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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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따스한 햇살이 코끝을 간질였다. 코를 몇 차례 찌푸리면서 입맛을 다셨다. 잠이 깨고 의식이 되돌아옴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더 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니 아주 잘 잤나 보다.

“으….”

늘 그러듯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허리에 힘을 주며 상체를 일으키려던 그때.

“…헉.”

하체에 욱신 하는 통증이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의준은 숨을 멈췄다.

왜 아래가 아프지. 의문을 떠올림과 동시에 의식이 어제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윽….”

누운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도헌의 얼굴이 보였다. 평온한 그의 얼굴에 간밤의 기억이 겹쳐지며 새삼스럽게 실감이 들었다.

‘…형하고… 진짜 했어.’

처음 사귈 때도, 그리고 재회 후에도 몇 번 몸을 겹쳤다. 하지만 이토록 감회가 새로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드디어 도헌이 형하고….’

평온하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이어서 아무런 전조 없이 회색 눈동자가 반짝하고 열렸다.

“엇.”

예상치 못하게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의준은 당황했다. 그러나 도헌은 그를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잘 잤어?”

살짝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준은 심장이 두근 하고 크게 뛰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잘… 잤어요?”

“응.”

도헌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의준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가 의준을 끌어안으며 머리카락 사이에 입술을 댔다.

“잘 잤어.”

잘 잤다는 말이 이토록 달콤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의준은 왠지 부끄러워져서 도헌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탄탄하고 따스한 목덜미의 감촉에 기분이 좋았다. 도헌은 의준을 그에게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겹쳐지면서 이불에 숨겨진 하체의 상태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전해졌다.

“앗….”

“괜찮아.”

도헌은 당황해서 몸을 떼려던 의준을 한층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냥 이러고 있자.”

“…….”

부끄럽지만 싫지 않았기에 의준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괜찮아?”

“네? 네… 윽.”

대답이 민망하게 허리가 욱신거렸다. 의준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좀 아파요.”

“그렇겠지.”

도헌은 의준의 허리 부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미안해. 너무 무리를 시켜서.”

“아뇨.”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 사과를 받을 일은 아니었어요. …저도, 같이 했고….”

귀까지 붉어진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의준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같이 회사 쉬자.”

그 말을 듣고서야 의준은 오늘이 월요일임을 깨달았다.

“어, 하지만 오늘 오전에 임원 회의가 있는데요. …앗, 오후에는 대표님 면담하고 비서실 신입 사원 미팅이….”

“회의 좀 빠진다고 큰일 나지 않아.”

“오늘 회의 안건 중에 전무님이 올린 안건이 있는데. 발표랑 진행을 전무님이 안 하시면 누가 합니까?”

무의식적으로 비서일 때의 어투와 어휘를 사용하는 의준을 보며 도헌은 피식 웃었다.

“임원 한 명 없다고 안 돌아가는 회사면 진작 망했겠지. 그런 회사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이어서 그는 의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침대 안에서는 전무님 걱정은 잊고 형만 보고.”

“…아.”

의준은 뒤늦게 자신이 그를 전무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헌은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같이 있자.”

“…….”

이렇게 달콤한 말을 태연하게 내뱉던 사람이었던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놀라우면서도 기뻤다. 의준은 슬쩍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희미한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의준아.”

희미한 심장 박동 사이로 이름을 부르는 소리. 의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네.”

“어제는 고마웠어.”

“…네?”

생각지도 않은 말에 의준은 당황했다.

‘뭐가 고맙다는 거지? 설마….’

어제, 그… 둘이, 했던 그거?

사랑을 확인하려던 행위가 아니었던가. 감사 인사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도헌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또 실수하지 않도록 붙잡아 줘서.”

“……?”

의준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었다. 도헌은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집 나가지 마. 여기서 계속 살자. …여기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집을 구하거나 아예 새집을 사도 괜찮아.”

도헌은 의준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같이 있어 준다면 뭐든 할 수 있어.”

“정말로요?”

“그래.”

“뭐든 말해 줄 수 있어요?”

“물론. 뭐가 궁금해?”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왜 그때 나를 떠났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은 이유는 한가지뿐이었다.

‘지금은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아.’

의준은 도헌의 팔을 꽉 잡았다. 도헌은 그런 의준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괜찮아.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언제든 듣고 싶을 때 물어봐.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그밖에도 궁금한 일은 많았다. 요즘 도헌을 성가시게 하던 ‘집안일’도, 그 덕분에 만난 동갑 손위 친척 영제의 사연도 궁금했다. 유학 생활도, 거기서 사귄 친구와 …다른 애인의 존재도.

다른 애인. 생각지도 못한 과거의 가능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와 헤어진 사이에 다른 사람을 사귀었을까?’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형.”

“응?”

“혹시….”

꼬르르륵.

입을 연 직후 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소리가 메아리쳤다. 아침 시간을 넘긴 아랫배가 항의를 하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도헌은 웃었다.

“사과를 왜 해, 배고플 만했는데.”

도헌은 의준을 안았던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뭣 좀 먹자. 내가 가져올 테니까 누워 있어.”

“우리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을 텐데요. 어제저녁에 남은 걸 먹어 버렸거든요.”

도헌은 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준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그는 입을 열었다.

“그 말 좋네.”

“무슨 말이요?”

“우리.”

“……?!”

의준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도헌은 태연하게 옷장으로 향하며 말했다.

“배달도 좋고 아니면 집 근처에서 뭐 사 오면 돼. 먹고 싶은 거 있어?”

“…어.”

집 근처 하니 가게 한 군데가 떠올랐다. 이런 곳에 있으면 손님이 찾아올까 싶었던, 알고 보니 경력이 화려한 조리장이 경영하는 고급 한식집이었다.

“그… 집 앞에 한식집….”

“갈비탕?”

도헌은 티셔츠와 트레이닝팬츠를 걸치며 물었다. 의준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사 올게. 쉬고 있어.”

도헌이 침실을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자 의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폭풍같이 지난 하룻밤이었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 몰랐다. 섣부른 동거 때문에 새로 시작한 관계가 무너질 것 같아서 두려웠었다. 그래서 동거를 해소하고 관계를 새로이 다질 생각이었는데, 현관 밖으로 짐을 빼지도 못하고 상황이 종료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는 원하던 대로 관계가 단단해졌으니 문제없겠지만.’

의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다리를 펴자 차마 말 못 할 부위가 욱신 하고 아팠다. 머릿속에 간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윽.”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프기만 하지는 않았다. 낯설지만 쾌감을 분명히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압도적인 감정은 충만함이었다.

혼자서는 채울 수 없었던 마음속 허한 부분이 단숨에 가득해졌다. 체온, 감촉 그리고 속삭임이 몸 안팎을 휘감아 혼자가 아니라고 알려 주는 듯했다. 사랑을 나눈다는 표현은 아마도 이런 기분을 맛본 누군가가 만들었으리라.

“…후후….”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랑해요, 형.”

혼잣말을 내뱉었던 그때 귓가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의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형인가?’

화면에 표시된 이름은 도헌이 아니었다. 의준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소영아? 웬일이야.”

---웬일은. 잘 지내나 싶어서 전화했지.

여동생 소영의 대답을 들은 의준은 의아한 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안부 전화라니까.

“그런 적 없으니까 묻잖아. 무슨 일이야.”

---…눈치가 이렇게 없다니까.

소영은 한숨을 내쉬더니 솔직하게 고백했다.

---상우 오빠랑 통화했는데 오빠는 잘 지내냐고 묻더라.

“…어… 그래.”

의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김상우와는 집들이 사건 이후 만나지 못했다. 전화는 두 번 정도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상우는 마지막으로 의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연락을 멈췄다.

‘사과하고 싶지만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연락은 그만할게.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야. 네가 나와 대화할 여유가 생기면 제대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 테니까. 언제든 연락해 줘. 기다릴게.’

잊고 있었다.

사건 자체, 아니, 상우의 존재조차 잊었다. 변명하자면 그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주로 도헌과 관련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좀 미안하네.’

의준은 입을 열었다.

“상우는 잘 지낸대?”

---촬영 마치고 서울에 올라왔대. 지금은 다른 일정 때문에 호텔에 머문다나 봐.

“그렇구나.”

의준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촬영에 몇 개월 걸린다고 들었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나 보다.

‘나랑 도헌이 형이 사귀기 시작한 때도 그 즈음이니까….’

자연스럽게 도헌을 떠올리던 의준의 귀에 소영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둘이 싸웠어?

“뭐? 아니야.”

의준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안 싸웠는데 왜 이래?

“뭐가.”

---내 메시지는 대답할 시간 없어도 오빠한텐 매일 연락하던 상우 오빠가 직접 연락 안 하고 나한테 오빠 안부를 묻잖아. 싸우지 않았으면, 왜 이러는데?

“…상우가 너한테 푸념이라도 하던?”

---아니. 그냥 자기가 잘못했다고는 하더라. 이유는 말 안 하고.

그렇겠지. 의준은 입을 다물었다.

---화해할 수 있으면 화해해. 상우 오빠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오빠 걱정하는데 못 들어 주겠어. 불쌍하잖아.

소영은 상우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라면 상우를 두둔할 만도 했지만 이 일은 별개였다. 그렇다고 진상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의준은 화제를 바꾸었다.

“어디야? 학교?”

---아니, 병원 가는 길. 오늘 병원 와?

“어… 좀 힘들 것 같은데.”

---야근해?

“…오늘은 움직이기가 좀 그래.”

영상 통화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의준은 욱신욱신한 허리를 슬슬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봐서 내일 가든가.”

---내일? 내일 올 거야? 몇 시에?

“…퇴근하고 가면 일곱 시쯤 되지 않을까?”

---그럼 나도 그때 맞춰서 갈게.

“뭐? 왜.”

---왜긴. 같이 엄마 만나면 좋잖아.

“그건 그런데….”

의준은 의구심 어린 투로 물었다.

“혹시 용돈 떨어졌냐?”

---아니거든.

발끈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더 주겠다면 사양하지는 않을게.

“자식.”

의준은 웃었다.

---어쨌든 내일 봐, 그럼. 꼭 와야 해.

“……? 그래.”

의준은 의아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얘가 왜 안 하던 소리를 하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준은 생각을 접고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욱신거리며 입에서 저절로 끄응 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일어났어? 누워 있어.”

“먹으려면 일어나야죠.”

침실로 고개를 들이민 도헌에게 의준은 이렇게 대답했다. 도헌은 미소를 지었지만 엄하게 대꾸했다.

“나오지 말고 있어. 여기로 가져올 테니까.”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거기 있어.”

도헌이 다시 사라졌다.

“…윽….”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의준은 얼굴을 찌푸렸다.

몸 전체가 쑤셨다. 새삼 간밤의 행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실감했다. 공사장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생각하면 이 수준의 근육통은 사나흘은 지나야 나아질 터였다. 몇 달 전이었다면 그사이에 일을 쉴 수 없으니 고민하며 근육 이완제라도 먹었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랑해.’

간밤에 들은 도헌의 고백을 떠올렸다. 땀에 젖은 얼굴과 애절한 표정이 생생했다. 도헌은 진심이었다.

‘형이… 나에게 고백했어.’

먼저 마음을 고백한 뒤로 고민했었다. 도헌은 의준에게 같은 말을 돌려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같은 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고백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마음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같은 마음이 되기를 바랐다.

도헌이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기는 어제가 처음이었다.

걱정과 바람을 담은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하룻밤 사이에 반복해서 그 말을 들었다. 이마에, 코에, 눈꺼풀에, 뺨에, 그리고 입술과 턱에. 목덜미와 어깨와 가슴에. 도헌은 입술이 닿는 모든 곳에 같은 말을 속삭였다. 마치 의준의 몸 구석구석에 자신을 새겨 넣으려는 듯이 말이다.

‘형도 참… 예전에는 그렇게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떨어져 있던 동안 변한 데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이런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니. 의준은 얼굴을 붉혔다.

바깥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곧 도헌이 쟁반 가득 음식을 차려 들고 돌아올 것이다. 침대에 누운 채 밥상을 받는 날이 오다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상상만으로도 민망했지만 또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은 물론 몸까지 하나로 이어졌다. 인생이 단숨에 완전해진 기분이 들었다.

‘행복해.’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의준은 베드 헤드에 머리를 기댄 채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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