상의 대화를 이끌어 보려고 온갖 화제를 떠올렸다. 도헌이 책에 대해 대화하기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매일같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도 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도서관 외의 장소에서 도헌과 만났고 일상 잡담까지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아직도 형이 저 만나고 처음으로 폭소했던 날을 기억해요.”
“언제였는데?”
“여름이 좀 지난 즈음이었어요.”
등교 도중에 우연히 도헌과 만났다. 함께 걸어가던 도중에 근처 가게에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몇 년째 여름만 되면 인기를 끄는 노래였는데 도헌은 모르겠다고 했다.
‘이 노래를 모른다고요?’
의준은 도헌에게 노래에 대해 알려 주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멜로디에 맞춰 가사를 흥얼거릴 수 있는데 정작 제목도 부른 가수도 몰랐던 것이다. 의준은 당황했다.
‘아, 뭐더라. 그러니까 여기서 이렇게,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춤을 추는데. 동영상도 봤는데.’
초조함과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반쯤 들고 까닥거리며 리듬을 탔다. 바로 그 춤이 도헌의 웃음보를 자극했다.
“길 한복판에서 진짜 크게 웃었잖아요.”
의준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도헌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형, 제가 춤추는 모습이 꼭 꽃게가 유영하는 것 같다고 했다고요!.”
“내가? …너한테 그런 황당한 비유를 했어?”
“제 말이 그거라니까요?! 꽃게라니, 홍게나 돌게도 아니고 꽃게. 팔을 휘적휘적하는 모습이 꼭 밀물이 들어왔을 때 미처 피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꽃게 같다고. 나, 참… 황당해서.”
의준이 농담조로 투덜댔다.
“내가 무척 무례했군.”
“이제 와서요?”
“미안해.”
도헌은 웃으며 사과한 후에 의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의준은 웃음을 참으며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지난 일이니까 용서할게요.”
사실 의준이 그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달리 있었다.
폭소를 터뜨리며 드러났던 도헌의 눈동자가 너무 예뻤던 것이다.
러시아 출신인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던 연한 회색 눈동자. 평소에는 머리카락과 안경으로 가리고 있어서 훨씬 진해 보이는 데다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쳐다본 적도 없었던 그 눈동자가 감정을 머금고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의 기분이란.
“형 눈동자가 정말 예뻤어요.”
의준은 도헌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돌이켜 보면 그때 처음으로 자각했던 것도 같다. 이 남자, 서도헌에 대한 감정이 평범한 선배에 대한 존경이나 우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고 보니 형, 그 뒤에 머리 자르고 안경도 바꿨죠?”
주말을 지나고 도서관에서 도헌과 만난 의준은 깜짝 놀랐다.
도헌이 늘 앉아서 점심을 먹던 자리에 낯선 남자가 있었다. 이마가 드러날 만큼 짧고 단정하게 다듬은 머리에 얇고 세련된 안경을 낀 키 크고 멋진 남자였다.
서도헌의 변화는 조용하게 화제가 되었다. 도서관에 자주 오가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미남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났을 즈음에는 그가 서도헌이라는 이름을 지닌 대학원생이라는 정보가 퍼졌다.
“점심시간에 형을 만나러 가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곤 했죠.”
상대는 여자일 때도 혹은 남자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의준이 목격한 사람들은 거의 여자들이었다. 어느 날 의준은 도헌의 자리 맞은편에 앉아 그를 흘끔거리며 점심을 먹던 같은 과 동기 두 명과 마주쳤다.
“평소에 저와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다음날부터 갑자기 친한 척하더라고요.”
그들은 도헌과 의준이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의준에게 만남 주선을 부탁했다.
의준은 곤혹스러웠다. 동기들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도헌과의 관계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그를 괴롭혔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조차 다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상태를 눈치챈 도헌에게 모든 상황을 가감 없이 털어놓고 나서야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자리 마련해 줘. 내가 직접 거절할 테니까.’
도헌의 말에 의준은 당황했다. 그러면 그들이 도헌에게 나쁜 인상을 품을 터였다. 걱정을 털어놓자 도헌은 웃었다.
‘남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어. 그보다는 네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게 더 중요해.’
그 뒤로 도서관의 미남에게는 ‘성격 나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가볍게 접근하는 사람은 줄어들었고 의준은 두 번 다시 같은 부탁을 받지 않았다.
“…그 일을 계기로 사귀기 시작했죠.”
“그랬지.”
의준은 도헌을 빼앗기기 싫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도헌은 의준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백은 제가 먼저 했었죠?”
“사귀자고 말한 사람은 나였고.”
의준의 말에 도헌이 대답했다. 잠시 생각한 뒤에 의준은 이렇게 덧붙였다.
“먼저 손을 잡았던 사람은 형이었어요.”
“키스는 네가 먼저 했지.”
9년 전 일을 자신만이 아니라 상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의준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먼저 좋아했던 사람은….”
“나였어.”
“저였어요.”
완벽하게 겹쳐진 서로의 말을 듣고 의준과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 날 좋아했는데?”
“깨달은 건 형이 인기가 좋아진 뒤였죠. …형은요?”
“연구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네? 말도 안 돼.”
“어째서?”
“그때 저를 노려봤잖아요.”
“노려봤던 적은 없는데. 시선이 마주쳐서 놀라기는 했어도.”
도헌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의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대고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도와줄 만큼 상냥해 보였어?”
“…그렇게 물으시면 대답하기 난처하잖아요.”
도헌은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차갑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좋은 예로 그는 사귀고 처음 맞은 밸런타인데이에 받았던 초콜릿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려 했었다. 의준 외의 사람들이 주는 호의는 필요 없다는 의미에서였다.
‘사실 나를 배려하는 마음도 깃들었던 행동이었겠지만….’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첫눈에 반했다고요?”
“그래.”
도헌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제 어디가… 첫눈에 반할 정도던가요?”
“굳이 말하자면 눈이었을까.”
“눈이요?”
“나를 보던 네 눈이 정말 예뻤어.”
도헌은 두 손으로 의준의 얼굴을 감쌌다. 의준은 슬쩍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눈 예쁘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요.”
눈이 커서 어릴 때는 귀엽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젖살이 빠지고 얼굴이 갸름해지면서 큰 눈은 조금만 피곤하면 퀭한 느낌을 주곤 했다.
“그래? …내가 너무 말을 아꼈구나. 앞으로는 자주 말해야겠어.”
다정한 속삭임과 함께 입술이 눈두덩 위에 내려앉았다. 의준은 웃었다.
“저한테는 형 눈이 더 예쁜데요.”
창을 등지고 누운 데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기에, 도헌의 눈동자는 낮에 볼 때보다 약간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눈동자와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형 눈은 꼭 보석 같아요. 보는 방향에 따라 빛이 달라지거든요.”
“신비롭고 아름다워?”
“그 표현이 딱이네요. …그런데, 본인이 그렇게 말하기예요?”
“네가 했던 말이야. 학교 다닐 때.”
“제가요?”
의준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기억은 안 나지만, 왠지 제가 했을 법한 말이기는 하네요.”
하하하. 도헌이 웃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줄까?”
“뭔데요?”
도헌은 자신의 눈가를 어루만지는 의준을 향해 물었다.
“학부 4년간, 내 눈동자 색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대학원에 온 뒤에도… 아마 교수님을 빼면 네가 유일할 거야.”
“네? 이렇게 독특하고 예쁜 눈인데… 아무도 못 알아보다니요.”
의준은 조심스럽게 도헌의 안색을 살폈다.
“…서운하지 않았어요?”
“아니. 왜 서운했겠어, 관심을 바란 적이 없는데.”
도헌의 집안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던 교수는 굳이 눈동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학부의 동기나 선배들은 도헌에게 관심이 없었다. 외모를 꾸미지 않고 눈이 드러나지 않는 머리 스타일인 데다 겉돌던 남자에게 눈을 마주 볼 만큼 가까이 다가왔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를 만난 후에야 머리를 자르고 안경도 바꿨어. 네가 좋아했으니까. 네가 나를 더 보아 주었으면 해서.”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외모를 꾸미기는 처음이었다.
“네가 마음에 든다고 했으니까 그 모습을 유지했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관심 없었다. 도헌에게는 의준만이 중요했다.
“너만 날 좋아해 주면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도헌은 의준을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뺨에 머리를 대며 숨결처럼 자연스럽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는 도헌을, 의준은 부드럽게 마주 안았다.
“형은 원래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제가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쳤어도 누군가가 분명히 알아냈을 거예요.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제가 먼저 알아서 다행이네요.”
덕분에 형이 내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의준은 이렇게 덧붙이고 웃었다.
“이렇게 멋지고 응석도 잘 받아 주는 애인을 만났다니, 아무래도 평생 쓸 운을 형 만나는 데 다 썼는지도요.”
“내가 할 소리야.”
도헌이 대답했다.
“이렇게 귀엽고 멋지고 상냥한 녀석이 내 애인이라니, 전생에 큰 덕을 쌓은 게 분명해.”
“전생까지 들먹일 정도예요? 제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의준은 살짝 부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형에게 해 드린 것 없이 받기만 했던 기분이 들어요.”
첫 연애였다. 좋아하는 마음이 앞서서 실수도 많이 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잖아요.”
사소한 갈등에 속상해하고 툭하면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런 의준에게 도헌은 늘 먼저 사과했고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형이 제 응석을 전부 받아 주셨어요.”
도헌을 믿고 의지했다. 그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든든했다. 어쩌면 그래서 도헌이 떠났을 때 큰 충격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형에게 과할 정도로 많이 받았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
도헌은 의준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네가 나에게 준 것에 비하면 그 정도는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들일 뿐이야.”
“제가 뭘 줬는데요?”
의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헌이 대답했다.
“추석 연휴 직후. 기억 안 나?”
“…어어….”
기억이 나지 않아 애매하게 말을 흐리는 의준을 보며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의준이 2학년 가을을 맞았을 때 일이었다.
도헌은 2년째 석박사 통합 과정을 진행 중이었다. 박사 논문을 준비하며 연구실에서 이런저런 과제를 수행했지만 교수와 마찰을 빚었다. 유달리 많은 잡일과 불합리한 지시도 군소리 없이 수행하던 도헌이 어떤 일에 거부 의사를 밝혔고 교수는 크게 화를 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길 수 있던 일이었는데 시기가 좋지 않았지.”
당시에 도헌은 집안일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부산에 기반을 둔 기업을 운영하던 조부는 도헌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와 가업을 이으라고 종용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할 때 가업을 잇지 않겠다고 말씀 드렸었거든. 나는 분명히 의사 표시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할아버님은 철없는 소리라고 치부하셨어.”
도헌은 부산 친가에 발길을 끊었다. 그러자 장손에 대한 조부의 애정에 빌붙어 살아갈 생각이었던 부친은 아예 학교까지 찾아와 설득했다.
‘니 혼자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이다. 다 같이 좀… 잘 살아 보자꼬 하는 거지. 평생 기 한 번 못 펴고 살던 애비가 불쌍하지도 않나?’
애증의 대상이었던 부친과 크게 싸웠다. 때마침 연락해 온 모친에게 상황을 전했고 그녀는 도헌에게 러시아로 오라고 했다.
‘학교는 잠깐 쉬어도 괜찮아. 뭣하면 그만둬도 되고. 와서 나하고 여행이나 다니자꾸나. 마침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으니까.’
모친이 재혼을 앞두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도헌은 제안은 사양했다.
“친가의 원조를 거절하면서 외가에서도 원조를 받지 않기로 결정했었어. 학비나 생활비는 어머니에게 받고 있었지만….”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리기 그지없었지.”
친가와 외가 양쪽에서 독립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도헌의 인생을 독자, 장손으로 규정하고 장래에는 가업을 이으라고 결정한 조부가 싫었다. 낳아 주었다는 사실 외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부친이나 자신의 삶을 우선한 모친도 원망스러웠다.
‘평생 반항만 하고 살면 안 아쉽겠나?’
동갑내기 혈연이자 십 대 시절의 유일한 친구였던 영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도헌은 연을 끊기 위한 몸부림이라 생각했던 행동이 어른들의 눈에는 그저 치기 어린 반항 정도로 보인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라고 이렇게 인생을 낭비하고 싶은 줄 알아?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기는 뭐어가 어쩔 수 없어. 아이다 싶으면 때리치면 되지.’
‘그럴 수는 없어.’
반항하지 않으면 순응뿐이었다. 순응은 항복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내 인생을 살고 싶다고.’
여기서 포기하면 지금까지의 삶은 무의미해졌다.
치기 어린 반항에서 벗어나고자 부산을 떠났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진학했고 친가에서 인정하지 않는 학업을 계속했다. 그에게 학업은 투쟁이었다. 친가에서 벗어나기 위한.
언제까지 이렇게 투쟁해야 할까?
서른? 마흔? …죽을 때까지?
집안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는데 교수가 심기를 건드렸다. 평소 같으면 성질을 죽이고 넘겼겠지만 그날은 그러지 못했다. 교수가 그의 얼굴에 대고 자랑스러운 저서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인내심이 끊겼다. 도헌은 연구실을 뛰쳐나왔다.
“그날은 너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이었어.”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의준과 만났다. 처음에는 티를 내지 않고 잘 놀았지만 점점 피곤해졌다. 결국 데이트의 끝에 사고를 쳤다. 붐비는 거리를 지나다가 의준에게 시비를 건 남자의 멱살을 잡아 버렸다.
“…아, 기억나요.”
의준은 작게 중얼거렸다.
“커플이었죠. 그쪽은 제가 여자 친구 어깨를 일부러 쳤다고 생각하고 화를 냈었고요.”
도헌이 너무 살벌하게 화를 내며 덤벼드는 바람에 상대는 기가 질렸다. 의준과 상대 커플의 여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각자의 ‘남자 친구’를 말렸다. 하마터면 경찰을 부를 수도 있었던 위기를 이름 모를 여자와 의준이 팀워크로 넘긴 후에 도헌은 이성을 되찾았다.
‘미안해. 내가….’
도헌은 사과했다. 의준은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도헌의 팔을 잡고 걸음을 뗐다. 얼떨결에 의준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저렴한 술집이었다.
‘제가 살게요.’
그러니 실컷 마셔요. 의준의 결연한 표정에 못 이기는 척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쉴 틈 없이 다양한 화제로 이야기를 이끌던 의준은 아무 말 없이 도헌의 술 상대 역할을 수행했다. 함께 잔을 비우고 빈 잔에 서로 술을 따라 주고, 안주를 먹고 새 술을 주문했다.
의준이 그저 자신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도헌은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여는 데는, 의준 앞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에는 용기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교수가 나에게 책을 던졌어.’
마침 세 번째 주문한 생맥주 피처가 도착했을 때 도헌은 불쑥 이렇게 내뱉었다. 의준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어디 맞았는데요?’
그 질문을 들은 순간 봇물 터지듯 속내가 흘러나왔다.
짜증 나는 대학원 생활. 교수에 대한 불만. 통합 과정 수료까지의 막막함. 부친과의 마찰. 명절에 친가에서 겪은 일. 연상으로서, 듬직하게 보이고 싶어서 한 번도 내색한 적 없었던 불만과 분노 그리고 불안감을 전부 의준 앞에 토해 냈다.
의준은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때때로 도헌의 잔과 자기 잔에 술을 채우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이다.
두 시간여의 토로를 마친 후 도헌은 정신을 차렸다. 자괴감에 젖어 사과하려고 입을 열려던 도헌을 향해 의준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형, 많이 힘들었구나.’
그 한마디에 마음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도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의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거의 덮치듯이 그를 끌어안았다. 술 취한 사람들투성이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곳에서 도헌은 의준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은 채 투정하듯 내뱉었다.
‘너무 힘들어.’
의준은 도헌의 등을 토닥거렸다.
‘뭘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르겠어. 이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건가? 이미 최선을 다했는데?’
‘그러게요.’
긴 푸념을 들었어도 도헌의 전부를 파악했을 리는 만무했다. 당연히 현실을 깔끔하게 타개하는 대책을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애초에 도헌 자신도 갈팡질팡하고 있지 않던가.
‘제가 뭔가 조언을 드릴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준은 도헌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형이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일?’
‘네. 교수님이나 아버님이나… 할아버님이 바라는 일 말고, 형이 원하는 일이요.’
친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조부의 사업을 이어받고 싶지 않았다. 부친의 인생을 따라갈까 봐 두려웠다. 벗어나기 위해서 공부를 선택했다. 배움이 짧았던 조부가 유일하게 반대하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길은 모두 친가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내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수단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어.”
의준은 아무 말 없이 도헌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과 차분한 눈동자는 술집에서 마주 보았던 때와 같았다.
‘형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의준이 했던 질문이 되살아났다.
‘장래에는 뭐가 되고 싶어요?’
‘장래?’
‘네, 그러니까. 예를 들면… 10년 뒤 정도?’
10년 뒤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으냐고, 의준은 물었다. 도헌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네 질문을 듣고 나서야 지금까지 한 번도, 장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날 이후 도헌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연구실을 오가고, 부친의 연락을 흘려 넘기며 그는 계속 의준이 했던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미래.
“몇 달 동안 고민한 끝에 10년 뒤의 내 모습을… 내 삶의 목표를 정할 수 있었지.”
목표가 정해진 직후 그는 학위를 포기했다. 의준에게도 대학원을 그만두고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고 알렸다. 의준은 놀라면서도 결정을 반겼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도헌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네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꾸었어.”
도헌이 말했다.
“네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
처음으로 가슴 떨림을 경험하게 했던 상대에게 운명을 느꼈다.
“그때의 나에게 너는 첫사랑 이상의 존재였어.”
타인을 인생의 지지대 혹은 의지처로 삼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의준은 어느새 도헌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지지대가 되어 있었다. 도헌은 그 사실을 유학을 떠나던 날 공항에서 짧은 이별 통보 문자를 통해 실감했다.
“다른 사람 일이었다면 보다 이성적으로 대처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였기에… 날 지탱했던 사람이었기에 그러지 못했고 시야가 좁아졌어.”
“…미안해요, 상처를 줘서.”
의준이 사과했다. 도헌은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었어.”
“형 잘못도 아니에요. 형은 오해를 했을 뿐이니까요.”
“오해로 시야가 좁아져서 다시 만난 널 힘들게 했지.”
“…….”
의준은 반박하지 못했다.
“재회 후에 내가 한 잘못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형….”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보호하고 싶었던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잘못은 평생 사죄해도 모자라겠지만, 그래도 널 놓고 싶지는 않았어.”
아직도 공항에서 이별 메시지를 처음 봤던 때를 기억했다. 가슴이 뻥 뚫리고 발밑이 꺼져 버린 듯한 상실감과 심장이 짓이겨지는 듯한 고통이 생생했다.
“너에게 상처를 줬지만 널 놓아줄 수가 없어.”
“…….”
“그때도 지금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그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내가 더 잘할게.”
“이보다 더 어떻게 잘해요?”
의준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도헌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진심이야, 의준아.”
도헌이 속삭였다.
“네가 내 옆에 머무르겠다고 약속하면 뭐든지 해 줄 수 있어.”
“뭐든요?”
“뭐든.”
의준은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도헌의 두 뺨을 감쌌다.
“형이 계속 내 옆에 머물면 좋겠어요.”
그건 자신도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도헌의 귀에 이어지는 말이 스며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고. 소식조차 알 길 없어서 나중에는 정말 존재했던 사람일까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열 손가락이 도헌의 이마를, 눈썹을, 콧대를, 그리고 입술을 차례로 더듬어 내려가 마지막으로 턱에 모였다.
추억이 아닌 현재를, 꿈이 아닌 현실을 원했다.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의준이 바라는 것은 그뿐이었다.
“다시는 나를 떠나지 말아요.”
손길이 이끄는 대로 도헌은 고개를 숙였다. 따스한 숨결이 입술 사이로 스며들기 직전 그가 속삭였다.
“영원히 함께 있을게.”
입술이 겹쳐졌다.
다가오는 겨울, 의준의 여동생은 단기 연수를 떠날 예정이었다. 모친은 많이 나아졌지만 앞으로도 몇 개월간은 병원에 머무를 것이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의준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도헌이 있었다.
길고 굽은 길의 끝에 재회했던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길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