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오전 업무를 마치고 잠깐 탕비실로 향하려던 의준은 도헌의 부름을 받고 급히 몸을 돌렸다.
“네, 전무님.”
“잠깐 일정 의논 좀 합시다.”
전무실로 향하며 의준은 남은 일정을 떠올렸다. 오늘은 수요일. 점심 식사 이후에 신규 투자처 자료를 검토하고 경력직 직원의 임원 면접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외부 일정은 없었다.
“점심시간부터 자리를 비웁니다. 오후 일정을 조정해 주세요.”
“일정 변경이라면 새 일정을 알려 주시면….”
“기존 일정만 취소하면 됩니다.”
의준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도헌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의준의 대답을 들으며 도헌은 책상 위에 두었던 차 키와 태블릿 그리고 휴대 전화를 챙겼다. 그 모습을 보며 의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텔을 예약할까요?”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도헌은 회사 근처 호텔에 방을 잡고 낮잠을 잤다. 수면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의준과 같이 살기 시작한 뒤로 2주째 낮잠을 따로 자지 않았다.
‘매일 푹 자니까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의준이 걱정스럽게 안색을 살피는 사이에 도헌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다른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일까.
“어떤 약속이신지 물어도 될까요?”
“의준 씨는 알 필요 없습니다.”
“…예?”
의준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알 필요 없다니. …비서로서? 아니면… 애인으로서?’
당황한 의준의 귀에 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해하지 말아요. 집안일로 영제를 만나야 해서 그렇습니다.”
부산 친가와 관련된 일에는 비서로서는 물론 애인으로서도 끼어들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점심과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겠습니다.”
“밖에서 곧장 퇴근할 겁니다. 의준 씨도 시간 되면 퇴근해요.”
도헌은 의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에 전무실을 먼저 나섰다. 의준은 급히 사무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큰일이 아니면 좋겠는데….’
어차피 오늘 저녁에도 같이 저녁을 먹고 영화나 보다가 잘 예정이었다. 그 정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
요즘 도헌은 자정 전에 잠들곤 했었다. 겨우 수면 패턴이 잡혀 가는 상태인데 혹시라도 오늘 늦게 귀가해서 흐트러지면 힘들지 않겠는가. 게다가 자정이 지나면 의준도 깬 채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자정 전에 잠들기는 의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이 쓸모없었다는 사실을, 의준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이날 도헌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늦을 거야. 먼저 자.’
자정 즈음에 도착한 짧은 메시지를 끝으로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잠들어 버렸던 의준은 다음 날 아침에야 도헌이 귀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급히 도헌에게 연락했다.
도헌은 회사에 있었다.
오전 여섯 시, 황급히 준비해서 출근한 의준은 탕비실에서 직접 커피를 내리던 도헌과 마주쳤다.
“도헌이 혀… 아니, 전무님.”
“일찍 왔군요.”
도헌은 태연하게 커피를 가리켰다.
“의준 씨도 마시겠습니까?”
“아니요.”
커피를 받아 마실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상황을 만든 원인이 어째서 이토록 태연한가.
“어제는… 어디서 주무셨습니까?”
“호텔에서 잤습니다.”
대답 후에 커피를 마시는 도헌을 보며 의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늦게라도 귀가하신다고 하셨는데 안 오셔서 걱정했습니다.”
“기다렸습니까? 먼저 자라고 했을 텐데요.”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놀랐을 뿐이다. …걱정했던 사람에게 굳이 저렇게 말해야 할까. 의준은 울컥했다.
“오늘 일정에 변동 사항은 없으신지요?”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사무적으로 물었다. 도헌은 고개를 저었다.
“전화 면접 일정이 새로 잡혔습니다. 어제 참석하지 못하셨던 임원 면접 대상자 두 명과 꼭 통화를 해 보라는 대표님의 말씀이 있으셨거든요. 오후 회의 전에 시간을 잡았고 이력서와 면접 질의서 그리고 어제 면접 결과서는 대상자별로 정리해서 오전 내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래요.”
도헌과 의준은 탕비실을 나왔다. 전무실로 향하는 길에 의준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녁에 예정된 만찬 말입니다만, 주최 측이 자리 배치 확인을 요청해서 메일을 공유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별문제 없었습니다만, 혹시 미처 검토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잠깐 봐 주시면 좋겠는데요.”
“그러죠. 메일 이미 보냈습니까?”
“네, 지금 확인 가능합니다.”
자리에 앉아 의준이 보낸 메일을 열며 도헌이 말했다.
“오늘 만찬에 의준 씨는 참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시 퇴근하세요.”
“…예?”
예상치 못한 말에 의준은 놀랐다. 오늘 만찬 모임은 도헌이 회사 대표로 참석하는 공적인 자리였다.
“저는 전무님을 보좌하러 참석할 예정이었는데요. 혼자 참석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요, 김하나 과장에게 대신 동반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네?”
비서실 선배이자 전 수행 비서인 김하나의 이름을 들은 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제저녁에 전화해서 동반을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일정에 여유가 있어서 괜찮다더군요. 그러니 의준 씨는 퇴근해도 됩니다.”
“…….”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런 중요한 일을 자기에게 말도 없이 단독으로 결정했을까. 아니, 어떤 비서의 보조를 받을지는 임원인 도헌의 마음이기는 했다.
‘그래도… 왜?’
의준은 입을 열었다.
“전무님, 제가 혹시 업무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까?”
도헌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해서 불편을 끼쳤다면 말씀해 주세요. 시정할 테니까….”
“아닙니다, 의준 씨.”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만찬에 김하나 과장이 전에 재직하던 회사 임원이 참석합니다. 그쪽 회사와 연결 고리 삼아 김하나 과장이 동반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부탁했을 뿐입니다.”
“그러, 셨습니까.”
이치에 맞는 변경이었지만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러시면 저를 통해 말씀하셔도 되었을 텐데요.”
“퇴근 후에 생각이 났고, 의준 씨를 통해서 김하나 과장에게 연락하기보다 내가 직접 연락하는 쪽이 부탁하는 입장에서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
“의준 씨를 업무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오해가 없으면 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답답했다.
‘일개 비서라면 몰라도 같이 사는 사이인데, 그 정도는 미리 말해 줄 수도 있잖아.’
공과 사를 구분하고자 하는 도헌의 업무 처리 방식을 존중했다. 그래도 이 정도 일에는 덜 공적으로 굴어도 되지 않을까.
“참석자 정보는 김하나 과장님께 공유하겠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의준 씨, 잠깐만.”
도헌이 돌아서려는 의준을 불러 세웠다.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도록 해요. 모처럼 일찍 퇴근하니까.”
바로 전까지 재수 없는 직장 상사처럼 굴다가 갑자기 배려 넘치는 애인이 되시겠다?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의준은 입을 열었다.
“배려 감사합니다. 하지만 모처럼 생긴 혼자만의 시간이니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
“실례하겠습니다.”
의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무실 밖으로 나왔다.
***
의준은 오후 일곱 시에 퇴근했다. 정시에 퇴근하지 못했던 이유는 의준 대신 만찬에 참석 중이었던 김하나가 급히 자료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고마워, 의준 씨. 덕분에 살았어.
“별말씀을요. 달리 도와드릴 일은 없고요?”
---괜찮을 것 같아. 어휴, 수행 비서일 몇 달 안 했다고 아주 난리네.
의준은 김하나의 푸념을 흘려 넘겼다. 비서 경력만도 10년에 가까운 사람이니 말은 그렇게 해도 도헌을 잘 보좌하고 있을 터였다.
“그럼 저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통화를 마무리하려던 찰나 김하나가 의준 씨,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퇴근 후에 곧장 집에 가죠?
김하나의 목소리에 실린 도헌의 궁금함을 간파한 의준은 헛기침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아니요,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요. 집에는 자정 전에 들어가려고 해요.”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침묵을 통해 김하나가 난감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의준은 헛기침을 한 후에 덧붙였다.
“어머니 뵈러 병원에 갑니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내일 보고요. 김하나는 다소 안도한 기색으로 이렇게 말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의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도 모르고 중간에 낀 채 상사와 부하의 황당한 질답을 중계한 김하나에게 미안함이 솟아났다.
“…내일 뵈면 사과부터 해야지.”
의준은 사무실을 나섰다.
전문 간병인을 고용한 후로 의준과 소영은 간병을 위해 병실에 오래 머물거나 잠을 자지 않았다. 전문 간병인이 병원에 상주하기 때문에 보호자로서 한 주에 두세 번 번갈아 가며 어머니 얼굴을 보러 면회를 갈 뿐이었다.
오늘은 원래 소영이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그러나 오후에 급히 조별 과제 모임이 잡혔다는 그녀 대신 의준이 면회를 가기로 했다. 마침 곧장 집에 가기 싫어서 들를 데를 찾던 중이었기에 오히려 다행이었다.
“오셨어요?”
손 소독제를 문지르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간병인이 인사를 건넸다. 의준은 꾸벅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한 후에 침상으로 다가갔다.
“엄마, 저 왔어요.”
“…….”
대답 대신 껌벅, 껌벅, 눈을 껌벅이는 어머니를 향해 의준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병인이 옆에서 오늘은 손도 조금 움직였다고 알려 주었다.
“와, 우리 엄마, 다 나았네.”
의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약하지만 마주 잡으려는 힘이 느껴졌다. 도헌 때문에 불편했던 마음에 따스한 희망이 스며들었다.
오는 내내, 도헌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업무 중이고 김하나를 통해 의준의 행선지를 파악했으니 연락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일과 시작 전에 그렇게 불편한 대화를 나누고 그 뒤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메시지 하나 정도는 보낼 수 있지 않나?’
김하나를 통해 의준의 퇴근 후 행선지를 물어본 것은 도헌도 어느 정도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과장님을 끌어들이지 말고 직접 연락하면 좋잖아. 하는 김에 사과도 좀 하고.’
업무적으로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애인으로서는 배려가 부족했다. 아무리 도헌이 무심한 성격이어도 그 정도는 깨달으리라 생각했는데.
‘공과 사를 구분한다는 건 의외로 힘든 일이구나.’
연애 사실을 비밀로 하고 회사에서의 호칭과 말투만 신경을 쓰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난관이 많았다.
‘공과 사 구분 없이 함께 삶을 공유하면 불편하구나.’
어느 한쪽을 포기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같은 회사를 다니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다른 부서에 근무했다면.
사직할 용기는 없었다. 회사에서 의료비를 제법 많이 대출받기도 했고 무사히 이직한다고 쳐도 다른 회사에서 지금만큼 대우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헤어질 수도 없잖아.’
알고 있었다. 자신만 마음을 다잡고 도헌처럼 공사를 구별하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힘들고 불안하지?’
의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면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의준은 계속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도 같은 고민을 오래 반복해서일까, 어느새 왜 고민하는지 무엇이 고민인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차를 타면 5분도 걸리지 않는 언덕을 거의 다 올라올 즈음 의준은 낯익은 간판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도헌과 방문한 적이 있는 작은 칵테일 바였다.
“도헌 씨하고 오셨던 분이네요. 어서 오세요.”
바텐더는 의준을 알아보았다. 의준은 어색하게 인사를 한 후에 좁은 실내를 둘러보았다. 평일 밤이어서인지 가게에는 의준 외에 남녀 손님 한 쌍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의준은 바에 앉았다. 바텐더는 그의 앞에 기본 안주가 담긴 작은 접시를 놓았다.
“뭘 드릴까요?”
“어… 글쎄요.”
의준은 망설였다. 칵테일은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종류도 잘 모르고 이 가게는 두 번째 방문이라 어색하기도 했다. 그런 의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바텐더는 웃으며 물었다.
“전에 드셨던 칵테일이 나쁘지 않았다면 같은 걸로 만들어 드릴까요?”
“아, 네.”
바텐더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몸을 돌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의준 앞에 술이 놓였다.
“전통주와 과일 퓨레를 혼합한 여름 칵테일입니다.”
“고맙습니다.”
투명한 붉은 색을 띤 칵테일에서 강한 알코올 향이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한 모금을 마시자 입안과 식도 안까지 화끈하고 달콤한 향이 스며들었다.
“하아….”
의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되지 않았던 고민이 되살아났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싶은데 그럴 만한 친구가 없다는 사실이 오늘만큼 슬펐던 적이 없었다.
‘상우라도 있었다면 좋을 텐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상우야말로 이럴 때 제일 부르면 안 되는 친구였다.
‘이젠 친구라고 부르기도 애매하잖아….’
상우는 의준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의준은 얼마 전에 그 사실을 알았고 감정이 격해졌던 그와 몸싸움을 벌였다. 그 뒤로 사과 문자만 한 번 보냈을 뿐, 상우는 의준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의준도 연락할 수 없었다.
‘만일 그런 일이 없었어도…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나에게 공감해 줄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의준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많이 힘드셨나 봐요.”
의준의 앞에 작은 과일 안주 접시를 놓으며 바텐더가 말을 걸었다. 서비스예요. 덧붙인 말에 의준은 고맙다고 인사한 후에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너무 한숨을 쉬었죠?”
“한숨을 안 쉬는 사람이 드문 세상인걸요.”
바텐더는 질문의 대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어긋나지도 않는 묘한 대답을 한 후에 빈 잔을 가리켰다. 더 마시겠냐는 의미였다. 의준은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걸로 드릴까요?”
“네.”
바텐더는 금세 새 잔에 같은 칵테일을 채워 의준의 앞에 놓았다. 독하고 향기로운 알코올 향을 맡으며 의준은 아무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회사 일은 아닌데, 개인적인 일이 영 안 풀리네요.”
바텐더가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의준은 말을 이었다.
“얼마 전부터 동거를 시작했는데요, 제 쪽에 일이 좀 있어서, 계획 없이 그렇게 되었는데….”
“…….”
“상대 쪽은 제 사정을 고려해서 기꺼이 같이 살자고 받아 주었는데, 요즘 태도가 좀 달라졌어요. 뭐랄까, 동거 전보다 거리가 멀어진 기분도 들고요.”
의준은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좀 걱정돼서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대화를 나눠 보시면 어때요?”
“그러고 싶은데… 모르겠어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혼자 추측하고 고민할 바에야 직접 물어보고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랬다가 제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게 될 수도 있잖아요.”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네요.”
“혼란할 때는 생각을 단순하게 정리하는 게 도움이 된다더군요. 현재 상황을 중요한 순으로 목록처럼 만들거나, 장점과 단점을 나란히 적어 보거나 하는 식으로요.”
바텐더는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해도 될 일과 안 되는 일, 혹은 포기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
포기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 의준의 시선이 칵테일 잔으로 향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있던가?’
공적인 관계도 사적인 관계도 포기할 수 없어서 고민이 시작되지 않았던가.
“저는 얼마 전에 집에서 독립했어요. 원래는 가족들과 함께 살았죠.”
생각에 잠겼던 의준의 귀에 바텐더의 차분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저희 집에서는 아버지하고 저하고 누나가 직장을 다니는데, 저만 밤에 일해요.”
바텐더의 부친은 아들의 직업을 못마땅해했다. 자주 야단을 맞고 충돌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싸움이 벌어졌다.
“홧김에 집을 나와서 살 집을 찾았어요. 절연을 각오하고.”
“…헉…?”
의준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바텐더는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보더니 웃었다.
“한 대여섯 달은 연락도 안 하고 살았는데, 생신 때였나? 누나 성화에 못 이겨서 연락을 드렸어요. 그런데 화도 안 내시고 오히려 잘 사냐고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
“오히려 독립 후에 아버지와의 관계는 훨씬 좋아졌어요.”
독립 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밤낮이 바뀐 생활과 술장사로 건강을 해치는 아들이 걱정되어서 화를 냈다는 사실을.
그의 모친이 바랐던 가족 모두가 화목하게 모여 사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는 부친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했다.
“거리를 두어야 애정에 금이 가는 일을 막을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죠.”
“그러네요.”
바텐더는 기본 안주 접시를 새로 내며 입을 열었다.
“그분을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네?”
“애인분요.”
“하하… 뭐… 네.”
의준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많이 신경 쓰고 배려하려는 마음이 전해져요. 그만큼 사랑하니까 고민하시는구나, 싶고.”
의준은 칵테일 잔을 바라보았다.
“…한 번, 그러지 못해서 놓쳤거든요.”
재회했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 기억 속의 모습과는 달라진 그가 낯설었고 태도에 화를 냈다. 그의 호의를 의심하고 경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빠져들었다.
‘도헌이 형이었으니까.’
재회가 우연이라면 사랑에 빠진 것은 필연이었다. 우연과 필연이 겹쳐져 만들어 낸 기적과도 같은 관계가 아니던가.
‘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아.’
감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공과 사 어느 한쪽만 선택하기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바 테이블에 두었던 휴대 전화 화면이 밝아졌다. 메시지 알람을 본 의준은 휴대 전화를 들었다.
‘영제 만나고 들어갈게. 기다리지 말고 자.’
의준은 메시지 창 위에 표시된 도헌의 이름에 손가락을 댔다.
“결정할 때가 왔나 봐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
서영제가 초대받지 않은 경제인 만찬 모임에 나타났을 때 도헌은 안도했다.
“아버지를 찾았군.”
“어째 알았노?”
“그 일 외에 네가 날 찾아올 이유가 없으니까.”
영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손님과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김하나를 향해 먼저 돌아가라고 지시한 후에 도헌은 영제를 향해 말했다.
“자리를 옮기지. 조용한 곳으로.”
“우에 라운지 바 있다. 숙박객만 출입하는 구역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여기 숙박 중인가? 강남 쪽에 있지 않았나?”
“오늘부터는 여기.”
호텔 2층 만찬장을 나온 그들은 투숙객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라운지 바로 향했다.
“오늘 새벽에 연락받고 사람 보내가 데려왔다.”
“서울로? 부산으로 안 보내고?”
“그러기엔 쫌 곤란해서.”
드문드문 앉은 손님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구석에 자리를 잡은 후 영제는 도헌에게 귓속말을 했다. 듣고 있던 도헌의 눈썹이 움찔하고 흔들렸다.
“가지가지 하는군.”
도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진 돈을 전부 도박장에 털어 넣어 빈털터리가 되더니 죽을 생각도 없으면서 쇼까지 해?”
서도헌의 부친은 강원도의 한 모텔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약물 과다 복용이었다. 급히 응급실로 가서 위세척을 해서 목숨을 건진 후 서울로 이송되어 한 병원에 입원했다.
“약쟁이 전문으로 치료하는 병원. 외부 면회 금지고 보안도 좋아. 한동안 거 가둬… 아니, 모셔 두고 남은 일 수습할라고.”
“…….”
“첨에는 땄다더라고. 빚 전체는 무리지만 들고 튄 내연녀 돈 이자 쳐서 갚아 줄 정도는 된다데.”
거기서 멈추고 서울로 돌아왔다면 내연녀에게 얹혀살며 재기를 노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도박꾼들이 그러하듯 그는 작은 이득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날 밤, 딴 돈을 모두 잃고 도박장에서 대출을 받았다. 물론 그 돈도 모두 잃었다. 겨우 사흘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며칠 사이에 아주 깔끔하게 털어먹었더만. 이야, 도박꾼들 무섭다, 무섭어. 말로만 들었지. 정말 맨몸 빼고 다 벗겼더라. 보증인으로 네 개인 정보도 넘겼어. …금리 65% 사채를 부리는 놈도 사기꾼이지만, 거기서 겨우 몇 천만 원 땡길라고 아들 정보를 팔아넘기다니.”
영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행님은 이제 안 되겠어. 답이 없다. 미안하지만.”
“미안할 필요 없어.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은 건 할아버지와 너뿐이니까.”
도헌은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평생 누군가가 자기 대신 뒤를 닦아 주었던 사람이야. 죽을 생각도 없고, 스스로 상황을 수습할 의지도 없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상이다.”
“내도 그런 타입은 별로다. 하지만 뒤를 닦아 주는 일을 물려받은 입장이니 어쩔 수 없지. 내 팔자가 진짜 이게 뭐고.”
영제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헌은 무심하게 물었다.
“남은 빚이 얼마야?”
“9억 정도?”
“할아버지가 알면 노발대발하시겠군.”
“여사님에게 의논해 봐야지. 회장님을 구슬리는데 그분보다 전문가는 없으니까.”
“…그분도 의붓아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군.”
“사랑이 그렇게 위험하다니까. 혼자 살면 이 꼴도 안 봤을 텐데, 어쩌다 회장님에게 반해서, 원.”
“혼자 사셨으면 너도 세상에 없었을 텐데?”
“그랬으면 더 행복하시지 않았겠나?”
영제는 말을 이었다.
“문제는 저쪽에서 돈을 얌전히 받아 주느냐야, 체면 구긴 걸 크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 골치 아프네.”
“힘내.”
“남이가. 너희 아버지 일이거든.”
“네 형님이기도 하고.”
“억울하다, 억울해. 내가 원해서 형님 동생 된 것도 아닌데.”
“나라고 다르겠나?”
티격태격의 끝에 도헌은 잔을 들어 올렸다.
“억울한 혈연끼리 건배.”
“무슨, 이거 가지고 건배까지 하노.”
영제는 도헌의 잔에 자기 잔을 부딪쳤다.
“뒷수습할 일이 까마득… 하다. 그래도 새로 사고는 못 칠 테니… 아, 몰라. 오늘은 그만 생각하고 술이나 마실 거다. 돈은 네가 내라.”
“숙박객 전용 라운지면 네가 내는 거 아니야?”
“요금은 별도거든. ---여기, 같은 거 한 잔 더.”
영제는 새 술을 주문한 후에 화제를 바꾸었다.
“내가 타향에서 호텔 살이 하는 사이에 누구는 신혼살림이나 차리고 말이야.”
“신혼살림? 누가.”
“니 말이다. 애인 데리고 사니까 좋나?”
“…….”
도헌은 피식 웃으며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영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 봐라. 아주 깨가 쏟아지네. 그러고 보니 얼굴에 살도 좀 붙었디? 좋은 거 많이 얻어먹나 보네. 의준 씨가 맛있는 거 해 주드나?”
“의준이가 요리할 틈이 어디 있어, 나랑 출퇴근 같이 하는데. 게다가 요리할 줄도 몰라.”
도헌은 말을 이었다.
“매일 배달 음식 얻어먹기 미안하다고 한 번 밥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집에 불날 뻔했어.”
가스레인지밖에 사용해 본 적 없던 의준은 낯선 인덕션 팬 위에 팝콘 봉지를 둔 채 전원을 켰고 덕분에 달궈져야 할 프라이팬 대신 팝콘 봉지가 녹으면서 대참사가 발생했다. 팝콘이 소리를 내며 사방에 흩뿌려지고 인덕션에 비닐이 눌어붙었던 것이다.
“큰일 난 줄 알고 씻다가 뛰어나왔더니 그 난리였지.”
다음날 출근하려다 구두 안에 숨어 있던 팝콘을 밟았을 때는 웃었지만 당시에는 황당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뒤로 그 녀석은 부엌에 출입 금지야. 해 먹어야 할 때는 내가 하고.”
“네가 밥을 해? 사 먹는 게 시간이 절약된다던 놈이?”
“외식에도 한계가 있어. 난 같은 메뉴를 일 년 내내 먹어도 상관없는데, 의준이는 그렇지 않으니까.”
“…….”
“그 녀석, 보기보다 입이 짧거든.”
영제는 피식 웃었다.
“말로는 투덜대면서 웃는 거 봐라. 좋아 죽네, 죽어.”
“좋고 싫고가 어디 있어.”
도헌이 대꾸했다.
“아버지 일 때문에 혹시 피해를 입을까 봐 보호할 겸 시작한 동거인데.”
의준이 살던 집에 든 빈집 털이는 잡히지 않았다. 경찰은 사실상 수사를 포기한 낌새였고 이사를 결정한 의준 역시 그 일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도헌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니가 의준이를 데려간 덕분에 내가 편했다. 둘 다 경호하는데 인력 낭비도 줄었고.”
도헌의 집과 직장에는 사설 경호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부친의 채권자 측에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경호 인력은 철수시킬 건가?”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둘 기다. 빠르면 이달 말 정도. 아니면 다음 달.”
“그래.”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도헌의 귀에 영제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이제 우짤 긴데?”
“뭘?”
“동거.”
도헌은 무슨 의미냐는 듯이 영제를 바라보았다.
“행님 일 일단락 짓고 나면 의준 씨랑 동거할 필요도 없잖아. 그래도 같이 살 건 아니제?”
“…우리 집에 오고 3주밖에 안 지났어. 지금 나가라고 할 수는 없잖아.”
도헌이 말했다.
“여동생이 몇 달 뒤에 유학을 떠날 테고, 어머님은 올해 내로 퇴원할 상황이 아니니 의준이 혼자 살 집을 구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돈도 돈이고 상황도 애매해.”
오랫동안 가족에게 자신을 맞춰 살았던 남자였다. 혼자 살아야 한다면 돈을 아끼기 위해서 기꺼이 고시원이나 저렴한 원룸을 찾아내리라.
“집에 남는 방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내보내서 고생시킬 이유도 없잖아.”
“각방 쓰는 척 오지네. 같은 방 쓰면서.”
“…….”
도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내보낼 생각 없고 알콩달콩 잘 살겠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는구만. 아, 괜히 물었네. 안 들어도 되는데.”
영제는 하이고, 하고 과장되게 한숨을 내뱉었다.
“김상우 놈이 들었으면 거품 물고 훼까닥했어. 일부러 의준이에게 동거 제안을 하려고 집도 새로 샀던 놈은 차이고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데로 불러들인 놈은 깨가 쏟아지고.”
“김상우는 얌전히 지내고 있나?”
도헌이 물었다. 영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영화 촬영하고 종종 다른 일도 하면서 성실하게 살고 있지. 의준 씨한테는 연락하지 않는 모양이고, 아랫도리도 자숙 중.”
“거기까지는 안 물었어.”
도헌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용케 그런 걸 알아냈군. 김상우에게 부하라도 붙여 놨나?”
“지금 내 방에 있거든.”
영제는 라운지 바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촬영 내내 지방에 머문다고 하지 않았나? 자주 올라오는군.”
“제작 발표회 전후로 띄워 주기 시작했지. 그 얼굴에 몸이면 금방 반응 온다이가.”
영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도헌은 새 술을 주문하며 입을 열었다.
“용케 그런 놈과 만나는군.”
“잠만 자는데 인격은 상관없으니까.”
영제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랫도리에 휘둘리는 멍청이지만 나쁜 놈은 아니야. 내 방에 찾아온 이유도 지 집에 가면 의준이에게 했던 짓이 떠올라서 괴로워서고.”
“나쁜 놈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괴로워할 짓을 안 했겠지.”
“그건 그렇지.”
영제는 키득키득 웃었다.
“술기운과 감정을 주체 못 하면 관계를 전부 날린다는 교훈을 얻었으니 관대하게 용서해 줘라. 다음에 또 그카믄 쥐어 패는 정도로 안 끝나니까.”
“용서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의준이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정론에 영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헌은 술잔을 천천히 흔들어 얼음을 녹이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놈과 엮여서 좋을 거 없어.”
“괜찮아, 니는 내랑 다르니까.”
영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나 김상우는 니랑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야. 사람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다르거든.”
“…….”
“내 입장에서는 니나 의준이랑 엮이고 싶지 않아. 몸과 마음이 같은 방향을 향해야 하고, 그 방향에 딱 한 사람만 존재해야 한다면… 너무 부담스럽거든.”
“나와 의준이는 달라.”
“내 보기엔 똑같은데. 너도 의준이도….”
“달라. 그 녀석은 네 말대로지만 나는 아니야.”
“……?”
“그 녀석과 내 마음은 같지 않아.”
도헌은 술을 마셨다. 영제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와 그라는데?”
“뭐가.”
“와 그렇게 의준이 좋아한다는 걸 부정하지 못해 안달이냐고. 남 눈을 피하려고 내뱉는 빈말 수준이 아니잖아.”
꼭 진심처럼 들린다고. 영제의 말에 도헌은 피식 웃었다.
“진심이니까.”
“허어.”
“애초에 어째서 나와 의준이의 마음이 같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군.”
도헌은 말을 이었다.
“나를 버렸던 남자야. 어떻게 그런 녀석을 다시 좋아하겠어?”
“의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도헌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멈췄다.
“그러면 왜 의준이하고 사귀는데?”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표정을 굳힌 채 도헌은 입을 열었다.
“별 의미 없어.”
“의미는 없어도 목적은 있겠지.”
“…….”
“아, 알겠다, 그거구나. 날 버린 남자에게 복수. 다시 나를 좋아하게 만든 후에 잔인하게 차 주마, 이런 거?”
신중하게 예측한 결과라기보다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 보고자 농담조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도헌은 영제가 예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허어?”
영제의 얼굴에 충격이 어렸다. 설마 지금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소가 되었나?
“와, 이 미친놈 봐라. 서른셋이나 처먹고 그딴 유치한 복수나 할라고 옛 남자 친구랑 다시 사귀고 있다고? 그걸 믿으라고?”
“…….”
“진짜가?”
헛웃음을 짓던 영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야, 서도헌.”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어.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야.”
“뭐가 중요한데?”
영제의 어투가 험악해졌다.
“5년이나 지난 실연을 복수로 승화하는 게? 5년이나 지나서 재회한 첫사랑을 상대로?”
“마음대로 생각해.”
도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영제는 도헌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참에 하나만 물어보자. …대체 5년 전에 의준이는 니를 왜 찼는데?”
질문이 자연스럽게 과거를 되살렸다.
‘헤어져. 연락하지 마.’
도헌은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상관없잖아.”
“하긴, 내 일은 아니니까.”
영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니가 바라지 않아도 내는 니 편에 설 거야. 그런 의미에서 한마디만 하자면….”
영제는 도헌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지금이 딱 좋을 때 아니야?”
“뭐가.”
“복수할 시점.”
“……?”
눈살을 찌푸리는 도헌 앞에서 영제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기 시작했다.
“직장, 돈, 새로운 애정, 희망. 지금 의준이가 누리는 안정된 생활과 나름의 행복은 모두 니가 존재했기에 가능했잖아.”
“…….”
“지금 의준이에게 이별을 고하고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복수가 되지 않겠나? 의준이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밝히기까지 하면 완벽하겠지.”
“그건….”
말문이 막힌 도헌을 보며 영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더한 복수도 가능해.”
“…….”
“마침 질 나쁜 놈들이 어슬렁대고 있으니 조금만 눈감으면 금마들이 니 대신 의준이한테 제대로 복수할 수도 있지. 의준이는 착하고 약하니까 쉽게 겁먹을 거고. 이쪽이 외면하면 도망칠 방법도 없겠지. 형님이 건드린 그놈들, 돈 되는 짓이라면 뭐든 하니까 여차하면….”
“서영제.”
도헌은 영제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상한 짓 할 생각 마.”
“내가 아니라 걔들이 그럴 수 있다니까. …살짝 부탁은 해야겠지만.”
영제는 도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만 해.”
“…….”
“니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으니 대가로 사지를 갈기갈기….”
콰당하고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도헌이 영제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의준이에게 손을 대면 죽여 버리겠어.”
도헌의 눈이 번득였다. 영제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푸흡….”
영제가 웃음을 터뜨리자 도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영제는 뒤로 물러섰다.
“복수하겠다던 상대를 건드리면 죽이겠다고?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른데?”
“…….”
영제는 키득키득 웃으며 도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냥 하는 말 아니고, 니 지금 니 생각보다 더 이상하다. 머리랑 마음이 따로 노는 수준을 한참 벗어났다고. 이런 상태에서 뭘 제대로 처리하겠냐? 냉정해져라. 본인을 좀 돌아보라고.”
“…….”
영제는 의자를 세워 다시 걸터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 복수라는 게 눈앞의 행복을 짓밟을 만큼의 가치가 있나?”
“…….”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안 늦는다.”
영제는 바텐더에게 새 술을 주문하며 덧붙였다.
“혹시라도 의준이를 버리게 되면 알려 줘. 김상우에게 전해 주게.”
도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영제가 잔을 비우는 사이에 도헌은 자리를 떴다.
흘깃 입구로 시선을 향하던 영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빠르게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칸막이로 구분된 옆 좌석으로 불쑥 들어갔다.
“여서 뭐 하는데?”
“술 마시잖아.”
2인석에 혼자 앉아 있던 상우가 고개를 돌렸다. 영제는 전혀 비지 않은 그의 술잔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들었나?”
“…처음부터.”
“흐응.”
영제는 상우에게 다가서며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상우가 말릴 틈도 없이 바닥에 떨어뜨린 후에 구두 뒷굽으로 짓이겼다. 기계가 박살 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잠깐, 무슨 짓….”
“녹음했제? 복사본은 백업되나? 계정 불러.”
“남의 휴대 전화를 박살 내 놓고 무슨….”
불평을 하려다 말을 멈춘 이유는 그를 향한 영제의 얼굴이 본 적 없이 살기등등했기 때문이었다. 상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녹음 안 했어. 백업 같은 것도 없고.”
“그걸 믿으라고?”
영제는 코웃음을 쳤다.
“의준이에게 미련이 철철 넘치던 니놈이 도헌이 발을 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녹음 버튼을 안 눌렀다고? …잔말 말고 백업 계정 대.”
“알면서 내버려 둘 거야?”
상우는 영제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뭘?”
“당신 조카가 말했잖아, 의준이에게 복수할 거라고. 내버려 둘 거냐고.”
“내버려 두지 않으면 뭐?”
영제는 상우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먼저 출구로 향했다. 상우는 그를 따라 걸으며 입을 열었다.
“서도헌은 의준이를 배신할 거야.”
“아직 안 했잖아.”
“할 거라고.”
“몬한다.”
“어떻게 단언해?”
“그놈, 의준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거든.”
영제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데 복수? 못하지. 그럴 작정이었으면 몇 년 전에 해치웠다.”
“…단언할 수 있어?”
“단언은 못 해.”
“말장난하는 거야?”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객실 앞에서 영제는 걸음을 멈췄다. 상우가 문을 열자 영제는 안으로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도헌이가 만일 진짜로 복수를 해도 막을 생각은 없고.”
“뭐라고? 어째서.”
상우는 대들 듯이 물었다. 영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도헌이는 내 조카지만 의준이는 남데걸.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의준이는 내 친구야.”
상우는 굳은 표정으로 영제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만일 당신이 서도헌 편을 들겠다면 나는 의준이 편에 서겠어.”
“니 지금 내 위협하는 거가?”
“그렇게 느껴져?”
“허어….”
영제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다음 순간 그가 상우의 멱살을 움켜쥐며 다리를 그의 무릎 뒤로 뻗었다. 상우의 몸이 휘청하고 뒤로 기울어졌다.
“…윽…!”
상우는 침대로 쓰러졌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영제가 그 위에 올라탔다. 단단한 팔꿈치가 상우의 목을 가차 없이 내리눌렀다.
“뭘 어쩌게?”
“윽….”
“내 하나 못 뿌리치면서, 뭘 할라고?”
“의준…이에게, 사실…을 알려 줘야, 지. 적어도…. …아무, 것도… 모르는데 배신, 당하면… 의준이가, 상처, 받잖아.”
“대뜸 친구를 덮쳤다가 차인 놈이 무슨 말이야.”
비웃음이 들려왔다. 상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상처받는 걸, 봤으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야.”
두 번 다시 그런 의준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상우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의준이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건…. 너무하다고.”
“흐응….”
영제가 팔꿈치를 떼자 상우는 쿨럭거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를 내려다보면 영제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멈춘 그의 입술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주제에 순정파인 척 굴기는.”
“영….”
“정 참견하고 싶으면 안 말린다. 하던가.”
영제는 몸을 일으켰다.
“납치, 감금, 협박 금지. 그리고 사실을 안 후의 선택권은 의준이에게 줄 것. 그것만 약속하면 의준이에게 말해도 좋아.”
“……? 뭐?”
증거가 남으면 곤란한 이야기라서 휴대 전화까지 박살 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쉽게 말해도 좋다고 허락하다니. 혼란스러워서 눈치를 살피던 상우에게 영제의 말이 이어서 들려왔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니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의준이도 나름 짚이는 점이 있었다는 의미겠지. 반대로 니 말을 들은 척도 않는다면… 니만 크게 상처받고 말 테니 크게 문제 될 일도 없고.”
“…내가 상처받는 건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야?”
“그 정도는 각오했으니 돕겠다고 나서는 거 아이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상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은 나를 도와줄 생각이 없고?”
“내가 왜?”
영제는 뒤로 물러나 앉은 후에 손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내한테 니는 쓸 만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윽….”
상우는 신음했다.
“남의 자존심을… 그렇게 찢어 놔야 속이 시원해?”
“내한테 뭘 바랐는데?”
영제는 웃었다.
“사랑 놀음을 하고 싶으면 사랑이 진짜인지 증명부터 해라.”
그 감정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지.
거기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러면 믿어 줄 테니까.”
서도헌, 김상우, 그리고 이의준. 누구든 상관없었다. 사랑을 입에 담으려면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다른 무엇보다 우선할 수 있는 감정임을 보여 주면 좋겠다.
“내는 진심이다.”
서영제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