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후덥지근한 더위가 한풀 꺾이고 길었던 낮이 조금씩 줄어드는 시기가 찾아왔다. 절기상으로는 가을에 들어섰다지만 여전히 중천에 뜬 해는 거침없이 따가운 햇살을 흩뿌리고 있었다. 실내에는 여전히 냉방이 필요했고 외근 후의 직장인에게는 찬 음료가 절실한 오후였다.
“A-387 고객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아, 저희 음료가 나왔네요.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영수증에 찍힌 주문 번호를 확인한 의준은 몸을 돌렸다. 음료수를 건네던 카페 사장은 의준을 알아보고 웃었다.
“요즘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얼굴이 아주 폈어요.”
“네? 아… 네.”
단골들을 지나치게 거리낌 없이 대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그의 말에 의준은 멋쩍게 웃었다.
“별일 없는데, 좋아 보인다니 좋네요.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좋은 일은 있었다. 그저 카페 주인에게 밝힐 만한 일이 아니었을 뿐.
“…….”
음료 두 잔을 들고 몸을 돌린 의준의 시야에 도헌의 모습이 들어왔다. 의준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지난주, 의준은 도헌과 하나가 되었다. 사귀는 사이에 자연히 이루어지는 관계라지만 몇 년 전에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육체적인 접촉을 드디어 이룰 수 있었다.
‘…끝까지 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론적으로 알고 있던 마지막 단계까지 이루기에는 준비도 부족했고 약간의 물리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래도 직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서로를 느끼고 서로의 안에서 쾌감을 얻었다. 비록 그 ‘안’이 손바닥 안이라고 해도 ‘안’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중요한 건 시작했다는 거니까.’
자주 접촉하다 보면 얼마든지 기회는 다시 찾아올 터였다. 의준은 슬쩍 붉어진 뺨을 진정시키며 걸음을 뗐다.
“전무님, 오….”
도헌이 기다리던 자리로 향하던 의준은 걸음을 멈추었다. 출입구 옆 1인용 좌석 앞에 서 있던 도헌은 어느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이 카페의 바리스타였다.
바리스타는 대화의 끝에 살짝 웃더니 도헌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명함? …아니, 저건.’
쪽지였다.
반으로 접은, 명함보다 작은 사이즈의 종이. 바리스타는 뭐라고 덧붙인 후에 도헌 곁을 떠났다. 의준 옆을 스쳐 지나기 전에 그녀는 의준에게도 눈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은 후 의준은 도헌에게로 향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전무님.”
“아닙니다.”
도헌은 의준이 자리를 비우기 전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 후에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가게 내가 번잡하니 가면서 마실까요?”
“네.”
도헌이 먼저 나가며 문을 잡아 주었다. 의준은 카페 밖으로 나왔다.
“…생크림 양이 나날이 많아지는군요. 방금 밥을 먹어 놓고 그게 또 들어갑니까?”
도헌은 생크림이 예쁘게 얹힌 의준의 음료를 보며 물었다. 의준은 웃었다.
“생크림은 부피만 큰 거품인걸요. 뱃속에서는 금방 흩어져요.”
“지방과 설탕으로 만든 거품의 열량은 생각해 봤습니까?”
“아, 열량 이야기는 하시면 반칙이죠.”
의준은 웃으며 흘깃 도헌의 손을 바라보았다. 음료수를 들지 않은 다른 쪽 손에는 곱게 접은 쪽지가 쥐여져 있었다.
‘분명히 연락처겠지.’
회사가 밀집한 만큼 프랜차이즈 카페도 두 건물 당 하나꼴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지역에서 의준의 단골 카페는 두 가지로 유명했다. 하나는 가격 대비 맛이 훌륭한 커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의 미모였다. 많은 손님들이 그녀에게 연락처를 주었다. 하지만 의준이 알기로 그녀가 손님에게 접근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상사분은 안 오셨냐고 묻기도 했지….’
언제부터 도헌을 마음에 두었을까. 직접 카페에 방문하는 일이 드문 도헌을 기다리며 쪽지를 늘 가지고 다녔을까.
“신경 쓰입니까?”
“네?”
갑자기 들려온 질문에 의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도헌이 의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신경 쓰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쪽지.”
도헌이 쪽지를 쥔 손을 들었다. 의준은 뜨끔해서 입을 열었다.
“별로 신경이 쓰여서는 아니라….”
의준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이윽고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신경 쓰여요.”
“…….”
대학 시절에도 종종 이런 일을 목격했다. 그때 의준은 깨달았다. 여자들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이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생기면 그녀들도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나서곤 했다. 연락처를 건네거나 데이트 신청 정도는 우스웠다. 때로는 술자리를 빌미로 육탄 공격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예전에도 전무님은 여자분들에게 인기가 좋으셨으니까요. 다들 전무님께 접근했고.”
“대학원 시절 말입니까? …기억에 없는 일이군요.”
“첫 밸런타인데이 기억 못 하시나 봐요? 전무님이 수업 발표 때문에 도서관에 늦게까지 계시고 제가 기다렸던 날요.”
서도헌이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여학생들은 준비에 바빠서 연락도 받지 않았던 그 대신 ‘친한 후배’였던 이의준에게 대신 전해 달라며 초콜릿과 편지를 남겼다.
“누가 뭘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준 씨와 내가 사귄 뒤 처음으로 그 일 때문에 싸웠던 사실은 기억납니다.”
도헌이 도서관 밖으로 나왔을 때 의준은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저녁 약속은 늦어졌고 양손에는 무거운 짐을 든 채 기다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선물을 고스란히 도헌에게 건넸다. 질투로 속이 상해서 울 정도로 힘들었으면서도 말이다.
“내가 너무 내 생각을 고집해서 의준 씨를 곤란하게 했었죠.”
도헌은 선물을 거부했고 의준은 받기를 강요했다. 도헌은 왜 의준이 상관없는 여자들을 그렇게까지 배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헌은 의준을 통해 전해 받은 선물을 꺼내 보지도 않고 전부 버렸다. 안에 든 편지조차 펴 보지 않았다. 의준은 당황했다. 도헌을 이해하지 못해 타박하기도 했다. 남에 대한 배려를 강요하는 의준에게 도헌은 정색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싸웠다.
“그때 일을 통해 거절할 때도 상대를 배려하라는 교훈을 얻었지요.”
회사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도헌은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에는 로비용 대형 쓰레기통이 있었다.
“앗.”
의준이 말릴 새도 없이 도헌은 곱게 접힌 쪽지를 쓰레기통 안에 던져 넣었다. 의준은 되돌아오는 도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카페에서 곧장 버려서 의준 씨를 곤란하게 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정도의 센스가 생겼어요.”
“…….”
카페에서 쪽지를 버렸다면 곤란해지는 사람은 의준이 아니라 바리스타나 그녀에게 마음을 둔 다른 손님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 때문에 도헌이 곤란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도헌은 미소를 지으며 의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마치 ‘나 잘했지?’라고 묻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의준은 웃고 말았다. 도헌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웃깁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스스로도 놀랄 만큼 도헌의 행동이 기뻤다.
‘이런 사람이 내 거라니.’
바리스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뿌듯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한적했던 로비와 달리 엘리베이터 앞은 사람들로 붐볐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우르르 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안으로 들어갔다. 꾸역꾸역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공간이 좁아졌다.
“의준 씨.”
도헌이 의준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헌의 가슴에 의준의 등이 밀착했다. 체온만큼 분명하게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 조금씩 빨라지는 것도 같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매시간이 생크림처럼 달콤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였다.
부디 이 행복이 오래 계속되기를. 의준은 입안에 남은 생크림 맛을 음미하며 도헌에게 기댔다.
***
아슬아슬하게 면회 시간에 맞춰 병실에 도착한 의준에게 간병인은 희소식을 전했다.
“어머님께서 오늘은 손을 좀 움직이셨어요.”
“정말로요?”
의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는 잠든 상태였다.
“낮에는 줄곧 창밖을 바라보셨어요. 아드님하고 따님 이름을 말하니까 약하게 반응도 보이셨고요.”
잠든 어머니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안색도 수술 전보다 나았다. 담당의 말로는 수술로 혈관 압력을 줄여 주면서 다른 곳에 가해지던 압박도 덜해진 덕분일 수도 있다고 했다.
“다행이네요. …잘 돌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일인걸요. 아, 참, 이거 드려야지.”
간병인은 이렇게 말한 후에 사이드 테이블 위에 두었던 물건을 의준에게 건넸다. 지갑 스타일의 키체인이었다.
“소파 틈새에 끼어 있던 걸 찾았어요. 아마 전에 오셨던 면회객께서 잃어버린 것 같아서.”
“아….”
안쪽에 새겨진 금색 이니셜은 ‘SW KIM’. 물건 주인인 상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 주말 일 이후 상우와는 만나지 않았다. 상우에게서 온 연락은 메시지 한 줄이 전부였다.
‘미안해.’
차마 괜찮다고 답장하지 못하고 둔 메시지 이후 다시 연락은 없었다. 그 뒤로 순식간에 사흘이 지나 버렸다.
‘사과에 대답하지 않은 채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는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지.’
의준은 일단 키체인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소영이는 어디 갔나요?”
“동생분요? 오늘 안 오셨는데.”
“그래요? 이상하네… 오늘 들른다더니.”
의준은 휴대 전화를 꺼냈다. 메시지 어플 창을 열어 여동생에게 어디냐고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읽음 표시가 뜨고 곧장 답장이 왔다.
---나 병원 앞이야. 면회 시간 늦어서 못 들어간대.
“면회 시간 걸려서 못 들어오나 봐요. 저도 이만 가 볼게요. 어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내일 뵈어요.”
의준은 어머니의 메마른 손을 한번 잡았다 놓은 후에 병실을 나섰다. 늦은 면회를 마치고 떠나는 다른 보호자 몇 명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후 어둑어둑한 로비에서 소영과 만났다.
“어디 갔다가 이렇게 늦었어? 수업 또 있었어?”
“아냐, 잠깐 들를 데가 있었는데 이렇게 늦어질 줄 몰랐지.”
“밥은?”
“안 먹었어.”
“지금 몇 신데 밥을 안 먹었냐.”
의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도 먹고 들어가자.”
“사 주게?”
“언젠 안 사 줬냐.”
“그건 그래.”
소영은 키득거리며 의준을 따라 병원을 나섰다. 의준은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 소영을 데리고 길 건너 24시간 식당으로 향했다. 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에 소영이 입을 열었다.
“오빠, 나 할 말이 있는데.”
“뭔데?”
“사실은… 나 오늘 아르바이트 면접 보고 왔어. 일하려고.”
“뭐? 갑자기 왜.”
의준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소영은 대학 입학 후에 반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지만 어머니가 입원한 뒤로는 병간호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며 학교에 다니느라 그만두고 계속 용돈만 받고 살았다. 용돈이라고 해 봤자 가족 생활비에서 교통비를 조금 떼어 쓰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엄마 상태도 좋아졌고, 간병인 선생님도 계시니까 이제 내가 계속 붙어 있을 필요 없잖아.”
“용돈이 부족해서 그래? 지난달부터 올려 줬잖아. 만일 더 필요하면….”
“아냐, 용돈은 뭐… 오빠도 아껴서 나 쓰라고 주는 거 아는데. 아니, 용돈이 문제가 아니고.”
소영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이렇게 말했다.
“지난달에 나, 팀플 했던 거 있지? 대학 연합 공모전에서 수상을 했거든.”
소영의 전공 분야에서는 유명한 공모전이라고 했다. 업계 취업시에 이력서에 적으면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대기업이 후원했기 때문에 상금도 후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부상이 호화로웠다.
“대기업이 후원해 줘서 교환 학생으로 한 달간 해외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어.”
학비 전체와 왕복 비행깃값을 지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현지 생활비와 기숙사 비용은 각자 부담해야 했다.
“내 몫의 상금으로 다 충당할 수가 없어서. …아르바이트해서 조금 더 보탤까 해서.”
“해외….”
의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행동을 오해한 소영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오빠, 나도 내가 이기적인 건 아는데… 진짜 가고 싶어. 딱 한 달만… 다녀오면 엄마 병간호는 다 할게. 취업도 빨리 하고….”
“아니, 아니, 잠깐만. 반대하려는 게 아니야.”
뒤늦게 소영이 공모전 수상 사실을 일찍 밝히지 못한 이유를 깨달은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내가 반대할 줄 알고 숨겼어? 공모전 수상이랑 해외 교환 학생 일.”
“…그야.”
소영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오빠도… 대학생 때 유학 포기했잖아. 아빠 일 때문에. 그 뒤에는 학교까지….”
“…….”
“오빠는 다 포기했는데 나만 하고 싶은 걸 하면… 미안하니까.”
“이게 오빠를 아주 못된 놈으로 만드네.”
의준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야, 이 오빠는 엄마랑 여동생 먹여 살리는 일이 학교보다 중요해서 포기한 거고. 그리고 완전히 포기한 거 아니다? 우리 학교는 휴학 무기한 연장인 거 아냐? 제적 후에도 다시 입학 가능하거든?”
“오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 보려고 진담 반 농담 반 꺼낸 말에 소영은 더욱 울상을 지었다. 의준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야, 야. 농담이야, 농담. 진짜 농담이야.”
“…….”
미심쩍은 여동생의 시선을 받으며 의준은 입을 열었다.
“가고 싶으면 가.”
“…그래도.”
“학비 공짜에 비행기표도 나오면 거절하기 아깝지. 게다가 취업에 도움이 되는 이력이잖아?”
결정적인 역할까지는 아니어도 이력서 한 줄을 추가로 채울 수 있는 경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의준이 더 잘 알았다.
“아르바이트하는 것도 괜찮아. 단, 과로는 하지 말고. 추석 즈음에는 상여금도 나올 거야. 그것도 보태면 되니까.”
“그래도 돼?”
“괜찮다고 했잖아.”
의준은 웃었다.
“모자라면 생활비를 좀 더 줄여 보자. 우리 그거 잘하잖아.”
“오빠….”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만둣국을 내려다보던 소영이 작게 말을 이었다.
“고마워.”
젓가락을 김밥 쪽으로 뻗다 말고 의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야, 남매간에 고맙다는 말은 하는 거 아냐. 왜 남같이 굴어.”
“뭐래, 진짜.”
소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의준과 그녀는 마주 보고 피식 웃은 후에 식사를 시작했다. 의준은 한결 편해진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옆자리에는 얼마 전에 그가 사 준 브랜드 가방이 곱게 놓여 있었다.
‘괜찮아.’
소영이 자기 계획을 우선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그만큼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좋은 징조였다. 그들의 삶이 조금씩 평온하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잘되어 가고 있어.’
조금씩, 조금씩.
‘…언젠가는 나도….’
몇 년간 마음 한구석에 곱게 접어 두었던 바람을 미련이 아닌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의준은 뿌듯한 마음을 억누르며 김밥을 입에 넣었다.
***
일찍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내려앉은 시각, 김상우는 촬영을 마치고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대규모 사극 세트장에서 가장 가까운 리조트 시설에 묵는 관계자는 배우 몇 명과 감독뿐이었다. 뒤늦게 합류한 상우의 숙소는 다른 관계자들의 숙소와 반대편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즈넉한 계곡에 자리 잡은, 아는 사람 없는 비수기의 리조트 디럭스 룸. 일을 마치고 쉬기에는 알맞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무도 없어야 할 상우의 숙소에는 선객이 있었다.
“늦었네.”
상우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열쇠를 주기는커녕 어느 방에 묵는지도 알린 적 없는데 어떻게 들어왔을까.
“여기서 뭐 하십니까, 서영제 대표님.”
“만나러 와 준 사람에게 말본새가 그게 뭐고?”
영제는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대답했다. 상우는 울컥했다.
“사람을 그렇게 패 놓고 뻔뻔하게 만나러 옵니까?”
“아, 오해할 만한 표현을 썼군. 정정하도록 하지.”
영제는 술을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대작 주연 배우께서 또 다른 사고를 안 치고 일을 잘하나 안 하나 확인할라고. 그래가 왔지.”
“…….”
상우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은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투자자님께서 당부하신 대로.”
“그러게. 촬영 순조롭다고 최 감독이 윽수로 좋아하더라. 니도 고분고분해서 스트레스받을 일 없다고. 원래 까탈시럽다매?”
“지난 드라마 건 말이라면, 어처구니없는 일정을 제시하고 사전 계획 없는 연출을 강요할 때 논쟁을 좀 했을 뿐입니다.”
“그걸 신인이 했으니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지.”
상우는 영제를 노려보았다. 영제는 웃었다.
“그 드라마 연출 쪼잔해 가지고 온 데 소문 퍼뜨렸지. 덕분에 이번 작품에 널 캐스팅할 때 최 감독이 투자자들 설득에 꽤 시간을 들였다. 잘해라, 그렇게 편견 없는 사람도 드무니까.”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상우는 이렇게 대꾸한 후에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탄탄하게 잘 잡힌 복근 위로 푸르스름하게 멍든 흔적이 보였다.
“분장팀이 고생 좀 하겠군, 그 멍을 지우려면.”
“누구 때문에 이런 멍이 들었는데요?”
“내 탓이라도 하게?”
영제가 정말로 황당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상우는 울컥해서 대꾸했다.
“당신이 내 배를 쳤잖아?!”
지난주, 상우의 집 현관을 들어서기 무섭게 영제는 상우의 명치에 주먹을 날렸다. 덕분에 현관 앞에 깔았던 이탈리아제 러그에 위장 내용물을 거하게 쏟아 내고 말았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니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대가잖아. 아무리 내라도 죄 없는 사람을 그렇게 패지는 않아.”
“…….”
상우는 분한 표정을 지었다. 영제는 그를 곁눈질하며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도헌이가 직접 방문하지 않았던 걸 다행으로 알아. 그 녀석이었으면 배때지에 멍드는 정도로 끝내지 않았을 테니까.”
상우는 코웃음을 쳤다.
“잘난 투자 회사의 엘리트 임원께서 찾아오시면 뭐, 뺨이라도 열 대 연달아 갈기셨으려나요?”
“뺨? …뺘암?”
영제가 낄낄 웃기 시작했다.
“얘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그날 도헌이가 쳐들어갔으면 닌 지금 여기 읎었어. 새집 장판 바닥에 쳐박혀가 뇌사 상태였거나 병원에 실려 가서 몇 달 입원하고 스캔들 기사 소재나 됐겠지.”
허세 가득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우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이 영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농담 아이다.”
“…….”
“부산 바닥에서 십 대 시절에 양아치 짓 좀 했다 하는 놈들 중에 내 모르는 놈은 있어도 서도헌 모르는 놈은 없다. 내야 덕분에 몸 상하는 일이 덜해서 편했지. 이래 봬도 연약하거든.”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부터 농담입니까?”
“어쨌든 앞으로 도헌이 심기 건드리는 짓은 하지 마라. 내 구해 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영제는 상우의 질문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이의준 씨는 니가 아니라 도헌이를 택했다. 상대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고 억지로 매달리면 좀… 구질구질하잖아, 인기 영화배우 김상우 씨.”
“압니다.”
상우는 내뱉듯이 대꾸했다.
“일방적으로 감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의준이를 존중해야 하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너무….”
“억울하다고?”
“…….”
정곡을 찔리고 입을 다문 상우를 보며 영제는 웃었다.
“하긴 갑자기 나타난 놈이 내 마음에 둔 사람을 가로채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하지만 속상한 마음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영제는 말을 이었다.
“빼앗긴 걸 인정하고 깔끔히 물러서는 것도 남자답지 않겠냐 이 말이야.”
“다른 놈이 상대였으면 저도 이렇게까지 안 합니다!”
상우가 버럭 외쳤다.
“의준이가 그 사람이 아닌 다른 남자를 선택하기만 했어도….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도 않는다고요!”
“도헌이는 왜 안 되는데?”
“한번 헤어졌던 상대 아닙니까.”
“…그야, 내도 옛날 애인과 다시 만나느니 새 애인을 만드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영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내 생각이고. 이의준 씨는 안 그런가 보지. 그게 그렇게 화낼 문제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했던 상대에게 다시 마음이 가다니 이상하잖아요.”
“……?”
영제는 머리를 긁적였다. 도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뭐, 그만큼 좋은갑지.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요.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겁니까?”
상우는 성큼성큼 영제에게 다가오더니 테이블 위에 두었던 영제의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가장 힘들 때 버렸던 남자를, 그래서 오랫동안 힘들고 아파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냐고요.”
“잘 아네? 그러게, 힘들어했지. …생각해 보니 나라면 다시 안 사귈 것 같기는 하다.”
영제는 빈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뭐가 그래 끌렸을까? 세계 최고의 미인도 아닌데. 아, 속궁합이 끝장났을지도 모르지.”
“저속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저는 진지하니까.”
“내도 진지하거든.”
영제는 위스키를 홀짝 마시며 대꾸했다.
“그만큼 납득이 안 간다는 의미다.”
“…….”
“가족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도헌이 같은 놈은 원하는 대로 여자건 남자건 골라잡을 수 있어.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몸을 던진다고. 그런 놈이 몇 년째 결혼은커녕 애인 소식 하나 없디마는 갑자기 전에 사귀었던 남자와 재결합하다니, 신기하지.”
그 말을 들은 상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서도헌 씨 이야기를 끼워 넣지 마십시오. 의준이 이야기 중이니까.”
“화제를 도헌이로 바꾼 건 니다.”
“무슨 말입니까?”
“니야말로 무슨 소린데?”
상우와 영제는 서로 마주 보았다. 이윽고 영제가 입을 열었다.
“이의준 씨가 일방적으로 도헌이를 찼잖아.”
“……? 서도헌 씨가 의준이를 버렸죠. 아주 잔인하게.”
“뭐?”
영제는 눈을 깜박였다. 상우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도헌의 말이 되살아났다.
‘나는 이의준을 버린 적이 없어. 이의준이 나를 버렸지.’
이상했다. 어째서 서도헌과 이의준은 서로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말하는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무슨 생각을 그래 심각하게 하노.”
영제의 질문을 들은 상우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영제는 상우의 안색을 천천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지금 그 얘기….”
“제가 착각했어요.”
상우는 영제의 말을 잘랐다. 영제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씻어야겠군요.”
상우는 몸을 돌렸다.
“오늘 여기 묵으십니까?”
“잘하고 있나 확인만 하고 갈라고 했는데. 딱히 가야 할 이유가 있지는 않다.”
“자고 가요. 내일은 촬영이 저녁에 있으니까 오늘은 오붓하게 둘이 술이나 마시죠.”
“…흐음?”
영제의 얼굴에 호기심이 번져 나갔다.
“웬일이고. 김상우 씨가 나를 잡아 둘라 하고 말이야.”
“혼자 술 마시기 질렸을 뿐입니다.”
욕실 앞에서 바지를 벗어 침대로 던진 후에 상우는 영제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같이 씻을까요?”
말과 함께 속옷을 허리 아래로 천천히 내리는 상우를 본 영제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감히 실연으로 상심한 마음을 나로 퉁치겠다고?”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뭐, 위로해 주겠다면 거절할 이유도 없지만.”
영제의 시선을 느끼며 상우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 말대로 나는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저질이니까.”
영제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위로 올라갔다. 상우가 입을 맞추려 하자 그는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먼저 씻고. 니 냄새 난다.”
“…….”
영제가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시선이 저절로 그의 등으로 향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사람보다 먼저 알아봐야겠어.’
일단 이 사람과 할 일부터 마무리하고. 상우는 이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욕실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