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밀리는 한강 대교를 건너 도착한 장소는 도헌의 맨션이었다.
의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따끔거리는 얼굴과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여동생이 있을지도 모르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도헌은 말없이 그의 집을 향해 차를 틀었다.
“침실에 붙은 욕실을 써요.”
상우 집에서 몸싸움을 벌이면서 맥주와 음식을 뒤집어쓴 탓에 옷은 얼룩지고 몸은 끈적거렸다. 일단 씻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자 도헌은 침실을 가리켰다.
“욕실에 수건이 모자랄 겁니다. 다른 욕실에서 가져올 테니까 일단 씻고 있어요.”
도헌은 이렇게 말한 후에 침실 반대편 방으로 향했다. 의준은 혼자 도헌의 침실에 들어섰다. 널찍한 침대가 놓인 어두컴컴한 방 저편에는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무수히 반짝이는 불빛의 흐름을 응시하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씩 편해졌다.
“의준아.”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도헌이 수건을 들고 침실로 들어섰다.
“왜 그래? …손 많이 아파?”
“예?”
의준은 질문을 듣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의식적으로 왼쪽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나 보다. 손등에 불거진 손가락뼈 부근이 뻐근했다.
“주먹으로 쳤군. 욱신거리지?”
도헌은 수건을 욕실에 가져다 놓고 나왔다.
“내일이 되면 부을 거다. 더 아파질 테니 씻고 나서 찜질해.”
“…….”
의준은 욕실로 들어갔다. 셔츠 단추를 풀려다 말고 흘깃 뒤로 시선을 돌리자 그에게서 돌아선 채 옷장 문을 여는 도헌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설마 사람 때려 보셨어요?”
“대학 오기 전에.”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잘못 쳐서 뼈에 금이 간 적도 있었어. 한여름에 깁스하고 고생했지.”
“…어쩌다 사람을 치셨어요?”
“별 이유 없이.”
도헌은 이렇게 대꾸한 후에 덧붙였다.
“영제와 같은 학교를 다녔거든. 겁대가리 없이 우리 관계를 놀리던 놈들이 있었지.”
동갑내기 작은아버지와 조카. 설명을 더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사람을 치면 맞은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친 사람에게도 몸에 충격이 가.”
도헌은 옷장에서 회색 티셔츠와 검은 트레이닝팬츠를 꺼내 침대에 놓고 말을 이었다.
“익숙해지면 덜하지만 아니면 다음날 몸살처럼 아프기도 하지.”
“그렇군요.”
의준은 천천히 주먹을 쥐어 보았다. 손 안쪽에서 찌르르 하는 통증이 솟아났다.
“상우의 코를 쳤어요. …피도 났죠.”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 얼떨결에 주먹이 얼굴로 향했다. 방심했던 상우는 코를 잡고 뒤로 주저앉았다. 손 사이로 주르륵 피가 흘러내리자 의준이 더 놀랐다.
“부러졌으면 어떻게 하죠? 상우는 배우인데…. 나 때문에 촬영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될 텐데요.”
“자업자득이지. 걱정해 줄 필요 없어.”
“하지만 제가 너무 세게 쳤어요. 그냥 밀어낼걸.”
“그럴 만한 여유가 있었나?”
“…….”
의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헌은 한숨을 내쉰 후에 말했다.
“영제가 올라갔으니 문제가 있으면 병원에 데려가겠지. 걱정하지 마.”
어서 씻고 나와. 도헌은 이 말을 남기고 욕실 문을 닫았다. 의준은 셔츠와 바지를 벗고 샤워부스로 향했다. 물을 틀자 머리 위에서 물줄기가 쏟아졌다.
“앗, 차거….”
정신이 확 들었다. 곧 따스한 물이 이어서 떨어졌다.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풀리면서 몸이 따스하고 촉촉한 물에 젖었다.
상우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욱신거리는 주먹이 아니었다면 꿈으로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물줄기가 눈가로 흘러내렸다. 눈을 감자 상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준의 어깨를 짓누른 채 절박한 표정으로 했던 말도 되살아났다.
‘널 좋아해.’
입을 꾹 다물자 찢어진 입술에서 통증이 솟아나면서 피 냄새가 입안으로 배어 들었다. 의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서도헌보다 먼저 널 좋아했다고.’
기억을 지우듯이 머리를 문지르고 몸에 남은 흔적을 지웠다. 아무리 몸을 깨끗하게 씻어도 한번 기억에 새겨진 말은 지울 수 없었다. 의준은 체념하고 샤워를 마쳤다.
의준이 욕실 문을 열었을 때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준은 조용히 침실로 나와 도헌이 준비해 둔 티셔츠와 트레이닝팬츠를 입었다. 젖은 머리를 대충 넘기고 침실 밖으로 향하려던 의준은 때마침 돌아온 도헌과 마주쳤다.
“어디 가게?”
“아뇨… 형이… 어디 가셨나 해서.”
의준의 말에 도헌은 잡고 있던 물건을 들어 보였다. 갸름한 목을 지닌 유리병은 얼핏 맥주처럼 보였지만 탄산수였다.
“목마를 것 같아서.”
“고맙습니다.”
의준은 탄산수 병을 받아들고 마개를 따려 했다. 그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헌은 다시 병을 받아 들어 마개를 연 후에 다시 의준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앉아서 마셔.”
도헌은 턱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의준은 순순히 침대에 걸터앉았지만 탄산수를 마시지는 않았다. 병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앉아 있는 그를 두고 도헌은 침대를 돌아 창가로 향했다. 사이드 테이블 서랍을 열던 그의 귀에 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우가 저를 좋아했대요.”
서랍을 열던 손이 멈췄다.
“전혀 몰랐어요. 상우는 여자 친구도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낌새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
도헌은 서랍에서 일회용 밴드와 연고를 꺼냈다. 의준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은 안 놀라네요.”
“티가 났으니까.”
의준의 지갑을 떠올렸다. 올해 새로 나온 명품 지갑을 굳이 쓰던 물건이라고 거짓말까지 하며 친구에게 선물할 이유는 달리 없었다.
명품 매장에서 상우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의준을 끌어안고 뺨을 비비며 도헌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모습. 제작 발표회장에서도 그랬다. 앞으로 의준에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표시하겠다던 말을 떠올리기 무섭게 불쾌함이 솟아올랐다.
‘뭐든 해 주고 소중히 하겠다고 선언해 놓고 한다는 짓이 고작 이런 건가?’
좋아하는 상대라면 상처 입혀서는 안 된다. 상식이 아니던가.
의준의 손등은 부어 있었고 관절에는 까진 상처가 나 있었다. 뺨에도 긁힌 상처가 있고 찢어진 입술은 보기만 해도 아플 만큼 부어오른 상태였다.
‘나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아.’
서랍장에서 꺼내 가져온 밴드를 의준의 손등과 뺨에 붙였다. 그리고 찢어진 입술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눈치채지 못했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어.”
“알아요.”
도헌은 상우의 마음을 눈치챘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의준은 몰랐을까.
‘…모른 척했던 건 아닐까?’
집이 기울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 평생 갈 인연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차례로 등을 돌렸다. 살아가기에 급급해서 뒤에서 그를 비웃는 친구도, 연락을 끊은 친구도, 그리고 그를 적대시하던 친구도 있었다. 유일하게 상우만이 의준의 곁에 남아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그다지 친했던 기억이 없었던, 솔직히 친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던 상우만이.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상우를 이용했는지도 몰라요.”
목적 없이 친절한 타인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왜 상우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까.
“상우에게 억지로 친구라는 굴레를 뒤집어씌우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려고….”
“그만둬.”
도헌이 의준의 말을 가로막았다.
“죄책감 가지지 말랬지.”
“…….”
“백 보 양보해서 네가 김상우의 감정을 눈치채고 이용했어도 김상우가 너에게 이런 상처를 입힌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못해.”
도헌은 밴드를 붙인 의준의 손을 감싸듯 쥐었다.
“이런 짓은 용서할 수 없어.”
“…….”
도헌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음이 생각을 못 따라가나 봐요.”
“남에게 너무 관대해서 그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제가 관대해요?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사람들은 남의 장점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 본인이 몰라야 이용하니까.”
대신 단점은 집요하게 언급하지. 가끔은 장점을 단점처럼 돌려 말하기도 하고. 도헌이 혼잣말처럼 덧붙이자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형 말이 옳은지도 모르겠어요.”
몇몇 사람들과의 기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용당한 이유가 다 있었네요.”
“네 탓이 아니야.”
“알아요.”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다면서 왜 울어.”
“네?”
의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울다니, 누가….
되물으려는 찰나 손등 위로 뚝 하고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눈을 깜박이자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이러지.”
의준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손등에 붙였던 밴드가 눈가를 스치면서 따끔한 통증이 솟아올랐다.
“아얏….”
“무슨 짓이야.”
도헌은 급히 의준의 손을 낚아채고 밴드가 스친 눈가를 살폈다.
“괜찮아? 눈에 스쳤어?”
“아뇨….”
“어디 봐.”
투명한 눈물이 고인 눈동자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헌의 얼굴이 비쳤다. 얼핏 화가 난 듯한 표정과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또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널 좋아해.’
고백 후에 그를 바라보던 상우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애틋하고 절박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던 기대에 가득한 눈빛을.
상우는 진심이었다.
고백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용기가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고백을 하려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필수였다. 그저 잔잔하게 찰랑이는 수준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솟아오르는, 주변 상황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휩쓸어 버릴 만큼 강한 감정이 말이다.
상우를 이해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상우에 대한 의준의 감정은 우정이라는 그릇 안에 잔잔하게 고여 있을 뿐이었다.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을 향한 감정은 다른 곳에 고여 있었다. 새로 채울 일 없이 말라붙은 채 깨져 사라져 버리리라 생각했던 그릇 안에, 테두리까지 가득 차서 넘실대고 있었다.
“좋아해요.”
상우에게 공감하면서 그에게 들려줄 수 없었던 말을, 다른 남자에게 속삭였다. 아마도 지금 의준은 상우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해요… 하지만 형을 좋아해요.”
내뱉은 말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넘쳐흐른 감정의 행방도 그가 정할 수 없었다.
의준은 무력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도헌의 손이 의준의 뺨을 감쌌다. 눈물에 젖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는 손길에 이어 눈꺼풀 위에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전해졌다.
“…윽….”
눈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찢어진 입술이 뜨끔하고 아팠다. 통증 위로 따스한 숨결이 밀려들었다.
“의준아.”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부드러웠고 얼굴을 감싸는 손길은 다정했다. 의준은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떨리는 의준의 입술 위에 도헌의 입술이 닿았다.
‘도헌이 형.’
천천히 입술을 겹치며 그의 품에 안겼다. 의준은 도헌의 옷깃을 움켜쥐고 입을 벌렸다. 자연스럽게 밀려들었던 숨결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읍….”
자연스럽게 의준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의준의 위에 도헌의 몸이 겹쳐졌다. 두 사람의 무게만큼 의준은 푹신한 이불 사이로 가라앉았다.
“…도헌이 형.”
“의준아.”
서로의 이름을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도헌은 서두르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괜찮겠어?”
입술은 더 부었고 운 탓에 눈가가 쓰렸다. 상우에 대한 죄책감과 이유 모를 두려움에 마음은 위축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괜찮을 수밖에 없었다.
“네.”
대답과 함께 도헌의 목에 팔을 감았다.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댔다. 쪽 하는 민망한 소리를 낸 직후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의준은 힘주어 말했다.
“괜찮아요. …형이니까.”
불안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상우가 그를 쓰러뜨렸던 때와는 달랐다. 이건 기대감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줄곧 바랐던. …서도헌과의 미래에 대한.
“형하고는 괜찮아요.”
속삭임과 함께 내뱉은 숨결은 도헌의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
따스한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이어서 콧등, 눈가 그리고 뺨을 지나 턱으로. 잠시 턱을 간질였던 숨결은 입술로 올라와 부드러운 감촉이 되었다. 감촉에 힘이 실리는 순간 찢어진 입술에 따끔 하는 통증이 스쳤다.
“…아얏….”
작은 신음 소리를 들은 도헌이 입술을 뗐다.
“미안. 괜찮아?”
“괜찮아요. 잠깐 따끔해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던 의준은 두 팔로 도헌의 목을 감았다. 도헌은 의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서두르지 말자.”
“…내키지 않아요?”
“그런 말이 아니야.”
도헌은 웃었다.
“밤은 충분히 기니까, 천천히 함께하자는 의미지.”
말의 끝에 그의 입술이 다시 가까워졌다.
습기를 머금은 숨결이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다시 턱으로, 그리고 턱 아래로.
감촉이 아래로 향하는 사이 의준의 숨결은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다.
“형….”
“응?”
대답이 가슴 언저리에서 들려왔다.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떨렸다.
“저기… 제가, 오랜만이어서요. 그….”
민망해서 단숨에 말하지 못하고 말을 끊던 찰나 아래쪽에서 손길을 느꼈다. 의준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윽….”
자극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숨길 수도 참을 수도 없는 반응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 잠깐…….”
타인과 몸을 맞대기는 오랜만이었다. …아니, 5년 만에 처음이었다. 삶에 시달리느라 연애는커녕 일회성 만남조차 꿈꿀 수 없었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자기 몸에 욕망이 깃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식으로 빠르게 욕구를 느낄 줄도 몰랐다.
몸이 들썩였다. 의준이 침대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시트를 움켜쥐자 도헌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날 잡아.”
기다렸다는 듯이 도헌의 목에 팔이 감겼다. 힘이 잔뜩 들어간 의준의 팔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열기와 떨림이 기분 좋았다.
빨리 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래 느끼고도 싶었다. 서로 상충되는, 하지만 같은 욕망에 몸이 들썩였다.
‘도헌이 형…!’
숨결도 속삭임도 그리고 손길도 모두 도헌이었다.
오랫동안 잃었던, 이제야 되찾은.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거친 숨결을 내뱉던 의준의 입술에 도헌의 숨결이 스쳤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위로 향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따스한 빛을 머금은 회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준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달콤했고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다정했다.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의준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 저기….”
“싫어?”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손을 오가며 도헌이 물었다.
“싫…고 좋고의 문제는 아니라. …그게.”
“억지로 안 할 테니 긴장 풀어.”
다정한 속삭임은 진실이겠지만 그 안에 깃든 야릇한 열기를 숨기지는 못했다. 귓가와 닿은 입술에서도 진득한 욕망이 묻어났다.
“의준아.”
도헌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의준은 대답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나름대로는 각오를 굳히고 기다리는 모양새였지만 도헌은 그런 의준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손길이 천천히 떠나갔다. 의준은 슬쩍 눈을 떴다.
“…형? 왜….”
“난 서로 즐기기를 원하지 한 사람이 억지로 참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특히 그 사람이 너라면 더욱더.”
도헌이 몸을 낮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니에요, 형. 그런 게 아니고….”
의준은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그. ……없어서요.”
“뭐가 없다고?”
“그…. ……가요.”
“……?”
기어들어 가는 의준의 대답에 도헌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결국 의준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거기, 그… 경험이 없다고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랐으리라. 어쩌면 기가 막혀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의준도 이런 고백을 행위 도중에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부한다는 오해를 사기보다는 수치를 감당하는 편이 나았다.
‘아니야, 전혀 낫지 않아! 말하지 말걸!’
말을 내뱉은 직후 스스로 느껴질 만큼 몸 전체가 화끈거렸다. 귓속에서 심장은 쿵쾅쿵쾅 뛰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영원히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도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차라리 비웃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형, 화났어요?”
침묵이 길어지자 참지 못한 의준은 입을 열었다.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내가 왜 화를 내?”
“그러니까.”
의준은 말문이 막혔다. 괜히 말을 꺼냈나 싶은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제가 거부해서요.”
“아니.”
민망함을 무릅쓰고 내뱉은 말에 대한 대꾸는 과하다 싶을 만큼 짧았다. 속상해진 의준은 눈을 떴다. 그 순간 도헌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
도헌은 온화한 표정으로 의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지만, 설마 경험이 없다는 말에 만족한 것일까.
‘그런 취향이었어?’
의준은 속상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형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요.”
“……? 뭐가.”
“지금 제가 그… 처음이라고 해서 기분… 좋아진 거죠?”
“뭐?”
도헌은 뒤늦게 의준이 어떤 오해를 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웃은 게 아니야. 오해하지 마.”
“…그러면요?”
“기뻐서.”
뭐가요? 선명하게 질문을 머금은 의준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은 후에 도헌은 입을 열었다.
“너를 즐겁게 해 줄 기회가 생겼잖아.”
“……!”
의준의 귀에 도헌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안심해.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까.”
손길은 처음보다 부드러웠다. 동시에 입술에 닿는 따스한 숨결에 마음이 편해졌다. 긴장이 풀리면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경험이 없었으니 손길이 닿은 것만으로도 거부감을 느꼈을 텐데 의준은 저항하지 않고 도헌에게 순순히 몸을 맡기고 따랐다.
‘날 믿었으니까.’
김상우에게 그러듯 거부하고 내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묘한 우월감을 주었다.
‘이 녀석은 나를 좋아해.’
새삼스럽게 와닿는 의준의 진심에 가슴이 지끈하고 저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나를 또다시 좋아할 수 있지?’
한 번 버렸던 상대가 아닌가. 의문에 혼란이 더해지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반대로 몸은 단순하게 반응했다.
의준이 상기된 뺨과 촉촉하게 젖은 눈매 그리고 가쁜 숨을 내뱉는 도톰한 입술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도헌이 형….”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지금까지 들었던 어느 누구의 목소리보다 유혹적으로 몸을 휘감았다.
‘빌어먹을.’
이 관계의 목적은 달리 있었다.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의준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이 두려움인지 아니면 흥분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다.
“…형….”
도헌을 불렀다. 대답 대신 입맞춤이 돌아왔다. 입술과 함께 몸이 밀착했다.
“…윽….”
“…의준아.”
도헌이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아까부터 그저 이름만으로 바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고 싶어도 몸이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으….”
“…의준아.”
“괜…찮, 아요.”
도헌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의준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처… 처음, 이라서 그래요, 금방….”
“…….”
심장이 지끈하고 쑤셨다. 도헌은 거칠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몸을 일으켰다. 맞닿았던 몸이 떨어졌다.
“…도, 헌이 형?”
의준은 실눈을 떴다.
“왜요? …괜찮아요?”
두려움이 미처 가시지 않은, 의심스럽고 어리둥절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도헌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낯선 행위에 겁을 먹은 상태에서 상대가 괜찮은지 묻다니.
‘사람이 좋은 건지, 바보인 건지.’
여전하구나. 도헌은 의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리할 필요 없어.”
“네? 아니에요, 처음이라 좀 긴장해서….”
“아팠잖아.”
“어… 그야, 처음이니까….”
의준은 대답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처음’임을 반복해 말하다니, 마치 그 부분을 강조하는 것 같지 않은가. 민망함에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죄송해요.”
“왜 사과를 해.”
도헌은 쓴웃음을 지으며 의준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가까이했다.
“내가 서둘렀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지나치게 흥분했나 봐. 미안해.”
“…….”
도헌은 의준의 눈동자에 안도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 두자.”
“어….”
의준이 당혹스러운 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러면 형은….”
도헌의 상태는 피부로 전해지고 있었다. 의준이 느꼈던 감각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채였으니 당연했다.
“난 괜찮아.”
도헌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내가 서둘렀어. 다음에 좀 더 알아보고 다시 시도하자.”
무엇을 어떻게 알아보아도 저 묵직하고 단단한 존재감이 줄어들지는 않을 텐데. 의준은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경험이 있었으면 형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 생각 없이 흘러나온 말에 도헌은 눈썹을 위로 올렸다. 미묘하게 변한 그의 표정을 눈치챈 의준은 민망한 투로 타박했다.
“…처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
“역시 처음이 아니었다면 실망했을 것 같아요?”
“아니.”
“하지만 지금 표정이….”
“실망할 일도 아니고 실망할 이유도 없어.”
부드럽지만 단호한 대꾸에 의준은 민망해졌다.
“…아, 네. 그러시구나.”
“그래.”
도헌은 낮게 속삭였다.
“대신 너의 첫 상대에게 무척 질투했겠지.”
“……!”
놀라서 벌어진 입술 위로 다정한 숨결이 닿았다. 상처 위로 배어난 피를 부드럽게 핥아 없애며 도헌이 다시 몸을 밀착했다.
“의준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달콤하게 스며들었다. 의준은 눈을 감으며 손을 아래로 향했다. 도헌이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형은 아직이잖아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뱉은, 작은 속삭임에 도헌은 웃었다.
‘이 녀석은 나를 좋아해.’
의준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감정을 표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행동과 말에 가슴이 뛰었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만족감마저 들었다.
‘만족감?’
자연스럽게 떠오른 표현에 생각이 멈췄다. 동시에 의문이 생겨났다.
‘나는 왜 이 녀석에게 복수하려 했지?’
의준이 그의 목덜미에 머리를 댔다. 숨결이 거칠게 목을 휘감았다.
“형….”
애타는 속삭임에 사고가 멈췄다.
의준의 손 위에 도헌의 손이 겹쳐졌다. 숨결이, 체온이, 그리고 감촉이 다시 하나로 이어진 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길고 달콤한 밤은 그렇게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