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빈집 털이 사건이 발생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경찰 조사에는 진척이 없었고 집을 비운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의준은 소영과 논의한 끝에 큰 결정을 내렸다.
“의준 씨, 이사한다고?”
김하나가 물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올해 말에 계약 갱신 예정이었는데 일찍 해지하기로 했어요.”
집주인은 집을 좀 수리하고 보안책도 강화한 후에 새로 세를 놓을 생각이라고 했다. 소영도 불안했는데 잘됐다고 찬성했다. 소영은 교환 학생으로 떠나기 전까지 친구 집에서 룸셰어를 하기로 했다.
“친구 집이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와 학교 둘 다 가까워서 편하겠더라고요. 그러라고 했죠.”
룸셰어 비용은 원래 살던 빌라의 월세로 충당하기로 했다.
“의준 씨는 그럼 어디 머물고?”
“아… 저는 아는 분이 비는 방을 내주셨어요.”
“잘됐네. 좋은 집을 구하기 빌어요.”
“고맙습니다.”
대화를 마칠 즈음 전무실 문이 열렸다. 도헌이 의준에게 손짓했다.
“의준 씨, 잠깐 봅시다.”
“네, 전무님.”
의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일 결혼식과 장례식이 겹쳤습니다. 둘 다 참석은 못 하지만 마음을 전해야 하니 준비 좀 해 줘요.”
“화환하고… 축의금과 부의금을 따로 보내십니까?”
“축의금은 신랑에게 내가 직접 보냈고, 부의금은 장성철 과장이 회사 대표로 참석하니까 그쪽에 봉투를 전달하도록 부탁하면 됩니다.”
“예.”
“그리고 ‘캐머론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에 대해 자료를 좀 찾아주겠습니까? 싱가폴 쪽 공연 기획사라는데 기초 정보부터 전부 부탁해요.”
“언제까지 준비할까요?”
“급한 건 아닙니다. 월요일 오전 내로 부탁하죠.”
“알겠습니다.”
캐머론 엔터테인먼트. 낯선 회사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려 외우던 의준의 귀에 도헌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김하나 과장하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했습니까?”
“예?”
놀라서 되묻는 의준에게 도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턱짓을 했다.
“아까, 밖에서. 환하게 웃더군요.”
“아…. 이사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디로 옮겼는지도 말했습니까?”
“…아니요.”
의준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도헌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수행 비서가 임원 집에 머무는 일은 흔하지 않지만 종종 있습니다. 대표 이사님도 한국에 자리 잡으실 무렵에는 당시 비서가 같이 숙소에 머물렀어요.”
“예… 하지만, 제 입으로 전무님 댁에 산다고 밝히기는 꺼려져서요.”
차라리 그들처럼 100% 공적인 관계였다면 의준도 거리낌 없이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의준과 도헌은 그들과는 입장이 다르지 않던가.
“어차피 인사부에 주소 변경 신고할 때 알려질 겁니다.”
“그렇기는 해도….”
의준의 뺨이 한층 붉어졌다.
“강요는 안 합니다. 마음 편한 대로 해요.”
두 사람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예전처럼 형으로 부르고 말을 놓기도 하지만 회사에서는 철저히 전무님이라는 호칭과 서로 존댓말을 쓰기로 했다. 공사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달리 시키실 일이 없으면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아, 그렇지.”
의준이 몸을 돌리려던 찰나 도헌이 말을 걸었다.
“저녁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 집에서 먹을까요? 내일은 저도 동생 만나서 먹을 예정이라….”
“그랬죠. 점심 약속이었습니까?”
“네, 동생하고 같이 사는 친구에게 식사 대접 좀 하려고요. 그 뒤에 병원에 좀 들렀다가….”
“오늘 저녁은 뭘 먹고 싶습니까?”
“저요? 음, 탕수유… 아니다. 전무님, 냉장고에 어제 먹다 남은 피자 있어요.”
황급히 대답을 바꾸는 의준을 보며 도헌은 피식 웃었다.
“퇴근 시간 맞춰서 중국집에 주문해요. 전에 들렀던 집 근처 중국집, 면도 잘 하니까 면류하고 요리 해서.”
“그러면 피자는요?”
“내일 아침에 먹으면 됩니다.”
“아침부터 피자요?”
“해장에는 피자가 최고니까요.”
“하하하.”
의준은 웃음을 터뜨린 직후 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알겠습니다.”
의준은 근엄하게 대답한 후에 전무실을 뒤로했다. 도헌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애써 웃음을 삼켰다.
동거를 시작하고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의준은 잠귀가 어둡고 깬 후에도 몇 분 동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식욕은 왕성해서 아무리 이른 시간에라도 남은 피자건 갓 구운 토스트건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몸을 씻는 시간은 놀랄 정도로 짧았다. 처음 이틀간은 대충 씻나 의심도 했지만 그에게서는 늘 깔끔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술은 센 편이고 양주보다는 맥주나 소주파. 하지만 어제 몇 달째 방치해 두었던, 선물 받은 와인을 개봉했더니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정리는 잘하는 편이었다. 설거지도 능숙했다. 하지만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우는 것 이상의 요리는 못 했다.
‘아마 같이 살지 않았다면 몰랐겠지.’
잘 웃고 잘 떠드는 남자였다. 별것 아닌 화제에도 의견과 감정을 섞어 재미있게 말하는 재주를 지녔다. 새로 산 소파 세트에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며 그가 하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가곤 했다.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면 불편한 일이 많으리라 생각했는데 일단 지금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다.
‘주변을 자기 분위기로 물들이는 능력은 여전했지.’
시선이 유리벽 너머로 향했다. 의준은 프린터 앞에 서서 김하나와 대화 중이었다. 밝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김하나와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보던 의준이었다. 수면 부족 상태에서 쓰러진 적이 있을 정도로 건강도 나빴고 눈 밑은 늘 검고 안색은 창백했었다. 재정적 여유와 생활 안정은 몇 개월 만에 사람을 바꾸어 놓았다. 요즘 의준은 마치 몇 년 전, 처음 보았던 대학생 시절의 그와 같았다.
빛나는 미소를 지닌 그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이의준은 그런 남자였다. 그때도, 그리고.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려 했는가. 그리고 뭐?
5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의준은 변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도헌은 변했다.
‘당연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두 번 다시 사람에게 마음을 전부 주지 않기로 맹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렇게 결심하게 만든 당사자가 상대라면 더욱 그랬다.
추억으로 현실이 흐려지게 두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주지 마.’
지나치게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
그 결과 손해를 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 될 테니까.
도헌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의준은 중국 음식 2인분의 기준이 늘 궁금했다. 짜장면과 짬뽕 혹은 볶음밥 같은 속칭 ‘식사’를 각각 주문하고 탕수육이나 양장피, 라조기나 고추 잡채 같은 속칭 ‘요리’를 하나 주문하면 2인분일까. 예전 회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 식사 하나에 요리 하나로도 충분히 많다는 사람도 있었고 요리는 반찬이니까 식사 둘에 요리 둘을 주문해야 2인분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기준이란 각양각색일 테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역시 두 사람이 먹기에 식사 세 개에 요리 다섯 개는 너무 많았어요.”
의준은 몇 인분이 들어갔는지 모를 배를 문지르며 푸념했다. 도헌은 잔에 남은 술을 들이켠 후에 입을 열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처음부터 다 먹어 치우려고 사지는 않았잖아.”
나란히 앉은 그들 앞에는 유명 음식점의 테이크아웃 용기 여덟 개와 개인 접시 두 장이 놓여 있었다. 도헌의 접시는 깨끗하게 비워져 있고 의준의 접시에는 칠리새우 한 마리와 계란볶음밥 한 숟가락 분량이 남아 있었다.
“다 맛있어 보여서 고르기 어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형이 전부 주문했을 때 말려야 했는데….”
“기대와 다른 음식이 있었나?”
“아뇨, 전부 맛있었어요.”
“그럼 됐잖아.”
도헌이 말했다.
“다 먹은 음식이 반이 넘고 남은 것도 깔끔하게 두었으니 두었다 다시 먹으면 돼.”
깔끔하게 비어 있던 냉장고에 먹다 남은 음식이 가득 찰 날이 가까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의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외근 없는 날에 도시락이라도 싸야겠네요.”
“부담스러워하지 마.”
도헌은 의준 쪽에 놓인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때마침 고개를 돌리던 의준의 눈앞에 도헌의 얼굴이 다가왔다.
“앗….”
“…….”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의준은 슬쩍 눈을 감았다. 도헌의 숨결이 코를 스쳤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입술 위에 온기가 닿지 않았다.
‘……?’
의준은 슬쩍 한쪽 눈을 떴다. 도헌은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마실 건가?”
시선이 마주치자 도헌이 물었다. 의준은 얼떨결에 잔을 내밀었다. 빈 잔에 채워지는 투명한 알코올의 향이 콧속에 머금었던 도헌의 체취를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키스할 줄 알았는데.’
약한 실망감이 솟아올랐다. 그런 기분이 든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설마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았겠지?’
의준은 슬쩍 고개를 들어 도헌의 표정을 살폈다. 도헌은 야경을 바라보며 잔을 비우는 중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의 표정을 보자 안심이 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형은… 아무 생각이 없는 걸까?’
동거를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회사에서는 수행 비서로 그리고 집에서는 동거인으로. 의준은 24시간 도헌과 함께 보냈다. ‘도헌이 형도 같은 시간 동안 나를 마주하고 있었지.’
도헌이 남은 음식을 정리하는 사이에 의준은 함께 볼 영화를 골랐다. 거실에는 얇은 벽걸이형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었다. 도헌이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켜 본 적 없다던 물건이었지만 의준이 온 뒤로는 저녁마다 역할을 다하는 중이었다.
“골랐어?”
“네.”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연애 사실을 비밀로 하는, 공통된 취미가 없는 남자 두 명이 보기에 무난한 액션 영화였다. 사실 의준은 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이 영화보다 순위가 높은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로맨스 장면이 나오면 형을 의식하게 되니까….’
어제 보았던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키스 장면이 나왔을 때 얼마나 긴장했던가. 나란히 앉아 있던 도헌을 의식하느라 영화 후반부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
의준은 흘깃 옆을 바라보았다. 도헌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앉아 있음에도 손을 잡거나 몸을 기대지 않고 그저, 혼자, 똑바로.
‘형은 내가 옆에 있어도 아무렇지 않나?’
박진감 넘치는 액션 영상보다 소파 위에 놓인 도헌의 손이 신경 쓰였다. 길고 가지런한 손가락을 보며 그 손이 자신의 몸에 닿았던 때를 떠올렸다.
달아오른 피부를 스치던 손길과 그 위에 스며들던 뜨거운 숨결. 몸을 밀착하고 서로에게 집중했던 시간을.
‘윽.’
허리 안쪽으로 약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은 의준은 황급히 생각을 멈췄다. 청바지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
‘미쳤어.’
의준은 슬쩍 다리를 오므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혹시라도 도헌이 눈치챘을까 싶어 옆을 바라보았지만 다행히도 도헌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내 쪽은 아예 안 쳐다보는구나.’
안도감만큼이나 실망감이 강하게 솟아올랐다. 의준은 시무룩해졌다.
영화를 보고 잘 준비를 했다. 그러고 보니 같이 살게 된 뒤로 자연스럽게 욕실을 따로 썼다. 처음에는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나하고… 접촉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면 왜 잠은 한 침대에서 잘까.
의준이 잘 준비를 마치고 도헌의 침실에 들어왔을 때 도헌은 태블릿을 들고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의준을 위해 비워 둔 그의 옆자리에 슬쩍 앉으며 의준은 입을 열었다.
“일하세요?”
“아니. 아까 영화 끝에 본 다른 영화의 예고편에 원작이 있어서 읽어 보려고.”
“한국어예요?”
슬쩍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알파벳과 비슷한 문자였지만 영어가 아니었다.
“…영어도 아니네요?”
“러시아어야.”
“러시아어도 하세요?”
“어머니 고향의 언어니까.”
도헌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버지와 생활할 때 제일 힘든 점이 말이 통하지 않는 점이셨다더군. 아버지는 결혼 생활 내내 러시아어를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거든.”
“형은 어머님께 배우셨어요?”
“기초는 작은할머니, 아니, 영제의 어머니, 이후에는 외갓집 친척들에게. 어머니는 한국어가 유창해서 나와는 한국어로 대화했어.”
“그러셨구나.”
의준은 태블릿에 슬쩍 손가락을 걸치며 중얼거렸다.
“저도 러시아어를 알면 좋겠네요. 형하고 같은 책 읽게.”
“영어로 된 책도 있을 거야.”
“제 영어 실력이 거기까지는 안 되는데, 한국어 번역본은 없어요?”
“아직 안 나온 것 같아.”
“아쉽네요.”
의준은 작게 중얼거렸다.
“형이 읽는 책 같이 읽어 보고 싶었는데.”
“…….”
도헌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의준은 웃었다.
“나중에 한국어판 나오면 읽죠 뭐, 그 전까지는 내용 스포일러 금지예요.”
“그래.”
의준이 태블릿에서 손을 떼고 바로 누웠다.
“자게?”
“네. 형은 책 읽다 주무실 거죠?”
“불 꺼도 돼.”
“아니에요. 전 불 켜고도 잘 자요.”
병원 다인실의 간병인용 의자 겸 침대와 반지하 맨션의 부엌 겸 거실 바닥은 어둡고 조용한 수면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르바이트와 회사 근무를 병행하던 시절에는 장소와 상관없이 잘 시간 자체가 부족했었다.
“저 신경 쓰지 말고 책 보세요.”
의준은 웃으며 말한 후에 눈을 감았다.
평소라면 눈을 감자마자 잠들었을 텐데 도헌이 옆에 있어서일까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도헌 쪽에 반듯하게 뻗은 자기 팔이 신경 쓰였다. 손을 잡아 줄 만도 한데 미동도 않는 도헌이 약간 원망스럽기도 했다.
잠시 후 의준은 돌아누웠다.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자신을 야단쳤다.
‘정신 차려, 이의준.’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되살아난 감정을 깨달았던 때는 그저 같은 마음이기만을 바랐었는데, 마음을 확인한 지금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서두르지 마. …함께 있잖아. 곧 나아질 거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어서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졸음이 밀려들었다.
“으응….”
책을 읽던 도헌의 귀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잠들었던 의준이 그쪽으로 돌아눕는 소리였다.
의준의 손끝이 도헌의 팔에 닿았다. 의준이 불편하지 않도록 팔을 빼려던 찰나, 그가 도헌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팔에 얼굴을 대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도헌이 형….”
“…….”
도헌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의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팔에 기대듯이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의준을 내려다보던 도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의준을 향해 몸을 굽혔다.
입술이 머리카락에 닿기 직전에 도헌은 동작을 멈췄다. 다시 고개를 든 도헌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천천히 고개를 저은 후에 의준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눕혔다. 바로 누운 채 천천히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의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고이 잠든 의준의 옷깃 사이로 맨살이 보였다. 부드럽고 매끈한 가슴의 감촉이 떠오르면서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 차려.’
기억이 욕망을 자극했다. 부드럽고 따스한 피부와 힘차게 두근거리던 심장 그리고 거친 숨결과 열띤 목소리.
의준과의 밤은 그가 기억하던 과거의 어떤 밤보다 좋았다.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그저 몸을 맞대고 열기를 공유했던 밤이 그토록 만족스럽고 짜릿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목적에 필요 없는 행위는 자제해야 해.’
슬그머니 고개를 들던 욕망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정말로 바라는 결과를 위해 참아.’
도헌은 천천히 주먹을 쥐며 눈을 감았다.
***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토요일 아침, 의준은 여동생인 소영과 그녀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일주일 전부터 여동생과 룸메이트가 된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할 예정이었다.
“오빠, 잘 먹었습니다.”
“뭘, 많이 먹었어? 더 먹어도 되는데.”
“아니에요. 많이 먹었어요. 진짜 맛있었어요.”
여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간 식당은 입사 후에 ‘경험 삼아’라는 이유로 도헌과 함께 방문했던 무수한 식당 중의 한 곳이었다. 얼마 전에 방송에 맛집으로 소개된 적도 있는 브런치 레스토랑으로, 사전 예약이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밥 사 주겠다기에 어딜 데려갈지 걱정했는데, 웬일이야.”
친구를 먼저 보내고 함께 어머니 면회를 위해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소영이 입을 열었다. 의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몇 번 갔던 데야. 손님들 중에 여자들이 많기에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예약했지.”
“미식가처럼 말하기는. 회사에서 일로 갔던 데지?”
“일로 갔어도 같은 메뉴 먹었거든. 잘 먹어 놓고 트집 잡냐?”
“트집 잡는 게 아니라 칭찬하는 거야.”
소영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오빠가 너무 친구한테 밥 사 주겠다고 고집부려서 불편했거든.”
“뭐? 그게 왜 불편해. 아무리 친구라도 갑자기 동생을 룸메이트로 받아 준 남에게 인사 겸 감사 표시 하려는 건데.”
“부모님도 아니고 오빠가 그러면 이상하지. 나이 차이 얼마 안 나는 여대생하고 밥을 먹어야겠다고 고집부리는 남자 회사원, 이상하지 않아?”
요약해서 들으니 정말 이상했다. 의준은 황급히 부정했다.
“동생 친구면 동생이나 마찬가지야.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 오해하지 않게 잘 말해 둬.”
“알았어. 정 뭣하면 오빠한테 애인이 있다고 할게.”
“그래, 그거 좋네. 아, 잠깐.”
의준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영은 의준의 걱정을 눈치챘다.
“걱정 마. 아무리 친구라도 남한테 오빠 애인 이야기를 시시콜콜 하지는 않아. 그냥 애인이 있다고만 할 거야.”
“…어, 그래.”
의준은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소영은 의준의 애인이 서도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대가 직장 상사에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반대하지 않느냐는 의준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연애는 오빠가 하는데 내가 왜 반대를 해. 잘 사귀세요.’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툭 내뱉은 말이 얼마나 마음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의준은 슬쩍 웃었다.
“웃는 거 봐. …애인하고 동거하니 그렇게 좋아?”
“그래서 웃은 거 아니거든. 뭐, 나쁘지는 않지만.”
“좋으면 좋은 거고, 나쁘면 나쁜 거지. 나쁘지 않다는 뭐야.”
소영이 핀잔을 날렸다.
“아, 하긴,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한창 깨가 쏟아질 때지.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완전히 허니문일 텐데.”
“야, 사람 민망하게 자꾸 그럴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민망해? 윽, 설마 허니문이라고 했다고 이상한 생각 한 거야? 변태.”
소영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
“그냥 잘 지내는지 물었을 뿐이니까 이상한 상상 하지 마.”
“아무 상상도 안 했거든.”
의준은 이렇게 대꾸한 후에 어깨를 으쓱했다.
“잘 지내고 있어.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넓고 편안한 집에서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식비도 주거비도 거의 들지 않고, 원하는 대로 언제까지나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오빠 걱정은 안 해도 돼.”
이보다 더 완벽한 생활은 없을 것이다.
‘그래,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는 생활이야.’
같이 산다고 해서 매일 끌어안고 잘 필요는 없었다. 반드시 매번 대화하고 함께 무엇인가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들은 함께였다. 밤낮으로, 언제나.
‘어쩌면 그래서 문제인 걸까?’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판단을 내리기에는 일렀다. 아직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하고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의준이 오기 전에 도헌은 혼자 살고 있었다. 갑자기 타인과 함께 살면 당연히 어색할 수 있고 적응 시간도 필요하리라.
‘천천히… 천천히.’
기적처럼 다시 이어진 인연이었다. 서둘러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시간에 맡기자.’
의준은 이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