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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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토요일 아침, 늦잠을 포기하고 아침 일찍 씻고 욕실을 나온 의준은 그보다 먼저 외출 준비 중이던 소영을 목격했다.

“아침부터 뭐 해? 오늘 약속 있냐?”

“응, 오후에.”

“오후인데 벌써 준비해?”

“아르바이트 오전 타임으로 바꿨거든.”

앞머리에 큼지막한 롤을 만 채 화장 중이던 소영이 대답했다. 의준은 소영이 먼저 쓰고 바닥에 둔 드라이어를 집어 들며 물었다.

“무슨 약속이기에 아르바이트 시간까지 바꿔?”

“그냥.”

“누구 만나는데?”

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의준도 더 묻지 않고 무시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짓궂은 마음이 솟아올랐다.

“남자구나?”

“뭐?”

드라이어 소리와 겹쳐진 의준의 질문에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의준은 목소리를 높여서 물었다.

“남자 만나러 가는 거지?”

“뭐, 뭐래, 상관 마.”

부루퉁하게 대꾸하는 소영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의준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잠깐만. …진짜 남자 만나? 누구? 남자 친구?”

소영은 드라이어를 끄고 추궁하듯 묻는 의준을 노려보았지만 달아오른 뺨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너 얼굴이….”

“아니라니깐!”

소영은 버럭 외쳤다. 잠시 후 그녀는 작게 덧붙였다.

“…아직 그런 사이 아니야.”

“…아직…?”

“남자 친구 되고 나면 말할 테니까 그전엔 관심 꺼 주라. 망치기 싫으니까.”

어조는 진지했지만 표정에는 민망함이 가득했다. 그만큼 진심이라는 의미이리라.

“알았어. 미안.”

“사과할 것까지는 없고.”

“응, 미안.”

재차 사과하는 의준을 슬쩍 흘겨본 후에 소영은 화제를 바꾸었다.

“오빠도 오늘 나간다면서.”

“어? 응.”

“오빠는 어디 가는데?”

“어, 음… 아는 사람 만나러?”

애매한 의준의 대답에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나한테는 꼬치꼬치 물어 놓고 자기는… 잠깐, 오빠야말로 설마 데이트는 아니겠지?”

“어? 어… 아냐.”

대답은 했지만 표정까지는 미처 관리하지 못했다. 당연히 소영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데이트 맞지?”

“…그게.”

“누구야?”

“야, 오빠가 아니라고 했는데 왜 단정을 지어.”

“됐고, 누구야? 언제 생겼어? 아니지…. 오빠가 그럴 시간이 있기는 했어?”

의준은 체념하고 입을 열었다.

“회사 사람이야.”

“뭐? 사내 연애! 와, 미쳤네.”

소영이 황당한 투로 중얼거렸다.

“맨날 야근하고 병원 오가느라 고생하는구나 싶어서 불쌍했는데… 회사에서 연애를 했어? 그래서 바빴구나?”

“야근은 일이 많아서 했고.”

수행 비서 업무를 설명하고 싶었지만 연애 대상이 대상이라 차마 단호하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가끔 일찍 퇴근한 후에도 형하고 저녁 먹느라 늦은 건 사실이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의준의 귀에 소영의 질문이 들려왔다.

“전무님도 알아?”

“어?”

의준은 놀라서 소영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모시는 전무님 말이야. 그분도 오빠가 사내 연애 중인 거 알아?”

“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의준은 말문이 막혔다.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거짓말이 되지 않을까.

“아마도… 아실걸?”

애매하게 질문형으로 답을 흐리던 의준을 본 소영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

“왜 얼굴을 붉히고 난리야? 어우, 뭐야, 진짜.”

“야, 오빠한테 뭐야라니. 네가 물어서 대답한 건데.”

“몰라, 기분 나빠.”

소영은 화장을 마친 후에 화장품을 파우치에 챙겨 넣었다. 파우치를 침대 위에 둔 가방에 넣고 충전기에 꽂아 두었던 휴대 전화를 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준 옆을 지나가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잘 사귀어.”

“…….”

의준은 현관으로 향하는 소영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붉어진 귀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해서 다니고, 늦지 마.”

“아, 좀.”

“앞머리 그거, 버스 타기 전엔 빼고.”

“알거든.”

소영은 문을 닫기 전에 의준을 향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오빠야말로 늦지 마. 오늘부터는 외박 안 봐줄 거야.”

“……뭐?! 야, 잠깐, 그… 그래서 외박한 게 아니….”

소영은 힘차게 문을 닫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의준이 뭐라고 외쳤지만 무시하고 걷기 시작했다.

“저 바보가 그래도 ‘또’ 연애를 하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소영은 버스 안내판을 확인했다. 타야 하는 버스가 5분 후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그녀는 앞머리 롤을 풀어 가방에 넣고 휴대 전화를 꺼냈다.

‘이제 버스 타. 30분 정도 걸릴 듯.’

메시지를 보내고 1분 정도 지나자 읽은 표시가 뜨고 답장이 도달했다.

---카페에서 기다릴게. 조심해서 와.

조심하라는 소리를 반드시 덧붙이는 점은 친오빠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친오빠의 간섭이 성가신 데 비해 이 오빠의 말은 배려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알았어, 조금 있다 봐, 오빠.’

소영은 맨 위에 표시된 김상우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슬쩍 어루만진 후에 창을 닫았다.

***

주말 데이트 장소는 영화관이었다. 주중에 접대 회식 때문에 예매를 취소했던 영화를 함께 보고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다.

의준은 약속 시간보다 20분 일찍 영화관 앞에 도착했다. 도헌에게 도착을 알리고 언제쯤 오는지 확인하는 질문을 메시지로 보낸 후에 그는 자동 발권기 쪽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붐비는 영화관에서 발권기 앞에 줄을 서고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도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네, 형. …어. 네?”

의준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교통사고요?!”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의준은 황급히 줄을 빠져나왔다.

“무슨… 어디서, 아니, 괜찮으세요?”

---괜찮으니까 진정해.

도헌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집 주차장을 나오다가 못 보고 달려오던 차와 접촉 사고가 났어. 다치지는 않았는데, 사고 처리를 해야 해서.

“…아….”

의준은 화장실 옆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준아? 괜찮아?

“…사고 난 사람은 형인데 왜 저한테 괜찮냐고 물어요.”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잖아.

떨리기는 목소리보다 손이 더 심했다. 의준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대답했다.

“놀라서 그래요, 사고라니….”

---접촉 사고야. 크게 안 다쳤어. 보험사 쪽에서 혹시 모르니 검진을 받으라고 강요해서 병원에 오기는 했지만.

“지금 병원이세요? 어느 병원요?”

---집 근처 대학 병원. 대교 옆에.

“갈게요.”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도헌은 놀라는 기색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그런데 서둘러서 오지 말고 근처에 카페라도 들어가서 커피 한잔 마신 후에 출발해.

“그럴 틈이 어딨어요?”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라는 의미야.

기분 탓일까. 도헌의 어조는 평소보다 다정했다.

---다친 데 없고 차도 좀 찍힌 수준이야. 네가 한숨 돌리고 와도 아무 문제없어.

“네….”

---병원에 도착하면 연락해. 마중 내보낼 테니까.

통화를 마친 의준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빨리 만나서 직접 무사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의준은 버스를 타기로 했다. 차로 20분 정도 걸릴 거리지만 버스를 타면 중간에 멈췄다 가니까 시간이 조금 더 걸릴 테고 그사이에 마음을 가라앉히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주말의 교통 상황은 예상보다 더 좋지 않았고 의준은 거의 한 시간을 길 위에서 허비한 후에야 병원에 도착했다.

“거짓말쟁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의준이 이렇게 내뱉자 도헌은 눈썹을 위로 올렸다. 의준은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많이 안 다쳤다면서요.”

“안 다쳤어.”

“입원했잖아요?”

“검사 결과를 확인할 때까지 머무르라고 지시를 받아서 그래.”

주말에는 응급실보다 병원 특실이 한가하거든. 도헌은 이렇게 덧붙였지만 의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문가에 선 채 입술을 꾹 깨무는 의준을 바라보던 도헌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계속 거기 서 있을 건가?”

“…….”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도헌이 손짓했다. 내키지 않는 걸음걸이로 침상까지 다가가자 도헌은 그의 손을 잡았다.

“만져 봐.”

우선 의준의 손을 자신의 뺨에 댔다. 이어서 목덜미, 어깨, 그리고 다른 팔.

“얼굴에 긁힌 흔적도 없고. 손, 팔, 양쪽 다 잘 움직이고. 다리도… 봐, 멀쩡하지?”

무릎을 세웠다가 펴 보인 후에도 의준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도헌은 피식 웃었다.

“거기도 멀쩡해. …확인할래?”

말과 함께 잡고 있던 의준의 손을 배로 끌어당겼다. 의준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뺐다.

“뭐 하는 거예요?!”

도헌은 웃었다.

“이제야 표정이 풀리네.”

“…….”

도헌은 의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준이 뿌리쳤던 손을 다시 내주자 그는 손을 꼭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와서 멀쩡한 모습을 보면 안심할까 싶어서 불렀는데, 입원하는 바람에 더 놀라게 했구나.”

“…아버지도 차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의준은 작게 말했다.

“그때도, 큰 사고가 아니라고 했는데….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몸이 떨렸다. 의준은 겨우 말을 이었다.

“형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르니까.”

도헌은 입술을 깨문 의준을 바라보다가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미안하다. 힘든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아니요….”

도헌의 힘찬 심장 박동을 들으며 의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러게.”

문가에서 누군가가 맞장구를 쳤다. 의준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교통사고 나서 입원했다 카길래 만사 제치고 달려왔더니만. 이게 뭐고. 사지 멀쩡하네?”

서영제였다. 의준은 황급히 도헌의 품에서 벗어났다. 도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멀쩡하다고 말했잖아. 굳이 올 필요 없었어.”

“어머니랑 통화하다가 사고 났다매. 어머니가 니 갑자기 통화 끊기는 바람에 놀라서 주저앉으셨더라. 내한테 전화할 땐 거의 우셨다고.”

“…괜찮다고 제일 먼저 연락 드렸는데.”

“진짠지 확인해 보라고 나를 보낸 기다. 니 신용 없잖아.”

서영제는 키득키득 웃으며 대꾸한 후에 의준을 바라보았다.

“상황 보고 병간호도 하라 하셨는데… 내 없어도 할 사람 천지삐까리네.”

“어… 그….”

아직 포옹을 들킨 민망함에 사로잡혀 제대로 대꾸조차 못 하는 의준에게 영제는 웃으며 말했다.

“의준 씨, 내가 급히 와 가지고 목이 마른데. 혹시 아래 카페 가서 시원한 커피 좀 사다 주면 안 됩니까?”

“예? 아, 예.”

의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한 뒤에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와서 왜 그런 심부름을 시켜.”

“자자, 내 카드 드릴게, 저놈 거하고 의준 씨 몫도 비싼 걸로 주문해 오세요.”

도헌이 다시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기 전에 영제는 그를 향해 눈짓했다. 도헌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의준을 바라보았다.

“미안, 부탁 좀 하자.”

“네. 금방 다녀올게요.”

의준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카드를 들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힌 후에 도헌이 입을 열었다.

“차는?”

영제는 도헌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우선 병원에 왔다가 사태를 파악하겠다며 나갔었다.

“니 차는 멀쩡하고 상대 차는 박살이 났다. 운전자가 살아남은 게 천운이다, 싶은 수준으로.”

“죽지는 않았나 보군.”

“어, 다른 병원에 입원했지. 사람 붙여 놨어.”

이어서 영제가 도헌에게 물었다.

“차가 갑자기 급발진하더니 운전석을 박았다고?”

“있는 힘껏 엑셀을 밟은 것 같았어. 날카로운 소리가 났거든.”

“우연히 그런 사고가 나려면 맞은편 집 주차장에서 튀어나오는 수밖에 없는데, 거기 차는 아니었어. 교차로도 아니고, 그러면 일부러 운전석을 노리고 핸들을 꺾었다는 말밖에 안 된다.”

도헌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그쪽이 나를 죽이려 했다고?”

“그럴 만한 원한을 산 기억이 있다면 백퍼지. 짚이는 데는 없나?”

영제의 말에 도헌은 고개를 저었다.

“투자 회사 업무로 개인적인 원한을 샀던 적은 없어.”

“그러면 다른 사람 원한을 덤탱이 썼나 보네.”

도헌은 눈살을 찌푸린다.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아버지 건인가?”

“그렇지 뭐.”

도헌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 빚을 아들인 나에게 대신 받아 낼 생각이라면 나를 죽이면 안 될 텐데. 왜?”

“니가 순순히 대신 빚을 갚아 줄 인물로 안 보였겠지.”

영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차로 들이받아서 정신을 잃게 한 후에 납치하면 몸값을 받을 수 있잖아. 행님이 아니어도 부산 회장님에게 말이야.”

도헌의 조부가 장남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그 아들인 장손은 끔찍이 사랑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뭐, 최악의 경우 회장님이 돈 안 주면 니 장기 팔아서 빚을 충당할 수도 있으니까 납치는 나쁜 선택이 아니다. 신체 건강한 30대 남자 장기 가격이 얼만지 아나? 콩팥만 해도….”

“딴소리하지 말고.”

도헌이 말을 자르자 영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니 차가 그래 단단할 줄은 몰랐던 게 실수라면 실수지. 니가 그 차 살 때 멋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다고 욕한 나를 용서해라. 북유럽 차 만세다, 만세.”

영제는 흘깃 병실 문을 돌아보았다. 의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이 사고 조사 중이고, 상대 운전자는 의식 없어서 오늘은 어떻게 족치… 아니, 물어보기도 힘들어. 일단 오늘은 넘어가자.”

“아버지는 찾았나?”

“아직.”

한숨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서영술은 며칠 전까지 신사동 유흥업소에 근무하는 여자 집에 얹혀살았다. 서영제가 수소문해서 그녀를 찾아내자 그녀는 서영술이 돈과 차를 빌려 나갔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서영술은 간밤에 강원도에 사는 지인 이야기를 했다.

“이틀 전에 그 여자가 빌려준 차가 정선으로 갔다.”

“…설마 도박장에 간 건 아니겠지.”

“행님이 뭐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감상하러 가지는 않았을 테니 각오는 해 둬라.”

“…가지가지 하는군, 정말.”

도헌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영제는 침상 옆에 떨어진 셔츠를 발견하고 몸을 숙였다.

“도박장에 갔으면 오히려 찾기 쉽지. 그쪽 아는 사람한테도 이미 말해 놨고. 사설 도박장이 문제인데… 뭐, 여기도 어떻게 찾아볼 방법이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아, 그렇지.”

영제는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너희 집하고 회사 쪽에 몇 명 사람을 둘라칸다.”

“사람을 둔다고 사고를 막을 수는 없을 텐데. 관둬, 너희 쪽 사람들은 눈에 띄어.”

“돈 받고 일하는 사설 경비 업체를 고용했으니 안심하십쇼, 전무님.”

영제는 셔츠를 도헌의 발치에 걸쳐 주었다.

“이쪽에서 니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가 필요해. 물론 회장님의 심장을 보전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협조해라.”

“쯧….”

도헌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조부가 지시했다면 거역할 길이 없었다. 그러고 싶어도 영제가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너무 많이 고용하지 마. 특히 회사 쪽에는.”

“상식선에서 할 테니까 안심해라. …어때, 좀 투자가 같나?”

영제는 웃으며 병실 문을 가리켰다.

“곧 돌아올 귀여운 수행 비서님에게도 경호를 붙여야 하니 얘기해 두고.”

“…의준이에게? 왜?”

“왜냐니.”

영제는 놀란 투로 대꾸했다.

“니 애인이잖아, 이의준 씨.”

그 대답에는 ‘애인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곤란하지 않으냐?’는 의문이 섞여 있었다. 도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이 아니야.”

“아니긴.”

영제는 웃었다.

“누가 주말에 부하하고 단둘이 영화 보는 약속을 잡노.”

부산 집과 통화 중에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가장 먼저 전화를 건 상대는 의준이 아니었던가. 평범한 부하 직원을 그렇게 우선하는 상사는 없었다.

“아까 들어올 때 끌어안고 있던 거 봤다. 아, 전에 너희 회사 갔을 때도 봤으니까 어설프게 변명할 거면 집어치아라.”

“…….”

도헌은 무표정했다.

“소문낼 생각 없으니까 긴장 풀어. 내도 사생활에는 손대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상황이 그래서 안전을 우선하려는 거지. 그 정도는 이해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

도헌은 영제의 말을 잘랐다.

“의준이하고 내가 사적인 관계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아. 단지, 그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호칭?”

내가 뭐라고 했는데? 영제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도헌은 그를 향해 대답했다.

“나와 의준이는 애인으로 부를 만한 관계는 아니라고.”

영제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뭐고, 뭐, 그럼 섹스 프렌드 정도 되나? 아니면 그, 뭐더라, 회사에서만 애인인 척하는 그거 있잖아. …오피스 와이프? 이의준 씨는 남자니까 오피스… 남편은 영어로 뭐고? 아….”

“그런 단어로 정의될 관계가 아니라고.”

“…운명의 뭐 운운하려는 건 아니제? 내가 방금 사생활에 상관하고 싶지 않다고 한 말 기억 나나?”

영제는 진심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도헌이 비웃듯이 물었다.

“내가 그런 걸 믿는 사람 같나?”

“한때는 믿었지?”

생각지도 못한 대꾸에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는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안 믿어.”

“…흐응.”

영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우의 집 앞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의준을 발견하고 안도했다가 그의 찢어진 입술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보고 분노하던 도헌의 얼굴. 의준을 포옹하며 짓던 미소만큼이나 진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상대에게 애인이라는 호칭이 부적절하다?’

영제는 입을 열었다.

“이의준 씨와 다시 애인 관계가 되는 건 싫은데 남들 보기에 오해할 만한 관계는 지속하겠다?”

“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그렇기는 했다. 하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마지막 질문을 내뱉었다.

“이의준 씨하고도 합의했고?”

“…….”

도헌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영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짓거리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준이 돌아왔다. 그는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병실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놀라면서도 두 사람에게 가져온 커피와 디저트를 전달했다. 도헌이 고맙다고 인사하자 의준은 고개를 젓더니 미소를 지었다.

‘…흐응.’

영제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

상우가 소영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한때 핫플레이스로 유명했던 카페였다. 위치는 불편했지만 경영자가 인기 있는 배우의 가족이어서 팬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지금도 주말에나 저녁 시간에는 국내외 팬들이 종종 찾는 곳이었지만 평일 오후 시간인 지금은 한적하기 그지없어서 대화를 나누기에 좋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오느라 고생했어. 더운데.”

“고생은 무슨.”

상우와 만난 소영은 환하게 웃었다. 자리에 앉던 그녀는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소영은 얼떨결에 마주 인사를 했다.

“아, 우리 코디야. 매니저는 잠깐 전화하러 나갔고.”

상우는 웃었다.

“미안해,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스태프 미팅처럼 꾸몄어.”

“아… 응. 괜찮아.”

두 사람만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에는 실망했지만, 그렇게라도 자기와 만날 자리를 마련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으리라.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소영에게 상우도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잘 지냈지? 아르바이트 시작했다고?”

“응.”

“바쁘겠네. 학교에 병원에 아르바이트까지. 안 힘들어?”

“힘들 때도 있는데, 할 만해. 오빠는 작년까지 일 년 넘게 투잡 뛰면서 병원에서 살았는걸.”

“너희 오빠는 철인이니까.”

상우는 이렇게 대꾸한 후에 슬쩍 시선을 옆으로 향하며 물었다.

“오빠는 잘 지내?”

“의준 오빠? 바쁘기는 한데 잘 지내.”

소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우 오빠가 나한테 오빠 안부를 물으니 신기하네. 늘 나보다 잘 알았잖아.”

“아… 요즘 좀… 연락을 못 했거든.”

의준은 집들이 날 있었던 일을 소영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양심에 찔렸기에 상우는 말을 흐렸다.

“촬영이 바빴나 보네. 하긴, 내 메시지도 맨날 다음 날 겨우 읽고 그랬지?”

“미안, 촬영 마치고 들어오면 진이 빠져서 씻자마자 잠들었거든.”

“우리 오빠한테도 연락 못 할 정도였다니 용서할게.”

“하하, 고마워.”

소영이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상우는 웃었다.

점원이 아래층에서 음료수를 가지고 올라왔다. 소영은 망고 슬러시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요즘 오빠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겠네?”

“어, 그렇지. 잘 지낸다며. 그러면 됐지.”

상우는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오빠 애인 생겼대.”

잔을 입에 대려던 순간 들려온 말에 상우는 동작을 멈췄다. 잔 너머로 그를 바라보는 소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너한테 말했구나. 웬일이야.”

“역시 상우 오빠는 알고 있었구나?”

소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오빠 일을 상우 오빠가 모르면 이상하지…. 언제 들었어?”

“음… 들었다기보다, 우연히 알게 되었어.”

“비밀 연애라더니 어디서든 다 들키고 다녔네, 우리 오빠?”

소영이 웃었다. 상우는 커피를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너한테도 들켰어?”

“응, 오늘 아침에. 쓸데없이 나한테 참견하다가 거꾸로 당했어. 상우 오빠도 알잖아, 우리 오빠 거짓말 죽어도 못 하는 거. 표정에 다 드러나고 목소리 막 떨리고.”

“맞아.”

“오늘도 애인 만나러 나갔어. 오후 약속이라고 했으니까 지금쯤 만나고 있겠네.”

“그렇구나.”

상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상우 오빠는 우리 오빠 애인, 봤어?”

“…어, 우연히.”

상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소영이 호기심 어린 투로 물었다.

“어떤 사람이야? 연상 아니면 연하? 혹시 동갑?”

“연상일 거야.”

“예뻐?”

상우는 말문이 막혔다. 자연스럽게 도헌의 얼굴이 떠오르자 불쾌함이 솟아올랐다.

“…예쁘진 않지, 아무리 좋게 봐도.”

“진짜?”

소영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오빠, 얼굴 따지는 줄 알았는데. 연예인 볼 때마다 얼굴 먼저 보고.”

“하하하… 그건 그렇지.”

상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예쁘지 않다는 말은 못생겼다는 의미가 아니야. 굳이 설명하자면, 음… 잘생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걸.”

“잘생겼어?”

소영은 어리둥절한 투로 되물었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충격이 어렸다.

“…오빠 애인, 설마… 이번에도 남자야?”

“어? 의준이가 말했다면서.”

상우는 당황했다.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애인이 생겼다고만 했어. 누군지는 말 안 해 줘서….”

“…그랬구나, 미안하네. 그런데, 소영아.”

소영이 내뱉은 한 마디가 마음에 걸려서 상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이번에도’라고 했니?”

“아….”

소영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오빠가 아직 대학 다닐 때… 남자 친구가 있었어.”

“의준이가 그런 이야기도 했어?”

“아니, 우연히 알았어. 상우 오빠, 이 얘기는 우리 오빠한테 비밀로 해 줘.”

“네가 안다는 사실을… 의준이는 모르는구나?”

“…응.”

소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그녀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예전에 우연히 오빠 휴대 전화를 봤거든. 그때… 어떤 남자랑… 좋아한다, 뭐, 이런 메시지를 교환했더라고.”

“그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 나?”

상우가 물었다.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무 놀라서 그냥 닫아 버렸어. 아빠 장례식 때여서… 금방 잊었고.”

“그랬구나.”

상우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그때 남자 친구랑 의준이가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모르겠네?”

“어?”

소영은 깜짝 놀라서 상우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고개를 돌리고 있던 상우는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응, 나야 모르지. 누군지도 몰랐는걸.”

“그렇구나.”

상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소영을 불러냈다는 후회가 솟아올랐다.

도헌과 의준은 과거에 헤어진 이유를 상대방 탓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 자기가 차였다고 주장하는 관계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대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어쩌면 거기에 지금 교제에 영향을 미칠 진실이 숨어 있을 수도 있고.’

성급하게 의준에게 고백하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려다가 관계를 망치고 말았지만 아직 의준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오래 의준을 좋아했다.

신중하게 다음 기회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 사이에 서도헌을 의준에게서 떼어 놓을 방법도 모색하면서 말이다.

‘서두르지 말자.’

일단 더 성과는 없을 것 같으니 소영과는 대충 헤어져야겠다. 상우는 이렇게 생각하며 남은 커피를 빠르게 마셨다.

“상우 오빠, 물어볼 게 있어.”

일정 핑계를 대려고 입을 열려던 상우에게 소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뭔데?”

“우리 오빠 지금 애인… 남자 친구 말이야. …그 전무님 맞아?”

“…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상우는 깜짝 놀랐다. 소영은 상우의 표정을 보고 대답을 짐작했다.

“역시 그렇구나.”

소영은 웃었다.

“사내 연애라는 소리만 들었을 때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그 전무님밖에 없겠다 싶었거든.”

“그래?”

상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서도헌 전무님이 어머님 병원도 그렇고 여러모로 너희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지. 아무에게나 그렇게 시간과 돈을 들이지는 않으니까.”

“그것도 물론 그렇기는 한데… 내가 그분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게 아냐.”

“……?”

“그분 말이야. 오빠하고 이야기할 때는 웃어.”

소영이 말했다. 상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화할 때 웃는다고? …그게 뭐?”

“상우 오빠는 그분하고 대화 안 해 봤어?”

“아니, 해 봤는데.”

“그럼 알 텐데? 그분 말이야, 남하고 이야기할 때는 절대로 표정이 안 변해.”

“…….”

첫인상은 무표정해서 무서운 남자였다. 덩치고 크고 짙은 색 정장을 갖춰 입은 빈틈없는 모습이 어렵게 느껴졌었다. 나이가 훨씬 어린 소영에게도 깍듯하게 묵례를 하고 존댓말을 썼다.

“그런데 오빠랑 이야기하다가 웃더라고.”

의준을 향한 그의 눈매는 부드럽고 입가에는 미소가 듬뿍 어려 있었다. 잠시도 의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웃음이 나오잖아. 아마 그분도 그랬던 건가 봐.”

소영은 이렇게 말한 후에 상우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구나.”

상우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소영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어렸다.

“오늘 만난 일은 의준이에게 비밀로 해 줄 수 있어? 촬영 때문에 연락도 못 하던 내가 너만 시간 내서 만났다고 들으면 의준이가 서운해할 것 같아서.”

“알았어.”

소영은 ‘너만’이라는 표현에 얼굴을 살짝 붉혔다. 상우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시간이 더 있으면 밥도 사 주고 오래 있다 가라고 할 텐데, 미안하다.”

달리 일정은 없었지만 빈말을 던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 준 소영에 대한 최소한의 팬서비스였다.

“괜찮아. 어차피 영어 시험 공부하러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어.

소영은 실망한 기색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상우 오빠가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만나 줬으니 공부가 잘될 것 같아.”

“다행이네. 소중한 친구 동생에게 도움이 되다니.”

소영이 바라던 답은 아니었다. 매번 이런 식이지만 소영의 감정은 잦아들지 않았다. 어쩌면 오히려 이런 대응에 더욱 감정이 커지는지도 모르겠다.

‘소영이의 감정을 책임질 수는 없으니 이게 최선이야.’

소영을 카페 밖까지 데려다준 후에 상우는 자리로 돌아왔다.

“후우….”

의문 해소에 실패했다. 애초에 정보를 캐낼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 친구인 그에게조차 연애사를 밝히지 않았던 의준이 여동생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었다.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편이 낫겠지만, 그럴 상황은 못 되니까.’

의준도 그렇지만 서도헌도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은 방법은 영제 형뿐이려나.’

서영제는 호기심이 강한 성격이니 분명히 서로 ‘상대가 찼다’고 주장하는 의준과 도헌의 과거를 캐내고 싶을 터였다. 어쩌면 이미 서도헌을 통해 진실을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에게 빚을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의문의 답이 분명 의준과 도헌 사이의 중요한 고리가 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를 쇄신할 혹은….

‘관계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사실일 테니까.’

상우는 표정을 굳혔다.

‘아직 널 포기하지 않았어, 의준아.’

어차피 다시 친구로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그렇다면 끝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상우는 서영제의 연락처가 표시된 화면을 망설임 없이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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