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 질투와 비밀과 해피 엔딩
사상 유례없던 폭염과 기록적인 강수량을 기록한 여름은 입추를 기점으로 거짓말처럼 기세가 꺾였다. 재택근무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하루 종일 냉방기를 가동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바깥 공기가 더 서늘해서 창만 열고 보냈는데도 충분했을 정도였다.
‘시간 한번 빠르네.’
의준은 석양에 물든 강변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러다 금세 겨울이 올 것 같았다.
“의준아.”
서재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의준은 네 하고 대답한 후에 걸음을 서둘렀다.
“서류 찾아 왔어요. 여기 둘까요?”
“그래, 고마워. ---이메일 좀 확인할래?”
“네.”
의준은 창가에 놓인 자기 책상으로 향했다.
붙박이 책장 외에 아무것도 없었던 서재에는 책상을 비롯한 가구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요양 기간 동안 재택근무를 위해 구입한 가구들이었다.
“메일 확인했어요. 답장은 제가 쓸까요?”
“그래, 김하나 과장한테 보내 줘.”
“네.”
도헌이 부상을 입은 뒤로 5주가 지났다. 최소한 12주 이상 안정해야 나아지리라는 의사의 진단과 달리 도헌은 경이적인 속도로 회복했다. 부러졌던 갈비뼈는 완전히 붙었고 후유증은 없었다.
‘완치되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조금 더 지켜봅시다. 과격한 운동이나 업무는 자제하시고요.’
도헌은 지난주 병원을 방문했을 때 의사가 했던 말을 지키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의준이 그러도록 감시, 아니 지원하고 있었다. 애인이 같은 집에 살면서 업무를 보조할 때 겪는 장단점을, 그는 매일 실감하고 있었다.
의준은 유능한 비서였다. 업무 처리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갑작스럽게 재택근무로 변한 환경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한 주에 한두 번 출근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도헌 옆에서 빈틈없이 업무를 보좌했다.
“서류 검토 마치시면 오늘은 마무리해요. 곧 저녁 시간이니까.”
“시간이 촉박하군. 천천히 검토하고 싶은데.”
“그러시면 내일 마저 하세요.”
의준의 말을 들은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근무 시간이 너무 칼 같지 않아?”
“재택근무는 까딱하면 과로하기 딱 좋은 조건입니다.”
의준이 대꾸했다.
“공식적으로 아직 요양 기간이고, 의사 선생님은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앉아 있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오늘은 다섯 시간이나 앉아 계셨잖아요.”
“한 시간 정도는 넘겨도 괜찮아. 이미 다 나았고.”
“전무님.”
의준은 진지한 얼굴로 도헌을 바라보았다.
“전무님께서 투자 분야의 전문가시듯 의사 선생님은 의학의 전문가세요. 그런 분이 무리하지 말고 쉬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할 말 없게 만드는군.”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기분 상하셨어요?”
“옳은 말에 기분이 왜 상하겠어.”
도헌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의준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리자 그를 향해 다가오는 의준이 보였다. 도헌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돌렸다. 의준은 그의 앞에 멈춰 선 후에 입을 열었다.
“…형이 무리해서 다시 아플까 봐 걱정이 돼서 그래요.”
말과 함께 의준은 두 손을 내밀었다. 도헌은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서재에서는 회사에서처럼 전무님이라고 부르겠다더니.”
“…….”
의준은 민망한 듯이 시선을 옆으로 향했다. 도헌은 웃으며 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걱정하는 거 알아. 그러니까 순순히 따르잖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도헌이 의준의 말을 어긴 적은 없었다. 의준은 자기 배에 닿은 도헌의 머리를 슬쩍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아는데도 자꾸 잔소리해서 미안해요.”
“미안할 필요 없어. 날 위해 하는 말인데.”
“그래도 듣기 싫잖아요?”
“잔소리를 듣기 좋아할 사람은 없을걸.”
도헌은 이렇게 말한 후에 의준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네가 하는 잔소리는 싫지 않아.”
도헌은 고개를 들었다. 민망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의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소한 점을 일일이 지적할 만큼 날 계속 보고 있었구나, 생각하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
“말도 안 돼.”
“정말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챙겨 주는 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근사했다.
“내가 요즘 얼마나 행복한지 짐작도 못 할걸.”
빛을 머금은 회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의준은 투정하듯 대꾸했다.
“그런 말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내뱉어요? 듣는 사람 민망하게.”
“아무에게나 그러지 않아. 너한테만이야.”
“그러니까, 그런 민망한 말을 어떻게….”
도헌은 천천히 일어섰다. 시선을 위로 향한 의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후에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겹쳤다.
“사랑해.”
입맞춤의 끝에 그가 속삭였다. 의준은 얼굴을 붉혔다.
“…하루에 몇 번이나 말하려고요?”
“아직 덜 했는데.”
어휴, 진짜. 싫지만도 않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의준을 보며 도헌은 웃었다.
‘이렇게 귀엽게 나오니까 더 말하게 되는 거야.’
물론 입 밖에 낼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정말로 화를 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의준이 귀엽다는 말을 싫어하는지 도헌은 알 수 없었다. 사실 직시에 따르는 민망함 때문일까.
‘그런 점도 귀엽지만.’
도헌은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만 퇴근해야겠어.”
“네?”
의준은 웬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도헌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저녁 전에 할 일이 생각났거든.”
“…잠깐만요, 설마 지금….”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밀착한 몸에서 생겨난 변화를 깨달으며 그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형, 잠깐만요, 의사 선생님이 무리하지 말라고….”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 하지 말라고는 안 했어.”
그건 그랬다. 하지만.
“…무리 안 할 자신 있어요?”
“…….”
도헌은 입을 열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의준은 새빨간 얼굴을 팍 찌푸렸다.
“아, 진짜. 빈말이라도 해요. 부끄러워지잖아.”
벨소리가 들렸다. 도헌의 휴대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도헌은 화면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누구예요?”
“영제.”
도헌은 전화를 받았다.
“뭐야.”
---뭐가?
짧은 대꾸에 짧은 되물음이 돌아왔다. 도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로 전화했냐고.”
---잘 있나 궁금해서.
“언제부터 내 안부를 챙겼는데?”
---회장님이 궁금해하신다.
“…아, 그래.”
도헌은 흘깃 의준을 바라보았다.
“다 나았어. 일상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말의 끝에 그는 의준의 허리를 어루만졌다.
“회사에도 빨리 복귀할 예정이야.”
“……?!”
의준은 깜짝 놀랐다.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다. 통화 중이라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당혹스러운 표정만 짓는 의준을 바라보며 도헌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믿어 줄 것 같거든.”
---마, 됐고. 부산 온나.
당황한 의준의 표정을 감상하느라 영제의 말을 흘려들었던 도헌은 뒤늦게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부산에 오라고.
“왜 갑자기. …무슨 일 있어?”
---일은 그쪽에 있었지.
영제가 말을 이었다.
---니 다쳤다는 소식 들은 뒤로 회장님이 밤에 잠을 못 주무셨다. 여사님이 이러다 초상 치르는 거 아니냐면서 걱정하신다. 그러니까 와가 멀쩡한 모습 비 드리라.
“…….”
---올 거제?
도헌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곤란해. 집에 있지만 일도 하고 있고, 병가 기간인데 장거리 여행은 좀.”
---주말 껴서 하루 연차 내면 문제없을 긴데? 그리고 임마. 다 나았다고 한 건 니잖아.
“병가로 쉬고 있는 상태에 여행을 위해 연차를 내기가 곤란하다는 거야.”
---니 걱정해서 밥도 거르는 노인네한테 얼굴 비 주라는 게 그래 싫나?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노.
영제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옳은 말이었기에 도헌은 울컥했다.
“그게 내 탓인가? 원인을 따지면 당신 아들이 잘못하는 바람에….”
---됐다. 마 치아라.
영제가 도헌의 말을 끊었다.
---니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 의준이 바꿔라.
“뭐?”
---의준이 바꾸라고.
“내가 왜 의준이를 바꿔.”
그러자 전화가 뚝 끊겼다. 이어서 의준의 책상 위에 있던 휴대 전화가 진동음을 냈다. 의준이 자리로 향하려 하자 도헌이 그를 잡았다.
“받지 마.”
“왜요.”
“영제일 거야.”
“알아요. …그렇다고 무조건 안 받을 수는 없잖아요.”
의준은 휴대 전화를 집었다.
“여보세요. 영제 형?”
---의준이냐?
“네, 형. 잘 지내셨….”
---살리 도.
“예?”
의준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영제의 설명은 이러했다.
부친이 친 사고에 휘말려 도헌이 입원할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도헌의 조부는 크게 화를 냈다. 그 결과 도헌의 부친은 치료를 빌미로 근처 요양 병원에 감금당했다. 그는 앞으로 어떤 일도 집안의 감시를 피해 벌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큰일을 처리한 후 조부는 서울에 혼자 입원 중인 손자를 걱정했다. 영제를 비롯한 측근들이 직접 올라가겠다는 본인을 말리자 부인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도 나이가 있었고, 간병하던 남편을 두고 떠나기를 망설였다.
도헌은 입원 중에 매일 한 번씩 영제를 통해 조부에게 호전 중임을 알렸다. 그러나 퇴원하고 연락이 뜸해지자 조부는 다시 걱정하기 시작했다.
영제가 말을 이었다.
---아니 어제 갑자기 내보고 올라가서 도헌이 새끼 수발을 들라는 거야.
“네?”
---아가 혼자서 밥도 못 먹고~ 끙끙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옆에 붙어 가가 돌봐 주라고….
“…….”
애라니. 의준은 저도 모르게 도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30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도 멀리 떨어져 사는 조부모에게는 그저 ‘애’일 뿐일까. 왠지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도헌이 물었다. 의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은 후에 영제를 향해 말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돼요?”
---부산에 온나.
영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도헌이 델꼬 와서 멀쩡한 모습 보여 주고, 온 김에 며칠 놀다 가라.
“어…. 그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의준은 난처하게 대꾸했다.
---니가 가자 그러면 거절 못 할 거 아이가.
“그…렇지 않을지도요?”
---니가 온다면 따라올 놈이라니까? 사람 살리는 셈 치고 온나. 어?
“으음….”
의준은 말을 흐리며 도헌을 바라보았다. 상황을 눈치챈 도헌이 휴대 전화를 내놓으라고 손짓했다. 건네면 전화를 끊어 버릴 것 같아서 의준은 대신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영제 형, 도헌이 형이랑 같이 들을게요.”
---마, 서도헌. 니 옆에서 또 전화 끊는다고 협박했나?
“닥쳐.”
도헌이 대꾸했다.
“의준이 곤란하게 만들지 마.”
---내가 뭘 어쨌는데?
“의준이에게 부산 오라고 부탁했잖아. 이 녀석이 가면 내가 따라갈 거라고, 아니야?”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우리 집 일에 의준이 끌어들이기 싫다고 했을 텐데.”
---마 새끼야. 이 정도 부탁도 몬 하나. 의준이랑 내 사이에. 안 그릏나, 의준아.
“네? 어… 네, 뭐….”
의준은 도헌의 눈치를 보았다. 도헌은 불쾌한 표정이었다.
‘형이 싫어하는데 강요하면 안 되니까.’
영제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역시 거절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려던 찰나 영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운대 앞 특급 호텔에 스위트룸으로다가 잡아 주께.
“……예?”
의준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스위트룸 숙박비에 체재비용 다 내가 낸다. 2박 3일 풀로.
“…….”
의준과 도헌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헌은 의준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고 휴대 전화를 받아 들었다.
“의준이하고 이야기해 보고 전화할게. 끊어.”
---10분 내로 대답 안 하면 내도 모른다. 없던 거로 할 기다. 30분 뒤에 회장님 뵈러 가야 한다.
“알았어.”
도헌은 전화를 끊고 의준을 바라보았다.
“가고 싶어?”
“어… 아니에요.”
의준은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제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망설여서.”
“아니야.”
도헌은 의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질책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가고 싶은지 궁금해서 물었어. ---부산, 가고 싶어?”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래.”
의준은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스위트룸이 끌려요.”
“흐음.”
“형이 가기 싫은데 꼭 가야 할 만큼 끌리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의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데 묵어 본 적이 없어서, 어떨지 궁금해서요.”
“그럼 가자.”
“네? 어.”
의준은 당황했다.
“아니에요. 저는 안 가도 돼요.”
“가고 싶잖아.”
“그건 스위트룸이라니까….”
“그러니까 가자고.”
도헌은 자기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의준은 도헌의 손을 잡았다.
“형, 부산 가기 싫잖아요.”
의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때문에 억지로 갈 필요 없어요.”
그것도 내 생각 없는 한 마디 때문에.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도헌은 그런 의준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부산에 가기 싫었던 이유는 부담스러워서야.”
조부는 대범하고 호탕했지만 가족 일에는 걱정이 과했다. 아들들과 손자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는 애정이 과하면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잘해도 잘못해도 걱정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
그 자리에서만 기분이 나쁘고 말았으면 몰라도 그런 기분은 돌아온 후에도 지속되곤 했다. 조부가 그를 아껴서 한 말이고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한 달에 한 번 조부의 얼굴을 보고 돌아와 며칠 동안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곱씹는 일은 정신 건강에 해로웠다.
귀국한 후로 거의 매달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 올라오자마자 너와 만났던 날은 달랐어.”
조부와 크게 다투고 갑자기 올라왔던 주말 저녁, 의준은 상우와의 약속을 도중에 취소하고 도헌에게 달려왔다. 그날 도헌은 처음으로 부산 일을 잊고 푹 잤다. 다음날의 개운했던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너하고 같이 가면 마음이 편할 테니까 괜찮아.”
“…….”
의준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대놓고 널 이용한다고 말해서 불쾌해?”
“아니요.”
의준은 도헌을 끌어안았다.
“형은 그렇게 날 생각해 주는데 난 너무 속물적이었구나 싶어서 미안해졌어요.”
“스위트룸 말이야?”
“스위트룸을 포함해서요.”
예전에 사귀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도헌과 여행해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설렜다. 설령 장소가 도헌이 내켜 하지 않는 고향이어도 함께 떠날 수 있다면, 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떠올리기도 했다.
“저 좀 한심하죠?”
“아니, 귀여운데.”
도헌은 의준을 마주 안으며 웃었다. 의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른답지 않은 욕심이라고 돌려서 지적하는 거죠?”
“왜 그렇게 비뚤게 받아들여. 정말 귀엽다고.”
말의 끝에 도헌은 의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결국 너도 나하고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이잖아.”
“그야… 그렇지만요.”
“그런 욕심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도헌은 휴대 전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기 무섭게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25분 지났다. 이럴 기가?
“스위트룸에 룸서비스 자유. 샴페인하고 와인도 몇 병 넣어 줘. 목록은 나중에 줄 테니까.”
---…어쭈.
“그리고 향주 누님네 일식집 두 자리 예약도.”
---거기 예약하려면 세 달 기다려야 하는 건 알제? …아이지, 아니까 했겠지. 망할 새끼가.
---…언제?
“이번 주말 껴서. …의준아, 금요일?”
도헌이 의준에게 물었다. 의준은 빠르게 기억 속 일정을 확인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에 내려갈게. 시간은 교통편 예약하고 알려 주지. ---그래.”
도헌은 통화를 마무리 짓고 의준을 바라보았다. 의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올해 병가 외에 거의 연차를 안 쓰셨던데, 연차 신청하면 대표님이 좋아하시겠어요.”
“그분은 놀 때는 놀아야 한다는 주의니까. 연말에 잔소리를 덜 듣겠군.”
“부지런히 소진해서 칭찬을 듣는 방향도 있어요.”
의준은 문득 자기 연차를 떠올렸다.
“아, 맞다. …저는 연차가 없을 텐데.”
올해 신입으로 입사한 의준에게는 7일 남짓한 연차만 있었다. 그나마 초반에 어머니 병원 문제와 자기 건강 문제 등으로 소진한 상태였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내년 연차를 당겨 쓰게 생겼는데요. 우리 회사에서 그게 되던가?”
“모르겠군. 하지만 수행 비서는 임원과 동행하면 업무로 간주되니까 출장으로 처리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아니죠. 업무가 아니라 사적인 여행인데.”
의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헌은 웃었다.
“공과 사 구분에는 단호하구나.”
“그러자고 한 건 형이었잖… 아니지, 전무님이셨어요.”
“지금 대화에 그 호칭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윽….”
의준은 말문이 막혀서 얼굴을 붉혔다. 도헌은 의준을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연차에서 차감해도 괜찮아. 사적인 일에 비서를 동원하는 경우에는 종종 그렇게 연차를 공유하는 일도 있었어. 전에 김하나 과장에게도 하루 제공한 적 있고.”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요?”
“될 거야. 어차피 내 연차는 남아돌 테니까.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41일 남았어요. 올해 연차만.”
의준은 대답한 후에 웃었다.
“형, 정말 일만 하셨네요.”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
일 외에는 취미도 없었고 굳이 시간을 들여서 가고 싶은 곳이나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돌이켜 보면 정말 재미없는 삶이었다.
“이제는 네가 있지만.”
“제가 있으면 뭐 달라요?”
“다르지.”
도헌은 웃었다.
“너하고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데도 많아.”
“…….”
어쩌면 처음에 내켜 하지 않던 부산행을 수락한 데 대해 의준이 미안해하니까 배려 차원에서 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의준은 도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겹쳐졌다. 자연스럽게 몸이 밀착하고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신경이 쏠렸다.
“…형, 아직 네 시예요.”
엉덩이로 내려가는 도헌의 손을 의식하며 의준이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아직 업무 시간…. …윽.”
목덜미에 숨결이 닿는 바람에 의준은 어깨를 움츠렸다. 도헌은 의준의 쇄골 부근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자.”
“하지만.”
“일은 아까 끝났잖아.”
도헌은 의준의 다리를 한 팔로 감싸 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당황한 의준이 도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잠깐만요, 형…!”
물론 도헌은 멈추지 않았다.
서재를 벗어난 두 사람은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사라졌다. 그 뒤로 오랫동안, 두 사람은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금요일 오전, 서울역은 주말에 비해 한산했다.
예약한 기차의 출발 시간 30분 전에 역에 도착해서 커피를 사고 플랫폼으로 내려가 10분 전 승차 안내를 듣고 기차에 올랐다.
“엇.”
예약한 특실 좌석을 찾아 통로를 걷다 말고 의준이 멈춰 섰다. 뒤따르던 도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뇨. 이 자리….”
의준이 1인석을 가리키며 도헌을 돌아보았다.
“7A석요. 형이 늘 앉는 자리네요?”
“아, 그렇군.”
도헌은 한 달에 한 번 조부를 뵈러 부산에 내려갔고 매번 같은 시간 같은 기차를 탔으며 같은 좌석에 앉았다. 특실의 1인석, 7A석이 바로 그 자리였다.
“혹시 부산 내려가면서 다른 자리에 앉기는 처음이에요?”
“아니, 종종 먼저 예약한 사람이 있으면 다른 자리에 앉았어. 하지만 늘 1인석이었지. 2인석 예약은 오늘이 처음이야.”
“그러시구나.”
도헌은 이렇게 대답하며 휴대 전화 화면에 떠 있는 기차표에서 좌석 번호를 확인했다. 7A 석에서 사선 뒤쪽 방향에 그들의 좌석이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
도헌이 창가 자리를 가리켰다. 의준은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형이 안쪽에 앉으세요.”
“들어가.”
도헌은 의준을 가볍게 밀었다. 마침 다른 손님이 차량에 들어섰기 때문에 의준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도헌은 복도 쪽 자리에 앉았다. 의준은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쪽 자리가 상석이니까 형이 앉아야 하는데요.”
비서이고 나이도 연하이니까. 의준의 생각을 읽었는지 도헌은 피식 웃었다.
“상석이면 더욱 네가 앉아야지.”
“…예?”
“애인이잖아.”
“그,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왜 상관이 없어.”
도헌은 의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준의 귓가에 그의 숨결이 스쳤다.
“넌 내가 여기 앉히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 이 형은 대체 어떻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예전에는 이런 남자가 아니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한 번 하기까지도 하루 종일 걸렸던 남자였다.
‘손만 잡겠다고 허락을 두세 번씩 받던 사람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도헌을 보며 의준은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도헌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의준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며 잡은 손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러나 손등에 입을 맞추기 직전 차량 안에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으헉…!’
의준은 화들짝 놀라 손을 뺐다. 도헌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던 그때, 그들 옆을 지나던 손님들의 가방이 도헌의 머리를 스쳤다.
“앗, 형. 괜찮아요?”
“괜찮아.”
『앗, 미안해요.』
도헌의 대답 위로 사과하는 목소리가 겹쳐졌다. 외국어. 여자 목소리.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복도에 체구가 작은 여자가 서 있었다.
『괜찮아요? 세게 부딪쳤어요?』
『아니, 괜찮습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여자에게 도헌은 점잖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자는 안도한 표정을 지으면서 도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요?』
미국에서 관심이 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 때 흔하게 사용하는 질문을 한국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혼자였다면 예의 바르게 넘겼겠지만 의준이 지켜보고 있었다. 도헌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닐 것 같군요.』
여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불쾌했나 생각하던 순간 갑자기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대니얼!』
“……?”
여자가 도헌의 팔을 덥석 잡았다.
『대니얼 맞지? 나야, 태미. 기억 안 나?』
『…태미?』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태미 리우?』
『그래!』
그녀는 도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헌이 손을 잡자 그녀는 그 손을 다른 손으로 마주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세상에! 대니얼! 바다 건너 타국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널 다시 만날 줄은 몰랐어!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너도 건강해 보이네.』
『나야 건강 빼면 시체인걸. 어디 가는 길이야? 부산?』
『맞아. 너도?』
『나도.』
이어서 태미는 일행과 함께 여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는 이틀 전에 입국했고 일주일 정도 전국 관광지를 돌아다닐 예정이라고 했다.
『친구의 조언대로 일단 부산부터 시작해서 서울로 거슬러 올라오기로 했어. 오늘이 여행 첫날이야.』
『그렇군.』
태미는 도헌의 뒤로 시선을 향했다.
『친구?』
『아.』
도헌은 고개를 돌렸다. 의준은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이의준이라고 해. 내….』
도헌은 소개 도중에 말을 멈췄다. 잠시 의미심장하게 의준을 바라보던 그가 태미에게로 시선을 향하며 말을 이었다.
『내 친구야.』
의준은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태미가 웃으며 의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태미예요.”
태미는 비교적 정확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의준은 그녀와 악수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의준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이준, 이준? 어, 미안해요, 발음이 좋지 않아서.』
『준이라고 부르세요.』
『그래도 돼요? 반가워요, 준.』
태미는 밝게 인사한 후에 다시 도헌을 바라보았다.
『대니얼도 여행? 부산 어디서 묵어?』
『해운대 쪽 호텔에.』
『그래? 우리도 하루는 해운대에 가는데. 연락처 알려 줘, 시간 되면 차라도 한잔하자.』
태미가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도헌은 순순히 연락처를 입력해 주었다.
『나중에 연락할게.』
『그래.』
열차 출발 안내가 나오자 태미는 자리로 돌아갔다. 의준과 도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친구분이세요?”
의준은 좌석 사이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열차 맨 뒤쪽 자리로 향하는 태미가 보였다.
“유학 시절에 알던 사이야. 전공이 같았어.”
“그러셨군요.”
의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태미가 손을 흔들었다. 의준도 슬쩍 손을 흔든 후에 고개를 바로 했다.
“미인이네요.”
“의준아.”
도헌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의준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태미에게 널 친구로 소개한 이유는 그녀와 내가 오래 연락하지 않던 사이라서야.”
“…….”
“친구라기보다 타인에 가깝고 너에게는 초면인 사람 앞에서 너와 합의도 없이 우리 사이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어.”
표정과 말에서 진심이 전해졌다. 의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경 안 써요. 저도 모르는 분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고요.”
“…그래?”
도헌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
열차가 출발했다.
약한 의문과 불안감 그리고 호기심을 실은 채 열차는 남쪽으로 향했다.
***
부산역에 도착해 개찰구를 빠져나온 의준과 도헌을 맞은 사람은 서영제였다.
“왔나.”
의준은 꾸벅 인사했다.
“영제 형, 잘 지내셨어요?”
“어. 내야 잘 지냈지. 오느라 고생했다. 그건 뭐고. 선물?”
“네, 도헌이 형이 할아버님 댁에 가져갈 거라고….”
“뭘 이런 걸 다 사 왔노. 회장님이 좋아하시겠네.”
영제는 웃으며 종이 백을 받아 들었다. 도헌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차는?”
“주차장에.”
딱 두 마디로 대화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뗐다. 의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그들 앞으로 거대한 캐리어 가방과 배낭을 멘 여자 두 명이 지나갔다.
『대니얼! 준!』
태미가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해운대에서 봐!』
도헌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고 의준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지나가자 영제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도헌을 바라보았다.
“누고?”
“친구.”
“니한테 저런 친구가 있었나?”
“미국에서 유학할 때 알던 친구분이시래요.”
대답할 생각이 없었던 도헌 대신 의준이 말했다.
“차 태워 준다 하지.”
“저희도 그러려고 했는데, 차이나타운 구경을 한 후에 숙소로 가신대서 시간이 안 맞았어요.”
“숙소는?”
“해운대래요.”
“그렇나. 다시 본다고?”
“네, 뭐.”
의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영제가 여자들에게 관심이 있어 보여서였다.
‘이분도 남자하고… 아니었나? …여자에게도 끌리시나?’
타인의 관심사는 상관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김상우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상우하고는… 잘 안 되셨나.’
의준은 김상우가 서영제와 다른 의미로 친밀한 사이라는 사실을 일주일 전에 알았다. 놀랍게도 그 사실을 의준에게 알려 준 사람은 의준도 영제도, 그리고 상우도 아니었다.
‘상우 오빠, 남자 좋아한대.’
일주일 전에 모친 병실에서 만난 동생 소영은 이렇게 말했다. 때마침 햄버거를 베어 물었던 의준은 하마터면 큰 덩어리를 그대로 넘길 뻔했다.
‘무슨… 소리야. 어떻게… 상우가 그랬어?’
‘응.’
의준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설마 상우가 그녀에게 자기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리라. 만일 그랬다면 곤란했다. 왜냐면 소영은 상우를….
‘상우 오빠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는데, 자기는 다른 사람하고 사귀고 있어서 받아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
‘…어?’
사귀고 있다니. 그는 상우와 사귄 기억이 없었다. …내가 아닌가? 그러면 누구지?
‘그래서 그 사람하고 헤어진 뒤라도 괜찮다고 했어. 난 계속 상우 오빠를 좋아하니까, 그때라도 날 봐 달라고. 그랬더니… 나를 동생 이상으로 본 적도 없고 설령 친구 동생이 아니어도 여자는 어렵다고….’
겁 없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찾아갔다는 말에 야단을 치려다가 문지방도 넘지 못하고 밖에 서서 고백하고 차였다는 말에 그만 화가 누그러졌다. 이어서 상우가 말한 ‘사귀는 중인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정답을 알려 준 사람은 도헌이었다.
‘영제일걸.’
술을 마시며 잡담을 하다 말고 소영의 이야기를 꺼낸 의준에게 도헌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의준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듣고 나니 두 사람의 행동이나 말에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상우가 그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날에 영제가 그의 집에 올라갔던 이유도 그러면…. 아니, 잠깐만. 날 좋아했는데 영제 형하고 사귀었어? 아니면 그때는 사귀기 전인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진실이었다. 호기심이 솟아났지만 꾹 참았다. 타인의 사생활을 캐묻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헤어졌다니.
‘상우도 행복해지기를 바랐는데.’
의준은 아쉬운 기분을 느꼈다.
지난 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사이에 의준과 도헌을 태운 영제의 차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운전 좀 살살 해. 사고 나는 줄 알았어.”
“여는 이래야 사고 안 난다.”
도헌이 핀잔을 주자 영제는 이렇게 대꾸한 후에 앞장서서 로비로 향했다. 도헌은 의준와 나란히 서서 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네? 네. …왜요?”
“안색이 안 좋아. 멀미했나 싶어서.”
“아니에요. 잠깐 생각 좀 했어요.”
“그래?”
도헌은 의준이 한 손에 들고 있던 백 팩을 받아 들었다.
“어, 형. 제가 들게요.”
“괜찮아.”
도헌은 한쪽 어깨에 백 팩을 메고 다른 손으로 의준의 어깨를 감쌌다. 먼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영제가 그들을 향해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의준은 걸음을 서둘렀다.
스위트룸 전용 체크인 카운터에서 수속을 마친 후 그들은 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도헌이 입을 열었다.
“이 시기에 용케 스위트룸을 잡았군.”
“잡으라매?”
“…정말 잡았을 줄은 몰랐어.”
도헌이 ‘스위트룸’이라고 부르는 방의 정식 명칭은 스페셜 스위트였다. 각각 보석 이름이 붙어 있으며 총 네 곳뿐인 방으로 늘 사전 예약이 차 있기로도 유명했다.
“이 시기에 비어 있는 방이 없을 텐데, 무슨 수를 썼어?”
“피, 땀, 눈물이라 하고 싶지만, 그냥 돈 더 썼다.”
영제가 이를 부득 갈았다.
“1박에 800, 거기다 100만 원 더 얹어서 양도받았다고.”
호텔 측이 그런 예약자 변경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기존 예약자를 찾아내 설득했는지는 알 바 아니었지만 분명히 돈 이상의 노력이 들었으리라. 도헌은 피식 웃었다.
“고생 좀 했겠군. 고마워.”
“병 주고 약 주네.”
영제가 문을 열며 대꾸했다.
“내 고생 생각해서 아주 알차게 써먹어라.”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방 안에 들어섰던 의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와….”
의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형! 봐요, 바다가 곧장 보여요! …우와!”
거실을 가로질러 창가로 향하는 의준을 본 도헌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영제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의준아. 거 열고 나가면 발코니다. 나가 봐라.”
“어, 진짜다.”
의준이 창을 열었다. 건조하고 청량한 실내 공기 사이로 특유의 향과 습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는 의준을 보며 도헌이 입을 열었다.
“의준이가 좋아하네. 이 방으로 하길 잘했어.”
“마. 예약하고 돈 낸 건 나거든. 뭔데 니가 생색이고.”
영제는 이렇게 대꾸한 후에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네 시가. 한 30분 있다가 출발하면 되겠다.”
“저녁은 여섯 시에 드시지 않던가?”
“어, 근데 오늘 하실 말씀이 있다 하시더라. 먼저 이야기하고 밥 먹는 게 낫지 않나?”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심각한 건 아닐 기다. 아, 보약 지으셨던데. 그거 설명은 좀 하실지도.”
“…….”
도헌은 실내를 둘러보았다. 거실과 다이닝 룸 그리고 화장실에 욕실이 딸린 메인 베드룸이 나란히 바다를 향해 배치된 널찍한 공간. 그리고 욕실로 구성된 간결하지만 넓은 공간. 거실에서는 맞물린 양쪽 유리창을 통해 바다를 볼 수 있었고 다이닝 룸과 침실에서도 같은 풍경을 끊기는 일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거실과 침실에는 바람을 쐴 수 있는 발코니도 붙어 있었다.
“의준아.”
발코니에 나갔던 의준이 다시 거실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하고 영제는 조금 있다 나가야 할 것 같아. 혼자 있어야 하는데, 괜찮겠어?”
“그럼요. 애도 아닌데요.”
내려오기 전부터 오늘 저녁에 도헌이 조부모를 방문할 예정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부산에 내려오지 않았던가.
“미안해, 기껏 같이 왔는데 혼자 방에 두고 나가서.”
“괜찮아요. 우리 일정은 내일부터인데요, 뭐.”
의준은 웃었다.
“방이 너무 넓어서 여기저기 탐험하다가 시간이 다 가겠어요. 제가 심심할 걱정은 안 하셔도 되니까 가서 잘 뵙고 오세요.”
의준은 이렇게 말하며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그를 따라 걷던 도헌은 침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의준을 슬며시 끌어안았다.
“앗. 형, 잠깐….”
“괜찮아, 문 닫았어.”
침실 문은 어느새 닫혀 있었다. 도헌은 의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대며 속삭였다.
“저녁을 혼자 먹게 하다니 마음이 좋지 않아.”
“제가 밥도 혼자 못 먹을 사람 같아요?”
“혼자서 대충 때울까 봐 그러지.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 사다가 먹고 만다거나.”
“윽….”
내심 그럴 생각이었던 터라 의준은 흠칫했다. 도헌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룸서비스 시켜 먹어. 메뉴에 없는 건 아까 체크인한 라운지에 연락해서 배달 부탁하고. 미리 말해 둘 테니까.”
“룸서비스… 비쌀 텐데요?”
“돈은 영제가 내니까 마음껏 시켜도 돼.”
도헌이 이렇게 말하자 침실 밖에서 영제의 외침이 들렸다.
“다 들린다!”
의준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도헌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진심이야. 뭐든 제대로 먹어. 내 카드도 주고 갈 테니까.”
“방에 있기 답답하면 내려가서 먹어도 된다. 방 호수 말하면 알아서 걸어 줄걸.”
영제가 미닫이문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그리고 쩌~기 아래쪽에 온수 풀 있다. 구경 가도 되고. 밤에 뜨신 물에서 바다 보면 장난 아니디.”
“그, 그래요?”
의준은 이렇게 대꾸하며 슬쩍 도헌의 품을 빠져나오려 했다. 도헌은 의준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혼자는 가지 마. 질 나쁜 놈들도 있으니까.”
“질 나쁜 놈들이요?”
“집적대는 놈들.”
“아….”
의미를 들은 후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사람들은 주로 여자들을 노리지 않나요?”
“100%는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만….”
타인에게 집적거릴 목적으로 온수 풀에 찾아온 사람 중에 동성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의준 같은 남자를 노릴 확률은 얼마나 높을 것인가.
“형이라면 몰라도 저를 헌팅할 사람은 없을걸요.”
도헌이 근거 없는 걱정을 하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에 의준은 농담조로 대꾸했다.
“모르는 일이지.”
“네?”
“나처럼 너에게 첫눈에 반하는 사람이 없으리라고는 보장 못 하잖아.”
“아이고, 참말로 미치겠네.”
영제가 비명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거실로 나가 버렸다.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 그런 일은 없다니까요. 저 같은….”
의준은 말을 멈췄다. 도헌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하여간 형은….’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만에 하나 그런 사람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가 상대하지 않을 테니까.”
“……!”
“설마 제가… 좋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나 따라갈 놈으로 보여요?”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답 후에 도헌은 의준의 머리에 자기 머리를 댔다.
“걱정이 과하다 못해서 널 의심하는 꼴이 되었구나. 미안해.”
“아셨으면 됐어요.”
의준은 고개를 돌리며 도헌의 뺨에 슬쩍 입술을 댔다. 이어서 품 안에서 몸을 돌리며 도헌을 마주 보았다.
“저녁 잘 먹고, 온수 풀에는 안 내려가고 방에 얌전히 있을 테니까 잘 다녀오세요.”
“그래.”
도헌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의준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도헌이 아쉬운 듯이 다시 입술을 가까이하려던 찰나 거실에서 영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고 가자!”
“헉!”
영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었다. 의준은 깜짝 놀라서 도헌의 품을 벗어났고 도헌은 불쾌한 표정으로 문밖을 노려보았다.
내켜 하지 않는 도헌과 능글맞게 웃던 영제를 떠나보낸 후 의준은 다시 거실 발코니로 나갔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시원한 바닷바람 사이로 해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메아리쳤다.
여행다운 계획 하나 세우지 않고 내려온 참이라 불안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 앉아 바다만 하루 종일 보아도 시간이 훌쩍 갈 것 같았다.
“아, 그렇지, 엄마 보여 줄 사진 찍어야겠다.”
의준은 휴대 전화를 꺼내 풍경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낮에 보는 바다 풍경도 근사하지만 밤에도 멋질 것 같았다. 내일은 해변 산책을 해야겠다. 동백섬까지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형하고 같이 가야지.’
이런 여유는 오랜만이었다. 의준은 여행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어서야 의준은 저녁을 먹으러 방 밖으로 나왔다. 침대에 드러누워 잠깐 눈을 감았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훌쩍 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와… 어떻게 그렇게 푹 잤지.’
침구가 편해서였을까. 아니면 아침부터 움직여서 피곤했을까. 어쨌든 푹 잤더니 머리는 맑았고 배가 고팠다. 룸서비스를 시킬까 했지만 잠도 깰 겸 밖으로 나왔다.
---11시 전에 돌아갈게. 밥은 먹었어?
‘지, 금, 먹으러, 가요.’
방을 나선 후에 받은 도헌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며 아래로 내려왔다.
‘깜박, 잠들, 어서, 지금, 깼어요. 뷔페, 레스토랑, 가려고요. 괜찮, 죠?’
---당연하지. 든든하게 먹어.
‘네.’
배가 고프기는 해도 잠이 덜 깼으니 많이 먹을 자신은 없었지만 일단 대답을 했다.
‘첫 접시에 음식 잔뜩 담아서 사진 찍어 둬야겠다.’
의준은 이렇게 생각하며 식당에 들어섰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로 이동하던 의준은 옆 테이블에서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어?”
『어머나!』
혼자 앉아 있던 태미가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준, 맞지?』
『태미, 안녕하세요. …이 호텔에 묵고 계셨어요?』
『아니, 옆 호텔이야.』
태미가 대답했다.
『이 식당이 맛있다고 추천을 받았어. 친구는 자고 싶다고 해서 나만 왔지. 준은 혼자야? 대니얼은?』
『아… 그분은 따로 약속이 있어서 나가셨어요.』
『준도 혼자네? 같이 먹어, 그럼.』
거절하기도 민망한 상황이라 의준은 태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음료수를 가져오고 한 차례 접시에 음식을 담아서 돌아온 후에 가벼운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니얼하고 준은 친구라며? 어떻게 만났어?』
『…어, 예전에 같은 대학교를 다녔어요. 지금은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요. 그가 보스이고 저는 비서죠.』
『그렇구나. 대니얼은 잘하고 있어? 물론 유능하겠지만.』
『물론이죠.』
의준은 웃으며 대답했다. 도헌은 회사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투자 업계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젊은 임원이었다. 처음에는 회사 홍보 차원에서 고용한, 실력보다 외모와 학력을 내세운 초보라는 평가도 받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꾸준히 실적을 내면서 편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도 함께 일하며 많이 배우고 있어요. 존경할 만한 상사입니다.』
『준은 부하 직원이라고 했던가?』
『비서입니다. 수행 비서라고….』
『아아, 개인 비서. 오래 같이 일했어?』
『아니요, 제가 입사한 건 올해 중순이라 아직….』
『그렇구나. 그러면 준도 모르려나.』
『뭘요?』
『대니얼의 새 여자 친구.』
생각지 못한 대답에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아까 전화로 내일 같이 관광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봤는데 거절하더라고. 사귀는 사람이 있어서 오해받고 싶지 않다면서. 대신 괜찮은 식당 목록을 공유해 주겠다고는 했지만.』
태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데이트 신청을 한 것도 아닌데, 왠지 차인 기분이 들더라니까.』
『하하….』
『하지만 누구인지 모를 여자 친구에게는 믿어도 좋은 멋진 남자 친구의 자세겠지.』
여자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이지만 그 말에는 깊이 동의했다. 서도헌 같은 남자는 직장에서건 사적인 자리에서건 눈에 띄었다. 의준에게 매력적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일일이 경계할 수도 없고 형이 알아서 쳐 내 주면 고맙지.’
이런 생각을 하던 의준의 귀에 태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부터 그런 성격이었어. 나하고 사귈 때도 한눈은 안 팔았거든. 원래 연애에 관심이 없는 편이기도 했고.』
『…예?』
의준은 놀라서 태미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응? 내가? …뭐라고 했는데?』
『방금… 사귀었다고….』
『맞아, 나 대니얼하고 사귄 적 있어. 대니얼이 말 안 했구나? 』
태미는 웃었다. 의준은 웃지 못했다.
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태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떻게 헤어져 방으로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의준은 방에 돌아와 거실에 서서 발코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졸업을 앞둔 시기에 사귀었다고 했다. 교제 기간은 사전 데이트를 포함해서 한 달 남짓. 먼저 접근했던 쪽은 태미였고 이별을 선언한 사람도 그녀라고 했다.
‘나하고 헤어지고 4년 뒤에 사귀었구나.’
오해로 인해 헤어졌어도 서로 남남이었던 시기임은 분명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도헌은 인기가 많은 남자였다. 오히려 유학 생활 동안 연애다운 연애 한번 없이 마지막에야 한 달 정도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점이 이상할 정도였다.
‘머리로는 알겠어. 알겠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사람을… 사귄 적이 있구나.’
어둠에 젖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기대했던 밤바다 풍경인데도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랬구나.”
고요한 분위기와 미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의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면서 의식이 돌아왔다. 감은 눈꺼풀 바깥이 환했다. 햇살이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커튼이 열려 있는 모양이었다.
‘…몇 시지?’
머리맡을 더듬었다. 베게 아래로 파고들었던 휴대 전화를 찾아 화면을 밝혔다. 한쪽 눈만 떠서 확인한 시간은 오전 일곱 시. 평일이었다면 이른 시간이 아니었지만 휴일에는 굳이 부지런을 떨 필요가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으음….”
휴대 전화를 놓고 몸을 옆으로 돌리며 팔을 벌렸다. 큼지막한 더블베드. 그의 옆은 의준의 자리였다. 간밤에 도헌이 방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그 자리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피곤했겠지.’
도헌이 입원한 동안 의준은 지극정성으로 그를 간호했다. 퇴원 후에는 함께 산다는 이유로 주변 일처리도 도맡았다. 지난 두 달간, 도헌은 공사 양면으로 의준에게 의지했고 의준은 싫은 표정 한번 짓지 않고 그를 도왔다.
‘이번 여행도 말이 여행이지 의준이에게는 부담이었을 텐데.’
오늘 일정에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어제 최선을 다해 손자로서의 서비스를 하고 돌아왔다. 오늘부터 1박 2일간 오직 의준에게 헌신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식당도 예약했고 관광 코스도 몰래 짜 놓았다.
‘우선 잠꾸러기를 깨워야겠군.’
도헌은 슬쩍 웃으며 도톰하게 솟아오른 이불을 덥석 끌어안았다.
“의준아, 일어….”
이불이 허무하게 꺼지는 바람에 도헌은 말을 멈췄다. 이불에 싸인 채 품에 들어왔어야 할 남자가 없었다.
“……?”
도헌은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의준아?”
욕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도헌은 일어서서 욕실을 확인한 후에 거실로 나왔다. 의준은 거실은 물론 발코니에도 없었다.
“…어디 간 거야?”
도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다시 침실로 향했다.
베개 옆에 두었던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 착신 이력에서 의준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도헌은 날듯이 침실을 벗어났다.
“어? 형. 일어나셨어요?”
의준이 웃으며 인사했다. 도헌은 안도하면서도 의아한 투로 물었다.
“아침부터 어디 갔었어?”
“아, 아래 편의점에요. 물 좀 사러….”
“물은 냉장고에 있잖아.”
“보리차가 마시고 싶었는데 생수밖에 없더라고요.”
의준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거실 커피 테이블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에서 유리병을 꺼내 도헌에게 내밀었다.
“이건 형 마실 꿀물.”
“…….”
도헌은 작고 귀여운 꿀벌이 그려진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어제 언제 들어왔어요?”
“열한 시쯤.”
“먼저 자서 미안해요. 씻고 잠깐 눕는다는 게….”
“미안할 것 없어.”
도헌은 음료수를 든 채 뒤에서 의준을 끌어안았다. 의준이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 많이 마셨죠?”
“그렇게 많이는 안 마셨는데. 잘 때 나한테 술 냄새라도 났어?”
“아니요, 씻고 주무셨죠? 욕실 어메니티 냄새 나던데요.”
의준은 웃었다.
“그런데 아침에 제가 일어나서 침대를 빠져나가도 안 깨고 주무시더라고요. 형 원래 잠귀 밝잖아요.”
“아아….”
도헌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잔소리를 너무 듣고 와서 피곤했나 봐.”
“하하. 몸은 괜찮아요? 아픈 데 없고?”
“몸은 멀쩡해.”
도헌은 의준의 목덜미에 코를 댄 채 심호흡을 했다.
“너한테서 바다 냄새가 나.”
“편의점 나간 김에 해변을 잠깐 걸었어요.”
어제 도헌이 돌아왔을 때 의준은 자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자는 척했을 뿐이었다. 태미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도헌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녀와의 과거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과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잠을 설친 의준은 머리를 비울 겸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뜨던 해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난 일이야.’
1년 전에 겨우 한 달 만났던 여자와의 관계를 추궁할 수는 없었다. 설령 더 오래 사귀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의준 자신과 헤어졌던 사이에 도헌이 누구와 사귀었건 의준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형의 사생활이고… 추억의 일부일 테니까.’
열차에서 우연히 만났고 뒤늦게 새 연락처를 교환했을 정도다. 도헌이 그녀와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다시 나하고 사귀잖아.’
바닷바람에 차가워졌던 몸에 도헌의 체온이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의준은 입을 열었다.
“형.”
“응?”
의준은 도헌의 품 안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제가 형 되게 좋아하는 거 알죠?”
“…알지.”
도헌은 의준을 꼭 안았다. 이어서 의준의 머리에 입을 맞춘 그가 속삭였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것도 알지?”
“…네.”
의준은 도헌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알죠.”
도헌은 지금 그의 것이었다. 이보다 더 바랄 것은 없었다.
“아침 먹고 산책 가요.”
의준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형하고 같이 가고 싶어서 동백섬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왔거든요.”
“그러자.”
도헌은 웃으며 의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의준은 웃으며 슬쩍 입술을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도헌도 고개를 숙였다.
***
가볍게 아침을 먹고 나란히 바닷가를 걸었다. 운동하러 나온 주민들과 풍경에 감탄하는 관광객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해안 끝에 도달했고, 암벽 위로 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그들이 나눈 대화는 무척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아침 식사 때 먹은 복숭아 절임에서 홍차 향이 났다거나, 옆 테이블에 앉았던 아이들이 귀여웠다거나, 그리고 로비에 장식된 꽃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거나. 의준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도헌은 귀를 기울였고 맞장구를 치거나 자기 생각을 밝히며 대화를 이어갔다.
“어? 그럼 이 동백섬이 노래에 나오던 그 동백섬이에요?”
겨울에는 동백꽃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떠오른 노래 제목을 댔던 의준은 깜짝 놀랐다.
“그 노래를 알다니 놀라운데. 네 나이에 친숙한 가수는 아닐 텐데?”
“돌아가신 아버지가 팬이었어요.”
꽤 가파른 층계를 올라가며 의준은 대답했다. 위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도헌은 의준을 자기 쪽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당겼다. 나란히 걸어오던 여자 셋이 도헌과 의준을 발견하고 암벽 쪽 난간을 잡고 차례로 내려갔다.
“아버님 고향이 이쪽이셨나?”
“아뇨, 아버지는 인천 분이세요. 친가 쪽은 모르겠네요, 남쪽이었을지도요.”
층계참에서 고개를 돌리던 의준의 시야에 아래쪽으로 향하던 세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도헌 쪽으로 흘깃 시선을 두며 소곤대는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한 걸음 늦게 층계참에 올라선 도헌은 의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웃었다.
“힘들어? 좀 쉬었다 갈까?”
“아뇨, 괜찮아요.”
“그러면 조금만 더 가자.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아래에 테이크아웃 카페가 있었어.”
호텔을 나서 해변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도헌에게는 심심치 않게 이런 류의 관심과 시선이 머물렀지만 도헌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우연히 시선이 마주쳐도 아무런 표정 없이 무시할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라 익숙한 걸까?’
암벽 둘레로 이어진 산책길을 지나 작은 등대가 있는 관광 명소에 도달했다.
“사진 찍어 줄게.”
도헌의 말에 의준은 손사래를 쳤다.
“전 사진 안 찍어요.”
“기껏 왔잖아. 어머님께도 보내 드리면 좋아하실 거야.”
산책 도중에 풍경 사진을 유달리 찍었던 이유를 눈치챘던 모양이다. 그래서 한 자리에서 열 장 넘게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준 것일까.
의준은 등대와 관광객 그리고 지나가는 주민들을 배경 삼아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제법 근사한 전신사진이 나왔는데 도헌은 만족스럽지 못한 듯 다시 찍자고 제안했다.
“클로즈업도 찍자. 하늘 잘 나오게.”
“됐어요. 민망하게.”
“뭐가 민망해?”
“독사진은… 좀 그렇잖아요. 표정도 어색해지고.”
“그런가?”
도헌은 무심하게 대꾸하더니 갑자기 의준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그러면 같이 찍자.”
“네? 엇….”
얼떨결에 도헌이 위로 들어 올린 휴대 전화로 시선을 향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찍힌 첫 사진 속의 그는….
“아! 나만 눈 감았어!”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시선도 정면을 향한 도헌과 달리 의준은 눈을 감고 입은 벌린 이상한 표정이었다.
“지워요, 얼른.”
“싫어. 귀엽잖아.”
“귀엽긴 뭐가 귀여워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나왔는데.”
“그런가? 잘 때 모습하고 똑같은데.”
“네? 저 이러고 자요?”
당황한 나머지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있고 되묻는 의준에게 도헌은 웃었다.
“가끔 흰 눈도 떠. 귀엽게.”
“그게 뭐가 귀엽… …워요?”
의준은 뒤늦게 주변 사람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죽였다. 도헌은 달아오른 의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귀여워. 너니까.”
“…형의 감성을 도저히 이해 못 하겠어요.”
의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헌은 웃으며 의준을 산책로로 이끌었다. 그들 옆으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지나갔다. 주말인데도 교복 차림이라니 특이하네, 하고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귓가에 그들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XX 잘생겼네.
---모델인가 봐.
---다리 X기네.
비속어가 섞이기는 했어도 명백히 도헌에게로 향한 칭찬이었다. 도헌 건너편에 서 있던 의준이 들었으니 도헌도 분명히 들었으리라. 그러나 도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방금 그 학생들이 형 보고 잘생겼다고 했어요.”
“그런가?”
저한테 한 소리는 아닐 테니까요. 치밀어 오른 말을 억누르며 의준은 슬쩍 물었다.
“저런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아무 생각도 안 드는데.”
“전혀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보지.”
도헌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은 그 사람들의 생각이고 나하고는 상관없잖아.”
잘생겼다는 말은 안부 인사 수준으로 들으며 사는 사람의 사고방식은 이런 것일까. 의준은 새삼 감탄했다.
‘하긴 남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도헌이 형은 상상이 안 가지만.’
의준은 웃었다. 도헌은 왜 웃느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우스운 말을 했어?”
“아니요. 그냥 형다워서요.”
“어떤 게 나 다운데?”
“남이 뭐라건 자기 생각대로 산다는 점에서?”
“…독선적이라는 의미야?”
“아니에요.”
의준은 웃으며 부정했다.
“여러모로 멋있다고요.”
도헌은 의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의준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놀랐다.
“왜요?”
“멋있다고 한 거 진심이야?”
“네? 네….”
의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뭐 잘못 말했어요?”
“아니야.”
도헌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좋아서.”
“…….”
방금 남의 생각은 자기와 상관없다던 사람이 할 소리인가. 문득 의준은 입을 열었다.
“형.”
“왜?”
“형은 진짜 잘생겼어요.”
진심 반 시험하는 마음 반으로 내뱉은 말에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가 본 사람 중에서 제일 잘생겼고 멋있어요.”
“…….”
눈초리를 휘며 미소 지으리라 생각했다. 가지런하고 흰 이를 드러내며 낮게 웃음소리를 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괜한 소리 말하며 머리를 툭 치고 걸음을 떼리라고도.
의준의 예상은 빗나갔다. 도헌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대신 의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웃는 대신 손을 입가에 대고 낮게 헛기침을 하더니, 살짝 얼굴을 붉혔다.
“……?!”
의준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설마 이 남자가 지금… 내 말에 부끄러워하는 건가?
도헌의 얼굴에 번진 붉은 기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의준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형… 지금….”
“의준아.”
도헌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남의 말은 나와 상관없다던 말, 취소할게.”
“…….”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말의 끝에 도헌은 의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네가 말하니 전혀 다르게 들렸어.”
의준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기분 좋아졌어요?”
“엄청나게.”
도헌의 눈초리가 웃음을 머금고 가늘게 휘어졌다. 미소를 지으며 도톰하게 솟아오른 붉은 뺨을 응시하며 의준은 말도 안 되는 표현을 떠올렸다.
‘귀여워.’
도헌은 그보다 키가 10센티미터 이상 크고, 이목구비는 물론 체격 조건상 귀엽다는 표현보다는 듬직하다, 잘생겼다 같은 표현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서 있는 그는 귀여웠다.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콩닥거릴 정도였다.
‘아… 혹시 형도 날 보면 이런 기분을 느끼나?’
그렇다면 이해가 갔다. 민망함은 별개로 말이다.
어깨동무를 한 채 걷기 시작하는 도헌과 함께 내려가면서 의준은 슬쩍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형은 나를 좋아해.’
과거에 누구와 사귀었건, 지금 누가 그를 좋아하건 상관없었다. 도헌이 바라보는 사람은 의준뿐이었다.
‘그걸로 충분하잖아.’
이 남자는 그의 것이었다.
의준과 도헌의 시선이 마주쳤다. 왜 그러냐며 다정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의준은 힘껏 미소를 지었다.
점심은 일식이었다. 인테리어와 종업원의 차림새부터 고급 느낌이 확 나는 작지만 깔끔한 곳으로 주인 부부와 도헌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신랑이 도헌 씨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제가 선배고.”
손수 음식 서빙을 맡은 여사장은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둘 다 공부엔 소질이 없어서 일찍 음식 공부에 뛰어들었죠. 다행히 이쪽으로는 그럭저럭 소질이 있어서 그나마 먹고살고.”
오기 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저녁 예약을 잡으려면 세 달 정도는 대기해야 할 만큼 유명한 식당이었으니 겸손한 인사치레라고 봐도 좋으리라. 실제로 회와 초밥은 물론 곁들인 상차림 접시 하나하나에 정성과 실력이 배어 있었다.
“와, 과식했어요.”
두 시간여의 식사 후에 배웅을 받으며 가게를 나온 의준은 배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도헌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맛있었어?”
“네.”
진심이 담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후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가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는 여주인을 발견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들은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차에 올랐다. 오늘과 내일, 관광용으로 빌린 영제의 차였다.
“사장님 두 분 다 친절하고 상냥하시네요.”
“나만 갔을 때는 저렇게 상냥하지 않지만.”
도헌은 입을 열었다.
“누님은 평소에 저렇게 표준어 존댓말을 안 써. 나를 부를 때도 ‘씨’를 붙이지 않지.”
“그러면 뭐라고 부르시는데요? 도헌이?”
“‘서도헌이~’라고 해.”
끝을 늘리는 게 포인트야. 도헌이 덧붙였다. 의준은 웃었다.
“형, 지금 꼭 영제 형 같았어요.”
“영제는 ‘서영제 XXXX’이라고 부르셔.”
“왜 영제 형한테는 욕이 붙어요?”
“이유는 몰라. 영제 말로는 애칭이라는데 누님 표정을 보면 그렇지도 않거든.”
고등학교 때 영제와 여주인의 남편 쪽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이미 여주인은 지금 남편과 교제 중이었다.
“그때의 원한이 남았는지도 모르지.”
“궁금하네요.”
“영제에게 물어보면 아마 신나서 대답해 줄 거야. 추천하지는 않지만.”
“왜요?”
“그러면 숨기고 싶은 내 옛날 일도 드러날 것 같아서.”
도헌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모범생은 아니었거든.”
“공부는 잘했으면서?”
“우등생과 모범생은 다르니까.”
“우등생이었다는 점은 부정 안 하네요?”
“그야.”
“우와, 얄미워.”
의준은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도헌은 웃었다.
“너하고 같은 대학에 합격했었는데 공부를 못했다고 하면 이상해지잖아.”
“그건… 그러네요.”
“빨리 수긍하네?”
“저도 요행으로 합격했던 건 아니니까요.”
의준은 이렇게 대꾸한 후에 슬쩍 덧붙였다.
“…졸업할 능력은 못 되었지만요.”
“…….”
도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의준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자학하려던 건 아니고, 그냥….”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의준은 입을 다물었다. 기껏 즐거운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대화가 어색해지고 말았다. 빨리 다른 화제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던 그의 귀에 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교 다니고 싶어?”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야… 다니고 싶었죠.”
처음에는 휴학을 했었다. 가능한 휴학 기간을 모두 소진한 후에야 스스로 퇴학을 선택했다. 재입학 가능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학교 정책상 재입학은 단 한 번만 가능했다. 다시 입학하면 휴학도 불가능했다. 남은 3년의 기간을 휴학 한 번 없이 다니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는데 이제는 복권 1등 당첨 수준의 꿈이 되어 버렸어요.”
“…….”
“괜찮아요. 이제 돈도 잘 벌고 있고 엄마도 많이 나아졌으니까.”
도헌은 의준의 머리를 슥 하고 어루만졌다.
“다시 학교에 가고 싶으면 내가 지원해 줄게.”
휴학 없이 3년간 공부를 하려면 등록금 외에도 생활비가 필요했다. 의준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의 생계도 책임지고 있었으니 생활비란 결국 지금 의준이 지탱하는 가족의 몫 전부였다.
도헌이 그런 집안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했다면 당연히 금전적인 부담은 전부 자기가 지겠다는 의미였다.
“한두 푼 드는 일이 아닌데요. 그렇게 큰소리치시면 진짜 믿어요.”
“적은 돈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도 유능한 비서가 자기 능력을 업그레이드하겠다는데 그 정도 투자는 할 수 있어.”
도헌은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냥 비서도 아니고 나와 삶을 함께 살아갈 동반자에게라면 더욱 그렇지.”
동반자.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의준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도헌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당장 준비를 시작해도 괜찮아. 언제든 지원할 테니까.”
“…고마워요, 형.”
“올라가서 곧 알아보자.”
의준은 잠시 생각한 후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분간은 회사를 다니고 싶어요. 적어도 1년 정도는… 만일 형이나 회사에서 계속 고용해 준다면 가능한 길게요.”
“왜?”
“일도 즐겁고 보람차지만, 한 회사에서 길게 일한 경력을 인정받고 싶거든요.”
의준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불안정한 임시직만을 전전했었다. 최근 2년 사이에 다닌 곳은 모두 반년 이상 근무한 적이 없었다. 적성이나 흥미보다 월급을 우선해서 선택했던 회사들이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최선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지금은 일하는 보람도 있고 배우는 것도 많고… 매일 즐겁게 다니고 있어요. 기왕이면 여기서 제대로 일해서 인정받고 싶어요.”
의준은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아래로 향하며 말을 이었다.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저한테는 중요한 목표예요.”
열심히 일해서 차곡차곡 인맥과 경력을 쌓고 싶었다. 빚 갚는 데 급급했던 삶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해 저축도 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고요. 제힘으로.”
미래에 목표를 세우고 다시 꿈을 꿀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형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겼어요. 고마워요.”
“감사 인사를 들을 만큼 도운 기억은 없는데.”
“무슨 말이에요, 취직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부분에 관여해 놓고.”
의준은 웃었다. 도헌은 그를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내 옆에 있기를 바랐을 뿐이야. 널 위해서라기보다 날 위해서 움직였지. …심지어 의도는 불순했고. 그러니 감사할 필요 없어.”
“의도가 불순했다는 사실은 부정 못 하겠네요.”
도헌은 한 차례 헤어진 계기가 되었던 오해로 인해 의준과 재회한 후에 복수를 다짐했었다. 오해가 풀리고 서로 마음을 확인한 지금 의준은 흘려 넘기기로 결정했지만 도헌은 그렇지 못했다. 그의 성격상 꽤 오래 후회하리라.
‘그래서 형 마음이 편해진다면야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만.’
의준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형과 다시 만난 후에 행복해진 건 사실이니까요.”
취직하고, 빚을 갚고, 간병에 도움을 받았다. 오늘을 사는데 급했던 삶에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형은 저한테 내일을 준 사람이에요.”
“…….”
도헌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데 뭐가 있구나, 넌.”
신호를 받은 차가 멈췄다. 핸들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두드리던 도헌이 입을 열었다.
“의준아.”
“네?”
“…가기로 한 카페, 나중에 가면 안 될까?”
“왜요?”
“당장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졌어.”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의준의 뺨이 달아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헌의 귀에 개미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그럼.”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도헌은 망설임 없이 핸들을 틀었다.
***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서로를 끌어안았다. 강한 힘과 체온을 느끼며 입술을 겹쳤고 달아오른 숨결을 음미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의준아.”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숨결이 턱을 타고 목덜미로 향했다. 부드럽고 뜨거운 접촉에 몸을 떨면서 의준은 입을 열었다.
“형… 안… 돼요.”
“뭐가?”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쪽 하는 소리가 피부를 통해 스며들었다.
“오후에… 같이 온수 풀 가기로, 했잖아요?”
“아직 세 시야. 여유 있어.”
“아뇨, 시간 말고….”
의준은 도헌을 슬쩍 밀어냈다.
“수영복 못 입어요.”
“…아아.”
도헌은 눈썹을 위로 올렸다.
“수영복을 꼭 입어야 하나? …아래는 그렇다 치고 위에는 티셔츠를 걸쳐도 되잖아.”
자국을 남기지 않겠다는 말 대신 불만을 내뱉는 도헌을 기가 막힌 듯이 바라보며 의준은 입을 열었다.
“수영장이잖아요. 수영복만 될걸요.”
“쯧.”
도헌은 혀를 차더니 의준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가기 싫어지는데.”
“왜요….”
“다른 사람들이 벗은 네 몸을 보게 되잖아.”
“…말 참 이상하게 하네. 수영복은 입거든요. 알몸이 아니라 아래는 가린다고요. 게다가.”
의준은 투덜투덜 반박했다.
“그러는 형도 수영복을 입는 건 마찬가지고요.”
“넌 그게 아무렇지 않아?”
도헌이 의준의 어깨에 머리를 댄 채 시선만 위로 향하며 물었다. 의준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물으면 또… 괜찮다고 하기 그렇잖아.’
의준은 목덜미를 간질이는 도헌의 숨결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왜 온수 풀에서는 상의를 못 입을까요.”
“내 말이.”
도헌은 고개를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의준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가지 말까?”
“…….”
“그냥 여기서 둘이, 욕조에 물 받아 놓고 들어가서 바다 야경을 감상하는 방법도 있어. 창을 열면 바닷바람도 들어올 테고.”
“음….”
“샴페인도 마실 수 있어. 룸서비스로 저녁도 시키고.”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넓디넓은 스위트룸을 그저 자는 데만 쓰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기도 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안 돼요.”
“왜?”
“온수 풀… 가 보고 싶어요.”
숙소 정보를 검색했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설은 온수 풀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따스한 풀이라니. 심지어 따로 들어오려면 돈을 내야 하지만 숙박객에게는 무료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기는 어려울지도 몰랐다.
‘구차하게 설명하기는 싫은데….’
무조건 싫다고 하면 도헌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기분 나빠하지 않게 잘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의준의 귀에 도헌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그러면 가야지.”
“네?”
의준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온수 풀에 가자고요? 왜요?”
“네가 가고 싶어 하니까.”
도헌이 대답했다.
“그렇게 기대했던 줄은 몰랐어. 하마터면 네 즐거움을 빼앗을 뻔했군. 미안해.”
“아뇨… 사과할 것까지는 없는데.”
“용서해 줄 거야?”
도헌은 의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대며 물었다. 잠시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던 의준은 시선을 슬쩍 아래로 향했다.
“…그럼요.”
“고마워.”
도헌이 의준의 콧등에 입을 맞추었다.
“같이 실컷 즐기고 오자.”
“네.”
의준은 웃었다. 도헌은 의준을 뒤에서 끌어안고 침실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대신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
“뭔데요?”
“실컷 놀고 돌아와서, 저녁 다 먹은 후에… 방금 전에 하던 거 계속하자.”
도헌이 밀착했다. 등에 그의 체온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하마터면 반응할 뻔한 것을 최대한 억누르며 의준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대신 무리하지 않기로 약속하세요.”
“무리하지 않는다의 기준이 애매모호한데.”
“형 본인의 상태를 고려해서 직접 정하세요. 완치한 지 얼마 안 되었잖아요?”
“이의준 씨, 완치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다 나았다는 뜻입니다. 정상 생활에 지장이 없는 상태라고 판정받은 거고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무리하지 말고 1-2주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셨죠. 저도 같이 들은 말을 빼먹으시면 곤란합니다, 서도헌 전무님.”
회사에서 쓰던 말투와 호칭을 들먹인 도헌에게 질세라 의준은 이렇게 대꾸했다.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얼마든지 함께하겠습니다.”
“…….”
도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포기했어요? 왜 말을 안 해요.”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하라고?”
도헌은 의준을 꼭 끌어안았다.
“널 안으면서 다른 데 신경을 쓰는 건 불가능해.”
설령 내 건강을 위해 필요한 일이어도. 도헌은 의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낮게 신음했다.
“…윽, 형….”
밀착한 도헌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분명한 감촉이 옷 위로 전해졌다.
‘그러고 보니 우리… 오랫동안 안 했었네.’
멀쩡한 몸으로 함께 침대에 누웠던 때는 납치 사건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에는 입원이다 요양이다 해서 키스와 포옹 이상의 접촉을 한 적이 없었다.
깨달음과 동시에 묘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도헌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마음이 약해지면 곤란했다. 온수 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와서 무리하지 않는 방향으로… 시도는 해 보자.’
의준은 이런 생각을 하며 마주 닿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
해가 서쪽으로 기운 늦은 오후. 숙소로 돌아오기엔 이른 시각인 데다 초가을에 접어든 시기 탓인지 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와.”
의준은 우거진 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각양각색의 온수 풀을 보고 감탄했다.
“잘 꾸며져 있네요. 이게 다 온천이에요?”
“색만 봐서는 아닌 것 같지만 온천 맞아.”
“어디부터 들어가죠?”
의준은 도헌을 돌아보았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생기 넘치는 얼굴을 본 도헌은 웃었다.
“어디든 상관없지만… 기왕이면 바다가 보이는 풀부터 가 볼까?”
“네!”
“가운 옷깃 여미고. 바람 부니까.”
초가을 바람은 따스한 온천 수증기를 기분 좋게 흩어 놓을 정도에 불과했지만 도헌은 굳이 가운 사이로 드러나는 의준의 가슴을 단단히 여며 준 후에 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 휴대 전화 가져올걸. 사진 찍어야 하는데.”
“어머니 보내 드리게?”
“그것도 그런데… 온 기념으로 사진 찍고 싶어서요. 형하고도.”
“휴대 전화는 방에 뒀어?”
“거실 테이블에요.”
“프런트에 부탁해서 가져다 달라고 할게.”
“네? 그래도 돼요?”
“스위트룸 전속 컨시어지가 근무 중일 테니까 그 정도는 들어줄 거야.”
“그냥 제가 빨리 다녀와도 되는데.”
“수영복에 가운 차림으로 혼자 어딜 가게. 거기 잠깐만… 의준아, 어디 가?”
대화 도중에 갑자기 의준이 걸음을 뗐다. 도헌은 발밑의 층계를 확인하지 않고 대뜸 걸음을 내딛던 의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위험하잖아. 어딜 보고 걷는 거야?”
“도헌이 형.”
의준은 시선을 멀찍이 둔 채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영제 형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영제? 아니. 왜 그 녀석 이야기가 나와?”
“저기 있어서요.”
“누가.”
“영제 형이요.”
“뭐?”
의준은 손가락으로 바다 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향한 도헌은 곧 눈살을 찌푸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풀 앞에 영제가 서 있었다.
“저 녀석이 왜 여기 있어?”
놀랍게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영제 형 옆에… 태미 씨랑 친구분 아니에요?”
“…왜 셋이 같이 있지?”
의준도 알고 싶었다.
이윽고 태미가 의준과 도헌을 발견했다.
『대니얼? 준도 있네! 안녕!!』
“…맙소사.”
도헌은 오붓한 풀장 데이트가 망했음을 직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태미와 그를 따라 팔자걸음으로 다가오는 영제에게 차례로 향했다.
『세상에, 두 사람을 여기서 만나다니 놀랐어.』
『내가 할 말이야. 어떻게 여기 왔어?』
『영이 초대했어.』
『…영?』
되묻는 도헌에게 태미는 뒤에 있던 영제를 가리켰다. 영제는 느긋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을바람 선선하니 바닷가에 산책을 갔는데. 아가씨 둘이 일광욕을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말을 걸었거든.”
『영이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곤란해하던 우리를 도와줬어. 그리고 안전한 데서 물놀이를 하자고 초대해 줬지.』
태미는 싱글벙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설마 영과 대니얼이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친구야?』
“가족이다, 가족.”
『가… 조오?』
“가족, 가족. 영어로 뭐라카지? 아, 패밀리, 패밀리.”
『아! 가족!』
태미는 도헌과 영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상에, 영과 대니얼이 가족 사이였다니, 세상 참 좁네!』
“…세상이 그렇게 좁을 리는 없지.”
도헌은 태미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영제가 씩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의심을 확신으로 변하게 했다.
‘아… 영제 형이 일부러 태미 일행과 접촉했구나.’
의준도 비로소 깨닫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영제의 목적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태미 일행과 마주하니 반갑지만은 않았다.
‘형하고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숙소에 남아 있을걸. 후회해 보아도 때는 늦었다. 태미가 의준을 향해 말했다.
『준, 내 친구를 소개할게. 이쪽은 매건이야. 나랑 같은 회사를 다니고, 패키지 디자이너야. 매건네 아빠는 군인인데 한국에 주둔한 적이 있어. 어디랬지? 오… 오생?』
『오산.』
『맞아, 오산!』
매건이 손을 내밀었다. 의준은 그녀와 악수를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의준입니다. 준이라고 부르세요.』
『반가워요, 준.』
이어서 그녀는 도헌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태미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대니얼.』
의준은 매건이 앞에 덧붙인 말이 신경 쓰였다. 의례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전 남자 친구였다는 이야기를 했을까?’
역시 숙소에 있을걸 그랬다. 의준은 재차 후회하며 영제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영제 형, 이렇게 또 뵙네요.”
“그러게. 반기는 사람도 없는데 나타나서 미안하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니에요.”
“니 뒤에 있는 놈 시선이 아주 살벌해서 몬 살겠다.”
영제는 이렇게 대꾸한 후에 도헌을 향해 말했다.
“의준이처럼 빈말이라도 이쁘게 해 봐라. 사회생활 한 새끼가 얼굴이 그게 뭐고, 얼굴이.”
“내가 너에게 그런 예의를 갖춰야 하나?”
도헌은 이렇게 대꾸한 후에 의준의 팔을 잡았다.
“이런 식으로 우리를 방해하지 마.”
“서운하구로.”
영제가 대꾸했다.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으시네.’
정말로 방해하러 온 것일까. 어째서? 의준은 의아해졌다.
그냥 멀뚱히 서 있기에는 바람이 서늘했기에 그들은 온수 풀 쪽으로 이동했다. 열선이 깔려 있어 따스한 선베드를 벤치 대신 삼아 마주 앉기 무섭게 태미가 입을 열었다.
『대니얼, 채드 기억해?』
『채드 브릭스턴?』
『맞아. SNS에 널 만났다는 이야기를 썼더니 기뻐하더라. 네 연락처를 알고 싶대서 명함에 있던 이메일 주소를 알려 줬어.』
『잘했어. 채드는 잘 지내?』
『작년에 결혼했어. 지금은 워싱턴에 살고. 맞아, 워싱턴에는 아니타도 있어.』
태미와 도헌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영어는 알아들을 수 있는데 내용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공통 지인의 안부를 전하는 것 같았다.
‘대학 시절 친구들일까? 아니면 다른 데서 안 사이?’
궁금했지만 차마 끼어들어 질문을 던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런 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준아, 내랑 마실 거 가지러 가자.”
“네? 네.”
의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헌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
“어, 영제 형이 마실 거 가지러 가자고 하셔서요. 형도 뭐 마실래요?”
“그럼 나도 같이….”
“괜찮아요, 바로 저기니까.”
의준은 일어서려던 도헌을 말렸다.
“금방 다녀올게요, 태미하고 이야기 나누세요.”
“…….”
도헌은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준은 그에게 웃어 보인 후에 영제를 따라 출입구 쪽의 간이 바로 향했다.
“뭐 마실래? 내가 살게.”
영제가 말했다. 의준은 사양하지 않고 탄산음료를 골랐다. 상품을 기다리는 사이에 의준은 영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때문에 괜한 돈을 쓰시네요.”
“음료수 사는 거 갖고 뭐가.”
“제가 어색해하니까 데리고 나오느라 음료수 사시는 거잖아요.”
“서울 도련님은 눈치도 빠르네.”
영제가 웃었다.
“아이지, 내가 초 치러 와서 밉다고 돌려 말했나?”
“원망이라니요, 아니에요.”
“초 치러 온 거 맞는데?”
“네?”
의준은 놀랐다.
“저랑 도헌이 형을 방해하러 오셨어요? 왜요?”
“내는 일이 안 풀리는데 니네는 자알 풀려서 배가 아프다.”
“…….”
의준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영제는 그를 흘깃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내가 속이 좀 좁다. 미안티.”
“아니요….”
의준은 영제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상우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
“상우?”
영제가 되물었다.
“상우가 눈데?”
“예?”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영제가 휴대 전화 화면을 확인했다. 상우의 번호였다.
영제는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 버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를 보며 의준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영제 형….”
“하늘이 두 쪽 나도 이 새끼는 용서 몬 한다.”
“…네.”
이 화제에는 참견하지 말아야겠다. 의준은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 혼자 오해해서 지랄 난 새끼를 관대하게 용서해 준 니는 모르겠지만, 내는 그래 안 착하다.”
잘은 모르지만 상우가 단단히 잘못한 모양이었다.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그렇게 관대하지 않은데요.”
“관대하지. 얼마나 관대한데.”
영제가 뒤쪽을 가리켰다.
“지금도 애인이 전 여자 친구하고 노가리까게 두고 내랑 놀고 있잖아?”
도헌은 태미와 그녀의 친구와 함께 직선으로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온수 풀에 몸을 담그고 있는 비키니 차림의 두 여자 앞에 놓인 선베드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안 놀라네? 둘이 사귀었다는 거, 알고 있었나?”
“네, 어쩌다 보니.”
의준은 웃었다.
“혹시 지금 그것도 심술부리신 거예요?”
“다 틀맀네. 재미없게.”
영제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호기심 어린 투로 물었다.
“도헌이가 말했나?”
“아니요, 태미가….”
어제저녁에 식당에서 마주쳤던 이야기를 하자 영제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 알아서 내한테 다 불더만. …암만 봐도 미련 있나 보네.”
“역시 그래 보여요?”
“역시?”
“제가 과하게 생각하나 했거든요.”
높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태미가 도헌의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마도 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겠지만 도헌은 웃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미는 반대로 그의 팔을 버팀목 삼아 풀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도헌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감겼다.
지끈하는 통증이 심장을 스쳤다.
“가시내 여우네, 여우.”
영제가 혀를 찼다. 의준은 입을 열었다.
“사귀었을 때, 둘이 잘 어울렸겠어요.”
“뭔 소리고.”
영제는 의준을 바라보았다.
“니 질투하나?”
“안 해요.”
대답은 빠르고 짧았다.
“도헌이 형은 지금 저랑 사귀고 있고, 바람 필 사람이 아닌걸요.”
도헌이 고개를 돌렸다. 의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태미에게서 떨어졌다.
“게다가 저렇게 저만 보는 사람이니까요.”
의준의 말에 영제는 피식 웃었다.
“상대가 성실하고 한결같다고 해서 질투를 하면 안 되는 건 아니잖아.”
“질투요?”
의준이 되물었다. 영제가 그래, 하고 대답했다.
“눈앞에서 다른 여자한테 손 댔으니까 뺨은 갈겨도 될 거 같은데. 내라면 팔 잘랐지.”
“네? 아니, 그건 좀….”
“사귄다는 건 전세 낸 거랑 똑같지. 그 정도 각오 없이 무슨 계약을 하노.”
“…….”
어쩐지 의준과 도헌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의준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만일 제가 저 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과 친분을 끊으라고 하면 도헌이 형은 불쾌해하지 않을까요?”
“서도헌이는 좋아라 할걸. 쟤는 니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기세다이가.”
“속박을 당하고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영제는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도헌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함 해 봐라.”
“예?”
“함 해 보라고. 싫어하는지 아닌지.”
영제는 말을 이었다.
“좋아서 난리 난다에 만 원. 해 봐라.”
“그건 좀….”
의준은 난처하게 웃었다.
“도헌이 형에게도 사회생활이 있는걸요.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고 싶지 않아요.”
“의준아.”
때마침 도헌이 그들 앞에 도달했다.
“영제가 뭐 이상한 소리라도 했어?”
“네? 아니요, 왜요?”
“너 표정이….”
도헌이 말하는 도중에 뒤따라온 태미가 그의 허리를 팔로 감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풀에 왔으면 물에 들어가야지.』
“어….”
의준의 몸이 굳어졌다. 도헌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놔, 태미.』
『어머, 미안.』
태미가 팔을 풀었다. 영제는 말없이 음료수를 마셨고 도헌은 의준의 안색을 살폈다.
“의준아,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
“네? 아… 좀 추운가 봐요.”
“내 가운 입어. 타월도 걸치고.”
“형.”
의준은 몸을 돌리던 도헌을 붙잡았다.
“저 그냥 방에 올라갈게요.”
놀란 도헌의 얼굴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처음부터 기분은 그냥 그랬다. 뒤늦게 깨달았을 뿐.
“좀 피곤해서… 가서 좀 누워 있을까 해요.”
“…그래.”
도헌은 달리 묻지 않고 이렇게만 대답했다. 이어서 그는 영제와 태미를 돌아보았다.
“우리 먼저 갈게. 잘 놀다 가.”
“어….”
의준은 당황했다.
“형도 가게요?”
“네가 가는데 내가 왜 여기 남아?”
도헌은 당연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가 의준의 어깨를 안고 몸을 돌리자 태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니얼, 준, 어디 가?』
『의준이 쉬고 싶다니까 방에 돌아가려고.』
『뭐? 저런.』
마무리되는 줄 알았던 대화의 끝에 질문이 이어졌다.
『준은 어디 아픈 거야?』
“쉬러, 쉬러. 쿨쿨, 슬립.”
『아픈 건 아니고?』
“안 아파. 슬립.”
한국어 방언과 영어가 번갈아 들려왔다. 어떻게 서로 자기 언어로 대화하는데 말이 통하는 걸까.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떼던 찰나 태미의 목소리가 그들을 향했다.
『우리도 그 방에 가면 안 돼?』
“……?”
도헌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의준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태미가 영제를 가리켰다.
『영이 그러던데, 지금 대니얼하고 준이 묵는 방, 이 호텔에서 제일 크고 좋은 스위트라면서?』
도헌은 영제를 바라보았다. 영제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했다.
『제일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어떨지 궁금해. 초대해 주면 안 될까?』
『곤란한데. 의준이가 쉬어야 해서.』
“의준이는 쉬게 하고 다른 방 구경 시키면 되지.”
영제가 끼어들었다. 도헌은 얼굴을 찌푸렸다.
“침실 말고 다른 방도 있고 거실도 넓은데 뭐 어떻노. 구경 시켜 준다고 닳나?”
“손님이 있으면 쉬기 불편하잖아.”
“아도 그 정도는 이해할걸. 사회생활이 그렇잖아. 안 글나, 의준아?”
‘도헌이 형에게도 사회생활이 있는걸요.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고 싶지 않아요.’
몇 분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제의 말에 의준은 입을 다물었다. 울컥하고 감정이 솟아올랐다.
“편한 대로 하세요. 어차피 공짜로 묵고 있는 방이니까.”
“진짜로?”
영제는 탐색하듯 되물었다. 의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심술궂게 나오는 사람 앞에서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영, 뭐래? 가도 된대?』
“오케이, 오케이.”
영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미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와, 그러면 우리도 옷 갈아입고 올라가자.』
“…영제 너.”
“하하하~.”
도헌은 얼굴을 찌푸렸다. 의준이 그의 팔을 잡았다.
“도헌이 형.”
도헌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먼저 올라갈게요. 손님들 모시고 오세요.”
“뭐? 잠깐만.”
“이따가 봬요.”
“의준아.”
의준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에 빠르게 출입구로 향했다. 뒤에서 태미와 매건의 즐거운 대화와 보란 듯이 낄낄대는 영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듣기 싫어.’
잘 참으며 예의 바른 모습을 유지했는데 마지막에 망치고 말았다. 영제에 대한 원망과 함께 자괴감이 솟아올랐다.
도헌의 인간관계를 막고 싶지 않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애인으로서 그리고 비서로서 어떤 식으로든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 여자 친구잖아!’
게다가.
‘우리 방이라고!’
두 사람이 사용하기엔 과할 정도로 넓은 공간이기는 했다. 작은 침실 쪽은 첫날 구경하느라 둘러보기만 하고 쓰지 못했고, 잠만 자고 밖에 나오느라 거실 소파에도 오래 앉아 보지 못했다.
‘그래도 거긴 형하고 내가 자는 공간이란 말이야.’
태미와 친구가 방을 둘러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첫날 의준이 그랬듯 방과 욕실을 모두 샅샅이 살피고 발코니로 나가 풍경에 감탄하리라. 그리고 어쩌면 침대로 힘차게 뛰어들지도 몰랐다. 도헌과 의준이 자고 일어났던 그 침대에.
‘싫어.’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의준은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거칠게 눌렀다.
스르륵 닫히던 문 사이로 툭 하고 무엇인가가 끼어드는 소리가 났다.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다시 열린 문 사이로 도헌이 보였다.
“어… 형.”
도헌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의준은 저도 모르게 그의 뒤로 시선을 향했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차마 태미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하고 이렇게 묻자 도헌은 짧게 대답했다.
“두고 왔어.”
“네?”
“영제가 같이 놀아 줄 거야. 방에는 오지 말라고 말하고 왔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의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도헌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제가… 싫은 티를 냈어요?”
“아니.”
도헌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니라 내가 싫어서 거절했어.”
“왜….”
“거긴 너하고 내가 머무는 방이니까.”
도헌은 의준을 바라보았다.
“너만 있으면 충분한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게 싫었어.”
“…….”
의준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관대하지 못해서 놀랐어?”
“…아뇨.”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그는 도헌에게 다가섰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도헌은 놀라는 대신 부드럽게 웃었다.
“그랬어?”
의준은 도헌의 가운 깃을 움켜쥐었다.
“형의 전 여자 친구를 계속 보고 있기도 힘들었고요.”
“……?! 어떻게 그걸.”
도헌의 놀란 기색이 전해졌다.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태미가 말해 줬어요.”
“…….”
단순히 옛 친구였다면 이렇게까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태미가 과거를 밝히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녀를 관대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옛 여자 친구라는 걸 알아 버렸으니 다른 사람 대하듯 할 수가 없었어요.”
태미는 쾌활하고 즐거운 사람이었다. 이성을 연애 상대로 느껴 본 적 없었던 의준조차 이 정도로 성격 좋은 미인이라면 반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도헌의 옆에 선 비키니 차림의 그녀를 보며 그들이 사귀었던 과거를 상상했다. 근사한 미남 미녀를 떠올리기 가슴이 아팠다.
“형 애인은 전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도헌의 팔을 잡고 그에게 매달리는 그녀를 보자 슬픔을 넘어서 화가 치밀었다.
“왜 태미가 형 옆에 있는데요.”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바람에 대화가 멈췄다. 의준은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도헌은 말없이 그를 따랐다.
방문 앞에 도착하자 도헌은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의준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도헌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의준아.”
그들 뒤에서 방문이 닫혔다. 도헌은 의준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댔다.
“내가 오해받을 짓을 했어?”
“…아뇨.”
도헌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그럴 여지가 없었다. 도헌은 태미에게 거리를 두고 대했고, 의준을 우선했다. 지금도 그는 옛 친구를 두고 의준을 따라오지 않았는가.
“태미가 형 옆에 있는 게 싫었어요.”
의준이 모르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를 단순한 동료 취급하는 것도 싫었다.
“제가 모르는 형 이야기를 그녀가 알고 있는 게 짜증 났어요.”
오해로 인해 이별했던 기간은 5년이었다. 이미 지난 일에 가정법은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만일 그때 헤어지지 않았다면… 도헌의 인생에서 의준이 모르는 부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는데 저는 모르니까… 그냥….”
“질투가 났어?”
도헌이 부드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의준은 흠칫하고 어깨를 떨었다.
질투.
영제가 웃으며 언급했던, 그에게는 부정했던 단어가 새삼스럽게 심장을 아프게 했다. 의준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네.”
솔직히 인정하자 후련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래요, 질투했어요. …이상해요?”
도헌이라면 아니라고 부정하리라 생각하고 내뱉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도헌은 웃음을 참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초리를 본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비웃는 거예요?”
“아니, 아니야. 미안.”
도헌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네가 질투할 줄은 전혀 몰랐거든. 넌 마음이 넓으니까….”
“안 넓어요.”
의준은 부루퉁하게 대답한 후에 도헌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제가 질투해서 보기 흉해요?”
“전혀.”
도헌은 의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시선을 위로 향하도록 한 후에 말을 이었다.
“보기 흉하기는커녕 너무 예뻐.”
“…저 놀려요?”
“진심이야.”
“웃고 있으면서.”
“그건… 미안. 지금 표정 관리가 안 돼.”
의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헌은 의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네가 과거까지 질투할 정도로 나를 좋아하다니, 기뻐서.”
“…….”
반짝이는 연한 회색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숨결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도헌의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태미하고는 2년 정도 전에 정말 잠깐 사귀었어. 한 달도 안 되었을 거야.”
“…네.”
“헤어진 후에는 서로 바빠서 소원해졌고, 연락처조차 모를 만큼 타인으로 지냈어. 이번에 재회한 건 정말 우연이었지.”
도헌은 의준의 입술에 다시 입술을 댔다.
“알던 사람을 다시 만나서 반가웠을 뿐이야. 다른 감정은 전혀 없어.”
“알아요.”
의준이 대답했다.
“저는 그냥… 저하고 헤어진 사이에 형이… 다른 사람을 사귀었을 줄은 몰라서….”
“충격받았어?”
“네.”
의준은 순순히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도헌은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미안해.”
“…왜 사과해요, 잘못하지 않았는데.”
“잘못했어, 네게도 그리고 태미에게도.”
데이트를 신청한 사람도 이별을 고한 사람도 태미였다. 그녀는 감정에 솔직했고 타인의 호감에도 예민했다. 그런 그녀에게 도헌은 이상적인 남자 친구가 아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날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겠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네 사랑을 얻을 수 없을 거야. …네가 잠꼬대로 이름을 불렀던 그 사람을 제외하고는.’
공항에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던 악몽을 꾸고 일어난 날 태미는 도헌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던 도헌은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 뒤로 다른 사람은 쳐다본 적도 없었어.”
모든 감정은 의준에게로 향해 있었다. 원망, 분노, 슬픔 그리고 약간의 기쁨까지. 곱씹던 추억과 상처는 모두 의준에게서 비롯되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뿐이야.”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지금 사랑하고 앞으로 사랑할 사람도 너뿐이고.”
뜨거운 숨결이 입술 사이로 밀려들었다.
“…으응….”
움켜쥐고 있던 도헌의 가운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의준의 가운도 미끄러져 팔에 걸쳐졌다. 몸을 밀착하자 젖은 적 없던 수영복이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도헌은 의준을 한 팔로 안은 채 걸음을 뗐다. 그에게 밀려 뒷걸음질 치던 의준의 발에 침대 테두리가 닿았다.
“앗…!”
의준은 순식간에 침대에 드러누웠다. 도헌은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그를 완전히 침대 위로 끌어 올렸다.
한 차례의 키스 끝에 도헌은 고개를 들고 달아올라 숨을 헐떡이는 의준을 음미하듯 훑어보았다. 그는 의준의 가슴을 한 손으로 짚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형….”
기대감과 걱정이 섞인 표정으로 의준이 입을 열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아무리 의사 선생님이….”
“싫어.”
도헌은 의준의 말을 가로막았다.
“참을 만큼 참았어.”
손길이 옆구리를 훑자 의준이 몸을 떨었다.
“이제 더는 못 참아.”
말의 끝에 도헌은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의준은 숨을 멈췄다.
“읍…!”
옆구리를 타고 내려간 손길이 수영복을 거칠게 끌어 내렸다. 도헌은 순식간에 드러난 의준의 하반신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속삭였다.
“내가 다 나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할게.”
거친 숨결 사이로 작은 덧붙임이 스며들었다.
각오해.
“……!”
등골이 오싹하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기대와 두려움 속에서 의준은 천천히 다가오는 도헌의 얼굴을 보며 입을 벌렸다.
***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꿈일까. 그렇다면 기분 좋은 꿈이었다.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곳에 머물러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으음….”
옅게 남은 잠의 끄트머리를 걷어 올리듯이 눈을 떴다. 서서히 밝아지는 시야에 빛으로 가득한 창문이 보였다. 햇살 그리고 푸른 하늘. 한 발짝 늦게 이성이 깨어나며 의준은 소리도 풍경도 꿈의 산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 그렇지….’
호텔 스위트룸의 메인 베드룸에 누워 있음을 인식하기 무섭게 등에 밀착한 체온과 목덜미를 스치는 숨결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그를 끌어안은 남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의준은 미소를 머금은 채 길게 숨을 내뱉었다.
“으….”
간밤의 열기로 인한 근육통에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오랫동안 참았던 욕망을 완전히 해소한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그대로 누워 도헌의 온기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미한 의준은 슬그머니 허리에 감겨 있던 도헌의 팔을 풀었다. 이어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도헌이 덥석 그를 끌어안았다.
“헉?!”
깜짝 놀라 쓰러지듯 누운 의준의 뒤에서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물었다.
“어디 가?”
“화… 화장실요.”
얼떨결에 솔직하게 대답한 후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요, 형. 제가 깨웠어요?”
“아니야.”
도헌은 팔을 풀었다. 그리고 침대를 돌아 화장실로 향하는 의준의 뒷모습을 따라 돌아누웠다. 덕분에 용무를 마치고 나오던 의준과 도헌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사람이 화장실 다녀오는 거 처음 봐요?”
민망해서 타박하는 의준에게 도헌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몇 시예요?”
“…일곱 시?”
도헌은 베드 사이드 테이블에 엎어 두었던 휴대 전화를 뒤집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더 자도 돼.”
이렇게 말하며 그는 이불을 들어 올렸다. 의준은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도헌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도헌은 이불째로 의준을 끌어안고 그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잤어?”
“네, 형은요?”
“나도.”
이어서 도헌은 조용히 물었다.
“몸은 괜찮아?”
이불을 통해 아랫배를 지그시 누르는 도헌의 손을 느꼈다.
“괜찮…다고 하고 싶지만, 온몸이 쑤셔요.”
의준은 솔직하게 말한 후에 웃었다.
“네 시간 전까지 사람을 괴롭히던 분이 할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미안해.”
도헌은 의준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뗀 자리에는 간밤에 생겨난 자국이 선명했다.
“어제는 진짜 멈출 수가 없었어. 네가 너무… 아니,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
“정말 미안.”
“왜 사과를 해요.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도 아닌데.”
의준은 몸을 돌려 도헌과 마주 보았다.
“괴롭혔다고 한 건 농담이에요.”
해가 질 무렵 시작했던 행위는 새벽에야 끝났다. 몇 번이나 까무라치고 이성을 잃었다. 서로의 이름을 얼마나 불렀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숨결이 거칠어져 말로 못 한 고백은 모두 몸으로 전했다. 그 흔적은 의준의 몸 구석구석에 달콤한 근육통과 무수한 울혈 자국으로 남았다.
“어제는… 진짜 좋았어요.”
의준은 작게 고백한 후에 도헌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댔다. 도헌의 입술 끝이 위로 부드럽게 끌려 올라갔다. 그가 의준을 끌어안으며 몸을 돌렸다.
“앗.”
어젯밤 처음 침대에 누웠을 때처럼 도헌은 의준의 위에 올라타 몸을 밀착했다. 부드럽던 숨결이 단숨에 거칠어질 정도로 진한 입맞춤의 끝에 의준은 살짝 투덜거렸다.
“…형, 왜 또 이래요.”
도헌은 얼굴을 붉히는 의준을 향해 웃었다.
“아침이잖아.”
“…진짜 건강하시네요.”
“남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도헌은 의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내가 다 나았다는 사실을 믿어?”
“…네.”
다 나은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그전보다 체력이 업그레이드된 느낌마저 들었다. 솔직히 어젯밤에는 도헌이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에 혹시 그쪽에 듣는 성분이 섞여 있었지 않은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의준아, 사랑해.”
피부에 닿은 입술 사이로 달콤한 고백이 들려왔다.
“너무 사랑해서 미칠 지경이야.”
속삭임에 몸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매달리고 싶어지는 기분을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의준은 입을 열었다.
“저도 사랑해요. …하지만 안 돼요.”
의준은 슬며시 움직이는 도헌의 무릎을 다리로 눌러서 막았다.
“지금 또 하면… 형은 몰라도 저는 아주 큰일 날 거예요.”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욱신거렸다. 살짝 힘을 주었을 뿐인데 전신이 아팠다.
“서울에는 제 발로 걸어서 올라가고 싶어요.”
“그래.”
도헌은 웃었다.
“미안해. 참을게.”
말로는 사과를 하면서도 표정에 드러난 뿌듯함은 숨길 수 없었다. 실실 웃는 표정을 보니 울컥하고 화가 나면서도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어휴, 나도 진짜.’
이마와 뺨을 가볍게 더듬던 도헌의 입술이 의준의 입술에 닿았다. 가볍게 입술을 마주한 직후 그가 의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어서 당겼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따스한 숨결이 스며들었다. 의준은 두 팔로 도헌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때 도헌의 휴대 전화에서 메시지 착신음이 났다. 도헌은 무시했다. 숨결을 음미하며 의준의 머리를 어루만지던 손끝에 침대를 통한 진동이 전해졌다. 이어서 다시 착신음이, 진동이, 착신음이 그리고 다시 진동이.
“어느 놈이….”
도헌은 신경질적으로 휴대 전화를 들어 올렸다. 기울어진 화면에 ‘서영제’의 이름이 떠 있었다.
“영제 형이에요?”
“망할 자식이.”
도헌은 휴대 전화를 침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도톰한 양탄자 위에 툭 하고 휴대 전화가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준의 휴대 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아… 영제 형이네요.”
도헌의 품을 벗어나 휴대 전화를 확인한 의준이 중얼거렸다. 메시지를 열자 대화창에 같은 단어가 연달아 떠올랐다.
---아침 먹자.
---아침.
---아침.
---아침밥.
---아침 먹자.
---아침.
---아침.
마지막 메시지에 적힌 호텔 아래층 조식 식당 이름을 확인한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죽여 버릴까.”
도헌이 낮게 중얼거렸다. 웃음기 없는 표정과 서늘한 눈빛을 본 의준은 황급히 분위기를 무마했다.
“왜 그래요, 좋은 아침에.”
“…….”
“우리 저녁도 굶었잖아요. 저 배고파요. 아침 먹으러 가요.”
의준은 도헌을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제 영제 형을 내버려 두고 우리만 올라왔으니, 영제 형도 걱정돼서 연락하신 거겠죠.”
“그 녀석이 걱정할 일이 어디 있어.”
내뱉은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말투는 누그러진 상태였다. 의준이 배가 고프다고 한 말이 먹힌 모양이었다.
“씻고 밥 먹으러 가요.”
“…….”
“같이 씻어요, 네?”
그 말에 도헌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의준의 두 손을 잡고 침대 아래로 내려서도록 도와주며 입을 열었다.
“…영제 말고 다른 사람도 있을지 몰라.”
“태미요?”
의준의 되물음에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나기 껄끄러우면 억지로 볼 필요 없어. 아침은 다른 식당에서 먹어도 되고.”
“아니에요.”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요.”
태미의 이름을 스스로 내뱉었는데 전혀 부정적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마음도 차분했다.
‘어쩌면 밤새 형을 독점한 게… 즉약이었는지도.’
의준은 얼굴을 붉히며 도헌을 슬쩍 끌어안았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태미를 보자마자 형의 새 애인은 나라고 밝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돼.”
의준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진짜요?”
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에서 처음 태미에게 널 소개할 때부터 밝히고 싶었어.”
사전에 그러기로 합의하지 않고 밝히면 강제 커밍아웃이 될 것 같아서 우선 ‘친구’라고 밝혔었다. 그러나 사정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으려던 도헌에게 의준은 자신도 모르는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네가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참았지.”
“그랬구나. 전 그냥….”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린 의준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형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고 알려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어째서?”
완벽한 서도헌의 인생에 자신의 존재가 오점으로 보일까 봐 두려웠다. 사랑하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두려움을, 도헌은 아마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만 허락해 주면 난 누구에게든 널 내 남자 친구라고 소개할 자신이 있어. 할아버님께도.”
“형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겨우 안도하셨을 분께 충격을 안겨 드리고 싶지는 않으니 그건 접어 두죠.”
도헌은 의준을 사랑했다. 그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까 두려움 정도는 극복할 수 있어.’
나도 이 사람을 사랑하니까. 의준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태미에게 우리 사이 말해 버려요.”
“그래도 돼?”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도헌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왜 형이 고마워요. 내가 고마운데.”
“너는 왜?”
“그야 형이….”
의준은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형이 내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밝힐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나도 마찬가지야.”
도헌은 의준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너와 내가 사귄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세상 사람들이라니, 너무 과하지 않아요? 부산 정도면 몰라도.”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받아친 의준에게 도헌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부산 전체도 좋군. …일단 발코니에 현수막부터 걸어 볼까?”
“미쳤어요?”
뒤늦게 의준은 정색했다.
“그런 짓은 남녀 커플도 안 해요. 정신 차려요, 형.”
“새 역사를 쓰는 커플이 되어 보면 어때?”
“싫어요. 농담 아니에요. 그런 짓은 절대 안 돼요, 알았죠?”
“알았어.”
“약속해요.”
“약속할게.”
도헌은 의준을 안아 올렸다.
“대신 키스해 줘.”
“…….”
의준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도헌의 입술에 닿았다. 달콤한 입맞춤의 끝에 도헌이 속삭였다.
“사랑해.”
달콤한 고백이 숨결과 함께 스며들었다. 의준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사랑해요.”
이어서 의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도헌을 바라보았다.
“…현수막 같은 건 진짜 안 돼요. 정말로, 진짜, 절대로 안 되니까요.”
하하하.
도헌의 웃음소리가 밝은 실내에 메아리쳤다.
행복한 아침이었다.
***
의준과 도헌이 식당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맞아 준 사람은 태미였다.
『대니얼! 준!』
예상했던 만남이었기에 의준은 놀란 기색 없이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어제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그 뒤에 잘 놀았느냐는 안부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영이 방에 초대해 줘서 밤새 파티했어. 매건은 새벽에 잠들었고 난 영하고 밥 먹으러 왔지.』
영제가 같은 호텔에 투숙 중이었다니 몰랐다. 게다가 친구는 그 방에서 자고 있다니, 설마.
‘…영제 형이 두 사람하고 함께?’
의준은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상우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내막은 모르지만 상우가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빠진 것만은 확실했다.
“커피 마실 거지?”
바닷가 쪽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은 후 도헌은 의준에게 물었다. 의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져올게.”
“어, 제가 가도 되는데.”
“앉아 있어. 힘들잖아.”
“…….”
의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태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준?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준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 떠나신다면서요? 서울로 가세요?』
『아니, 전주로 갈 거야. 전통적인 건축물을 볼 수 있대서. 거기서 1박 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그리고 서울에서 사흘 머물다가 출국.』
『전주 좋은 곳이죠. 즐거운 여행이 되시면 좋겠네요.』
『고마워.』
태미는 웃으며 오믈렛을 잘라 입에 넣었다. 음식을 삼킨 후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준.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네?』
『준은 대니얼의 비서이자 친구라면서? 혹시 대니얼이 지금 사귀는 사람을 알아?』
『네? 어….』
의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커피를 가지러 간 도헌은 음식 코너 옆에서 통화 중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표정이 심각했다.
‘어쩌지. …우리가 사귀는 사실은 형이 태미에게 말하기로 했는데.’
의준이 망설이는 사이 태미가 말을 이었다.
『어제 풀사이드에서 대니얼이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진지하게 교제하는 사이라고 말이야.』
『그…래요?』
『응, 그런데 어떤 사람인지는 말해 주지 않더라고.』
아마도 의준에게 밝혀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어제 태미와 사이좋게 대화하던 도헌의 모습을 떠올렸다. 도헌이 유달리 미소를 짓고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혹시 의준 이야기를 돌려 하는 중이었을까.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태미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준은 대니얼이 사귀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어, 그게….』
『아는구나? 누구야? 어떤 여자?』
어떻게 하지. 의준은 잠시 생각한 후에 도헌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등을 돌린 채 통화하고 있던 도헌이 의준의 시선을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살짝 눈을 깜박였다. 마치 ‘금방 갈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제가 말할 수는 없는 사안인데, 일단 제가 알기로는….』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분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해요.』
『대답이 수수께끼 같네.』
태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의준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도헌이 형, 아니 대니얼이 돌아오면 물어보세요. 아마 대답해 줄 거예요.』
『어제는 숨겼는데?』
『오늘은 마음이 바뀌었을지도요.』
『…그래?』
태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의준의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뭐가 그리 즐겁나~?”
“어, 영제 형.”
어느새 나타난 영제가 대뜸 의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살기등등하게 자기를 노려보는 도헌을 향해 내 커피도 가져와라, 라고 손짓한 후에 태연하게 태미와 의준을 돌아보았다.
“무슨 얘기 중이었는데?”
“아… 그게.”
『대니얼의 여자 친구 얘기였어. 준 말로는 대니얼이 드디어 밝힐 것 같대.』
“걸프렌드?”
핵심적인 단어를 알아들은 영제가 의준을 바라보았다. 의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영제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아하, 그 사람 이야기? 재미있네.”
“…….”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돌리는 의준을 바라보면서 영제는 씩 웃었다. 태미가 눈을 반짝이며 영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영도 알아? 만났어?』
“알지. 내가 쟤하고 걔하고, 이렇게 딱, 붙여 줬는데.”
영제가 도헌을 가리켰던 손과 다른 한 손을 딱 소리 나게 부딪치며 대답했다. 태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이 소개했어? 누군데? 어떤 여자야?』
“비밀, 비밀. 시크릿. 본인한테 직접 들어.”
영어라고는 짧은 단어 몇 마디뿐, 나머지는 모두 방언으로 이루어진 한국어인데도 태미와 대화가 통하는 모습이 신기하다 못해 경이적으로 느껴졌다. 의준이 감탄하며 지켜보는 사이에 태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항의했다.
『대체 얼마나 굉장한 사람이기에 이렇게들 숨겨?』
『숨기려던 게 아니고…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시라는 의미죠.』
의준이 무마했다. 태미는 한숨을 내쉬며 도헌 쪽을 바라보았다. 통화를 겨우 마친 그가 커피를 따르는 모습이 보였다.
『자꾸 나만 따돌리면 확 대니얼의 비밀을 불어 버릴 거야.』
『비…밀이요?』
『비밀이랄까, 대니얼의 인생 최대의 오점?』
“뭔데, 무슨 이야기 하는데?”
굳어진 의준과 달리 영제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태미의 말을 재촉했다. 태미는 도헌이 아직 멀리 서 있음을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나랑 대니얼이 사귈 때 말이야, 딱 하룻밤, 데이트 후에 잤거든?』
의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고백이 이어졌다.
『그런데 못 했어.』
『…예?』
의준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태미가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니얼이 안 섰거든.』
믿어져? 이런 매력적인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분위기까지 다 잡았는데 전혀 반응이 없었다니까. 태미가 동의를 구하듯 덧붙인 말에 의준은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 대화는 알아들을 수 없었는지 영제가 의준의 팔을 툭툭 쳤다.
“뭐라고?”
“…어, 음….”
이걸 설명해야 하나. 의준은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형이…. 태미하고, 그… 못 했대요.”
“뭘?”
되묻는 영제 앞으로 태미가 집게손가락을 들이밀었다. 그녀가 위를 향해 바짝 세웠던 손가락을 스르륵 굽히자 영제는 입을 딱 벌렸다.
“진짜로? …서도헌이?”
어째서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걸까. 의준은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영제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의준을 곁눈질했다.
“어째 다른 여자랑 잘도 사귔다 했더니, 암것도 못 했구만?”
“…….”
태미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도헌이 옛날 일로 바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불쾌하기도 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라면 영제처럼 웃어넘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아니잖아.’
시선이 도헌에게로 향했다. 도헌은 커피를 쟁반에 두고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었다. 아마도 의준을 위해 음식을 담아 올 생각인 것 같았다.
‘그래, 난 친구가 아니야.’
태미의 폭로에 영제는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이야, 서도헌, 흑역사네, 흑역사야.”
『영, 너무 좋아하네. 대니얼의 친척이라면서 그렇게 기뻐해도 돼? 가족의 문제일 수도 있잖아.』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아이고, 내 미친다.”
『가족의 위기라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여야지.』
태미는 농담조로 덧붙였다.
『지금 여자 친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의준이 갑자기 끼어들자 태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제와 태미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의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애인은 그런 문제가 있었다고는 짐작도 못 했답니다. 왜냐면 어젯밤에도 정상적으로… 아니, 다른 의미로 비정상적일 만큼 훌륭하게 역할을 다했거든요.』
『뭐?』
태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윽고 말뜻을 깨달은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잠깐만, 준, 지금 그 말… 세상에.』
의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심스럽게 테이블 사이를 걸어 도헌에게로 향하는 그의 등을 응시하던 태미가 중얼거렸다.
『영, 내가 지금 엄청난 실수를 한 거야?』
“의준이 화도 낼 줄 아나?”
『어떻게 하지? 난 대니얼이 나랑 사귀었으니까 이성애자일 줄 알았어.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여자 친구라고 불렀는데….』
태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맙소사, 영. 어떻게 하지?』
“응? 표정이 와 그라노. 노 프라블럼, 노 프라블럼.”
영제는 손을 내저었다.
“의준이는 내랑 다르게 착한 놈이라 화내도 금방 풀린다. 사과하면 돼.”
『대니얼이 날 죽일지도 몰라. 내가 자기 남자 친구에게 무례하게 굴었잖아. 게다가… 그런 줄도 모르고 이상한 얘기까지 해 버렸으니까. 아아, 왜 미리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매건을 깨워서 데려왔어야 해. 걔가 있었다면 내가 그런 말을 못 하게 막아 줬을 텐데.』
“아이고, 바다 저짝 출신은 감정 표현이 격하네. 진정해라. 음식 다 엎겠다.”
『영, 내가 대니얼 손에 죽으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줘. 태평양을 면한 곳이 좋아.』
“죽고 싶다고? 다이? 에헤이, 그건 안 되지.”
영제는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럴 때 딱 맞는 와인 있다. 갖고 올게. 드링크, 오케이?”
태미는 울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 고마워, 사랑해.』
“입으로 씨부리는 고백은 안 받는다. 내로 갈아탈라면 몸으로 보여 줘야지.”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어제 오늘 함께 놀았던 경험으로 이해했으리라. 태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진심도 아니면서.』
“술 좀 먹고 올라가자.”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생각 좀 해 보고.』
태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이보다 더 충격적인 아침은 없을 거야. …대니얼하고 준에게 어떻게 사과하면 좋지?』
도헌과 의준이 영제와 교대하듯 테이블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쨌든 잘못한 건 사실이니까 제대로 사과해야겠다고 결심한 태미는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대니얼, 준, 이리로 와.』
그때였다. 입구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태미는 물론 도헌과 의준도 고개를 돌렸다.
입구 쪽에 야구 모자에 선글라스 그리고 마스크까지 쓴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직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들어온 그 남자는 곧장 영제를 향해 걸어가더니 그의 팔을 잡았다.
“나랑 얘기 좀 해요.”
영제가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팔을 뿌리쳤다.
“어딜 함부로.”
“얘기 좀 해요, 제발.”
“꺼지라.”
“영제 형!”
낯익은 목소리에 의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우 아니에요?”
“흐음.”
도헌은 별 관심 없는 표정으로 의준의 등을 감쌌다.
“일단 앉아.”
“어… 네.”
의준은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다. 도헌이 그의 앞에 접시와 커피를 내려놓는 사이에도 영제와 상우의 티격태격은 이어지고 있었다.
“얘기 좀 들어 봐요. 오해라니까.”
“끄지라고.”
“사람이 찾아온 성의를 봐서 듣는 척이라도 해요.”
“니 멋대로 와 갖고 무슨 말이 그래 많노.”
“영제 형, 나는….”
상우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영제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억…!”
상우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영제는 그를 둔 채 식당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 상우는 그를 둘러싼 직원들을 뿌리치고 일어서더니 절뚝이며 영제를 쫓아나갔다.
“영제 형!”
상황을 지켜본 직후 태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도헌과 그 옆에 앉은 의준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둘 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방금 영하고 그 남자… 봤지?』
『봤어. 하지만 나하고 상관없으니까.』
도헌이 대답했다. 태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저 녀석들에게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는 편이 나아, 태미.』
『뭐?』
태미는 의준을 바라보았다.
『저 두 사람, 사귀어?』
『글쎄요. 그건 잘….』
의준은 난처하게 웃었다.
『둘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안 되겠어, 커피가 필요해.』
태미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준이 대신 가겠다고 일어서기보다 먼저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테이블을 떠나 버렸다.
“…표정이 왜 그래?”
의준이 안타깝게 태미를 바라보자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의준은 멋쩍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형이 없는 사이에 제가 태미에게 좀… 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해서요.”
“……?”
“그게….”
식당은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했다. 태미는 한 무리의 단체 손님 사이를 지나 커피 머신 앞에 도착했다. 먼저 커피를 내리는 손님의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떠나온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햇살이 창을 통해 비치는 가운데 의준이 얼굴을 붉힌 채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후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대니얼이 저렇게 웃기도 하네.』
기억 속의 그는 대체로 무표정하고 희미한 미소 외에는 지을 줄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어디가 좋았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다.
태미가 알던 도헌과 지금의 도헌은 다른 사람이었다. 웃느라 일그러진 도헌의 얼굴과 그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의준을 보고 있으니 그 사실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별거 아니야.』
몇 년 지나 다시 차인 기분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서도헌은 그의 짝이 아니라는 하늘의 계시일 뿐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사귀었던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태미는 그녀의 짝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으리라 믿었다. 그녀의 존재를 잊고 둘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저 두 남자처럼 말이다.
부디 그 사람은 도헌이 의준을 바라보듯, 혹은 의준이 도헌을 바라보듯 태미만을 바라보아 주기를. 태미는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신에게 이렇게 기도하며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