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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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얇은 커튼이 쳐진 창을 통해 부드러운 햇살이 번져나갔다. 조명을 켜지 않고도 밝은 실내에 달콤한 신음이 메아리쳤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가늘게 뜬 의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면서 도헌은 그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댔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은 따스했고 머금은 미소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의준은 몸을 씻은 후에 목욕 가운을 입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도헌은 욕실에서 가져온 드라이어로 그의 머리를 말려 주며 입을 열었다.

“점심은 샌드위치로 때워야겠군. 그래도 괜찮겠어?”

“네.”

수요일 점심이었다. 서도헌은 매주 수요일에 회사 옆의 특급 호텔에 투숙해 혼자 점심시간을 보냈다. 무엇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낮잠을 주무시려고 투숙했다고요?”

의준은 생각지도 못한 진실에 깜짝 놀랐다.

“그냥 낮잠만요?”

“그래.”

도헌은 의준의 머리를 말린 후에 침대 옆에 놓았던 종이봉투를 집어 의준의 무릎 위에 놓았다. 의준은 봉지 안에서 샌드위치를 꺼낼 생각도 못 한 채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연예인과 밀회나 재계 인사와 비밀 회동이 아니라 실망했어?”

“네? 아….”

의준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에 돌던 소문을 알고 계셨어요?”

“그래.”

도헌은 의준 대신 샌드위치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밤에 잠을 못 잤어. 한 주 내내 잠을 설치니까 수요일 즈음에 잠깐이라도 낮잠을 못 자면 버틸 수가 없었어.”

“불면…이셨어요?”

도헌의 집에 머물렀을 때를 떠올렸다. 의준이 먼저 일어나도 모를 정도로 푹 잤던 사람이 불면증이라니.

“수면제를 처방받았지만 소용없었어. 그런데 너하고 만난 뒤로는 잘 자고 있어.”

도헌은 샌드위치를 깔끔하게 먹어 치운 후에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네가 있어서 그런지도.”

“…….”

툭 하고 내뱉은 그 말에 의준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형, 이리로 와요.”

의준은 샌드위치 봉투를 사이드 테이블에 놓고 빈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도헌은 순순히 침대 위로 올라왔다. 서로 마주 보고 비스듬히 눕자 도헌이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으니 졸린데.”

“먹고 바로 자면 좋지 않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의준은 발밑으로 밀어 두었던 시트를 끌어당겨 도헌과 자기 몸에 덮었다. 도헌은 미소를 지으며 의준을 끌어안았다.

먼저 잠에 빠져 든 사람은 의준이었다.

“…….”

도헌은 가늘게 뜬 눈으로 품 안에서 곤히 잠든 의준을 바라보았다. 코끝을 스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촉촉한 피부에서 풍기는 향기에 마음이 편해졌다.

‘여전히 잘 속는구나.’

불면증은 고쳐지지 않았다. 의준이 자고 간 날도 그는 자지 못했다. 키스도 잠결에 하지 않았다.

‘그 고생을 하고 인간 불신에 빠질 만도 한데, 어쩌면 이토록 여전할까.’

의준은 타인의 행동과 의도가 선의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친구들이 뒤에서 비웃어도, 가족이나 타인이 그를 이용해도 그 믿음이 완전히 깨지는 일은 없었다. 아마도 천성이리라.

‘이렇게 착하고 선량한 네가….’

도헌은 의준의 머리카락 사이에 입술을 댔다.

“…대체 나에게는 왜 그랬던 거야?”

“……으응…?”

의준이 움찔하고 몸을 떨며 눈살을 찌푸렸다. 도헌은 입술을 떼고 의준의 등을 다독였다. 찌푸렸던 얼굴에 다시 평온한 표정이 펴져 나갔다.

지난 일인데도 아직 미련이 남았던가. 이유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몇 번을 되새겼는데도.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련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좋아해요.’

재회 후에 의준이 고백했던 날을 떠올렸다. 김상우의 억지 고백을 벗어나 도헌의 품에 돌아온 의준은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었다.

체온을 나누었다. 숨결과 땀을 공유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생각이 모두 날아갈 만큼 눈앞의 의준에게만 몰두했다.

심모든 것이 완벽했었다. 세상에 오직 의준과 자신만 존재하는 듯한 느낌조차 받았다. 그야말로 지난 시절과 같았다.

‘…의준이와 내가, 예전처럼.’

가능한 일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 가로막혔다. 대신 의문이 떠올랐다.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일방적으로 그를 떠났던 의준이 다시 그에게 감정을 품었다. 그걸 바라지 않았던가.

‘아니야, 내가 원한 건….’

의준이 그를 돌아보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를 자신이 버리는 것. 그것이 복수의 완성이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누구를 위해서?

5년 전, 실연의 고통은 인생을 뒤집어 놓았다. 그때의 고통은 아직도 심장 한쪽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과거를 접어 두고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나?’

몇 년 동안 서로의 안부조차 모른 채 각자의 삶을 살았던 사이라면 남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과거는 없던 셈 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미 의준과 그는 비서와 상사라는,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 했을 관계를 새로 맺었다. 공적인 관계만큼 사적인 관계도 얼마든지….

“웃기는군.”

언제부터 이렇게 상황에 맞추어 생각을 바꾸었던가. 도헌은 비웃음을 띠었다. 그렇게 쉽게 묻어 둘 수 있던 일이었나?

5년 전, 의준과 그는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은 산산조각 난 채 가슴 한구석에 고통으로 남았다.

‘감정은 영원하지 않아.’

도헌의 시선이 의준을 향했다.

‘…어째서 한번 사랑이 식은 상대를 다시 좋아할 수 있지?’

묻지 못할 질문이 떠올랐다.

의준의 마음을 읽고 싶었다. 그의 생각을, 과거에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왜 내 앞에 나타났어?’

사랑을 가르쳐 주었고 사랑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던 남자가 다시 그의 인생에 뛰어든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왜 나를 이렇게 흔들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심장이 욱신거렸다.

‘나더러 다시 네 마음을 믿으라고?’

달콤한 유혹의 끝은 절망이었다. 이미 겪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더 당해야 만족할 거지?’

상대가 이의준만 아니었다면. 도헌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랬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고 철저히 짓밟아 버렸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그가 자신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이의준은 특별했다. 그에게 품은 감정은 단순한 미움이나 분노와는 달랐다.

의준과의 과거는 고통스럽게 끝났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하는 지금은 즐거웠다. 그의 말이나 행동에 자연스럽게 신경이 쓰이고 보이지 않으면 허전했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는 짜증이 났다.

그를 좋아하면서 미워했다. 원망하면서 기댔다. 의준을 보면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 쉴 새 없이 동시에 솟아올랐다. 그 사실이 도헌을 이토록 괴롭히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헌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

오후 업무에 복귀하기 무섭게 대표이사실로 불려갔던 도헌이 돌아왔을 때 의준은 마침 오후 일정 보고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오셨습니까, 전무님. 오후 일정을….”

“취소해요.”

“예?”

의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헌이 그에게 전무실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대표님과 함께 언론 대응을 해야 합니다. 일정을 조정해 줘요.”

“알겠습니다.”

수요일 오후 일정은 내부 회의 한 건뿐이었다. 길어질 수도 있는 회의여서 이후 일정을 잡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언론 대응 일정에 대해서는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잡지 인터뷰입니다. 새로 생긴.”

도헌이 말했다.

“홍콩에 본사를 둔 투자 금융 전문지의 한국판이라는군요. 이번에 새로 창간했다고.”

“파이낸스 월드 말씀이시군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었다.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그 잡지에서 다음 호에 우리 회사를 다루면서 임원 인터뷰를 특집으로 싣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좋은 제안이네요. 그런데 왜 그걸 대표님 쪽에 연락했을까요? 보통 홍보팀에 연락해서 저희 비서실로 연결되어야 할 텐데….”

“그쪽 편집장이 대표님과 아는 사이입니다.”

“아….”

모든 의문이 풀렸다. 하긴 회사 전무의 일정까지 변경시키려면 일반적인 연줄로는 불가능할 터였다.

“오후 세 시 반부터 취재라는군요. 대표님부터 시작할 테니 내 인터뷰는 네 시쯤 될 겁니다. 사전 질의서는 대표실에 전달되었다고 들었어요.”

“저도 전달받아서 사전 검토하겠습니다.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개인 인터뷰에 사진 촬영이 있다니 전무실에서 그냥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의준이 변경된 일정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사이 도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저녁에는 대표님이 마련하는 접대 회식 자리에 참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야근이군요. 유감입니다.”

“네? 아, 저는 괜찮습니다.”

“난 안 괜찮습니다. …저녁 데이트,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

의준은 퇴근 후에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던 약속을 뒤늦게 떠올렸다.

“영화는… 주말에라도 보면 되지 않을까요?”

“주말에 시간 됩니까?”

“네, 달리 약속은 없는데….”

“그럼 주말에 봅시다. 시간 여유 있게 일정 잡아 둬요.”

“…네….”

시간에 여유를 두라는 말이 마치 하룻밤 같이 보낼 생각을 하라는 투로 들렸다. 의준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꾸벅 숙인 후에 전무실을 나갔다.

‘…생각이 표정에 너무 드러난다니까.’

재회 후 한동안 보였던 긴장해서 굳어진 얼굴이나 불쾌해하던 표정에 비하면 보기에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특히 도헌 앞에서만 보이는 표정이라는 점이 좋았다.

전무실 유리벽 너머로 의준을 바라보았다. 김하나에게 변경 일정을 의논하는 의준의 옆얼굴에는 홍조는커녕 민망한 표정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공과 사 구분은 저쪽이 훨씬 잘하는지도 모르겠군.’

의준은 일정 변경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비서의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그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는 동안 도헌은 줄곧 지난 점심시간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물줄기 아래서 한데 겹쳤던 몸의 감촉과 달콤하고 뜨거운 탄식 그리고 곤히 잠든 채 내뱉던 숨소리를 말이다.

짧은 점심시간이 아쉬웠다. 서로 몸을 맞대고 체온을 느끼던 행위로는 모자랐다.

‘좀 더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의준이 비서실 파티션 너머로 모습을 감추자 도헌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면 나도 기꺼이….’

기꺼이, 뭘? 도헌은 생각을 멈추었다. 어쩌겠다는 건가. …의준의 감정에 응하기라도 하겠다고?

‘웃기지 마.’

사랑에 빠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는 의미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의준이 그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던가.

고개를 들었다. 마침 파티션 너머에 서 있던 의준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의준은 도헌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심장이 지끈하고 아팠다.

‘단순히 양심의 가책에 불과해.’

사랑일 리는 없었다.

도헌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

서도헌을 인터뷰하러 온 파이낸스 월드의 편집장은 서글서글한 성격에 엘리트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이었다.

“제니 한이라고 합니다. 서도헌 전무님과는 같은 대학원 동문이랍니다. 제가 1년 늦게 입학했기에 함께 공부할 기회는 없었지만요.”

인터뷰 전에 자기소개를 하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도헌은 그렇습니까, 하고 의례적으로 대꾸했다.

“우수하고 뛰어난 학생이셨죠. 인기도 좋으셨고요. 이렇게 만나 뵈어 기쁘네요.”

“과찬이시군요. 일개 학생이었을 뿐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재학 중에 단과대 파티에서 늘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하셨던 분께서.”

“…….”

도헌은 미소를 지었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학창 시절 이야기를 별로 내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녀는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저희 잡지는 홍콩에서는 5대 금융지로 손꼽힙니다. 한국판도 홍콩에서만큼 인정받도록 만드는 것이 제 목표죠. 갑작스럽게 요청한 인터뷰에 응해 주신 전무님께서 나중에 자랑스럽게 저희 잡지를 이 멋진 사무실에 장식해 두실 수 있도록 말이에요.”

“기대되는군요.”

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능숙한 분이네.’

인터뷰에 동석했던 의준은 감탄했다. 서도헌은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기에 그의 기분이나 화제에 대한 흥미를 확인하려면 짧은 말 한두 마디에 의존해야 했다. 첫 만남에 그런 도헌의 성격을 간파하고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은 제니 한이 처음이었다.

‘나도 예전 경험이 아니었다면 아직 헷갈렸을지도 모르는데.’

분위기 파악 기술만이 아니었다. 사전에 전달받은 질의서 역시 수준 높은 질문투성이였다. 사생활이 아닌 업무에 초점을 맞추고, 잡지의 독자인 전문 투자가 및 금융 관계자들에게 소속 회사에 대한 정보를 전하면서 동시에 서도헌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핵심적인 이야기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종종 질의서에 없던 질문을 던질 때도 흐름을 깨거나 상대를 곤란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했기에 도헌은 물론 인터뷰를 참관하던 의준이 제지할 일이 없었다.

“---훌륭한 인터뷰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잡지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예정 시간을 크게 어기지 않고 인터뷰를 마무리한 후 제니 한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도헌도 불쾌한 기색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저에게도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시다니 다행이네요.”

제니 한은 웃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퇴근 시간이 되었네요? 이 뒤에 대표님과 식사 예정이 있는데, 서도헌 전무님도 함께 하시나요?”

“…네, 대표님께서 그러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기쁘네요.”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도헌은 살짝 미소를 지은 후에 의준을 바라보았다.

“의준 씨, 대표실에 인터뷰가 끝났다고 전해 주겠습니까?”

“네, 전무님.”

의준은 전무실을 나왔다. 대표 비서에게 연락하는 도중에 흘깃 전무실로 시선을 돌린 의준의 눈에 도헌의 팔을 가볍게 잡는 제니 한의 모습이 비쳤다.

‘별걸 다 신경 쓰네.’

스스로에게 이렇게 핀잔을 주며 의준은 연락을 마쳤다. 업무에 개인감정을 섞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도헌도 그러기를 바랐지만 의준 자신이 그러겠다고 결정했었다. 그것이 도헌과 공적인 관계 및 사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저녁 접대 장소로 정해진 객실 스타일의 고급 일식집에 도착한 직후 그녀는 자연스럽게 도헌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대표가 먼저 안쪽에 자리를 잡고 도헌이 맞은편에 앉자 ‘대표님과 나란히 앉을 수는 없으니까요.’라는 이유로 도헌의 옆자리도 차지했고 말이다.

‘이거… 왠지….’

대표와 도헌 그리고 제니 한이 함께 앉은 좌식 테이블 옆에 따로 차려진 비서들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후에 의준은 흘깃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은 예의 바르게 미소를 띤 채 대표와 제니 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근거는 없는데….’

회사 대표가 잘 아는, 나란히 앉은 모습이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두 사람. 우연히도 그들은 결혼 적령기에 속하는 남자와 여자.

나쁜 예감이 적중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연이 별 게 아니야. 이런 식으로 서로 알고 대화하다 보면 감정도 생기고 그러는 거지.”

사람이 좋고 직원들에게도 친근하게 대하는 이웃 아저씨 같은 인상을 지닌 대표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제니 한이 도헌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도헌이 짧게나마 대답을 하며 대화를 이어 가던 도중이었다.

“꼭 남녀 간의 애정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네. 우정이나 업계 동료로서의 정 같은 것도 다 감정이지. 안 그런가? 서도헌 전무.”

아니라고 했지만 어떻게 보아도 ‘남녀 간의 애정’에 초점을 맞춘 자리였다. 의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맞은편에 앉은 대표 비서는 의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갯짓을 했다. 잠깐 밖으로 나가자는 신호였다.

“의준 씨 들어오기 전에도 이런 자리는 종종 있었어.”

식당 밖의 흡연 장소로 의준을 데려간 대표 비서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우리 대표님이 뭐랄까, 악의 없이 ‘남자는 가정을 일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시거든.”

“아아….”

의준은 빠르게 이해했다. 대표 비서의 말에 의하면 도헌이 입사한 후로 반년에 한 번 꼴로 이런 선 아닌 선 자리가 있었다고 했다. 상대도 다양했다. 재력가 출신 배우, NGO 활동을 하는 변호사, 대학원에서 공부 중인 학생까지.

“참고로 대학원생은 대표님 따님.”

“예?”

의준은 깜짝 놀랐다. 대표의 외동딸은 아직 만으로 24세로 도헌과는 거의 10년 가까이 차이가 나서였다.

“서도헌 전무님이 그때는 정말 정색하고 화를 내셨지. 어린 따님에게 실례라고 말이야. 그때는 대표님도 좀 반성하시는 듯했는데…. 반성 기간이 끝나셨나 봐.”

대표 비서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 후에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뭐, 저 편집장님은 전무님과 나이도 비슷하고 인물도 학벌도 빠지지 않고…. 대표님도 나름 신중히 자리를 마련하신 것 같기는 해.”

그래도 정말 반성하셨다면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 게 나을 텐데 말이야. 대표 비서는 이렇게 말한 후에 담배를 비벼 껐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니 의준 씨도 어색하겠지만 참아 줘.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식사 자리만 끝나면 우리는 퇴근할 수 있으니까.”

“…네, 고맙습니다.”

의준이 인사하자 대표 비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들은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 최 비서. 허허, 이 사람, 설마 나 빼고 담배 피우고 왔나? 서운하게.”

대표의 말에 대표 비서는 태연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잠깐 차량 확인을 하고 왔습니다. 담배 피우러 가실 거면 같이 가시죠.”

“그래? 그럼 같이 갈까.”

“…….”

의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대표는 비서와 함께 식당 밖으로 향했다. 의준 옆을 지나며 대표 비서는 눈을 찡긋했다. 마치 이것도 사회생활에 필요한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알려 주는 듯했다. 의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에 방에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었다.

“호감과 애정은 다른 개념입니다.”

조용히 미닫이문을 열던 찰나 안에서 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준은 문 틈새로 시선을 향했다. 도헌이 제니 한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첫눈에 타인에게 애정을 품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럴까요?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요. 예를 들어 완벽한 이상형이라거나.”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누군가의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이상형일 가능성은 오히려 더 낮다고 봅니다.”

제니 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도헌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가장 먼저 품는 감정은 경계심이죠. 애정은 경계심과는 가장 먼 감정이고요. 그러니 첫눈에 사랑에 빠지기는 어렵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불가능하죠.”

의준은 대학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도헌의 첫인상은 수수한 공부 벌레였다. 그는 의준이 수강하는 경영 쪽 과목을 담당한 교수가 지도하는 대학원생이었다. 교수는 대학교 2학년, 아직 학부생인 의준에게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설득했고 의준은 난처해서 말을 흐리기만 했다. 그런 의준을 도와준 사람이 도헌이었다. 의준에게는 억지스러울 정도로 의견을 강요하던 교수는 도헌의 말에 빠르게 의견을 굽혔다. 덕분에 의준은 아무 일 없이 교수실을 빠져나왔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저기… 성함이.’

‘서도헌.’

‘도헌이 형이시구나. 저는 이의준이에요.’

‘…그래.’

첫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도헌의 첫인상은 부스스한 머리 스타일의 키 큰 남자. 무뚝뚝하고 어딘지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첫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인 상대는 아니었지.’

도서관에서 종종 마주치면서 조금씩 대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면서 첫인상과 다른 모습을 다양하게 발견했다. 의외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수염을 깎으면 미남이라거나, 마른 듯하지만 드러나는 팔은 근육투성이라거나, 의외로 농담도 잘한다거나 하는.

가장 놀라운 발견은 그의 눈동자였다. 안경과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회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보았을 때 의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어머니가 러시아 출신이어서.’

대학에서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덩치 크고 무서운 선배는 조금씩 상냥하고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저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말에 의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도헌의 목소리였다.

“불확실하고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감정에 인생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굳이 투자가 입장이 아니어도 너무 비효율적이니까요.”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궁금하네요. 혹시 예전에 인생을 건 사랑을 하셨나요? 아니면 지금 하고 계시기라도?”

의준은 흠칫 몸을 떨었다. 혹시 내가 티 나게 행동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지만 만일 도헌과의 관계를 들켰다면….

“아니요.”

이어서 들려온 대답에 의준은 표정을 굳혔다.

‘도헌이 형? 지금 아니라고 대답…했어?’

시선이 방 안의 도헌에게로 향했다. 도헌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경험을 하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일 뿐입니다.”

“그런가요?”

되물음 뒤에 낮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저하고는 생각이 전혀 다른 분이시네요. 흥미로워요.”

정신을 차렸을 때 의준은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찬물을 틀어 손을 씻다 말고 얼굴에도 물을 끼얹었다.

‘아니요.’

짧고 단호했던 도헌의 말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과거에 그런 사랑을 한 적 없다는 의미? 아니면….

‘…지금 그런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일까?’

심장이 욱신거렸다. 아니다. 대화의 흐름상 상대에게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한 말일 수도 있었다. 도헌은 이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니 상대가 정이 떨어지게끔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되잖아.’

화장실을 나와 방으로 향했다. 대표와 비서는 이미 돌아와 있었고 제일 늦게 돌아온 의준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의준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향했다. 대표는 곧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고 제니 한도 대화에 빠져들었다. 오직 도헌만이 의준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의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헌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슬슬 일어날까.”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접대 회식은 끝났다. 대표 비서가 차를 준비시키고 세 사람을 밖으로 인도하는 사이 의준은 법인 카드로 계산을 마쳤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바로 앞에 도헌이 서 있었다. 의준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전무님.”

“…의….”

도헌이 입을 열려던 찰나 대표가 그를 불렀다.

“서 전무! 이리 오게.”

“…….”

도헌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대표가 말했다.

“집이 한남동 쪽이었지? 제니 편집장 집도 그 근처니까 서 전무가 좀 바래다주게.”

“괜찮아요. 택시 타면 금방인데요.”

“가는 길인데 태워다 달라고 해.”

사양하려던 제니 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도헌은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밤이 늦었으니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은데 폐를 끼치네요.”

대표는 이어서 대표 비서에게 손짓했다.

“김 실장, 자네하고 이의준 씨도 늦었으니 택시 타고 들어들 가게. 내일 보지.”

“네, 대표님.”

대표 비서가 대표를 배웅하는 사이에 의준도 도헌의 차로 향했다. 운전기사가 문을 열었다. 제니 한을 먼저 차에 태운 후에 도헌은 의준을 돌아보았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전무님.”

“그래요. 의준 씨도.”

도헌은 이어서 말했다.

“대표님 말씀대로 택시 타고 들어가요. 밤이 늦었으니까.”

“괜찮습니다. 심야 버스가 근처에 있어요.”

차 문 위쪽을 잡고 있던 의준의 손 위에 도헌의 손이 얹혔다. 놀라서 그를 바라보는 의준에게 도헌은 짧게 말했다.

“택시 타요.”

“…들어가십시오.”

의준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차가 출발한 후에 남은 대표 비서와 함께 큰길까지 걸어 내려갔다. 심야 버스가 다니는 시각에 택시를 타자니 내키지 않았지만 도헌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실장님, 들어가십시오.”

대표 비서를 먼저 보내고 이어서 택시에 탔다. 양심의 가책은 집 앞까지가 아니라 집 근처 큰길에서 내려서 무마하기로 했다.

버스로 50분은 걸릴 거리를 30분 만에 도착한 후 의준은 택시에서 내렸다.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에 막 접어들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어디야?

도헌이었다. 의준은 순순히 대답했다.

“집 앞입니다. 걸어 올라가는 중이에요.”

---택시 타랬더니.

“탔어요. 기사님이 차 돌리기 불편하실 듯해서 길가에서 내렸죠. 전무… 도헌이 형은요?”

---집에 가는 중이야.

누구의 집으로요? 의준은 혀끝까지 치밀어 오른 질문을 삼켰다.

---잡지사 사람은 내려 주고 이제 출발한 참이라는 의미야.

마치 의준의 마음을 읽은 듯 도헌이 덧붙였다. 의준은 민망해져서 입을 열었다.

“…설명 안 하셔도 알아요.”

---정말로?

“…왜 그렇게 물으세요?”

---헤어지기 전에 불안한 표정으로 날 봤잖아.

말의 끝에 후,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났다.

---…내가 어지간히 신용이 없구나 싶어서 서둘렀지. 너 들어가서 자기 전에 연락하려고.

도헌의 배려에 감동하기보다 먼저 의준은 충격을 받았다.

“제가… 불안해했어요?”

---내가 보기에는.

의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표정에 드러났었다니 몰랐다.

‘표정 관리조차 못 하다니….’

자괴감이 그를 휩쓸었다.

---…혹시 여자 때문이 아니었나?

예리한 질문에 의준은 흠칫 몸을 떨었다. 도헌이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공사 혼동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사과 안 해도 돼.

잠시 후 도헌은 짧게 덧붙였다.

---넌 괜찮아.

“…….”

몇 시간 전에 들었다면 특별한 사람 취급을 받은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랐을 말이었지만 지금은 의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저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도헌이 했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랑을 불확실하고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했다. 그런 데다 인생을 걸 생각도 없다고.

‘…도헌이 형은, 나와의 관계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기적적으로 다시 같은 마음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기분이 이상했다. 의준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집에 도착했어요. 끊을게요.”

---그래. 푹 쉬고 내일 봐.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통화가 끝났다.

도헌은 몸을 등받이에 기대며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 실장님, 창문을 좀 열어 주겠습니까?”

“예, 전무님.”

창 네 군데가 동시에 살짝 열렸다. 스며든 바람이 차 안에 고여 있던 공기를 순식간에 휘감고 빠져나갔다. 여자가 내린 후에도 가시지 않았던 향수 냄새가 사라지고 후덥지근한 습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제니 한은 야망이 넘치는 여자였다. 머리도 좋고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실력도 지녔으며 자기 주변의 인맥을 유효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늦건 이르건 자기 분야에서 크게 성공하리라. 그런 언론인을 알아 두면 여러모로 편리했다. 대표 이사가 괜한 참견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와의 관계는 오히려 양호하게 발전했을지도 모르겠다.

‘대표님께서 제게는 이런 저녁 모임이라고 미리 말씀하셔서, 전무님도 알고 계신 줄 알았답니다. 본의 아니게 실례했네요. 이 일로 저희 매체에 대해 나쁜 인상을 품지 않으시기를 바라요.’

집 앞까지 바래다준 도헌에게 제니 한은 이렇게 말하고 이별을 고했다. 도헌은 뒤늦게 날 서게 굴었음을 후회했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닌데, 어리석게.’

지금까지는 능숙하고 예의 바르게 잘 피했는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이의준이었다.

옆 테이블에서 흘깃흘깃 자신을 살피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신경이 쓰여서 대화를 제대로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대화의 주도권은 제니 한에게 빼앗기고, 그녀가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던진, 과하게 사적인 질문조차 거르지 못하고 대꾸하는 우를 범했다.

‘초면인 상대 앞에서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소리나 내뱉고.’

그녀가 경험에 의한 발언이냐고 되물었을 때는 뜨끔했다. 스스로 함정에 걸어 들어간 기분으로 수습하려다 헛소리를 추가하기까지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의준은 그 자리에 없어서 대화를 듣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경험이라.’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반짝반짝 생기 넘치는 눈동자와 미소를 머금은 표정에 밝고 정확한 목소리를 지닌 상대였다. 교수의 대학원 권유에 쩔쩔매던 몇 년 아래 후배. 별것 아닌 도움에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던 그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결말은 끔찍했지만 그 시절은 아름다웠다. 그때의 감정 역시 진실이었다, 그런 감정은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으리라.

‘…다시 그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의준이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5년의 세월 동안 변한 점도 있었다. 통통한 볼은 해쓱해졌고 눈 밑에는 약하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거칠어진 손 여기저기에는 낯선 흉터도 있었다.

하지만 표정과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발끈해서 그를 노려볼 때 반짝이던 눈동자도, 분할 때 입술을 깨무는 버릇도, 그리고 잠결에 그의 품에 파고들던 버릇조차 그대로였다.

의준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향수로 인한, 혹은 변하지 않은 취향에 따른 흔들림일까.

의준은 그를 좋아했다. 감정에 솔직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도헌은 달랐다.

사랑에 빠지기 위해 시작한 관계가 아니었다. 사랑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했다.

‘그런데 왜….’

도헌은 고개를 돌려 빈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오후 일정이 변경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는 의준이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일찍 퇴근해서 영화를 본 후에 저녁을 먹고 집까지 바래다줄 생각이었다.

물론 약속은 취소하지 않고 주말로 미루었다. 내일은 평일이니 출근하면 얼굴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이토록 아쉽다.

‘계획이 어긋나서 그래.’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니 한을 내려 주자마자 전화를 건 이유도 식당에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후 급격하게 어두워진 표정과 시선을 피하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 녀석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야.’

도헌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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