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평온한 분위기가 감도는 오후, 전무실 문이 열리고 서도헌이 고개를 내밀었다.
“의준 씨, 잠깐 들어와요.”
“네.”
의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거기 앉아요.”
급한 일인가 싶어 서둘러 들어온 의준에게 도헌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의준이 소파에 앉자 그는 다가와 태블릿을 내밀었다.
“다음 주에 참석할 외부 회의 자료입니다. 검토해 두세요.”
의준은 화면에 표시된 문서를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전무님, 이건 오전에 검토를 마친 자료인데요.”
“압니다.”
“예?”
“다시 검토해요. 거기 꼼짝 말고 앉아서.”
그제야 의준은 도헌의 의도를 눈치챘다.
“전무님….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화장실 갈 때 허리를 짚는 모습을 봤습니다.”
“아….”
그걸 또 언제 봤을까. 의준이 민망한 표정을 짓자 도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오늘까지 쉬자니까.”
“이틀이나 쉴 수는 없잖아요. 제가 아니라 ‘전무님’께서는.”
의준을 돌보기 위해 함께 쉬겠다는 도헌의 고집을 꺾고 출근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의준의 대꾸에 눈썹을 위로 올렸다.
“재택근무라는 선택지도 있었어.”
“일정에 면접이 두 건이나 있었거든요.”
“…….”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됐으니까 자료나 다시 읽어 둬. 그리고 한 시간 뒤에 퇴근하자.”
“다섯 시에요?”
의준이 되묻자 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같이 가자. 그 전에 저녁 먹고.”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내가 그러고 싶어.”
도헌은 의준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제발 데려다주게 해 달라고 빌어야 허락할 건가?”
“…….”
애원하는 도헌이라니,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의준은 웃었다.
“형이 힘들까 봐 그러죠.”
“전혀 힘들지 않아.”
도헌이 의준의 손을 잡았다. 의준은 깜짝 놀랐다.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적어도 낮에는.”
“…무, 무슨 말이 그래요.”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도헌은 웃으며 잡았던 손을 놓았다.
“네가 어머님을 면회하는 사이에 난 교수님을 뵙고 오지. 이미 약속도 잡았어.”
“…….”
그렇게까지 나오면 말릴 수도 없었다.
결국 의준은 푹신한 소파에 한 시간 정도 앉아 시간을 보낸 후에 도헌과 함께 퇴근했다. 그리고 함께 저녁을 먹은 후에 승용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편하게 병원까지 왔다.
“혼자 올라갈 수 있겠어?”
도헌은 의준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주며 물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가 보세요, 약속 시간 되었잖아요.”
“…면회 마치고 연락해.”
“네.”
헤어지기 전 도헌은 의준의 손을 잡았다. 무엇이 그렇게 아쉬울까. 의준은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왜 꼭 이대로 헤어지는 것 같지? …형한테 옮았나.’
의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병실로 올라갔다.
병실에는 소영과 간병인이 있었다. 의준은 간병인에게 어머니 상태를 전해 들으며 병상으로 향했다.
모친은 순조롭게 회복 중이었다. 몸은 불편했지만 의식은 분명했고 의준과 소영을 알아보았다. 그래 봤자 악화되기 전인 작년 초 수준으로 돌아간 데 불과했지만 남매에게는 충분한 진전이었다.
“엄마, 내일 다시 올게.”
“푹 쉬고 내일 봐요.”
면회를 마친 남매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의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여덟 시, 도헌은 면회가 끝나는 대로 전화하라고 했지만 잠깐 소영을 바래다주고 나서 연락해도 늦지 않으리라.
“오빠, 잠깐 시간 돼?”
마침 소영이 이렇게 묻기에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아니면 택시 탈래?”
“아니, 그게 아니라.”
소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시간 되면 카페 안 갈래? 나 목 말라.”
“……? 병실에서 커피 마셨잖아.”
“아, 그런 게 아니라.”
말문이 막힌 소영은 대뜸 의준의 팔을 잡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카페 가자.”
“어, 야… 왜 이래?”
의준은 당황했지만 소영을 따라 걸음을 뗐다. 고민 상담이라도 하려는 걸까.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알았어, 가자. 그런데 잠깐만, 나 전화 한 통만 하고….”
“잠깐이면 돼. 나중에 해.”
“야….”
소영은 의준을 병원 맞은편의 주상 복합 건물에 자리 잡은 프랜차이즈 카페로 이끌었다. 주문 카운터를 지나쳐 대뜸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소영에게 의준은 의아한 투로 물었다.
“주문 안 해? 1층에 자리 있는데 왜 2층으로 가?”
“그냥 좀 따라와.”
“이소영,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그냥 대화하자는 수준이 아닌데? 뭘 꾸미는 거….”
층계를 다 올라간 즈음에 의준은 걸음을 멈췄다. 벽 쪽에 나란히 붙은 칸막이 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의준아.”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의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김상우, 너.”
“오빠.”
소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상우 오빠가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데 어렵다고. 그래서 내가 잠깐 보자고 했어.”
“…….”
“잠깐 이야기만이라도 들어. 상우 오빠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죽을죄도 아닐 텐데 사과는 받아 줘야지.”
의준은 울컥해서 소영을 노려보았다. 험악한 의준의 표정을 처음 본 소영이 놀라서 굳어졌다.
“…오빠.”
의준은 소영을 내버려 둔 채 상우에게로 향했다.
“사과를 받을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리겠다더니, 이런 식으로 나와? 아무것도 모르는 내 동생을 이용해서?”
“오해하지 마. 그런 게 아니니까.”
“아니긴 뭐가 아냐.”
의준은 앉아 있던 그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소영이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겠지?”
“안 했어.”
상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소영이가 날 돕겠다고 너를 불러내지 않았겠지.”
“…….”
“소영이는 아무것도 몰라. 쟤한테 화내지 마.”
의준은 흘깃 소영을 바라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소영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화는 안 내도 야단은 쳐야겠고, 너랑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이제 쟤한테 연락하지 말고.”
의준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내뱉은 후에 몸을 돌렸다. 뒤에서 상우가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기다려. 할 말이 있어.”
“사과는 받을 생각 없어.”
“아니야. 다른 이야기야.”
“관심 없어.”
“서도헌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걸음을 떼려던 찰나 상우의 말이 날아들었다.
“서도헌에 대해서 네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 있어.”
상우의 표정은 진지했다.
***
병원 면회 시간이 지난 데다 번화가나 주택가와 떨어져 있는 위치 탓인지 카페는 한산했다. 2층에도 창가에만 손님 한두 명이 앉아 있을 뿐 벽 쪽 좌석에 앉은 사람은 상우와 의준뿐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도 간단히 해.”
의준이 말했다. 그들에게서 한두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 소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헛소리를 하면 즉시 돌아갈 거야.”
의준의 엄포를 아랑곳하지 않고 상우는 이렇게 물었다.
“지금 그 남자 집에 살고 있다면서?”
소영에게 전해 들었나 보다. 의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우와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록 용서하기 어려운 짓을 저지를 뻔했어도 그의 사정을 고려해 먼저 동거 제안을 했던 사람은 상우였기 때문이다.
“집에 일이 있었어. 소영이가 그런 건 말 안 했나 보네.”
“들었어. 빈집 털이가 들었다고.”
상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용의주도한 남자네. 상황을 그런 식으로 유도하다니.”
“…무슨 말이야?”
“설마 우연이라고 생각해?”
상우가 물었다.
“1년 넘게 아무 문제없이 잘 살던 집에 도둑이 들었어. 피해 본 건 아무것도 없고 사람이 왔다 갔다는 흔적만 남겼지. 그것도 너 혼자 집에 돌아가던 날이 아니라 영제… 아니 자기 친척에게 데려다주라고 한 날에 말이야.”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빈집 털이를 꾸몄을 수 있다는 얘기야.”
“뭐?”
의준은 황당한 투로 되물었다.
“무슨 헛소리야. 도헌이 형하고 빈집 털이가 무슨 상관이라고. 지금 형이 일부러 우리 집에 도둑을 보냈다는 거야? 왜?”
“널 그 집에서 나오게 만들려고.”
상우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 집이 위험하다는 인식을 심고 나면 너를 도와주고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자기 집에 불러들이기 쉬워지니까.”
“말도 안 돼. 증거가 있어?”
“물증은 없어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어. …전부 같은 목적하에 이루어진 일이니까.”
“같은 목적이라고?”
의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는 목적이 있어서 너에게 접근한 거야. 처음부터… 아마도 재회했을 때부터 이미.”
“무슨 소리야, 대체.”
“남의 결혼식장에서 옛 남자 친구와 재회하는 일이 우연이었을까?”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상우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자기 회사에 취직 제안을 한 일은? 자기 영향력이 미치는 자리에 널 취업시킨 일은? 재정난을 해소해 주고 모든 편의를 봐 준 일이 그저 인간적인 호의에서만이라고 생각해?”
“그건 형이 나를….”
“좋아해서라고?”
상우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 남자가 5년 전에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 못 해?”
질문이 비수가 되어 심장에 꽂혔다. 뜨끔하는 통증이 전신에 퍼져 나갔다. 그때였다.
품속에서 휴대 전화가 진동음을 울렸다. 의준은 무의식적으로 휴대 전화를 꺼냈다. 화면에 서도헌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받지 마.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어.”
상우가 말했다. 하지만 의준은 무시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의준아.
이름을 부르는 도헌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두근거림은 아까와는 달리 불길한 예감을 머금고 있었다.
---면회 시간이 지났는데 연락이 없어서. 어디야?
“아… 잠깐 카페에 왔어요. 길 건너편에.”
---여동생하고?
“네….”
시선이 상우에게로 향했다. 상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 남자는 사기꾼이야!”
휴대 전화 저편의 상대에게 들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남자 목소리가 들렸는데. 여동생 말고 다른 사람도 있나?
“…형.”
---누구?
“…….”
도헌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김상우야?
상우가 손을 뻗었다. 말릴 새도 없이 휴대 전화를 가로챈 그가 빠르게 말했다.
“의준이에게 당신의 정체를 알려 주던 중입니다.”
도헌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의준은 알 수 없었다. 상우는 눈살을 찌푸렸고 울컥해서 대꾸했다.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나도 의준이도 당신의 더러운 복수 계획에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상우는 통화가 끊긴 휴대 전화를 의준에게 돌려주었다. 의준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복수라니?”
상우가 내뱉은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 복수. 그 남자는 너에게 복수하려고 다시 접근했어.”
“복수라니….”
의준은 당황했다.
“도헌이 형이 나에게 복수를? …무엇 때문에?”
갑자기 웃음이 흘러나왔다.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그 남자가 그렇게 말했어.”
“뭐?”
의준은 상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상우가 말했다.
“서도헌이 서영제에게 직접 그렇게 말했지. 난 옆자리에서 들었고.”
말의 끝에 상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의준의 어깨 너머를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본인이 등장했네. 직접 물어봐. 부정하지 못할걸?”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층계참에 도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의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헌이 형.”
도헌은 성큼성큼 의준에게로 걸어왔다.
“다시는 의준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요. 영제가 대신 교육한다기에 맡겼는데,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서늘한 시선이 상우에게로 향했다. 상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난 의준이를 보호하러 왔을 뿐입니다.”
“보호?”
도헌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의준이를 보호한다고? 당신이? 누구로부터 말입니까.”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서 복수를 계획한 못된 남자에게서죠.”
상우는 물러나지 않고 대꾸했다. 도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모르는 척하기엔 늦었습니다. 이미 의준이에게 말했어요. 당신이 의준이에게 복수하려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증거도 없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증거는 없어도 증인은 있죠. 서영제. 당신 친척. …호텔 바에서 그에게 직접 말했던 내용을 잊었다고는 못 할 텐데요?”
“…영제가 말했나?”
도헌의 눈동자가 차갑게 변했다. 상우는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아니, 내가 직접 들었습니다. 당신들이 술을 마시며 대화하던 호텔 바에서!”
“…….”
의준은 입을 다문 도헌을 바라보았다.
‘복수라니.’
당황스러웠다. 영문을 몰라서였다.
‘형이 왜 나에게 복수를 해? 무엇 때문에?’
도헌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문 채 상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하는 도헌 때문에 가슴이 술렁였다.
“형….”
의준은 도헌의 팔을 잡았다. 도헌이 고개를 돌렸다. 가면처럼 무표정한 도헌의 얼굴에 흠칫 몸을 떨면서도 의준은 입을 열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에요? 복수라니, 형이 왜 저한테 복수를 해요?”
이유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해라는 대답을 듣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너에게 복수할 일이 어디 있어? 김상우 씨가 뭔가 착각한 모양이야.’
의준은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젓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제 아침 아니 오늘 오후처럼 다정하게 의준을 감싸면서 이렇게 대답을 해 주었으면 했다.
“상우가 잘못 안 거죠?”
의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형이 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잖아요?”
“……?!”
도헌은 놀란 표정으로 의준을 바라보았다.
‘복수할 이유가 없다고?’
불안해하는 의준을 향해 도헌은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
“…뭘, 요?”
“…….”
의준은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심장 깊이 박혀 있던 쐐기가 움찔하고 흔들리는 듯한 통증이 생겨났다. 도헌은 의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야.”
“당신에게나 그렇겠죠.”
상우가 대꾸했다.
“혼자 계획했다가 혼자 포기한다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당신이 정말로 복수를 포기했는지 누가 압니까?”
“…….”
“상황을 무마해 놓고 방심한 의준의 등에 비수를 꽂을 수도 있잖아요? 5년 전의 일에 앙심을 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윽!”
도헌이 코앞으로 다가서자 상우는 말을 멈췄다. 서늘한 살기를 머금은 회색 눈동자가 상우의 코앞에서 번득였다.
“모르면서 아는 척 끼어들지 마라.”
“끼어들면 어쩌게요, 죽일 겁니까?”
“영제가 널 보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선을 넘지 마라. 그 뒤는 보장 못 해.”
“…누가….”
“도헌이 형.”
상우가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려던 찰나 옆에서 의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도헌과 상우는 고개를 돌렸다.
“저에게 복수하려 했어요?”
“…….”
“제가 형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복수를 해요?”
도헌의 옷깃을 잡은 손이 떨렸다. 목소리에서 혼란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제가 뭘 했나요?”
도헌은 숨을 들이마셨다. 의준의 질문이 모루가 되어 심장에 쐐기를 깊이 박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의문이 솟아올랐다. 이미 포기한 복수의 목적을 밝힐까? 복수를 결심하게 만든 행동을?
‘의준이는 기억조차 못 하는 일로 나만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그때였다.
“이 사람은 네가 자기를 찼다고 생각하거든.”
도헌은 고개를 돌렸다. 상우가 말을 이었다.
“5년 전에 네가 자기를 버렸으니까, 복수하고 싶은 거야.”
“…내가 형을 찼다고?”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인가. 그를 버린 사람은 도헌이었다.
“말도 안 돼.”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유학을 떠나면서 연락을 끊은 사람은 형이잖아요.”
“……?”
“연락처도 바뀌고, 유학 간 곳 주소도 몰라서…. 그래서 형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널 버렸다고? 웃기지 마.”
도헌은 울컥했다.
“출국 당일에 헤어지자고 말한 사람은 너였어!”
“그런 적 없어요!”
“말로 하지 않았지. 메시지 한 통으로 해결했으니까.”
“메시지라니….”
“넌 그 한 마디로 나를 죽였어!”
의준은 놀라서 굳어졌다. 도헌은 분노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난 5년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고.”
어떻게 5년이 흘러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유학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귀국이 더 망설여졌기에 버텼다.
“너 때문에….”
겉으로는 평온하게 생활했다. 공부도 순조로웠고 새로운 인맥도 쌓았다. 호감을 품고 접근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질 수 없었다. 무엇을 해도, 누구와 만나도, 떠오르는 것은 메시지 한 통의 형태로 심장에 박힌 고통스러운 첫사랑뿐이었으니까.
“나는 너 때문에 5년을 잃었어.”
도헌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탄식과도 같았던 한 마디가 퍼져 나가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백한 얼굴의 소영과 당황한 상우가 지켜보는 가운데 의준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복수하고 싶었어요?”
“…….”
“그러면 모두 거짓말이었군요?”
도헌이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그와 의준의 시선이 마주쳤다.
“다시 만난 후에 나에게 했던 말도, 해 준 모든 일도… 다 진심이 아니었겠네요?”
마주 보던 시선도, 다정하던 손길도, 하나로 이어졌던 거친 열기조차 모두.
“전부 꾸민 거였어요?”
‘날 사랑해?’
이렇게 묻던 목소리와 어깨를 안았던 손길에서 전해지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한데. 의준의 대답을 듣고 짓던 미소가 이토록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데.
“그러고 보니 형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네요.”
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나 따위를.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도헌은 그 말을 분명히 들었다.
“의준아.”
마치 번개를 맞은 것처럼 도헌은 정신을 차렸다. 의준은 도헌의 옷깃을 놓고 몸을 돌렸다.
“의준아!”
대답하지 않고 층계를 내려간 의준의 뒤를 쫓아 도헌도 급히 움직였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상우도 뒤늦게 층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상우 오빠.”
“왜?!”
상우는 초조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소영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혹시, 전무님이… 우리 오빠 예전 남자 친구였어? 대학교 때 사귀었던?”
지금 그게 중요한가. 상우는 짜증이 났지만 참고 대답했다.
“맞아.”
소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해…. 그런 줄도 모르고….”
“……?”
소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평소라면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의준이 데리러 다녀올게. 넌 여기 있어.”
상우는 소영을 두고 층계로 향했다.
밖은 어두웠다.
‘어디로 가지?’
횡단보도 저편에 밝게 빛나는 병원 건물이 보였다.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래, 병원에 가자. 면회 시간은 지났고 들어가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의준아!”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의준은 흠칫 몸을 떨었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외쳤다.
“왜 따라와요?! 날 얼마나 더 괴롭히려고?”
걸음 소리가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이제 충분하잖아요.”
“…….”
“내 마음을 두 번이나 갈가리 찢어 놨으면… 충분하잖아요?!”
“의준아.”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도 돌아보고 싶어질 만큼 달콤하게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의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놔줄 거예요?!”
“아니야.”
발소리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도헌이 다급하게 의준의 팔을 잡았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어. 의준아, 나는….”
“놔요!”
의준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부릅뜬 눈에 도헌의 얼굴이 비쳤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문 얼굴에서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느껴졌다.
‘날 걱정할 이유 따위 없으면서.’
가슴이 아팠다. 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그때였다. 도헌의 안색이 변했다.
“의준아!”
이름을 외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의준에게 달려들었다.
끼이익---!
도헌이 의준을 안고 몸을 돌린 직후 검은 차가 날카로운 급정거 소리를 내며 그들을 덮쳤다. 쿵, 하고 차가 사람에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윽….”
도헌은 의준을 안은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차에서 사람이 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누군가가 그를 일으키더니 품에 있던 의준을 떼어 냈다.
“……? 잠깐만. 놔요.”
의준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도헌은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에 의준을 데리고 차로 향하는 두 남자가 보였다.
“무슨 짓이야?!”
도헌은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옆구리가 화끈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한 남자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형!”
의준은 당황해서 몸을 틀었다. 그러나 차 안에 있던 다른 사람이 그의 목을 팔로 감았다.
“윽…!”
“의준아!”
쓰러졌던 남자가 도헌을 가로막는 사이에 의준은 차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차 문이 닫히자 남자는 도헌을 힘껏 밀치고 급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의준아!”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도헌은 옆구리를 움켜쥔 채 따라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차는 어느새 그의 시야를 벗어나 도로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영제가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왔을 때 임시로 영업을 중지한 프랜차이즈 카페 1층에는 경찰과 사설 경호원이 끼리끼리 모여 서 있었다. 낯익은 경호원에게 눈짓을 하자 그는 옆을 가리켰다. 층계 아래쪽, 6인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마주 앉은 도헌을 발견한 영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에 치였다매, 괜찮나?”
카페 직원의 신고로 납치 사건을 조사하러 나온 형사가 별다른 소득 없이 일어선 후, 영제는 이렇게 물었다.
“내가 너에게 말했던 복수 계획을, 김상우가 알고 있더군.”
도헌은 영제의 질문을 무시하고 말했다. 영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바에서 우리 대화를 엿들었거든.”
“입막음에 실패했나?”
“폭로할 생각이라면 목숨을 걸라고는 했지.”
도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영제를 바라보았다.
“김상우가 자작극을 벌였을 가능성은?”
“걔가 의준이를 납치했을 가능성은 0에 가까워.”
영제가 대답했다.
“제 감정에 과하게 취하는 면이 있지만 머리가 나쁘고 치밀한 성격은 못 돼. 그리고 제 인생을 사랑에 걸 만큼 미친놈도 아니고.”
그래서 가볍게 입막음만 했던 거야. 영제는 덧붙였다.
“김상우의 자작극이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한가지뿐이군.”
“…그렇지.”
영제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도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위층에 김상우하고 의준이 동생이 있어.”
“경호 붙인다.”
도헌의 정장에는 도로를 뒹굴 때 긁힌 흔적과 얼룩이 남아 있었다. 그의 손등에 난 긁힌 자국을 보며 영제는 입을 열었다.
“몸값이 목적일 테니 죽이지는 않을 거다.”
“죽일 생각이면 납치하지 않았겠지.”
도헌은 도로에 세워져 있던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그놈들의 목적 따위는 상관없어.”
몸을 던져 보호했던 남자를 빼앗겼다. 필사적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늘어졌던 남자를 놓쳤다.
“…의준이를 반드시 되찾겠어.”
“그래야지.”
영제의 시선이 층계로 향했다. 계단참에 있던 상우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달리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상우를 향해 영제는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걱정 마라.’
의준은 괜찮을 터였다. 쓸모없는 자책감에 휩싸인 상우를 위해서가 아니라 분노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 상태인 도헌을 위해서 반드시 그래야 했다.
‘의준이 자신을 위해서도.’
영제는 도헌을 따라 카페를 나섰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