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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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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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 질투와 비밀과 해피 엔딩

외전 2 : 함께 걷는 길

26.

눈을 감기만 하면 떠오르던 광경이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한 넓은 공항에 그는 혼자 서 있었다.

해외 유학을 위해 출국하던 당일. 몇 달 전부터 예정했던 일이었고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과의 송별도 예정대로였다. 예정된 미래처럼 모든 일은 순조로웠다. 작은 이변만 제외하고.

애인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보낸 후에 공항에서 만나 출국 직전까지 함께 있기로 했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을 넘기고도 나타나지 않는 데다 연락도 받지 않았다.

당황했다. 걱정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통사고 검색도 했다. 열 번 넘게 전화를 걸고 메시지도 몇 차례 남겼다. 그러나 애인은 응답하지 않았다.

출국 심사장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결국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줄을 서고, 보안 검색을 통과하고, 출국 심사를 대기하는 동안에도 줄곧 애인의 연락을 기다렸다. 휴대 전화 사용 금지였던 출국 심사대를 통과하자마자 휴대 전화 화면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기다리던 사람은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 있어?’

이미 보낸 메시지와 다름없는 메시지를 새로 보냈다.

‘연락해 줘. 출국 전에 목소리 듣고 싶어.’

해외에서도 연락은 할 수 있었다. 영상 통화도 가능했다. 직접 만나고 체온을 느끼는 데 비할 바는 되지 못해도 떨어져 지내는 사이에 외로움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오늘에야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음을 깨달았다.

어떤 최첨단 기술과 초고속 통신망도 강제로 상대와의 연락을 이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일 이대로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불안한 마음에 또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의준아, 전화하기 힘들면 메시지라도 보내 줘.’

발송 후에 시선을 잠시 뗀 그 순간, 휴대 전화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급히 창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본 메시지는….

빠앙!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도헌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집으로 이어지는 언덕 초입 길, 정면에 꼬리를 물고 멈춰 선 차들의 불빛이 보였다.

“전무님, 언덕 위에서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대형 차량이라 수습에 시간이 좀 걸릴 모양인데요.”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온 운전기사가 말했다.

“차를 돌려서 반대편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걸어서 올라가면 집까지는 15분. 생각을 정리하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었다. 도헌은 행렬을 이룬 차들 옆을 지나 걷기 시작했다.

‘헤어져. 연락하지 마.’

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음을, 도헌은 5년 전 그날 깨달았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동시에 수백, 수천 번 의문을 곱씹었다.

‘왜 나와 헤어졌지?’

낯선 땅에서 괴로워하기를 몇 개월, 참지 못하고 다시 연락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연락처라는 기계 메시지를 들었다.

‘왜 날 끊어 낸 거야?’

겉으로는 평범하게 유학 생활을 보냈다. 학위도 손에 넣었고 인맥도 늘어났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었다.

‘왜 나를 버렸어?’

첫사랑은 고통스러운 의문문의 형태로 심장 깊숙이 박혔다.

다시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타인에게 기대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누구라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런데 어째서.’

재회는 우연이었다. 한시도 잊은 적 없지만 찾아볼 생각조차 못 했던 그와 마주쳤을 때 도헌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날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놓고 겨우 이렇게 살고 있었나?’

혀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삼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까져서 피가 범벅이 된 발뒤축과 흉터가 선명한 거친 손가락이 보기 싫었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면서 어색하게 웃음을 짓는 모습이 불만스러웠다.

‘왜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

회사에서 쓰러졌던 그를 안아 들었을 때, 성인 남자의 체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무게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했다. 수면과 영양 부족. 과거에 알았던 의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병명에 화가 났다.

‘이렇게 살 바에야 나를 택했어야지.’

도헌이 곁에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라면.’

빌라 현관 앞에서 도헌은 걸음을 멈췄다.

‘…나라면 너를….’

시선이 위로 향했다. 의준과 동거를 시작한 후로 종종 그는 현관을 들어서기 전에 집에 불이 켜져 있는지 확인했다. 밝은 창은 의준이 집에 있다는 증거였다.

“……?”

그러나 오늘은 불이 꺼져 있었다. 집에 의준이 없는 것일까. 문득 낮에 사무실에서 들었던 의준의 말이 떠올랐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아직 귀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영제가 경호원을 붙였으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현관에 들어선 도헌은 나란히 놓인 의준의 구두를 발견했다. 얼마 전에 그가 선물했던 구두였다.

‘…집에 있나?’

자정이 지난 시각, 집은 어둡고 고요했다.

도헌은 거실로 고개를 돌렸다. 현관과 거실 사이에 캐리어 가방이 놓여 있었다. 의준이 이 집에 들어올 때 가져왔던 가방이었다.

작은 방에 놓여 있었던 가방이 왜 밖에 나와 있는가. 도헌은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방은 묵직했다. 마치 처음 가져왔을 때처럼 말이다.

“…….”

도헌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그는 의준과 함께 쓰던 메인 베드룸으로 향했다. 불을 켜자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욕실 문을 열었다. 물방울 하나 없이 마른 세면대에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심장 박동 소리가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도헌은 휴대 전화를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침실을 나서 거실로 향하던 그의 눈에 복도 저편의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

도헌은 복도를 가로질렀다. 불이 꺼진 작은 방의 침대 위에서 의준의 휴대 전화가 빛을 내뿜으며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불빛이 새어 나오던 곳은 옆쪽 욕실이었다. 도헌은 욕실 문 앞에 섰다.

“으헉?!”

때마침 욕실 밖으로 나오던 의준은 도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도헌이 형? 뭐, 하세요, 여기서. 깜짝 놀랐잖아요.”

“왜 불을 다 꺼 놨지? 집에 없는 줄 알았잖아.”

사과 대신 돌아온 말에 의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잘 준비를 하느라고 껐어요. 놀라셨어요? 거실 불은 켜 놓을걸 그랬나.”

의준은 도헌의 옆을 지나 욕실 밖으로 나왔다. 도헌의 코에 따스하고 향기로운 향기가 스며들었다. 의준은 침실에서 휴대 전화를 가지고 나왔다.

“술 드셨네요. 물 드려요?”

“…그래.”

의준은 부엌으로 향했다. 그가 조리대에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냉장고를 향해 돌아서자 그를 따라왔던 도헌은 조리대 앞에 멈춰 섰다. 의준이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 한 병을 도헌에게 내밀고 다른 한 병을 따던 그때 휴대 전화가 빛났다. 화면을 본 도헌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게 뭐야?”

“네?”

도헌은 휴대 전화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에는 집 구하기 어플리케이션의 알림이 떠 있었다.

---양재역 5분. 1인실 55/55, 미니룸 0/35. 화장실 공용. 깔끔해요~.

“아….”

의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집을 알아보던 중이었어요.”

“집? 누구의.”

“제가 이사할 집이요.”

도헌은 이해할 수 없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사를 하다니, 왜?”

“그야….”

대답 도중에 의준은 말을 멈췄다. 이윽고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도헌을 바라보았다.

“형네 집에서 나갈 생각이에요. 가급적 빨리.”

“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얼마든지 머물러도 된다고 했을 텐데, 왜….”

“음….”

의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나가는 게 낫겠더라고요.”

“왜?”

도헌은 다급하게 되물었다. 스스로도 당혹스러웠지만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헤어져. 연락하지 마.’

의준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할 말을 고르는 중이리라. 그때도 이런 표정을 지었을까. 도헌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집이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내가?

“아니요, 아니에요. 집은 정말 좋아요. 넓고 쾌적하고, 야경도 멋지고요.”

의준의 시선이 거실 창으로 향했다. 바깥에 펼쳐진 꿈같은 야경을 응시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저도 가능하면 계속 여기 살고 싶어요.”

“그런데 왜 나갈 생각을 해.”

“그게….”

도헌은 의준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도헌의 품에 파묻힌 의준이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형?”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도헌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흐릿한 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없기를 바라나?”

“네?”

“이 집이 아니라 내가 문제야?”

“잠깐… 형.”

의준은 당황했다.

“혹시… 지금 술 취했어요? 내일 다시 이야기할까요?”

대체 도헌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의준은 슬며시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뗐다. 그러자 도헌은 의준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웁….”

얼굴이 도헌의 품에 세게 파묻혔다. 일순 숨을 멈춘 의준의 귀에 낮은 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놔줘.”

의준의 등을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아. 절대로.”

“형….”

기분이 이상했다. 도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의준은 두 손을 슬쩍 도헌의 허리에 대며 생각했다.

‘어쩌면 형은 내 생각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걸까?’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형.”

의준은 입을 열었다. 도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준은 그의 어깨에 기댄 도헌의 머리에 자기 머리를 기울여 가볍게 부딪쳤다.

“형, 자요?”

마주 닿은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아니라는 신호이리라.

“잠깐 제 얘기 좀 들어요.”

“…….”

의준은 길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같이 살게 되면서 형하고 저, 24시간 붙어 있었죠. 처음에는 즐거워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조금씩 형이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도헌은 의준보다 먼저 잠든 적이 없었다. 저녁 메뉴 결정부터 시간을 보내는 방법까지, 모든 결정을 의준에게 맞추었다. 혼자 살 때는 필요하지 않았던 가구를 오직 의준을 위해 구매했고 혼자 쓰던 침대에서 의준과 함께 잤다.

“누군가를 배려하려면 기력을 많이 소모하게 되죠. 형이 그래서 피곤하고 예민해진 것 같았어요.”

“그런 적 없어.”

낮게 들려온 반박에 의준은 웃었다.

“형, 요즘 수면 부족이죠?”

“…….”

“저보다 늦게 자고 먼저 일어나고, 저 때문에 안 먹던 아침도 드시고. 대신 아침에 하던 운동을 그만두셨죠. …회사 아래층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평소 생활 루틴이 어긋나면 쉽게 피로해지거나 불면증이 올 수도 있다고 했어요.”

의준은 도헌의 등을 감쌌다.

“나랑 같이 살아서 힘들잖아요.”

“아니야.”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원인은 동거가 아니었다.

“너와 함께 있어서 피곤한 적은 없어. 나는….”

도헌은 입을 다물고 숨을 들이마셨다.

“…나와 헤어지고 싶나?”

“네?”

의준의 눈이 커졌다.

“아니에요!”

의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헤어지려는 게 아니에요! 반대예요.”

“반대?”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따로 살 생각을 했다고요.”

의준은 도헌의 옷깃을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저는… 형이 저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았으면 해요.”

일상에 방해되는 요소는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작은 요소들이 쌓여서 두 사람 사이에 벽을 만들지도 몰랐다.

“형이 제 좋은 면만 보고 저를 계속… 좋아하기를 바라거든요.”

형을 좋아하니까요.

도헌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형?”

의준의 촉촉한 목덜미에서 샤워 용품의 향기와 따스한 온기가 함께 피어올랐다. 끌어안은 몸에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은 처음보다 빨랐다. 아마도 지금 의준은 귀까지 붉힌 채 도헌의 숨결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 복수라는 게 눈앞의 행복을 짓밟을 만큼의 가치가 있나?’

영제의 말을 떠올렸다.

눈앞의 행복.

‘나는 행복한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이 있었다.

의준이 없는 줄 알았던, 불이 꺼진 창과 적막한 어둠에 휩싸인 집안은 차갑고 외로웠다.

“도헌이 형.”

불안한 기색이 어린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의 어떤 목소리와 호칭도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없을 것이다.

이의준이어서였다.

그토록 미웠던 것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도, 그러면서도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도.

‘이의준이기 때문에.’

도헌은 입을 열었다.

“의준아.”

“네?”

“나 사랑하니?”

의준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이윽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가 대꾸했다.

“…갑자기 왜요.”

가늘게 뜬 도헌의 눈에 붉어진 목덜미가 비쳤다. 서서히 짙어지는 따스한 붉은 기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말해 봐.”

매끈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나 사랑해?”

고개를 들고 의준에게로 향한 눈빛은 간절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의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 도헌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형.”

무슨 일이에요?

눈빛에 선명하게 떠오른 의문을 내뱉는 대신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조용히, 붉어진 얼굴에 수줍음을 담은 채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해요.”

대답의 끝에 의준은 눈을 내리깔았다. 눈가와 뺨에 붉은 기운이 진하게 솟아올랐다. 그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도헌은 입을 열었다.

“정말로?”

“누가 거짓말로 고백을 해요.”

이렇게 내뱉은 직후 의준은 작게 덧붙였다.

“…거짓말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형을….”

말을 잇지 못한 이유는 벌어진 입술 위로 다른 입술이 밀착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 커졌던 눈동자가 조금씩 가늘어졌다.

의준은 도헌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응답하듯 도헌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발뒤꿈치가 살짝 들리는 기분을 느끼며 의준은 도헌에게 몸을 기댔다.

“…응….”

자연스럽게 이끌리듯 침실로 들어왔다. 단단한 팔이 감싸고 있던 등에 푹신한 이불의 감촉이 전해졌다.

“도헌이 형….”

입술이 떨어진 사이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연한 회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사랑해요.”

말로 내뱉지 않고서는 점점 커져 가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입맞춤을 반복하며 마치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처럼, 서로의 체온과 감촉을 탐하기 시작했다.

입술을 마주한 채 손을 움직이려던 그때 도헌이 의준의 손을 잡았다. 의준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의준아, 하나만 부탁해도 돼?”

도헌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의준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너하고 하나가 되고 싶어.”

“…아….”

말의 의미를 파악한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진지한 빛과 열기를 머금은 도헌의 눈동자에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아픈 건 싫어. …하지만….’

재회 후 도헌과 보낸 밤마다 하나가 되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상상 속에서는 고통 대신 희열을 느끼곤 했다.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감과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아파도 참으면 돼.’

상상이 100% 완벽하게 현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큰 기대는 실망을 낳는다. 게다가 이미 결론은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러니까.

“저도 그러고 싶어요, 형.”

도헌과 하나가 되는 것만을 바라기로 했다.

고통도 희열도 무시하고 오직 서로 완전히 이어지는 것만을 목표로. 의준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끝까지 해요. …어떤 일이 있어도.”

도헌은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렇게 비장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야?”

“네?”

“표정이 비장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같이.”

“죄송해요, 저는.”

“사과하지 마. 걱정도 하지 말고.”

도헌은 의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댔다.

의준은 시트를 움켜쥐었다. 손등과 팔 그리고 목덜미에 힘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도헌의 숨결이 가늘게 떨리는 목덜미를 따라 아래로 향했다.

“으응….”

의준은 신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감각이 도헌에게 집중되었다. 도헌의 움직임, 숨결 그리고 표정. …그래, 표정.

도헌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의준은 감각의 홍수 속에서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도헌의 얼굴이 들어왔다. 살짝 일그러진 눈썹 아래 빛나는 연한 회색 눈동자가 마침 의준을 향했다. 의준은 그의 눈동자 안에서 번득이는 욕망을 보았다.

“도헌이 형, 사랑해요.”

시트를 쥐었던 손에서 힘을 뺐다. 두 팔을 날개처럼 펼쳤다가 위로 뻗어 도헌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들었다. 도헌의 코에 자신의 코가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한 후에 의준은 해야 할 말을 속삭였다.

“빨리 형하고 하나가 되고 싶어.”

진심이면서 유혹이었다. 또한 확신이기도 했다.

“…윽….”

침대에 파묻힌 의준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재촉하지 마. 애써 참고 있으니까.”

“뭘… 참고 있는, 데요.”

“네가 날 경멸하고도 남을 짓.”

대답하는 도헌의 눈동자에서 다른 종류의 욕망이 번득였다.

“네 안팎을 밤새 맛보고 싶어. 네가 지쳐서 혹은 질려서 날 거부할 때까지, 네 머리와 몸에 온통 나만 존재하도록 만들고 싶어. 너를….”

도헌은 손끝으로 의준의 가슴 가운데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윽….”

오싹함과 짜릿함이 동시에 등골을 스쳤다. 의준은 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참지 말아요.”

의준의 몸 안에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사이로 한층 거친 또 다른 박동이 뒤따르듯 메아리쳤다. 도헌의 심장 박동이 이어진 몸을 통해 의준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도헌 역시 의준의 박동을 느끼고 있으리라.

오직 상대를 향해 뛰고 있는 심장을, 그 박동에 깃든 마음을 온전히 전하고 싶었다. 말로 할수 없던 모든 것을 느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더 느끼게 해 줘요.”

마찬가지로 도헌을 느끼고 싶었다. 감각도 몸도 그리고 마음까지 모두 하나가 되기를 바랐다.

“내가 형을 완전히 가지게 해 줘요.”

도헌은 신음하며 몸을 트는 의준을 내려다보았다. 입을 꾹 다무는 바람에 한층 각져 보이는 턱 아래에서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날 미치게 만드는구나.”

도헌은 고개를 숙였다.

“넌 정말 내 인생을 휘어잡는 데 도가 텄어.”

정말이지. 도헌은 의준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더 나를….

숨결이 거칠어졌다. 잡념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맑아졌다. 텅 빈 사고에 의문이 툭하니 떨어졌다.

‘왜 의준이에게 복수할 생각을 했지?’

과거의 상심에 현재의 복수가 위로가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정말 그랬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던 상심에 위로가 되어 준 것은 그 상심을 낳은 장본인의 존재가 아니었나.

“형… 아앗, 형…!”

의준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서로 손만 닿아도 얼굴을 붉히던 시절에는 그에게서 이런 애타는 목소리가 흘러나올 줄은 몰랐다.

의준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의 체온, 살결 그리고 눈빛과 미소도. 의준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의준이 없으면 허전했다.

의준은 어느새 다시 그의 인생에 자리 잡았다. 우연한 재회에서 멈출 수도 있었던 관계를 여기까지 이끈 사람은 도헌 자신이었다. 그가 의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 녀석을 원해.’

과거의 도헌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때도 지금도 그는 이의준을 원했다. 한때 완전히 얻지 못하고 놓쳤던 그는 지금 도헌의 품 안에 있었다. 그런데 놓아야 하나? …왜?

‘누구를 위한 복수지?’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헤어지고 몇 년간 의준을 잊지 못해 고통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 후에 의준을 따로 찾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예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어디서건 의준과 재회하는 순간 모든 것이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몇 번을 헤어졌다 다시 만나도, 의준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없이 도헌은 그를 자신의 인생에 들일 것이다.

이의준이기에.

상기되어 일그러진 의준의 얼굴. 눈초리에 맺힌 투명한 눈물방울에 시선이 갔다. 몸을 움직이며 눈물을 핥았다. 의준이 한쪽 눈을 살짝 떴다. 낯선 감각에 휩쓸린 채 허덕이던 그의 입가에 약한 미소가 피어났다.

“도헌이 형….”

떨리는 목소리에 실린 그의 이름은 달콤했다.

‘도헌이, 형….’

우연히 마주쳤던 그날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에 심장이 지끈거린 이유는 예감이었다.

다시 이의준을 삶에 들여놓게 되리라는, …그와 사랑에 빠지리라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이름을 부르고 웃던 의준을 되찾은 지금 과거의 상처에 연연할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지난 일인데?’

의준이 자신을 떠났던 이유는 몰랐다. 의문은 아직도 심장 한구석에 쐐기가 되어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현재를 포기해야 할까.

‘이 녀석을 다시 잃을 위험을 무릅써야 할 가치가 있어?’

열기가 몸을 태울 듯이 솟아올랐다.

도헌은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의준을 바라보았다. 의준도 눈을 떴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도헌을 발견하더니 부드럽게 휘었다.

“도헌이 형.”

의준이 속삭였다.

“사랑해요.”

도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의준은 쾌감의 여운이 남은 얼굴에 한껏 미소를 지었다.

“…의준아.”

처음부터 복수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과거의 상처 따위, 지금까지 그랬듯 심장 한 켠에 박아 둔 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이의준만 곁에 있어 준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자신의 과거조차, 의준의 존재 앞에서는 하찮기만 했다.

‘내가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두 번이나 품게 될 줄은.’

심장이 욱신거렸다. 과거의 상처로 인한 통증과는 다른 새로운 통증이 솟아올랐다. 그는 이 통증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의준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작은 입술에 입술을 비비며 이름을 불렀다. 의준이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작은 몸짓에서조차 애정이 흘러넘친다면 과한 생각일까.

“사랑해.”

재회 후에 의준은 몇 번이나 들려주었던 말이었지만 도헌이 입에 담기는 처음이었다. 의준도 그 사실을 깨달았으리라. 원래도 큰 눈이 더욱 커졌다. 믿어지지 않는 듯이 도헌의 얼굴을 뜯어보는 그를 보며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야.”

아직 남아 있는 과거의 상처를 무시하기로 결정했을 만큼.

“사랑하고 있어.”

되살아난 감정에 솔직하고 싶었다.

도헌의 한 마디에 의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 얼굴이 너무 예뻐서 홀릴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무슨 이유로 나를 버렸는지 상관없어. 이제 놓지 않을 테니까.’

두 번째 관계가 어긋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입술에 이어 몸이 다시 겹쳤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열기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도헌은 의준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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