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18/33)

18.

김상우의 새집은 강남의 큰 대교 옆에 있었다. 유명한 대기업 브랜드로 거실과 안방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신축 주상 복합이었는데 혼자 살기에는 과하다 싶을 만큼 넓었다.

“…사는 사람은 한 명인데 방이 네 개라니….”

안내를 받아 집을 한 바퀴 둘러본 후에 의준은 감탄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집주인인 상우는 웃었다.

“그러게나. 나도 놀랐어.”

“네가 고른 집이 아니야?”

“위치하고 이름은 들었는데 이렇게 클 줄은 몰랐지.”

의준을 거실로 인도하면서 상우는 말을 이었다.

“부모님은 살다 보면 좁아질 거라고 하는데 그럴 것 같지 않아. 누구라도 데리고 들어와 살면 또 모르겠지만.”

“가족이 늘어나는 걸 염두에 두셨나? 혹시 빙 돌려서 결혼 독촉하시는 거 아니야?”

“우리 엄마라면 가능성이 있네. 모르는 척해야겠어.”

“하하하.”

의준은 웃으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넓은 거실에는 소파와 텔레비전, 에어컨은 물론이고 안마 의자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모두 새 물건이었다.

‘너무 깨끗해서 모델 하우스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텅 빈 집보다는 사람 사는 느낌이 나네.’

비슷하게 넓지만 아무것도 없던 도헌의 집 거실이 떠올랐다. 1년 넘게 살았으면서 어떻게 의자 하나 갖추지 않았을까.

‘사무실에도 원래 있던 집기 외에 따로 들인 집기가 없었지. …인테리어에 관심이 없는지도.’

“왜 웃어?”

상우의 질문이 들려오는 바람에 의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다가온 상우가 의준에게 맥주 캔을 내밀었다.

“어, 고마워. 그런데….”

의준은 벽걸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작하기에는 이르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안 왔는데.”

“다른 사람들? 올 사람 없는데.”

“뭐?”

의준은 놀라서 되물었다.

“없다니, 집들이잖아.”

“촬영 일정 중에 잠깐 짬을 냈을 뿐이라 다른 녀석들하고 시간을 맞추기는 번거로워서.”

상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나만 불렀다고? 왜?”

“왜긴 왜야, 너한테는 빨리 새집 구경을 시켜 주고 싶었으니까지.”

상우는 이렇게 말한 후에 캔을 내밀었다.

“자, 건배나 하자.”

“어? 어….”

의준은 얼떨결에 캔을 부딪쳤다. 상우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했다.

“이것저것 주문했으니까 배터지게 먹자. 오늘은 식이 포기할 테니까.”

“내일 촬영이라며 얼굴 부으면 어쩌려고.”

“안 부어, 걱정 마.”

상우는 휴대 전화로 배달 가능한 음식 목록을 확인한 후에 이것저것 음식을 주문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널찍한 거실 테이블 위에 온갖 음식이 가득 차려졌다.

“야, 너무 시켰어.”

“술안주는 골라 먹어야 제맛이잖아.”

상우는 피자를 한 조각 떼며 대꾸했다.

“두세 명 더 있으면 더 시킬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긴 하네.”

“사람에 맞춰 시켜야지 음식에 맞춰 친구를 부를 생각을 하냐.”

의준의 핀잔에 상우는 웃었다.

“아니, 친구 말고, 예를 들어 여기 같이 사는 사람이 많으면 좋았겠다 싶어서.”

“가족 말이야? …이사하자마자 본가가 그리워졌어?”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같이 살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싶은 거지.”

“의미심장한 말이네. 뭐야, 혹시… 누구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정말로 그러리라 생각해서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우는 의외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준은 놀라서 집었던 탕수육을 떨어뜨렸다.

“…진짜 있어?”

“응.”

“누군데?”

“너.”

대답을 듣기 무섭게 이번에는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의준은 상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농담을 너무 진담처럼 하는 거 아니야?”

“농담 아닌데.”

“농담이 아니라니….”

의준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상우는 진지했다.

“방은 네 개, 욕실도 두 개야. 위치상으로 너희 회사나 어머님 병원도 가깝고… 괜찮지 않아?”

“아니, 그게….”

의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은 고마운데, 이런 집에 살 비용을 감당할 처지는 아니거든. 보증금은 그렇다 쳐도 월세가 보통이 아닐 텐데….”

“너한테 돈을 왜 받아. 내가 들어와 살라고 부탁하는 처지인데.”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아니, 그건 더 아니지. 왜 네 집에 내가 공짜로 살아? 그럴 수는 없어.”

“친구 집인데 뭐 어때.”

“친구니까 더 안 되지.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가 아니야. 전부터 그러자고 생각했어.”

“…….”

의준은 말을 잃었다.

“이번 촬영도 그렇고 앞으로도 작품 때문에 종종 집을 비우는 일이 생기겠지. 그럴 때 집을 관리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잖아. 매니저 형이 종종 들르겠지만 너하고는 아는 사이니까 불편하지 않을 테고.”

“상우야.”

“집세는 안 받아. 어머님 쾌차하실 때까지… 아니, 그 뒤에도 머물러도 돼. 어머님과 소영이 다. 소영이는 내 여동생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무 문제 없지.”

“아니, 상우야, 그건 좀….”

“어차피 너도 지금 집에서 이사할 예정이었잖아?”

“어떻게… 아니, 누구에게 들었어?”

지난주에 집주인으로부터 월세를 올려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니면 보증금을 조금 올리고 싶다고 말이다.

“소영이도 알던데. 아마 집주인이 말했겠지.”

상우는 말을 이었다.

“병원에서도 멀고, 너 출근하기에도 그리고 소영이가 학교 다니기에도 멀잖아. 게다가 요즘 근처 치안도 안 좋아졌다며. 소영이가 무섭다던데.”

“…….”

“어차피 집을 옮겨야 할 상황이니 잘됐다 싶어서 말하는 거야. 교통 편리하고 안전하고, 돈도 안 들고, 얼마나 좋아?”

상우는 웃었다.

“같이 살자.”

“아니, 상우야. 그건 아니지.”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기껏 독립해서 마련한 집이잖아. 나 혼자도 그런데 우리 가족까지… 난 그렇게 염치없는 짓은 못 해. 게다가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너희 부모님은 또 어떻고.”

“부모님도 너희 사정을 아시니까 괜찮아.”

“아시니까 더 안 되는 거야.”

의준은 울컥해서 대꾸했다. 상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때는 의준의 집도 유복했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구를 위해 베풀고 싶은 상우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렇지만 상우와는 표면적으로나마 그때와 변함없는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알량한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래야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내가 갚지 못할 만큼은 받을 수 없어.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갚지 않아도 된다니까?”

“알아. 하지만 내 마음의 문제야.”

의준은 억지로 웃었다.

“그 사람에게는 갚을 수 있어서 받았고?”

“뭐?”

의준은 당황했다. 상우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취업 알선도 했고 병원비도 대 줬지. 그건 왜 받았어?”

상우는 서도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받고 나에게는 못 받을 이유가 뭔데.”

“그때는 도헌이 형, 아니, 전무님이 마침….”

의준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취업도 급했고 병원비도 더는 미룰 수 없었으니까.”

“내게는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없었으면서?”

“그건….”

집과 마찬가지였다. 친구에게는 쪼들리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넌 늘 그랬어. 네 기준에서 과하다 싶은 도움은 모두 거부했지. …난 얼마든지 널 도울 생각이었는데 매번 거절당했어. 너 혼자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상우야.”

“그래도 네 마음이 그렇다면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 도움은 거부하고 그 사람 도움은 받아들이는 모습을 봤을 때는….”

서도헌과 자신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전 남자 친구와 친구의 차이만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는 의준의 태도를, 이름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변해 버린 표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서도헌이 그렇게 특별해?”

“무슨 소리야?”

“서도헌을 좋아하지?”

“……!”

의준은 당황했다.

“네가 그 남자에게 미련이 남았다는 건 알아. 그래서 그 남자가 손을 내밀었을 때 거부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의준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상우는 흔들리는 의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한번 널 버렸던 남자를 어떻게 다시 좋아할 수 있어?”

“…상우야.”

“너를 배신했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짝사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체 왜….”

“…….”

의준은 입을 열다 말고 말을 삼켰다.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돌리는 의준을 본 상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짝사랑이 아니구나.”

“…….”

“그 남자에게 고백했어?! 언제?”

“안 했어.”

의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백 안 했어. 그냥… 마음이 통했어, 서로.”

“사귀어?”

“……응.”

“몇 년 동안 생사도 모르던 사람을? 재회하고 겨우 몇 달 만에?”

상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이 없던 의준은 시선을 돌렸다.

“사과는 받았어?”

상우가 물었다. 무슨 사과 말인가. 의준이 의아해하자 상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 말 없이 널 떠났던 일에 대한 사과. 왜 떠났대?”

“그건….”

의준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몰라. 안 물었어.”

“왜?”

“…너하고 상관없잖아.”

상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하고 상관없다고? 왜?”

“아무리 친구라도 사생활을 추궁할 권리는 없어.”

“사생활? …지난 몇 년간 힘든 티는 다 내서 사람 걱정하게 만들고?”

“너에게 하소연한 기억 없어.”

고통은 혼자 씹어 삼켰다. 그 일 외에도 신경 쓸 일투성이였고 하소연할 일은 나날이 늘어났다. 일로 바쁜 상우와는 한두 달에 한 번 만나면 다행이었다.

“하소연을 안 했으니 걱정도 안 했을 거라고? 바보냐, 너?”

상우가 의준의 어깨를 덥석 움켜쥐었다. 살을 파고드는 강한 힘에 의준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혼자 견디고 넘긴 일이라고! 그걸 왜 네가 들쑤셔? 무슨 권리로?”

“이의준!”

“아무리 친구라도 아픈 곳을 건드릴 권리는 없어!”

울컥한 의준은 상우를 뿌리치려고 몸을 틀었다. 그때였다.

“친구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상우가 의준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의준의 입술에 겹쳐졌다.

“……!”

의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 위로 상우의 체중이 얹혔다. 입술 사이로 밀려드는 뜨거운 숨결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읍…!”

의준은 상우를 밀어냈다. 입술이 떨어졌다.

“뭐 하는 거야?!”

“그 남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두 번이나 반할 정도야?”

상우가 물었다. 거친 숨결에서 진한 술 냄새가 났다.

“비켜, 김상우. 너 취했어.”

상우가 의준에게 몸을 겹쳤다. 밀착한 하반신에 예상치 못한 감촉이 느껴졌다. 상우는 흥분한 상태였다.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야, 김상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의준은 상우를 밀어냈다.

“너 취했다니까! 저리 비켜. 일단 떨어져서 이야기하자, 어?”

“안 취했어.”

“취했어!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상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서 의준은 말을 멈췄다. 상우가 입을 열었다.

“좋아해.”

의준의 뺨 위로 툭, 하고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계속 널 좋아했어.”

툭, 툭, 뺨과 이마에 이어 코 아래로 떨어진 눈물이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상우는 눈물에 마비되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는 의준의 뺨을 어루만졌다.

“의준아, 좋아해.”

속삭임이 숨결을 타고 입술에 다가왔다. 의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

서도헌이 김상우의 새집 앞에 차를 세우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오후에 그와 만났던 서영제가 지금 묵고 있는 숙소라면서 주소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김상우라고?”

도헌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아파트 단지 앞 도로에 차를 멈추고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서영제를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김상우네 집을 오갈 정도로 친해졌어?”

“안 친해. 그냥 가끔 시간 맞을 때 보는 정도.”

영제는 태연하게 말했다.

“…돈 되는 상품에는 손대지 않는 주의 아니었나?”

“내가 파는 상품도 아니고, 손 좀 댔다고 돈이 안 될 상품도 아닌데 뭐가 문젠데. 글고 먼저 손댄 쪽은 김상우고.”

김상우가 손을 대도록 만들었겠지. 도헌은 혀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말을 삼키며 앞을 바라보았다.

“김상우는 이의준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영화 제작 발표회장에서 도헌에게 했던 선언은 무엇이었던가. 이유 모를 불쾌함이 솟아올랐다.

“세상에 감정이랑 몸이랑 따로 노는 사람도 많다. 다 니같이 일편단심도 아이라 이거지.”

도헌은 키득거리는 영제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지?”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 누가 몰라.”

영제는 휴대 전화를 귀에 대며 말을 이었다.

“특히 이의준 씨 관련된 일에는 희로애락이 너무 분명해서 김빠진다. 좀 감추는 시늉이라도 해야 정보 캐내는 재미라도 있지.”

“지금 뭐라고 했어?”

“……? 뭐가?”

“어떻게 네가 의준이를 알지?”

채근하듯 질문을 내던진 직후 도헌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제가 씩 웃었다.

“거 봐라. 그렇다카이.”

영제는 휴대 전화를 뗐다. 화면에 표시된 ‘김상우’의 이름 아래를 터치해서 스피커 모드로 돌린 후에 그는 말을 이었다.

“관계를 비밀로 하려면 대낮에 사무실에서 남자끼리 부둥켜안지는 말아야지.”

“…….”

지난주 영제가 사무실을 방문했다 떠난 직후의 일이었다. 분명히 나간 후였는데. 도헌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영제가 말했다.

“어디서 나불거릴 생각 없으니 안심해라.”

도헌은 얼굴을 찌푸렸다. 영제는 태연하게 물었다.

“근데 어쩌다가 남자 비서한테 손을 댔노?”

“…떠들지 않겠다며?”

“떠들 생각은 없는데. 관심은 있그든.”

영제는 메시지 프로그램을 켜서 빠르게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원래 남자 취향이었나? 아니면 이의준 씨가 취향을 뛰어넘었나? …결혼하지 않겠다던 이유가 설마….”

“억측하지 마.”

도헌은 영제의 말을 잘랐다.

“이의준과는 목적이 있어서 관계를 맺었을 뿐이다. 수단에 불과해.”

“무슨 목적?”

“상관없잖아.”

“흐응?”

영제의 미심쩍은 시선을 받은 도헌은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런 얼굴로 보지?”

“음, 실망했거든. 니답지 않은 대꾸라서.”

“나다운 게 뭔데?”

“니 아까까지 감정이랑 몸이랑 따로 본다고 김상우한테 불쾌함 보였나 안 보였나. 근데 그런 사람 입에서 남이랑 하는 관계가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라서?”

“…….”

“이래서야. 김상우나 니나 다른 게 있나? 이의준 씨 입장에서 보면.”

도헌은 그를 노려보았다.

“나를 화나게 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렇게까지 해서 김상우를 두둔하고 싶은 거야?”

“다 아이다.”

영제는 말을 이었다.

“니가 김상우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뭐 때문에 화를 내던지 내 알 바가.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이의준 씨가 니한테 별 의미 없는 존재인 편이 낫고. 행님 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변수가 많아지면 일이 늘어나거든. 그래서 관심 없어도 묻는 기다.”

말의 끝에 영제는 도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도헌의 생각을 읽어 내려는 듯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진짜로 이의준 씨와 중요한 사이는 아니가?”

마치 뱀이 얼굴을 훑고 내려가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도헌은 입을 열었다.

“말했을 텐데. 네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대답이 아니네?”

“네 유도 심문에는 안 넘어가.”

도헌은 내뱉듯이 대꾸한 후에 오토 록을 해제했다.

“그만 성가시게 하고 가 봐.”

영제는 어깨를 으쓱한 후에 휴대 전화를 흔들었다.

“내도 그러고 싶은데 김상우가 전화를 안 받네”

보안 시스템이 갖추어진 신축 아파트 단지에 거주자 허락 없이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줄곧 연락을 시도했지만 통화는커녕 메시지에도 읽음 표시가 붙지 않았다.

“집들이하는 날이라더니. 얼마나 쌔가 빠지게 놀면 전화 오는 줄도 모르지.”

“다른 데 가서 자면 되잖나.”

“기껏 왔는데 귀찮잖아.”

상우는 이렇게 대꾸한 후에 도헌의 어깨를 툭 쳤다.

“이의준 씨한테 연락해 봐라. 오늘 집들이 왔을 긴데.”

“…그럴 수는 없어.”

“와?”

도헌은 잠시 망설인 후에 입을 열었다.

“내가 데리러 온 줄 알면 난처해지니까.”

“뭐가 난처한데? 데리러 오면 좋지. 어, 설마….”

영제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데리러 온다 했다가 거절당했나?”

“…….”

도헌은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영제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 나갔다.

“진짜로? 이야… 서도헌이, 너.”

“닥쳐.”

위협조로 낮게 내뱉은 도헌의 말에 영제는 대답 대신 휴대 전화를 흔들었다.

“전화나 걸어 봐라.”

“…….”

도헌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의준의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자 빠르게 신호가 갔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신호가 끊기고 음성 녹음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도헌은 전화를 끊고 다시 걸었다. 이번에도 신호가 길었다. 그러나 도헌이 중지 버튼을 누르기 전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전무님.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었다.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왜 그럽니까?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그냥, 좀 추워서요.

“…추워요?”

도헌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둑어둑해진 하늘 아래 가로수 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차 문을 열었다.

“어디 가나?”

운전석을 벗어나는 도헌의 뒤에서 영제가 놀란 투로 물었다. 도헌은 대꾸하는 대신 휴대 전화에 대고 말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김상우 씨 집입니까?”

---네, 아뇨. 집 안은 아니고… 가려고 나온 참입니다.

이어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 아홉 시 안 되었는데… 확인하려고 전화하셨어요?

“그런 건 아니고….”

도헌은 말을 멈추었다. 그의 안색이 확 변했다.

---전무님?

그를 부르는 의준의 목소리를 귓가에서 떼어 내고 성큼성큼 아파트 단지 입구를 향해 걸었다.

“…어…?”

그에게 다가오는 도헌을 발견한 의준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서도헌이 이곳에. 의문을 떠올린 직후 그는 황급히 손으로 입 부근을 가렸다. 하지만 늦었다.

“얼굴이 왜 이렇습니까?”

의준 앞에 도착하자마자 도헌은 대뜸 물었다. 의준이 대답을 망설이자 그는 거칠게 재촉했다.

“얼굴이 왜 이러냐고 물었습니다.”

“…….”

의준의 뺨에는 생채기가 선명했고 이마에는 붉은 혹이 나 있었다. 도헌은 얼굴을 가린 의준의 손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가운데가 찢어져서 퉁퉁 부은 아랫입술을 본 순간 도헌의 눈동자가 차갑게 변했다.

“김상우 씨 짓입니까?”

“그게….”

억지로 키스를 하려던 상우를 피하려다 이가 스치면서 입술이 찢어졌다. 어깨를 짓누르는 상우를 밀쳐 내려고 박치기를 했고 손목을 잡은 손을 뿌리치다가 자기 손톱으로 얼굴을 긁었다. 상우의 짓이냐고 묻는다면 망설여졌지만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을 흐리자 도헌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죽여 버리겠어.”

“……?! 전무님?”

의준은 당황했다.

“전무님, 잠깐만… 전무님!”

도헌이 화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의준은 그의 팔을 힘껏 끌어안았다.

“전무님! 잠깐만요, 제발, 제 말 좀 듣고….”

의준 혼자서는 도헌을 막을 수 없었다. 때마침 거주민이 밖으로 나오며 아파트 현관이 열렸다. 의준은 다급해졌다.

“전무님, 제발!”

“스톱.”

어느새 따라온 서영제가 현관을 가로막았다. 도헌은 살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비켜.”

“비키면 김상우가 죽잖아. 120억짜리 영화 주연이다. 지금 죽으면 곤란해.”

“같이 죽고 싶어?”

“아, 그건 더 곤란한데.”

영제는 이렇게 말한 후에 도헌에게 매달려 있던 의준을 바라보았다.

“이의준 씨, 당했습니까?”

적나라한 질문에 의준은 당황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봐라. 미수란다. 보아하니 이의준 씨가 허우대만 멀쩡하지 그 애빈 새끼를 박치기로 떨궈 놓고 명치나 거기 좀 차서 쓰러트린 뒤에 도망쳐 나온 모양이구만.”

“윽….”

마치 직접 본 듯이 술술 말하는 영제 앞에서 의준은 말문이 막혔다. 도헌은 의준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더 때렸어요. 입술 찢어진 게 제일 크게 다친 거고요. 전무님,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일이 있기는 했는데 큰일은 아니고. 걍 말았다. 그 정도로 해 둡시다. 괜찮죠?”

영제는 이렇게 말한 후에 현관을 향해 돌아섰다.

“여는 내가 맡을 테니까. 니는 이의준 씨 데리고 퍼뜩 가라.”

도헌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어쩔 건데.”

“묵으러 왔으니 들어가야지.”

영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씩 웃었다.

“겸사겸사 상황 정리 좀 하고, 정신 못 차릿다 싶음 정신 들 때까지 교육해야지.”

“…….”

“이의준 씨 증언과 상관없이 법적으로 문제되는 짓을 했다 싶으면 영화 촬영 끝난 후에 바다에 가라앉힐 테니까.”

“……?!”

의준이 말뜻을 받아들이기 전에 영제는 출입 카드를 대더니 현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째서 그가 이곳 출입 카드를 가지고 있을까. 당황해서 눈만 깜박이는 의준의 어깨를 도헌이 감쌌다.

“가자.”

“네? 어… 네.”

의준은 얼떨결에 도헌에게 이끌려 아파트 부지 밖으로 나갔다.

낯익은 도헌의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 도헌은 시동을 걸었지만 차를 바로 출발시키지 않고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앞을 바라보기만 했다.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생채기가 난 얼굴과 찢어진 입술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던 의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되살아나서 미칠 것 같았다.

“…전무님.”

조심스럽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헌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못 가게 했을 겁니다.”

“…….”

“오랜 친구라기에 믿을 만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 친구를 떠나 사람이라면 최소한 선을 지켰어야 하는데… 어떻게 사람이.”

핸들을 움켜쥔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뿌득하고 핸들 커버가 찢기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의준은 도헌의 옆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사과를 들은 도헌이 고개를 돌렸다. 마치 빙의가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도헌의 표정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사과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화를 낼 때가 아닌데.”

도헌은 이렇게 말한 후에 짧게 숨을 내뱉었다.

“괜찮습니까?”

마주쳤을 때 가장 먼저 물었어야 할 질문을 뒤늦게 던지며 도헌은 의준의 안색을 살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는 도헌을 본 의준은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상우의 집을 나왔을 때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무작정 아파트 단지 입구를 향해 걷기만 했다. 솟아오르던 슬픔과 분노는 아직도 생생했다.

“전무님과 만났더니 괜찮아졌어요.”

도헌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불안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그가 손을 잡자 긴장이 풀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체온을 느끼자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이상하죠?”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달아오르면서도 그렇게 말하며 웃는 의준을 향해 도헌은 갑자기 팔을 뻗었다. 의준의 몸이 도헌 쪽으로 쏠렸다.

“전….”

“난 괜찮지 않아.”

의준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도헌은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다행이다.”

탄식과도 같은 숨결이 의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의준은 도헌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부드럽게 스며드는 온기를 느끼며 의준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