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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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호텔 1층 정문 앞에 차가 대기 중이었다. 도헌은 운전을 맡았던 경호원에게 내리라고 손짓한 후에 직접 운전석으로 향했다.

“의준아, 뒤에….”

뒤에 타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준은 조수석에 올라탔다. 도헌은 말없이 운전석에 타고 문을 닫았다. 차가 호텔을 벗어나 도로에 접어들자 조수석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대기 신호를 받고 차가 멈추었을 때 도헌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저놈들에게 사기를 쳤어. 차용증 없이 돈을 빌려주었던 터라 다들 크게 열을 받았지. 아버지 대신 부산 집에서 원금만 갚기로 합의했는데 그렇게 넘길 수 없다고 반발한 자들이 있었어.”

“…그 사람들이 방금 그 사람들이에요?”

차마 ‘나를 납치했던’이라는 말을 쓰지 못한 것은 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서였다. 의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욱신 하고 쑤셨다.

“그래.”

도헌은 짧게 대답했다.

“저희 집에 침입했었다고 했어요. 빈집 털이… 그거요.”

“…….”

“그날… 형이 집 앞에서 교통사고 난 거… 그것도 같은 사람들 짓이었나요?”

“그래.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하다. 영제가 합의를 끝내고 마무리하던 상황이어서….”

대답 도중에 도헌은 말을 멈췄다. 이어서 묵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니, 다 변명이야.”

생각지 못한 말에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이 말을 이었다.

“나에게 그런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 그런 집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네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

의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새벽에 가까워진, 드문드문 차량이 지나치는 도로는 밤보다 더 어두웠다.

“왜요?”

의준이 물었다. 핸들을 쥔 도헌의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차가 완전히 멈춘 후 도헌은 입을 열었다.

“네가 날 떠날까 봐 두려웠으니까.”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5년 전에 널 처음 만났을 때, 넌 좋은 집안에서 자란 착하고 좋은 녀석이었지.”

좋은 부모님과 교우 관계 속에서 자라났고, 타인에게 당연하게 호의를 받고 자연스럽게 되돌려줄 줄 아는, 행복하고 선량한 남자.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늘 불안했다.

“…너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되고 싶었어.”

대학에 진학했을 때부터 친가 일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사업은 영제가 물려받을 예정이었고, 부모가 이혼하면서 친가와는 자연스럽게 거리도 생겼다. 하지만 그래도 몸속에 흐르는 피까지 제거할 수는 없었다. 난봉꾼인 부친도, 이름 석 자만으로 특정 업계에 속한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고도 남는 조부의 존재도 그 피 안에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조용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영제 형이 나타난 뒤로 있었던 ‘집안일’도… 그런 거였어요?”

“그래. 네가 나 때문에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

자조적인 웃음이 도헌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은 다치게 만들었지만.”

도헌의 시선이 의준에게로 향했다. 대화 도중에 무의식적으로 어루만지고 있던 그의 손목에는 붉은 생채기가 선명하게 나 있었다. 손을 묶었던 케이블 타이에 스친 상처였다.

시선을 느낀 의준은 천천히 손목을 손으로 가렸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다쳤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뒤쪽에서 차 소리가 났다. 버스가 깜박이를 켜고 다가오더니 그들이 탄 차를 피해 버스 정류장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첫차가 다닐 시간이었다.

“여기서 내릴게요.”

의준은 이렇게 말한 후에 안전벨트를 풀었다. 도헌은 문을 열려던 그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게?”

“집에 가려고요.”

“지금 가던 중이었어.”

“형네 집에는 안 가요.”

“…뭐?”

도헌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거기 갈 이유가 없잖아요, 이제는.”

이제는?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도헌은 입을 열었다.

“의준아.”

“짐은 다음에 가지러 갈게요. 그리고 회사도… 가급적 빨리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인수인계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부끄럽지만… 대출 상황만 조금 여유를 주세요. 다른 직장을 찾는 대로 갚을 테니까요.”

의준은 이렇게 내뱉은 후에 차 문을 열었다. 도헌은 급히 차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려던 의준을 붙잡았다.

“설명이라도 제대로 해. 왜 이러는데?”

“왜 이러냐고요?”

되묻는 의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다 끝났잖아요.”

“뭐가.”

“형이 계획했던 복수요.”

“……!”

뒤통수를 묵직한 쇠뭉치로 얻어맏은 듯한 충격이 솟아올랐다.

“제가 가진 모든 걸 잃고 추락하면 마무리되는 거 아니에요? 아, 혹시 제가 죽어야 끝나는데 눈치 없이 살아남았던가요? 그러면 지금 도로에 뛰어들까요?”

“무슨….”

도헌은 황급히 의준을 끌어안았다.

“놔요!”

의준이 그를 밀쳤다. 옆구리가 뜨끔하고 아팠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해야. 그런 게 아니야, 의준아. 나는….”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의준은 그의 손목을 움켜쥔 도헌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유달리 뜨거운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복수하려던 건 사실이잖아요?”

도헌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면서요?”

의준은 말을 이었다.

“그깟 메시지… 정말로 내가 보냈는지 구별도 못 하고 그 정도 메시지에 휘둘려서….”

“…….”

“멋대로 오해하고, 멋대로 화가 나서… 그렇게 날 떠났다가 다시 나타나 놓고…! 나를 다시 상처 입혔잖아!”

의준은 도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형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나며 전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형이 나를 상처 입혔다고!”

납치당했을 때는 무서웠지만 구출된 지금 그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손목과 발목의 찰과상 따위, 험한 일을 하다 다쳤던 상처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몸의 상처는 언젠가 낫는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못한 채 고통만 줄 뿐이었다.

“5년이나 있었어!”

피를 토하는 기분으로 외쳤다.

“내가 그 메시지를 보냈는지, 내가 정말 당신을 그렇게 찼는지 확인할 시간은 5년이나 있었다고! 그런데 하지 않았잖아!”

“연락했었어.”

도헌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네게 연락했어. 하지만 받지 않았지. 며칠 동안, 하루에 수십, 수백 통씩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남겼다고.”

대답은 없었다. 서서히 지쳐 가던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는 없는 전화번호라는 메시지가 나오더군.”

뒤늦게 수소문했다. 겨우 대학 친구에게 연락이 닿았지만 의준이 학교를 자퇴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었다. 집안일 때문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그들도 몰랐다. 대학교수도 생판 남인, 졸업생인 도헌에게 자퇴생의 정보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렇게 널 영원히 잃었지.”

의준의 표정이 흔들렸다.

“휴대 전화를 잃어버렸어요.”

아버지가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느라 경황이 없던 때 이미 휴대 전화는 그의 손에 없었다. 덕분에 장례식을 치를 때도 친구들에게 제대로 연락하지 못했고 말이다.

그 뒤에 휴대 전화를 새로 만들었다. 스마트폰이 아닌 새 기기로, 요금제도 최저로 선택하느라 번호도 변경했다. 집안 사정도 집안 사정이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게 되어 버린 도헌을 잊고 싶었다.

“그래서 형에게도 연락할 수 없었고요.”

“그랬군.”

도헌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의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휴대 전화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믿어요?”

“지금 그렇게 말했잖아.”

“거짓말이면 어쩌려고요?”

“넌 나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어.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도헌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메시지도 네 진심이라고 생각한 거야.”

“윽….”

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 믿고 싶어지잖아요.’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린 의준을, 도헌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널 오해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지.”

명백한 잘못이었지만 돌이킬 수도 없었다.

“오해를 빌미로 복수하려 했던 사실도 부정할 수 없어.”

상처받은 마음을 핑계로 사랑했던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했다. 5년간 줄곧, 불쾌한 감정에 휩싸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헌은 알고 있었다.

모든 감정의 기반은 슬픔이었음을.

‘너에게 버림받은 사실이 슬퍼서….’

의준을 향한 도헌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너와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워서….’

슬픔은 그렇게 절망으로 변했다.

“너와 떨어졌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자 본 적이 없었어.”

유학은 성공적이었다. 새로운 인맥은 물론 경력도 순조롭게 쌓였다. 하지만 의준과 헤어진 후 손에 넣은 어떤 것도 구멍이 뚫린 듯 허무한 가슴을 메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도헌이 피식 웃으며 내뱉은 그 말에 의준은 울컥했다.

“누구 앞에서 죽음 운운해요? 정말 죽고 싶었던 사람이 누군데?”

아버지는 빚만 잔뜩 남긴 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이라고는 어머니와 미성년자 동생뿐. 의지할 어른은커녕 기댈 구석조차 없었다. 장례식에서 그는 상주였고 장례식이 끝난 뒤부터는 가장이었다.

“휴대 전화는 사라지고, 친구는 아무도 안 오고, 어머니와 동생은 울기만 하고….”

다들 그에게 힘을 내라고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어머니와 동생을 이끌라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형도 내 곁에 없었어요!”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막막했던가.

“뒤에 남겨진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기나 해요?”

세상에 홀로 남았음을 실감했다. 매일이 지옥 같았다. 너무 고통스럽던 어느 날 도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만이라도 들으면 기운이 날 것 같아서, 그런데.

“그런 사람 없다던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도헌은 그의 곁을 떠났다. 영원히 만날 수 없으리라.

이제 남은 건 몇 명 없는 친구들과 가족뿐이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완전히 믿고 의지할 수 없었다.

“믿고 기대해 봤자 비참해지는 사람은 나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텼다. 아들로서, 오빠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가장 친했던 친구 결혼식에 건넬 축의금을 마련하려고 2주 가까이 점심을 굶었다. 낡은 옷이나마 단정하게 차려입고 싸구려 구두의 뒤축이 해지도록 달려 식에 참석했다. 그런 날에 한때 친구였던, 일말의 희망을 품고 아쉬운 소리를 했던 사람으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피가 배어난 뒤꿈치보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추스를 기운조차 없어서 이대로 밖으로 나가 도로에 뛰어들면 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조차 했었다.

그런데 도헌을 만났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좀 더 멋있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먼저 들 만큼 원망보다 반가움이 먼저 솟아올랐다.

‘그럼, 나중에 봐.’

그 말을 듣고 기뻤다. 우연한 만남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짓궂은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스치는 손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보같이… 날 가장 먼저 버렸던 사람을 상대로….”

어째서 다시 사랑에 빠졌을까.

의준은 일그러진 얼굴로 도헌을 바라보았다.

“왜 돌아왔어요?”

묻는 목소리는 떨렸다.

“그대로 날 버려뒀어도 충분히 복수가 되었을 텐데….”

“…….”

“왜 내가 다시 형을 사랑하게 만들었어요?”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내가 미웠어요?”

“의준아.”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헌은 곤란해지면 입을 다무는 버릇이 있었다.

“한 가지만 솔직하게 말해 줘요.”

그래도 지금은. 의준은 입을 열었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쐐기를 박아 주었으면 했다. 다시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도헌의 미간에 천천히 주름이 잡혔다.

“나는.”

이윽고 도헌이 입을 열었다.

“널 보면 화가 났어.”

“……!”

의준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서서히 일그러지는 의준의 얼굴을 보며 도헌은 말을 이었다.

“네가 절뚝거리며 걷는 모습을 봤을 때도, 잠을 설치고 쓰러졌을 때도, 백화점에서 시무룩해져서 돌아왔을 때도…. 화가 났어.”

“…….”

“네가 친구였던 놈에게 비웃음을 샀을 때도, 김상우를 만났을 때도, 그놈에게 억지로 당할 뻔했을 때도 화가 났지. 내가 모르는 시간을 홀로 산 너와 만났을 때도… 그런 너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던 때도….”

의준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도헌을 바라보았다.

“널 보면 화가 났어. 하지만 널 보지 못했던 때도 화가 났지.”

도헌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쩌면 나는 늘 화가 나 있었는지도 몰라.”

입을 열던 도헌의 뇌리에 어째서인지 집을 나서기 전에 영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사랑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몰라도. 내 보기에 니는 그냥….’

그 뒤의 말은 듣지 않았지만 알 것 같다.

“의준아, 나는.”

도헌은 입을 열었다.

“너를 사랑해.”

분노에 일일이 이유를 붙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모든 이유의 이유는 하나였다.

“널 잃기 전부터, 널 잃은 후에도, 그리고 다시 만난 지금까지 줄곧 사랑했어.”

진실을 이토록 간단했는데.

마음 한구석에 박힌 작은 응어리가 풀리지 않아서 괴롭다고 스스로를 괴롭혔다. 응어리보다 더 커진 괴로움을 무시하고 상대만을 탓했다.

“일찍 인정했다면 네가 상처받는 일도, 내가 후회할 일도 없었을 텐데.”

도헌은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본 의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게요.”

긴 침묵 끝에 흘러나온 그의 한 마디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말을… 조금만 더 일찍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

도헌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끝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미안해.”

짧은 침묵의 끝에 도헌의 낮고 묵직한 사과가 들려왔다. 의준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사과해요?”

“…미안하다.”

심장의 통증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다리의 힘이 풀렸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의준아.’

도헌은 눈을 깜박였다. 찌푸린 얼굴에 눈물이 가득 맺힌 눈동자. 슬퍼 보이는 의준의 얼굴 위로 기억 속의 웃는 얼굴이 겹쳐졌다.

“의준아.”

“…형?”

도헌이 휘청거렸다. 의준은 그 자리에 주저앉는 도헌을 황급히 끌어안았다. 도헌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형!”

의준의 안색이 변했다.

“정신 차려요! 형?!”

의준의 외침이 멀리서 들려왔다. 도헌은 정신을 잃었다.

***

서영제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 도헌은 응급실을 벗어나 입원실로 이동한 뒤였다. 암막 커튼 사이로 아침 해가 반짝거리며 스며드는 널찍한 특실에는 환자인 도헌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의준아.”

침대 옆에 앉아서 도헌을 바라보고 있던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들어선 영제를 본 의준은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자고 있어요.”

“…….”

영제는 병상으로 다가갔다. 창백한 얼굴에 환자복을 입은 도헌을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뜯어보던 그의 귀에 의준의 차분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갈비뼈 골절이래요. 다행히 폐나 다른 장기에는 영향이 없어서 안정만 하면 된다고….”

이어서 의준은 사뭇 미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제가 납치되기 직전에 그 사람들이 탄 차가 달려들었거든요. …그때 형이 저를 감싸느라 차에 부딪쳤는데, 아무래도 그때 다쳤던 것 같아요.”

“…허어.”

그러고 보면 의준이 납치된 후 전화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눌 때 도헌은 옆구리를 계속 어루만졌다. 그때 이미 통증이 심각했으리라.

‘망할 놈이….’

영제는 잠든 도헌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갈비뼈가 나갔는데 호텔 문짝 부수고 생지랄, 지랄했다 이거가? 안 죽은 게 용하네.”

의준이 웃었다.

“저한테는 맨날 몸을 챙기라고 잔소리를 하더니, 정작 자기는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고 말이죠.”

의준의 손이 침대 위 도헌의 손으로 향했지만 차마 닿지 못하고 떨어졌다.

“의준이 니 일이었으니 자기 몸을 챙길 겨를이 없었겠지.”

영제는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대화는 좀 했나?”

“네.”

“저놈이 고백은 제대로 했고?”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셨어요.”

“그래. …그러면.”

영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받아 줄 생각은 있고?”

“……?”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의준은 놀랐다.

“어… 그게, 저기….”

“왜 그렇게 더듬는데? 내가 못 물을 거 물었나?”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의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영제 형은 고백받아서 잘되었네, 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거든요.”

“그게 누구한테 좋은데…. 아, 아니지. 그래 말했어야 했나? 지금이라도 하까?”

“아니요.”

영제의 말에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영제의 귀에 의준의 한숨 소리가 스며들었다.

“도헌이 형을 좋아해요. …형도 저를 좋아한다고 했고요.”

서로 마음을 확인했다. 그러니 행복한 결말만이 남았다.

“하지만 모르겠어요. 형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나는데 화도 나거든요.”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마무리되어도 되는 걸까요?”

“안 되지.”

또다시 의준의 예상을 벗어난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한 거 아니가? 유치한 복수에 속아 넘어가가 마음고생한 분함도 있을 테고, 남의 집안일에 휘말려 안 해도 될 고생 실컷 했는데. 그걸 그냥 넘기면 그게 사람이가, 보살이지.”

“…….”

의준을 눈을 깜박였다.

“저 새끼 지 마음대로 굴다가 이 사달을 냈는데 니만 배려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면 억울하지. 니도 니 생각만 해라.”

영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서로 좋아한다고 반드시 사귀란 법도 없고, 그런다고 행복해지리라는 법도 없는 게 인생 아이가.”

가벼운 어조에 실린 말의 내용은 의외로 현실적이었다. 아마도 영제 나름의 조언이리라.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스스로 결정하라는 뜻이겠지.’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딱 하나만 참견해도 되겠나?”

“……? 네.”

“저 새끼가 니 좋아하는 마음은 진짜다. 그것만은 의심하지 마라.”

영제는 몸을 돌렸다.

“너희 집 아가씨를 데려다주고 돌아올 테니 그사이에 간호 좀 부탁하마.”

“아가씨… 제 동생이요?”

경황이 없어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영제는 당황한 의준을 안심시켰다.

“아가씨는 아무 데도 다친 데 없다. 어제는 안전하게 도헌이 집에서 재웠고. 상우랑.”

“……”

“아, 걱정 마라, 상우는 따로 가둬 뒀고 아가씨는 여자 경호원하고 같이 있었으니까.”

영제가 덧붙였다.

“가는 김에 안부 전할게. 이따가 통화라도 해라.”

“네. …고맙습니다, 영제 형!”

영제는 손을 휘휘 저은 후에 병실을 나갔다. 병실 문이 닫히자 의준은 다시 병상 옆 의자에 앉았다.

‘도헌이 형.’

의준은 도헌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도헌이 움찔하고 팔을 떨더니 의준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의준은 깜짝 놀랐다.

“도헌이 형? 정신이 들어요?”

“…의준아.”

도헌이 의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의준은 미소를 지었다.

“입원실에 올라왔어요. 방금 영제 형이 왔다 갔고요. 일찍 깼으면 봤을 텐데… 조금 이따 다시 온다고 하셨어요.”

도헌은 말없이 의준을 뜯어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아니.”

도헌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있어서 신기해서.”

의준의 손을 잡은 도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악몽을 꾸고 일어나면 옆에는 늘 아무도 없었거든.”

“악몽을 꿨어요?”

“…….”

“무슨 악몽인데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은 직후 도헌은 대답했다.

“네가 떠나는 꿈.”

의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형도 바보 같은 소리를 할 때가 있네요.”

“…….”

“아니지, 소심한가? 형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인 줄 몰랐는데.”

도헌은 피식 웃었다.

“나도 몰랐어.”

도헌은 의준의 손을 잡아당겨 입술에 댔다.

“…널 상대하면 이렇게 되는 모양이야.”

“내 탓이라고요? 너무하네.”

의준은 웃으며 대꾸한 후에 다른 손으로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당겼다.

“한숨 더 자요. 어디 안 가고 여기 있을 테니까.”

“이러고 앉아 있기 불편하잖아.”

“손 계속 잡고 있으려고요? …진짜, 몰랐던 모습 많이 보네요.”

“…….”

의준은 마주 잡은 손 위에 다른 손을 올려 천천히 토닥였다.

“병상 옆에서 조는 데는 익숙해요. 손도 안 놓을 테니까 안심해요.”

도헌은 한숨을 내쉰 후에 한 손으로 배를 지그시 누른 채 베개에 머리를 댔다. 이윽고 그는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천천히 생각해.”

“네?”

도헌은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영제 말대로 좋아한다고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생각보다 차가운 되물음에 도헌은 놀라서 눈을 떴다. 의준은 눈살을 찌푸린 채 도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꼭 내가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그럴 리가. 네가 떠나면 나는….”

도헌은 말을 멈추었다. 시선이 움켜쥔 의준의 손으로 향했다.

“만일 네가 떠나도 너에게 화를 내지는 않아.”

의준을 원망하다가 5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했다. 분노에 몸을 맡겼던 대가로 하마터면 두 번째로 찾아온 기회조차 잃을 뻔했다.

“대신 네가 나에게 돌아오고 싶어지도록 노력할 거야. 뭐든지 하겠어.”

“뭐든요?”

“뭐든지.”

도헌이 되풀이해 말하자 의준은 웃었다.

“우리 형 쉬운 사람이었네. 공과 사를 분명히 하자고 선 긋던 전무님하고 완전히 딴판이야.”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어조는 무거웠다. 도헌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떠나지 않고 있어 주면 좋겠어.”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진심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네가 날 받아 준다면 뭐든 할 수 있어.”

“떠나도 머물러도 뭐든 해 주겠다니, 어느 쪽을 택해도 나만 이득이네요.”

의준은 농담조로 대꾸했다. 도헌은 그가 힘들고 괴로울 때 오히려 웃는 얼굴로 농담을 던지는 버릇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의준은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괜찮아.’

본인 앞에서 선언하지 않았던가. 떠나면 돌아오도록 노력하겠다고. 도헌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부상을 입은 왼쪽 가슴이 욱신거렸다.

“형이 나에게 복수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원망하고 분노했다. 5년 전 갑작스럽게 이별했을 때보다 더. 상처를 억지로 벌린 것 같은 고통조차 느꼈다.

“솔직히 옆에 남는다고 해서… 형을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도헌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별 선고를 기다리던 그의 귀에 의준의 목소리가 이어서 스며들었다.

“그런데 이상하죠? 이렇게 아프고 화가 나는데도 형이 밉지 않아요.”

“……!”

도헌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 나갔다.

의준은 웃고 있었다. 아니다. 울고 있었다. 아니….

입술 양쪽 끝을 위로 한껏 끌어올리고 환하게 웃고 있던 의준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형이 좋아요.”

재회를 통해 도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의 배려에 위로를 받고, 힘들 때는 그에게 기댔다. 도헌의 온기와 속삭임에 행복했다. 그와 하나가 된 후에는 삶이 완전해지는 기분조차 맛보았다.

“형이 없는 인생을 상상하고 싶지 않아….”

의준은 울먹였다.

“…다시 혼자서는 살 수 없어요.”

비참함과 간절함이 동시에 솟아올랐다. 아마도 매달리는 자신은 상상보다 더 추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내를 감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도 형을 사랑한단 말이에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도헌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떠는 의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여서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한 손에 의준은 스스로 뺨을 가져다 댔다. 눈물로 젖은 서늘한 뺨에 뜨거운 체온이 스며들었다. 도헌은 천천히 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의준아.”

도헌이 그를 불렀다. 살짝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로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 달콤했다. 의준은 숨을 들이마셨다. 낯선 약품의 향기 사이로 익숙한 체취와 체온이 스며들었다.

“맙소사, 의준아….”

안타까운 목소리가 의준의 목덜미에 스며들었다. 의준의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도헌의 뺨을 적셨다. 도헌은 심장이 찢어지는 기분으로 속삭였다.

“미안하다. 내가… 내가 어떻게 너한테 이런 짓을 했을까.”

누구보다 소중했다. 두 번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의 인생에 하나뿐인 사랑이었던 남자가 자신 때문에 울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하다, 의준아.”

의준의 눈물이 아프게 스며들었다. 도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형….”

도헌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의준은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원래 이렇게 안 우는데… 왜 이러나 모르겠어요.”

의준은 훌쩍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

도헌은 고개를 들어 의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댔다. 눈물로 젖은 의준의 입술에 따스한 도헌의 숨결이 스며들었다.

“울고 싶은 만큼 울어. 괜찮으니까.”

입술 가까이에서 도헌이 속삭였다.

“어떤 감정도 숨기지 마. 슬플 때도, 화가 날 때도, 힘들 때도 전부 보여 줘.”

지난 5년간 홀로 감정을 억눌렀던 의준에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도헌 자신 때문에 우는 일은 없으리라 맹세하고 싶었다.

“다시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

한순간의 실수로 두 번째로 찾아온 기회를 잃을 뻔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게. 널 아프게 하는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나하고 있어. 도헌은 의준의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의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말, 지킬 수 있어요?”

“그래.”

“정말 뭐든지 할 거에요?”

“헤어지자는 요구만 빼고 뭐든.”

도헌은 의준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한 번만 더 날 믿어 줘.”

“…….”

“뭐든 할게.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간절한 진심이 스며들었다. 의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맺혔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랑한다고 말해요.”

의준은 입을 열었다.

“앞으로 평생 사랑한다고 말해요. 말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날 사랑해 줘요. 그럴 수 있어요?”

도헌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 젖은 커다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럴게. 얼마든지.”

이어서 그는 의준의 눈가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닦아 낸 후에 속삭였다.

“사랑해.”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도헌은 링거를 꽂은 팔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두 팔로 의준을 감쌌다.

“사랑해, 의준아.”

진심을 담은 속삭임이 귀를 통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의준은 도헌을 끌어안았다. 따스한 손길이 마음에 남았던 앙금을 조금씩 녹이기 시작했다.

“…저도요.”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아올랐다. 의준은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렸다. 도헌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고백을 머금은 입술에서는 행복의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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