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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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맑은 휴대 전화 벨 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차가 정지 신호를 받고 대기하는 사이에 품 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낸 영제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통화 거부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소리가 뚝 끊긴 휴대 전화를 다시 품에 넣는 영제에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의준이 말을 걸었다.

“받으셔도 되는데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쓸데없는 전화라서 괜찮습니다.”

영제가 이렇게 대답하자 의준은 멋쩍게 웃었다.

“말씀 놓으세요.”

“으음… 그래도 됩니까?”

“그럼요. 도헌… 아니, 전무님 친척이신데요.”

“하긴 나이도 같잖아요.”

영제는 이렇게 대꾸한 후에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 말을 놓을까. 의준이라고 불러도 되나?”

“그럼요.”

의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제는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의준이는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네.”

“네?”

“말로 듣던 것보다 똑 부러진다고 할까…. 아이지, 이래 말하니까 그전 이미지가 영 아니었던 것 같네. 그런 의미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아니에요.”

의준은 웃었다.

“그런 말 종종 들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의 가장이 되기 전까지는 사실 혼자 어떤 큰 결정을 내리거나 인생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의준 자신도 20대 초반까지의 자신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바뀐 쪽이 좋아 보인다고 믿고 있습니다.”

“똑 부러지는 성격이 나쁠 일은 없지.”

영제는 말을 이었다.

“오늘 많이 놀랐지?”

“네? 네… 뭐.”

“도헌이 그 무뚝뚝한 놈이 놀라서 달려와 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 한 마디도 제대로 안 하더만, 그래도 내심 와 줘서 기뻤을 기다. 서운해 마라.”

“서운할 게 뭐 있나요. 사고로 제일 정신없을 사람은 전… 도헌이 형인걸요.”

속으로 잠시 ‘전무님’과 ‘형’ 사이에서 어느 호칭을 쓸까 갈등했지만 조심스럽게 형이라고 불렀다. 영제는 호칭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도헌이 성격이야 의준이도 잘 알잖아. 예전부터 지금까지 별로 달라진 게 없으니까. 저런 놈하고 두 번씩이나 사귀다니, 의준이도 대단하네. 저놈, 어디가 그래 좋더노?”

의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와 도헌이 형 사이를 아시네요.”

“……? 알지? 아까 병실에서 끌어안는 것도 봤는데?”

“네? 억… 보셨어요?”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곧 그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 지금 사귀는… 그거 말고…. 예전에….”

두 번씩이나 사귀다니, 라는 표현은 짐작해서 쓸 수 없었다. 서영제는 도헌과 의준의 과거도 알고 있는 것일까.

“알지.”

당황한 의준과 달리 영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쪽이 남자라는 사실은 둘째치고 이름이나 얼굴도 몰랐다. 그래도 도헌이가 학교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

“어떻게….”

“도헌이가 말했거든.”

“……?!”

“추석인가, 하여간 명절 때였을걸. 식사하러 내려와 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화제가 결혼 쪽으로 흘렀는데 행님, 그러니까 도헌이네 아버지가 빨리 결혼을 하라고 강요했거든. 그래서 크게 싸웠는데, 홧김에 가족 앞에서 이카드라.”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하고 함께 있고 싶으니까 결혼 따위는 안 합니다.’

영제는 추억을 떠올리듯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어른들이 그러면 그 사람하고 결혼하라고 설득했는데 고집은. 결혼은 안 한다고 거부했지.”

조부와 부친도 상대가 유부녀가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남자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영제도 마찬가지였다.

“그 일 이후로 도헌이는 부산에 발길을 끊었다.”

집안 어른들을 대신해서 서울까지 도헌을 만나러 왔던 영제에게 도헌은 사귀었던 사람이 남자임을 밝혔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그는 해외로 떠났다.

도헌은 입막음을 하지 않았지만 영제는 굳이 집안 사람들에게 도헌의 애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정신적 충격도 그렇지만 도헌에게 밀어닥칠 후폭풍이 걱정돼서였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그때 터뜨렸으면 이제 와서 행님이 도헌이 결혼을 빌미로 일을 벌이지 못했을지도… 아이지. 행님이라면 도헌이가 남자와 사귀어도 결혼을 시킬라캤겠지. 그런 양반이니까.’

찰나의 후회를 빠르게 이성적으로 무마한 직후 영제는 의준의 표정을 살폈다. 의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무릎 위에 놓인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몰랐어요.”

의준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도헌이 형이 친가와 사이가 틀어졌던 이유가… 저 때문이라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원래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안카나.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행님하고 행수님이 이혼할 때 이미 도헌이와 집안 사이에도 금이 갔었어. 그러니 의준이 탓은 못 해.”

영제는 이렇게 대꾸한 후에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가족과 연을 끊고 선택할 만큼 세기의 연애구나 싶었는데 몇 달 뒤에 갑자기 헤어졌다 캐서 충격을 받기는 했다.”

의준이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또다시 신호가 바뀌어 차가 멈추자 영제는 핸들에 두 손을 얹은 채 의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헌이하고 왜 헤어졌나?”

의준은 그를 바라보았다. 영제의 가늘고 예리한 눈동자가 탐색하듯 반짝였다. 의준은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다른 이야기는 다 했으면서 도헌이 형이 그 이야기만 안 했나 봐요?”

온화한 어조에 실린 가시 돋친 질문에 영제는 눈썹을 위로 올렸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굳어진 의준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영제가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다….”

그때 의준이 쥐고 있던 휴대 전화가 진동음을 냈다. 화면을 확인한 의준은 짧게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한 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주머니. 웬일이세요?”

상대의 말을 듣던 의준의 안색이 변했다.

“네? 도둑이요?”

다급한 시선이 영제에게로 향했다. 의준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영제는 액셀을 밟았다.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차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

의준에게 전화한 사람은 빌라 건물의 주인 대신 관리를 맡은 꼭대기 층 세입자였다.

“애가 벨도 안 누르고 집까지 올라왔더라고. 어떻게 공용 현관을 지났냐고 했더니 열려 있었다는 거야. 그러더니 아래층 형네도 문이 열려 있다고… 그래서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내려와 봤는데 현관이 활짝 열려 있고 안쪽에 발자국이 찍혀 있어서.”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도둑 같은데 혹시 몰라서 안은 확인 안 하고… 일단 총각한테 전화했어.”

“잘하셨어요.”

전화를 받고 20분 만에 집에 도착한 의준은 우선 감사 인사를 한 후에 활짝 열린 집 현관을 바라보았다. 의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집 안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집주인 분, 아무도 없으니 오십시오.”

경찰 한 명이 지상을 향해 외쳤다. 의준은 황급히 아래로 향했다.

“일단 안에는 아무도 없고요. 거기, 얼룩진 데는 밟지 마십시오. 범인 흔적 같으니까요.”

“아, 네.”

낡은 장판 위에 흐릿하게 찍힌 얼룩을 피해 의준은 집에 들어섰다.

“나가실 때 문단속은 하고 나가셨지요?”

“네, 제가 마지막에 나갔고… 문을 잠그고 확인도 했습니다.”

“창 같은데 열어 두신 건 없고?”

“화장실 창문은 환기 때문에 열어 두는데… 거기는 사람이 오갈 수 없는 크기라….”

“아, 그러네요. 보안 창도 있고.”

경찰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집 털이일 가능성이 높은데요, 요즘 휴가철이라 종종 사건이 있었고…. 우선 분실물이 있나 확인 좀 해 보시겠습니까? 귀중품이라거나, 현금 같은 거.”

“…저희 집에 그런 건 없는데…. 아, 엄마 패물.”

의준은 급히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밑의 겨울옷 박스를 끌어낸 후에 그 안에 넣어 둔 작은 보석함을 꺼냈다.

“…다 있습니까?”

“네….”

패물이래 봤자 부모님의 결혼반지와 진주 목걸이 한 줄이 전부. 그러나 보석함은 물론 겨울옷 박스도 남이 뒤진 흔적이 없었다.

“털러 들어왔다가 가져갈 게 없어서 그냥 나갔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게요.”

민망해진 의준이 말을 흐리자 경찰이 당황해서 덧붙였다.

“아니요, 피해가 없으니 다행이라는 의미입니다.”

“네, 그렇죠.”

“의준아~.”

현관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영제가 서 있었다.

“가신 줄 알았는데….”

“주차하고 왔어.”

신발을 벗고 들어서던 영제는 경찰의 수상한 눈초리를 눈치채고 웃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쟤랑 아는 사입니다.”

“아, 예.”

영제는 의준이 있던 침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방을 휙 둘러보더니 소영의 화장대에 시선을 멈췄다.

“어, 동생 있나?”

“네. 아, 소영이한테도 연락해야지.”

의준이 소영에게 전화를 거는 사이 영제는 거울을 빤히 응시했다.

“의준아.”

의준이 통화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영제가 입을 열었다.

“여기 거울에 이거, 원래 있었나?”

“뭔데요? …어.”

거울의 오른쪽 윗부분에 흐릿하게 숫자와 낯선 기호가 적혀 있었다.

“아니요… 모르겠네. 소영이가 적었나?”

“아가씨가 자기 화장품으로 거울에 이런 걸 적지는 않을 건데.”

영제는 화장대에 놓인 립라이너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의준은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뭔가, 문제가 되나요?”

“아니, 그냥 이상해 보여서.”

영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의준이는 신경 쓸 필요 없고, 짐이나 싸라.”

“예? 짐이요?”

영제는 당황한 의준에게 말했다.

“도둑 들었는데 여기서 자게? 그건 안 되지. 여동생도 그렇고 하룻밤만이라도 다른 데 머무는 게 나아.”

“아니, 그렇게까지는….”

경찰들은 이미 현관 밖에 나가서 멀뚱멀뚱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체적인 피해 사실이 없는 빈집 털이 미수 사건을 적극적으로 조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집 정리도 해야 하니까 그냥 있을게요. 여동생은 친구 집에서 자라고 하고요. 전 남자니까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테고….”

“흉악한 놈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남자고 여자고 없다.”

영제는 이렇게 말한 후에 휴대 전화를 꺼냈다.

“빨리 짐 싸라.”

“어, 영… 영제 형. 잠깐만요….”

의준이 나가려던 그를 불러 세웠다.

“나가는 건 좋은데, 갈 데가 없어요. 재워 줄 친구도… 지금은 없고요.”

“도헌이 집 가면 되제?”

영제는 황당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의준은 말문이 막혔다. 영제는 휴대 전화를 귀에 대며 덧붙였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잘 챙겨서 나와.”

“…….”

영제는 의준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길게 이어지던 신호가 끊기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도헌아.”

---왜.

“의준이 데려다주러 왔는데 다시 가야겠다. 너희 집 비었제?”

---무슨 일이야?

도헌의 어조에서 긴장감이 전해졌다. 영제는 말을 이었다.

“집에 도둑이 들었어. 피해는 없는데… 마음에 걸리네.”

---뭔데.

“거울에 내가 유일하게 아는 외국어가 적혀 있더라고.”

영제는 흘깃 뒤를 확인했다. 경찰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그는 낮고 짧게 거울에 적혀 있던 글자를 읊었다.

---의준이 지금 어디 있어?

영제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도헌이 물었다.

“짐 싸는 중.”

이어서 영제는 슬쩍 덧붙였다.

“갈 데가 따로 없다캐서 우선 내가 묵는 호텔로 데려갈 생각인데….”

---우리 집에 데려와.

영제가 말을 맺기도 전에 도헌이 말했다.

---퇴원하자마자 갈 테니까, 우선 집에 데려와. 출입 비밀번호는 알지?

“알지.”

영제는 씩 웃었다.

‘병실에서는 선을 딱 긋더니만, 막상 닥치고 나니 목소리부터 달라지는 거 봐라.’

아마 입원 상태가 아니었다면 본인이 달려왔을지도 모르겠다.

“알았어. 너희 집에 데려다주고 갈게.”

---같이 있어. 의준이가 위험해지면….

“그쪽에는 경호 회사 놈들 깔아 뒀으니까 괜찮다. ---그래. 현관문 열고 안에 들라 놓고 갈 테니까 안심해라.”

통화를 마친 영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느긋하게 앉아서 보고나 기다릴 때는 지난 모양이었다.

‘부지런히 다녀야겠네.’

영제는 길고 긴 연락처를 빠르게 스크롤하기 시작했다.

***

쿵, 삐리릭. 현관문이 닫히고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제야 의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의준이 서 있는 곳은 도헌의 집 현관이었다.

움직임을 감지하고 밝아진 현관 조명 아래, 큰 여행용 캐리어에 전역 때 메고 나왔던 가방을 싣고 등에는 배낭을 멘 채 다른 한 손에는 마트의 부직포 가방까지 들고서, 집주인이 없는 집에 들어왔다. 물론 불법 침입은 아니었다. 집주인인 도헌이 초대했고 그의 친척인 영제가 현관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현관 전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한강 야경이 멋들어진 고급 맨션에 초대받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급히 어딘가로 피난을 떠나는 도망자 같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지 말걸….”

집에 빈집 털이가 들었다는 연락을 받은 때는 오후 네 시 경이었다.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함께 갔던 영제는 오늘은 다른 곳에 머무는 편이 낫겠다고 강하게 권했다. 여동생 문제도 있었기에 순순히 따를 수 없어서 망설였더니 영제와 통화를 마친 도헌이 의준에게 즉시 연락을 했다.

‘당장 우리 집으로 가. 여동생이 걱정되면 같이 데려오고.’

안 오겠다고 고집을 부릴 거면 내가 데리러 가겠어. 거의 엄포 수준의 마지막 말을 들은 후 의준은 어쩔 수 없이 짐을 챙겼다. 자신의 옷가지와 며칠 쓸 이런저런 물건들에 소영에게 부탁받은 짐을 더한 결과가 지금 상황이었다.

‘일단 짐부터 내려놓고 생각하자.’

의준은 캐리어 가방을 현관에 둔 채 우선 거실로 향했다. 가구 하나 없는 거실 구석에 배낭과 부직포 가방을 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조리대 옆에서 키친타월을 찾아서 물을 적신 후에 현관으로 돌아와 캐리어 가방의 바퀴를 닦은 후에 복도로 끌어들였다.

“어휴….”

의준은 바닥에 주저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이 거실 창으로 향했다. 노을이 흩어지며 남색이 밀려드는 하늘 아래 하나둘 반짝이기 시작하는 인공적인 불빛들이 보였다. 강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천천히 이어지는 차량 행렬.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빛이 물결 위로 길게 흔들렸다.

‘역시 풍경은 최고라니까….’

도망자 행색으로 찾아오기에는 민망할 정도였다.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복잡한 머릿속이 텅 비었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뒤에서 삑, 하고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의준은 몸을 돌렸다. 그가 일어나기보다 먼저 도헌이 거실에 들어섰다.

“아, 형… 오셨어요.”

“그래.”

“몸은 괜찮으세요?”

도헌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의준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도헌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아무렇지 않아. 말했잖아, 절차상 검사를 받았을 뿐이라고. 그보다….”

도헌은 의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네? 네….”

의준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그때 집에 없어서. …여동생은?”

“아… 소영이는 친구 집에 갔어요.”

의준이 연락했을 때 소영은 학교 도서관에서 친구와 공부 중이었다.

“소영이는 여자애고, 저보다 일찍 집에 들어오니까, 며칠 정도 집에 오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친구 자취방에 묵겠다더군요.”

의준은 소영의 짐을 대신 챙겨 주기로 했다. 제일 큰 캐리어가 소영의 짐이었다.

“캐리어는 내일 퇴근하고 전해 주기로 했고요.”

“그랬군.”

말의 끝에 도헌은 의준을 덥석 끌어안았다.

“도… 도헌이 형?”

“큰일 아니어서 다행이야. 놀랐지?”

“…아뇨,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다정한 품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 의준은 슬그머니 도헌의 등에 팔을 감았다.

“오늘은 우리 둘 다 본의 아니게 고생했네요.”

“…그러게.”

도헌은 의준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거실 구석에 놓인 배낭과 부직포 가방을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저게 네 짐이야?”

“아, 네.”

대답과 함께 의준은 도헌의 품에서 벗어났다. 도헌은 한 팔을 의준의 허리에 댄 채 말했다.

“구겨질 옷이 있으면 우선 풀어 둬. 다른 짐은 천천히 풀고.”

“음, 하루 이틀 머물 건데 굳이 짐을 풀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냥 두면 불편하잖나.”

“그렇기는 한데….”

의준의 시선이 침실로 이어지는 복도로 향했다. 도헌의 침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너무 깔끔해서 다른 짐을 더할 공간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제 짐을 두면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겠지만, 네가 불편하다면 다른 방에 풀어 둬.”

“다른… 방이요?”

“이쪽.”

도헌은 의준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부엌을 기준으로 왼쪽에 자리 잡은 도헌의 침실과 정확히 대칭되는 오른쪽에는 방이 두 개 더 있었다. 한 방은 텅 비어 있었고 다른 한 방은….

“…침대가 있네요?”

베드 헤드가 없는 싱글침대. 매트리스 커버는 씌워져 있었지만 베개나 이불은 없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침대 같았다.

“침실이니까. …침실에 침대가 있는 게 이상한가?”

“이 집에는 형 침실에만 가구가 놓여 있는 줄 알았거든요.”

거실에는 흔한 러그 한 장, 소파 한 세트 없고 부엌에도 의자가 없었다. 도헌의 침실에도 옷장과 침대만이 있을 뿐이었다.

‘드레스 룸을 옷장으로 친다면 말이지.’

의준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형이 살기 전에는 아무도 안 살았던 빈집인가 했는데요.”

“비어 있었지. 거주용이 아니라 숙박용 집이었으니까.”

도헌이 말했다.

“이 집은 어머니가 한국에 방문할 때 머물 용도로 구입한 곳이야. 내가 귀국하겠다니 여기 살라고 말씀하셨지.”

침실 옆에도 방이 있었다. 문이 달려 있지 않아서 방보다는 거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고 한쪽 벽에 붙박이 책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 이 집에는 가구가 있었어. 그런데 집주인이 잠깐씩만 머물고 가끔 사람 손을 빌려 관리를 하다 보니 낡고 불편해져서 내가 들어온 후에 전부 버렸지.”

“전부요?”

“작은 방의 침대하고 여기 책장과 내 침실 드레스 룸 설비 빼고. 내가 쓰는 침대는 새로 샀어.”

“침대 들이실 때 다른 가구도 좀 들이시지 그랬어요?”

“쓰지도 않을 텐데 왜.”

도헌은 텅 빈 책장을 한 손으로 슥 어루만졌다.

“이쪽 방에도 오랜만에 왔어. 평소에는 현관에서 곧장 내 침실로 향하니까.”

“…….”

이렇게 널찍한 집의 반을 사용하지 않고 버려두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야 도헌 혼자 거주하고 잠자는 것 외에 집에 머무는 일이 없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텅 빈 이 공간이 의준이 살던 반지하 맨션에 버금가는 크기여서일지도 모르겠다.

“가구를 들이긴 해야겠군. 이제 네가 머물 테니까.”

도헌이 말했다.

“필요한 가구를 생각해 봐. 책상이나 옷장… 침대도 바꾸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잠깐 있다 갈 건데 저 때문에 가구를 들일 필요는 없어요.”

“일이 해결될 때까지 머물도록 해.”

“네?”

의준은 놀랐다.

“경찰 조사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돌아가지 마. 주변에 빈집 털이범이 기승을 부렸다면 또 닥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고.”

“…그래도, 형. 제가 너무 오래 머물면 형이 불편하실 텐데.”

“안 불편해.”

도헌이 대답했다.

“최소한 경찰이 사건 수사를 마칠 때까지라도 여기 있어. 그편이 너도 안전하고 나도 마음이 편하니까.”

“…….”

도현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사실이 역력히 전해졌다. 의준은 가슴이 찡하는 기분을 느끼며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진짜로 믿고 눌러앉아요.”

말을 내뱉은 직후에 의준은 아차하고 입을 다물었다. 혹시라도 계속 여기 살고 싶다는 욕심으로 느껴졌을까. 변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의준의 머리에 도헌의 손이 닿았다.

“필요한 물건은 주말에 사러 가지. 짐은 이 방에 풀고 잠은 저쪽 침실에서 자면 돼.”

“네.”

의준은 안도했다.

짐을 옮기려고 다시 거실로 나갔을 때 도헌은 휑한 거실을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소파도 사야겠군. 매일 바닥에 마주 보고 앉아서 술을 마시기도 그러니까.”

“매일 술 드시게요?”

의준은 웃었다.

“야경을 배경 삼으면 맨바닥에 앉아서 마셔도 운치 있던데.”

상우가 동거를 제안했던 일이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흐지부지되었지만 그 제안을 받았을 때는 당혹스러웠는데 오늘 도헌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기쁘기만 했다.

누가 제안했느냐에 따라 감정이 이렇게까지 달라지다니 이래서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고 하나 보다.

같이 살면 도헌과 함께 보낼 시간이 늘어난다. 그 사실이 순수하게 기뻤다.

‘내가 정말 도헌이 형을 좋아하는구나.’

새삼 자기 마음을 확인하며 의준은 캐리어 가방을 끌고 침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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