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부부 문상객이 조문을 마치고 손을 잡자, 모친은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초등학교 동창 앞에서 참고 참았던 슬픔이 폭발한 것 같았다. 친구 부부는 몸을 떨며 울기 시작한 모친을 다독이며 상주용 테이블로 데려갔다. 의준은 저러다 또 혼절할까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모친에게 의지할 사람이 찾아와 주기는 처음이었다.
향냄새와 국화 줄기의 풀냄새가 맴도는 공간에서 아버지의 사진만이 웃고 있었다.
아직 한창일 나이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아버지에게는 정식 영정 사진이 없었다. 그래서 앨범을 뒤진 끝에 대기업 관리자로 일하던 시절 찍었던 증명사진을 찾아 확대했다. 20년 이상 과거의 부친은 당시에 갓난아기였던 아들이 20대가 되어 당신의 상주 자리에 앉으리라 상상했을까.
의준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그렇기에 이 상황이 낯설고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그의 옆에는 동생 소영이 앉아 있었다. 소영은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과 생명처럼 사수하던 틴트를 바르지 못한 입술을 내민 채 검은 한복 차림으로 구석에 앉아 있었다. 손님을 맞을 때도 아닐 때도, 소영은 아버지의 영정 사진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상황을 받아들이기에 그녀는 아직 어렸다.
조문객이 찾아왔다. 의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절 바르게 조문을 마무리한 후 그는 상주인 의준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의준은 고개를 숙였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윽….’
목 안쪽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째서 지금 눈물이 나오는가.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들은 이래 그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니, 울지 못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망 선고를 들은 직후 혼절해서 장례식 준비를 하는 내내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여동생은 충격을 받고 화를 냈지만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하자 그제야 울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척도 없고 아버지 사업이 기우는 바람에 친구도 많이 잃은 의준에게는 가족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가 버렸으니 이제 의준이 어머니와 여동생을 보살펴야 했다.
‘울면 안 되는데.’
가장은 울지 않는 법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어머니하고 동생을 돌봐야 하는데.’
어깨에 내려앉은 가장의 책임은 예상보다 묵직했다.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수십, 수백 번 스스로에게 들려주었던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나는….’
현실만으로도 답답해서 미래를 내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하지 못하고 그의 앞에 떨어진 온갖 문제들부터 파악했다. 이틀째 잠을 설쳤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채무액을 들은 직후부터 밥도 먹지 못했다.
‘울면… 안 돼.’
이를 악물던 의준의 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괜찮아, 울어도 돼.’
따스한 온기가 그를 감쌌다. 목소리의 주인이 그를 끌어안더니 다정하게 등을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옆에 있어.’
‘…….’
‘언제든, 내가 네 옆에 있을 테니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거칠게 헤집었다. 의준은 입을 열었다.
‘거짓말쟁이.’
서러움이 솟아올랐다.
‘당신은 내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곁에 없었어.’
그의 옷깃을 움켜쥐며 분노를 내뱉었다.
‘당신은 나를 버렸으니까!’
5년이 지난 지금 깨달았다. 그때 그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것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의 병도 학업 중단도 아닌,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남자의 배신이었음을 말이다.
“…흐읍….”
의준은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하고 뺨이 축축했다.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눈가를 닦으려고 손을 들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의준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손은 한데 묶여 있었다. 발도 마찬가지였다.
“……?”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의준의 귀에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자식! 서도헌 앞에서 납치했다고? 그럴 거면 아예 서도헌을 데려왔어야지!
---거기 있을 줄 알았나. 애들이 그놈 얼굴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서도헌을 치고 다른 놈을 데려왔다는 거야? 미치겠군.
한 명이 아니었다. 둘 아니 셋. 의준은 목소리에 신경을 집중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는 커튼이 쳐진 방에 혼자 있었다. 침대 위, 손과 발은 묶여 있고 옷은 입고 나왔던 그대로였다.
‘그래, 카페 앞에서….’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쪽에서 우리 얼굴을 봤을 텐데.
---너 같은 잔챙이 얼굴을 누가 알아본다고 걱정이야. 그보다 지금 몇 시야? 형님이 연락하겠다던 시간이 지나지 않았어?
---아직 안 됐어. 뭘 그렇게 떨어? 이런 일 한두 번 해 보냐.
---XX, 지금까진 연고 없는 놈들이나 담갔지 그런 거물 건드려 본 적 없다고.
---고등학교 때 주먹질 좀 하던 놈이 무슨 거물이야.
---XX 놈아, 서도헌 뒤에는 서영제가 있다고.
---시끄러워, XX들아, 모르고 시작한 일 아니잖아!
마지막 사람이 버럭 외치자 말싸움이 잦아들었다.
---우리는 저놈을 데리고 있다가 몸값을 받고 내주면 돼. 나머지는 형님이 알아서 하실 거야.
몸값. 형님. 단어만 들어도 보통 사람들은 아니었다.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의준은 흠칫하고 몸을 웅크렸다.
“깼어?”
“아직 자는데. 뭘 먹인 거야?”
“마취제.”
“뭐야, 그러면 한동안 못 일어나겠네.”
문이 닫혔다.
---그런데 서도헌이 저놈 몸값을 댈까? 지 애비 빚을 안 갚겠다고 선언해서 이 사달을 낸 놈이잖아.
---형님이 그 정도도 모르고 작업 지시를 내렸겠냐. 뭔가 있겠지.
---서도헌이 못 내겠다면 저놈 가족을 찾아서 수고비라도 받으면 되지.
---관둬라, 저놈이나 가족은 털어 봤자 동전 한 닢 안 나올걸. 그 집 못 봤냐?
---그 집이라니 누구 집이요?
---저 방에 있는 놈 집.
‘어째서 저 사람들이 우리 집 이야기를 하지?’
의준은 당황했다. 그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지난주에 형님 지시로 나랑 희철이랑 갔었는데… 야, 감방이 백 배 낫겠더라.
---닥쳐, XX야. 우리 엄마도 아직 그런데 산다.
---왜 발끈하고 XX이야. 우리가 니 집 털러 갔냐?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형님이 가서 흔적 좀 남기고 오라고 해서 갔는데, 간 김에 뭐라고 집어 올까 싶어서 둘러봤는데 야… 진짜 금목걸이 하나 없더라니까.
‘…저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어왔던 빈집 털이였어?’
믿어지지 않았다.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우리 집에 도둑이 든 것처럼 만들어서 나를 겁먹게 했다고? 왜?’
문득 영제가 화장대 거울에 그려진 문자를 유심히 살폈던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아니라 영제 형이 눈치채도록 만든 거구나.’
그렇기에 영제는 의준을 도헌의 집으로 데려갔으리라. 아마도 목적은….
‘나를 보호하려고.’
---그 집을 생각하니 저놈을 왜 납치했나 싶은데. …진짜 서도헌이 저놈을 데려갈까?
---형님이 그럴 거라고 했잖아.
---저놈이 뭐기에?
---비서.
---비서를 납치해서 어디다 쓰냐고.
---XX야, 영화도 안 봤냐? 낮에만 일하는 비서가 아니라고.
---아, 그거야? 밤일?
---서가 놈들 면상이 하도 반반해서 눈도 높을 줄 알았더니… 얼굴 안 보나 보네.
남자들이 비웃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의준은 울컥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 취향 따위 알 게 뭐야. 어쨌든 평범한 관계는 아니야. 너도 감시하면서 봤을 거 아냐. 서도헌이 경호원 깔아 둔 거.
---우리가 처음에 차로 칠려다 실패해서 그런 거 아녔습니까?
---자기 집 말고, 비서 놈 주변에도 깔았잖아. 병원에 24시간, 대학 다니는 여동생인가한테도 전담 경호원 붙이고.
---우리 형님 첩X들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보호받는 꼴을 못 봤다고. 저건 밤일 좀 하는 비서 수준이 아니야.
---하긴 오늘도 용케 경호원 없을 때를 노렸죠.
---서영제 상대는 반반하기라도 한데 말이지.
---그쪽 놈은 영화배우라면서. 남자래도 그 정도 되면 뭐….
‘영화배우’라는 단어를 듣자 상우가 떠올랐다. 상우는 서영제와도 안면이 있었다. 설마 두 사람이 그런 사이였던가.
낄낄낄, 하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음담패설에 몰두한 남자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날카로운 벨 소리가 들리자 대화가 끊겼다.
---예, 형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예, 예. 아이고, 손끝 하나 안 댔습니다. 방에 얌전히 뒀습죠.
말과 거의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미처 눈을 감지 못한 의준과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놀란 듯했지만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예, 정신도 차렸네요. 별문제 없겠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연락 주십쇼.”
의준은 애벌레처럼 꿈틀대며 베드 헤드 쪽으로 몸을 붙였다. 남자는 문가에 선 채 그런 의준을 향해 말했다.
“얌전히 있으쇼. 받을 것만 받으면 놓아줄 테니까.”
이어서 남자는 동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꼼짝 못 하게 감시해.”
“…….”
문이 닫혔다. 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
이소영과 김상우는 서영제의 보호하에 도헌의 빌라로 왔다. 혹시 모를 추가 사건을 방지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게 위해서였다.
“아가씨는 이 방 쓰세요.”
영제는 소영을 손님용 침실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의준의 짐이 남아 있었다.
“화장실은 맞은편이고, 부엌은 저쪽. 밖에는 못 나가도 필요한 건 말하면 사다 줄게요.”
“…….”
소영은 불안해 보였다. 눈앞에서 오빠가 납치당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저, 저기….”
소영은 돌아서려던 영제를 불러 세웠다.
“오빠는…요?”
“……? 상우는 아가씨 옆방입니다. 이불 한 장 없긴 해도, 그 정도 벌은 받아 마땅하니까 내비 두세요.”
“아뇨, 상우 오빠 말고… 우리 오빠…. 의준 오빠요.”
소영은 시선을 아래로 향하며 물었다.
“오빠는 괜찮을까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영제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오빠는 아무 일 없을 깁니다. 어차피 저쪽이 원하는 건 돈인데, 돈은 준비가 끝났거든요. …원래 여기까지 갈 일도 아니었고요. 그쪽에 멍청한 놈들이 전달을 잘못하는 바람에 일이 귀찮게 꼬여서….”
소영의 눈이 커졌다.
“아, 내 말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뜻입니다.”
영제는 급히 말을 마무리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지 않으면 내 아주 곤란하거든.’
집주인 도헌은 거실에 있었다. 창가에 서서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연락은?”
“30분 뒤. 현찰 주고 의준이 데려오면 된다. 내 직접 갈 테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면….”
“내가 가겠어.”
“이쪽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더니?”
영제는 놀라는 기색 없이 물었다.
“그쪽 일이 아니야. 의준이 일이지.”
“…어, 그래.”
영제는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로 향했다.
“의준이는 기억하지 못하더군.”
“뭐를?”
“메시지 한 통으로 나를 버렸던 일을.”
전혀 기억 못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도헌이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건… 좀 그러네.”
의준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도헌은 지난 5년이 아무 의미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웃긴 게 뭔지 알아?”
“……?”
“그런데도 의준이에게는 화가 안 나.”
5년 동안 그는 혼자 분노했었다. 실연의 상처를 후벼 파서 덧나게 만들고 그 고통에 괴로워했다. 의준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앞으로 그를 볼 수 없는 미래를 살아가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가.’
뒤늦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난 그저… 의준이가 없는 삶을 살기 싫었을 뿐이었나?’
도헌은 고개를 돌려 거실을 돌아보았다. 의준과 함께 골랐던 소파, 테이블 그리고 그와 함께 보았던 텔레비전이 보였다. 의준이 오기 전에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도헌의 지난 5년간의 세월처럼 그저 텅 비어 있었을 뿐이었다.
‘의준이가 없으면 안 돼.’
도헌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살기 싫은 수준이 아니었다. 이제 의준이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의준이는 내 곁에 있어야 해.”
도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의준이 그의 옷깃을 놓치고 끌려가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를 부르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아무도 내게서 의준이를 떨어뜨려 놓을 수 없어.”
설령 의준 자신이라고 해도. 도헌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이런 비뚤어진 감정은 의준이에게 필요 없겠지만.”
“그런가?”
영제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마, 가둬 놓겠다는 것도 아니고, 애 둘 낳을 때까지는 친정에 못 보낸다고 협박한 것도 아니고…. 요는 그냥 상대를 곁에 두고 평생 지켜 주고 싶다, 이건데. 그 정도면 아주 건전하고 올바른 자세 아이가?”
“…….”
내가 사랑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몰라도. 영제는 말을 이었다.
“내 보기에 니는 그냥….”
뚜르르르르---.
휴대 전화 벨이 울리는 바람에 대화가 멈췄다.
“서영제입니다. …어디라고?”
영제가 도헌을 향해 입을 벙긋했다. 마포구. 이어서 호텔 이름.
‘멀지 않군.’
도헌은 소파에 걸쳐 두었던 겉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옆구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쳤다.
“……?”
영제의 시선을 느낀 도헌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표정을 가다듬었다.
“돈은 현찰로 준비 끝났습니다. 약속 장소까지 30분이면 도착할 거고요. 아, 그 전에 그쪽 물건 상태가 멀쩡한지 알고 싶은데요. 목소리 좀 들읍시다.”
영제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도헌의 안색을 살피며 통화를 이어 갔다.
“백주 대낮은 아이지만 대로변에서 대뜸 우리 쪽 사람을 차로 치고 데려간 사람인데 걱정을 안 하면 이상한 거 아입니까? 이쪽도 최대한 잡음 없이 일 처리하려고 노력 중이니, 성의 좀 보이시지요.”
잠시 후 영제는 휴대 전화 스피커 부분을 막고 도헌을 향해 말했다.
“의준이 상태만 확인하고 출발하자.”
“이리 줘.”
영제는 순순히 도헌에게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도헌은 휴대 전화를 귀에 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어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어디 있냐? 데려와, 전화 바꾸란다.
또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말소리.
---어이, 형씨. 통화하쇼. 살아 있다고 한마디 하면 되니까.
---손에 묶은 거 풀을까요?
---형씨,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하면 풀어 줄게.
의준이 묶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휴대 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보…세요?
그러나 겁먹은 의준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분노는 순식간에 흩어졌다. 도헌은 짧게 숨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의준아.”
---…도헌이… 형?
“그래.”
---형…. 괜찮아요?
생각지도 않은 질문이 들려왔다. 심장이 욱신 하고 쑤셨다.
“너야말로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네.
“지금 데리러 갈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
---…형이 오세요?
“그래.”
그러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 라고 말하려던 도헌의 귀에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왜요?
“왜라니.”
대꾸를 하려 했지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오실 필요 없어요. 형한테, 아니, 전무님에게….
의준은 잠깐 말을 멈췄다.
---저는 그럴 가치 따위 없는 사람이잖아요.
감정을 외면했던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르는구나. 도헌은 입을 열었다.
“의준아.”
---…….
“날 믿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변명할 기회를 줘.”
되찾겠다던 결심조차 자기중심적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의준을 곁에 둘 기회는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도헌은 진심으로 말을 이었다.
“널 데리러 갈게. 무사히 돌아오게 할 테니까 믿고 기다려.”
그가 없는 데서 의준이 다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도헌이 혀….
의준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찰나, 갑자기 소리가 멀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어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XX, 살아 있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무슨 사랑싸움을 하고 XX이야.
---아… 아니에요!
당황한 의준의 목소리.
---XX 자식들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진짜.
---야, 건들지 마. 형님이 얌전히 데리고 있으라고 했다고.
“거기 있는 놈들.”
휴대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던 대화가 멈췄다.
“의준이에게서 손 떼.”
---뭐? 이봐, 지금 누구한테….
“다시 의준이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열 배로 갚아 주겠다. 아니, 전부 죽여 버리겠어.”
---뭐가 어째? 너….
“30분 내로 도착할 겁니다. 이따 봅시다.”
영제가 도헌에게서 휴대 전화를 가로채 이렇게 말한 후에 끊었다.
“도헌이, 니.”
핀잔을 주려고 입을 열었던 영제는 도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헌의 얼굴은 창백했고 표정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지금 내가 뭐라고 해 봤자 귓등으로도 안 듣겠구만.’
긴 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밤늦은 시각, 호텔 로비는 커다란 캐리어 가방과 쇼핑백을 든 관광객들로 붐볐다. 지은 지 3년 된 세련된 부티크 호텔은 문화 관광 성수기의 혜택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이야, 머나먼 타국에 와서 지대로 벌어 제끼고 있네. 이 정도면 출세한 거 아이가?”
로비를 지나 호텔 맨 위층으로 향하며 영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출세했네, 출세했어. 서울에 진출할 때만 해도 수산시장 옆에 코딱지만 한 사무실 하나 차렸었는데 이제는 호텔 맨 위층에 살림도 차리고.”
호텔 고객은 예약할 수 없는, 맨 위층 스위트룸 앞에 도착한 직후 영제는 빈정거리는 빛이 가득했던 표정을 서글서글한 미소가 맴도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덩치 큰 남자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오셨습니다.”
문이 열렸다. 영제는 고개를 돌려 도헌을 바라보았다.
“내 알아서 할 테니 조용히 있어라.”
“…….”
도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제는 가볍게 한숨을 쉰 후에 걸음을 뗐다.
문 너머에서 그들은 몸수색을 받고 복도를 지나 거실에 들어섰다.
“평소에도 맨몸으로 다니는 거 알면서 몸수색을 시키고. 그렇게 더듬고 싶었으면 직접 더듬지 그러셨습니까.”
영제는 느긋한 투로 말을 걸었다. 험악하게 생기기로 치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남자들이 나란히 서 있는 가운데 혼자 소파에 앉아 있던 초로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돈은?”
영제는 들고 있던 가방을 자기 발 앞에 툭 하고 떨어뜨렸다. 남자의 부하 한 명이 다가와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영제는 한 발로 가방을 팍 밟았다.
“손님 얼굴도 안 보여 주고 돈부터 가져간다니, 기본이 안 된 집일세.”
“그 돈은 그쪽 양반이 우리에게 빌렸던 돈이니 먼저 받아야지. 그쪽에서 우리 상대로 사기를 안 쳤다면 이런 성가신 일도 없었소이다.”
초로의 남자가 대꾸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하가 가방을 잡으려고 몸을 숙였다. 영제는 무릎으로 그의 목을 빠르고 강하게 올려쳤다.
“커윽!”
부하가 고꾸라졌다. 다른 부하들이 눈을 부릅뜨고 모여들었다.
“와 이라노. 이 장사 하루이틀 해 본 분들도 아닌데.”
영제는 태연하게 웃었다.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이쪽에서 돈을 가져온 이유는 그쪽에 대한 성의 표시입니다.”
가방을 다시 발로 꾹 짓누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 쪽 양반이 어느 집안 망나니인지 뻔히 알면서 작업친 거 아는데, 피차 이 바닥 뜰 거 아니면 좋게 넘어가자고 윗선에서 이야기하고 위자료 삼아 가져온 돈입니다.”
“…….”
“우리야 당신네 윗분에게 드리고 알아서 당신을 설득하든 야단치든 해서 우리 물건을 고이 되돌려 놓도록 하는 편이 덜 수고스러운데… 그 윗분이 당신 체면 좀 세워 줄 겸 이렇게 하라고 부탁해서 찾아왔다, 이 말입니다.”
턱, 하고 가방에 다시 발이 얹혔다. 초로의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놈들, 우리가 조용히 사니까 아주 우습게 본 모양인데….”
“우습게 본 건 그쪽이죠.”
“뭐라고?”
“우리 회장님이 몇 년 조용히 생활하시니 정말로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데, 지금도 아랫지방 교도소에 전화 한 통 거는 건 일도 아닌 분입니다.”
“…무슨 말이냐.”
“그쪽 윗분 아드님이 지금 어디서 목숨 부지하고 있는지 잊은 겁니까?”
영제는 말을 이었다.
“디립다 약 처먹고 민간인들 다 보는 데서 친구한테 도끼 휘두르다 걸린 거, 없던 일 해 주고 언론 막고 없던 진료 기록 내세워서 겨우겨우 지내기 편한 데에 1년 미만으로 막아 준 게 누구였지? 응?”
“…….”
초로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영제는 씩 웃었다.
“내 알기로 이달 말 출소였을 텐데, 안에서 헛짓 하다가 형기가 길어지거나 나오기 전에 잘못되면…. 그 감당은 어찌 하실렵니까?”
“그런 짓을 하면 우리 회장님이 네놈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잖나.”
“그라믄 전쟁이지요.”
영제는 태연했다.
“서울에 쪼매난 구역 하나 양도받고 왕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인 모양인데… 아래쪽에서 전쟁 나면 순식간에 날아갑니다.”
“…이, 자식.”
초로의 남자는 부들부들 떨었지만 대꾸하지 못했다. 영제는 자, 하고 손뼉을 딱 쳤다.
“그래서, 우리 귀한 손님은 어디 계신고?”
“…옆방에.”
결국 남자는 체념한 표정으로 실토했다. 영제는 고개를 돌렸다. 그 옆을 도헌이 빠르게 지나갔다.
“도헌아.”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영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험악한 남자들 사이를 성큼성큼 가로지른 도헌은 침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문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열어.”
“…어디서 명령이야?”
쾅!
도헌은 문을 걷어찼다. 순식간에 문이 안쪽으로 넘어갔다. 남자가 놀라서 멈춰 선 사이에 도헌은 안으로 들어갔다.
“의준아.”
어두운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침대 두 개. 한쪽에는 사용 흔적이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의준아?”
창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도헌은 몸을 돌렸다. 침대와 창문 사이에 작은 머리가 보였다.
“의준아.”
세 번째로 이름을 부르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겁먹은 눈동자가 도헌을 알아보고 흔들렸다.
“도헌이… 형.”
도헌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문가에 서 있던, 험상궂은 남자들을 무시하고 다가온 그는 의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어설 수 있어?”
다정한 질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의준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도헌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서서 방을 빠져나오자 거실에서 아는 사람과 마주쳤다.
“의준이 많이 놀랬제?”
영제는 의준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도헌이랑 얼른 집에 가라. 여 일은 이제 신경 쓰지 말고.”
“…….”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멈춰 섰던 의준은 도헌의 재촉을 받고 다시 걸음을 뗐다. 출입문으로 향하던 그들의 뒤로 영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네는 대화를 좀 해라, 대화를.”
“…….”
“서로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말고 다 터놓고 대화를 해. 남자 사이에는 그래야 할 때가 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교대하듯 덩치 좋은 남자 서너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보자 안에 있던 남자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자, 그럼 우리도 대화를 좀 해 볼까요?”
닫히는 문 사이로 영제의 느긋한 목소리에 이어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도헌은 흠칫하는 의준을 한 팔로 감쌌다.
“가자.”
두 사람은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호텔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