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긴급 수술 후 이 주일이 지났다. 의준의 모친은 빠르게 회복했고 수술 전보다 상태가 개선되었다. 아예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만 있던 그녀는 이제 눈을 깜빡이고 때때로 신음 비슷한 소리도 냈다. 소영은 어머니가 자기 이름을 불렀다고 믿었다.
“앞 글자는 분명히 발음했어. 힘에 부쳤는지 뒷글자는 못 들었지만.”
퇴근하고 병원에 온 의준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소영은 이렇게 말했다.
“간병인 선생님 말씀으로는 매번 내는 소리가 다르대. 분명히 엄마가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거야.”
“마비된 혀가 풀리는 건 좋은 징조라고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더라. 잘됐어.”
“그러니까.”
소영은 의준의 말에 이렇게 맞장구를 친 후에 육개장을 한 입 떴다.
“엄마는 우리가 보고 싶었던 거야. 그러니까 우리 이름부터 부르려고 하시는 거고. 빨리 엄마가 나으면 좋겠다.”
“그러게.”
모친이 병원 생활을 반복한 지도 4년이 넘었다. 크게 악화되는 일도 호전되는 일도 없이 유지되던 상태가 조금이나마 좋아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어쩌면 순조롭게 회복되어 퇴원할 수도 있었다. 잊고 있던 희망이 남매의 마음에 싹텄다.
“아, 그렇지, 소영아. 나 토요일 저녁에 일이 있어.”
“이번 토요일? 무슨 일?”
“상우랑 보기로 했거든.”
“상우 오빠? 드라마 촬영 때문에 지방에 가지 않았어? 설마 상우 오빠가 촬영장에 초대했어?”
“아니야, 거길 왜 가? 주말에 인터뷰 일정이 있어서 올라온댔어.”
의준의 대답에 소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올라온다는 말 없었는데.”
“상우가 너한테 일정을 왜 말해 주냐.”
“어제까지 메시지 대화했었는데 말 안 해 준 게 이상하지 않아?”
“친구 동생한테 일정을 일일이 보고하는 쪽이 더 이상하지.”
의준은 소영의 불평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집들이라니까 좀 늦을 거야. 문단속 잘하고 자고….”
“상우 오빠 이사했어? 어디로?”
“이 동네라던데. 나도 정확히 어딘지는 몰라. 가 봐야 알 것 같아.”
“너무하네… 병원 근처인데 나는 안 부르고 오빠만.”
오늘따라 소영은 불만이 많았다. 의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우가 집들이하는데 널 왜 불러.”
“왜 부르긴, 친구 동생이잖아.”
“친구 동생인데 왜….”
“죽고 못 사는 절친 동생에, 데뷔 전부터 팬이었는데 이렇게 따돌리는 건 아니지.”
“연예인이 개인 연락처를 알려 주고 메시지 대화에 응해 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팬과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거든?”
“전화는 아예 안 받고 메시지 대화는 네 시간 넘어서야 짧게 대답하는데 뭐가 특권이야.”
소영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이윽고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우 오빠, 요즘 대놓고 내 연락을 피하고 있어. …내가 싫어진 걸까?”
“…….”
의준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설마 설마 했는데, 이 녀석 진짜로 상우 좋아하는 거 아냐?’
그야, 미남에 상냥한 남자다. 연예인이라는 특수성만 제외하면 여동생이 자주 보던 오빠 친구를 좋아하는 일도 있을 법했다.
‘하지만 걔는 연예인이고… 소영이에게는 관심이 없을 텐데.’
게다가 상우는 학창 시절부터 연애 쪽으로는 소문이 좋지 않았다. 오래 연애한 적도, 한 번에 한 명만 사귄 적도 없었다. 친구로서는 몰라도 여동생 남자 친구라고 생각하면 한 대 치고도 남을 타입이었다.
“싫고 좋고가 어디 있어, 친구 여동생인데.”
의준은 잘라 말했다. 소영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빠로서 상우만은 반대하고 싶었다.
“누가 뭐래?”
소영은 퉁명스럽게 대꾸한 후에 수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상우 오빠네 집들이에 오빠 말고 또 누가 오는데?”
“글쎄? 못 들었는데…. 뭐, 매니저 형들하고 코디들이랑, 관계자들이 좀 오지 않을까.”
“연예인도 올까? 전에 오빠 여행 갔을 때 만났던 사람들 말야.”
“글쎄, 친해 보였으니 올지도 모르겠다.”
강원도에 놀러 갔을 때 만났던 연예인들을 떠올리며 의준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소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는 진짜 좋겠다.”
“뭐가?”
“주변에 잘생긴 사람들만 모이잖아. 상우 오빠도 그렇고, 전에 병원에 왔던 그 회사 상무님도 그렇고.”
“상무님 아니고 전무님.”
“하여간 그 잘생긴 오빠 상사 말이야.”
의준은 슬쩍 소영의 표정을 살핀 후에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네가 보기에도 잘생겼던? 우리… 전무님.”
“말이라고 해? 지금까지 내가 실제로 본 사람 중에 상우 오빠와 양대 산맥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잘생겼더라.”
“그 정도야?”
의준은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물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그 전무님은 결혼했어?”
“아니, 아직.”
“나이 많아?”
“서른 중반?”
“보기보다 많네.”
“회사 임원 중에서는 엄청나게 젊은 거야.”
“키 크고 잘생기고 돈도 많고 회사에서 잘 나가고…. 나이는 전혀 문제가 안 될 만큼 대단한 사람인데 왜 결혼을 안 했대?”
“야, 전무님 나이를 왜 단점처럼 말해? 서른 중반이면 나하고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거든.”
“나하고 비교해서 많다고. 오빠랑 차이 안 나는 게 무슨 상관이야?”
소영은 황당한 투로 물었다. 의준은 당황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전무님 나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인데….”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왜 그래, 진짜.”
소영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정도 되는 사람은 여자들이 가만히 안 둘걸. 주변에 여자들이 우글우글할 것 같아. 연예인이나 준연예인급 여자들하고 사귀다가 제일 젊고 예쁜 여자랑 결혼할 것 같은 이미지야.”
“전무님은 그런 사람 아니야.”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수행 비서잖아. 곁에서 지켜보는데 왜 모르냐.”
의준은 이렇게 대꾸한 후에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토요일에는 상우 만날 거니까 알아 두라고. 급한 일 있으면 상우 말고 나한테 연락하고.”
“나도 오후엔 학교 친구랑 도서관 갔다가 저녁에 집에 가서 자려고. 연락 안 돼도 그러려니 해.”
“…그건 아니지. 메시지 답장은 해라.”
“말이 그렇다고.”
소영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우리 좀 웃겨서.”
“……?”
의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화제라고는 엄마 상태랑 병원이 마련 문제가 전부였고 취직이랑 장학금 걱정으로도 하루가 모자랐는데…. 오늘 봐.”
소영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몇 달 전까지 생판 남이던 회사 전무님 외모 이야기나 하고, 둘 다 주말에 엄마 간병 누가 할지 고민도 안 하고 약속 잡았다고 통보하고 있잖아?”
“그러네.”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팔자 좋아졌다, 우리.”
“맞아.”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엄마만 퇴원하면 되겠어.”
“그러면 더 바랄 게 없지.”
건강했던 모친과 두 남매. 쪼들리는 살림살이였지만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그때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삶을 바라기는 의준도 소영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생길 거야.”
어머니는 회복 중이었다. 소영은 대학 졸업을 앞두었고 의준은 안정적인 직장을 손에 넣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도헌이 있었다.
한 번 끊겼던 인연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되살아나는 기적도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남들만큼 행복하기를 바라도 욕심은 아니리라.
“다 괜찮을 거야.”
부디 이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기를. 의준은 조용히 빌었다.
***
김상우가 새로 집을 샀고 토요일에 집들이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금요일 오후, 도헌은 의준과 함께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귀가하던 중이었다.
“김상우 씨는 지방에서 영화 촬영 중이 아니었습니까?”
“네, 그런데 주말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잠깐 올라온다나 봐요. 여유가 좀 있으니 그때 보자고 해서.”
외근을 끝으로 도헌의 오늘 일정은 모두 끝났다. 내일 서영제와 만나기로 한 약속 외에는 주말에 달리 일정이 없었다.
수행 비서로서는 귀중한 주말 휴일이었다. 도헌의 일정에 구애받지 않는 시간에 의준이 어떤 약속을 잡든 자유였다. 이론적으로는 그랬지만.
“바쁜 일정 중에 굳이 시간을 내서 집들이라니, 김상우 씨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군요.”
“사람 만나는 게 취미 같은 녀석이라서요. 학교 다닐 때는 안 그랬는데,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나 봐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의준 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아닙니까?”
“전에 강원도에 갔을 때도 다른 친구들도 많았는걸요. 저하고만 노는 것도 아니고요.”
“…….”
연예인 친구들과의 모임에 굳이 고등학교 동창인 의준을 데려갔다면 그 모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을 터였다.
‘그를 단순히 친구로만 생각했을 테니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머릿속에 제작 발표회에서 상우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되살아났다.
‘저한테는 처음 찾아온 기회입니다.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날 김상우는 대놓고 의준에게 접근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랜 친구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대놓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남자이니 수시로 기회를 노릴 터였다. 어떻게든 의준을 유혹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술을 사 가기로 했는데요. 역시 집들이 선물로 술은 좀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고. 술은 술이고 따로 작은 소품이라도 선물하는 편이 나을까요.”
태평하게 집들이 선물을 고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 혀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도헌은 애써 참았다.
“소품이 낫겠군요. 술은 사 가지 말고.”
“어, 그래도 술을 사 오라고 하던데….”
“손님들이 마실 음료 정도는 집주인이 준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의준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무님은 집들이 때 어떤 선물을 사셨나요?”
“누구의 집들이 말입니까?”
“어… 친구나, 주변분들…. 아니면 전무님 댁 집들이를 할 때 받은 선물이 있으시면 그것도 좋고요.”
“남의 집들이에는 원하는 물건을 선물했고 우리 집은 집들이를 한 적 없습니다.”
“집들이 안 하셨어요?”
의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헌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소유한 집도 아니고, 집에 아무나 들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이윽고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댁에… 사람을 안 들이세요?”
“내가 이사한 뒤로 그 집에 들어왔던 사람은 영제 한 명뿐입니다. 그나마 현관에서 신발도 안 벗고 나가 버렸지요.”
“왜요?”
“우리 집이 어떤지 봤잖습니까. 빈말로라도 손님을 데려와 묵게 할 만한 곳이라고는 못 할 텐데요?”
“아….”
가구라고는 침실에 침대와 드레스 룸의 옷장뿐이던 휑하고 넓은 공간을 떠올린 의준은 말문이 막혔다. 도헌은 말을 이었다.
“임시로 거주하는 곳에 쓸데없이 사유물을 늘리고 싶지도 않지만, 그런 식으로 갑자기 찾아오는 외부인을 방지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사적인 공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면.”
“……?”
의준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도헌은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럽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아니요, 그게….”
의준의 뺨에 희미하게 홍조가 솟아났다.
“…제가… 그 집에 묵었던 첫 타인이었나 싶어서요.”
도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모르겠군요.”
“아, 아닙니다.”
도헌의 말에 의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성격상 속으로 선을 넘는 질문을 했다고 후회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 녀석은 여전해.’
도헌은 입을 열었다.
“난 의준 씨를 타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랬다면 집에 묵게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윽….”
의준은 민망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무님.”
“예.”
“…몇 년 본 뵌 사이에 굉장히… 능숙해지셨네요.”
“오해 말아요. 의준 씨에게만 이러니까.”
“……!”
의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의준은 나를 좋아해.’
의준의 표정과 태도가 그리고 시선이 증거였다.
‘만에 하나 김상우가 고백을 해도 이 녀석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겠지.’
그러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목표는 의준이 도헌 자신에게 빠져들도록 만드는 것이지 도헌이 그에게 빠져드는 게 아니었다. 의준만 감정을 확신한다면 굳이 주변 상황에 불쾌해하고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못을 박아 둘까.’
도헌은 의준의 손을 잡았다. 의준은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집들이는 몇 시쯤 끝납니까?”
“그, 글쎄요. 사람들이 언제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전 밤 열 시 전에는 나올까 하는데.”
“아홉 시까지 나와요.”
“네?”
“데리러 갈 테니까.”
“네?!”
의준은 깜짝 놀랐다.
“전무님도 토요일에 약속이 있으시잖아요.”
도헌은 주말에 영제와 만날 예정이었다. 부친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오후에 카페에서 잠깐 만날 뿐입니다. 시간은 충분해요.”
의준의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도헌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일요일에 만나기로 했지 않습니까. 조금 일찍 만나도 좋을 것 같은데.”
언제부터 ‘하루 전’을 ‘조금 일찍’으로 표현했던가. 의준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녁에는 병원에 가야 해서요.”
“바쁘군요.”
도헌은 더 몰아붙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너무 늦게까지 놀다가 일요일 약속을 취소하는 일만 없도록 해요, 그럼.”
“그럼요.”
의준은 그제야 웃었다. 도헌은 잡고 있던 의준의 손을 위로 올렸다.
“마음이 바뀌면 연락해요.”
손등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본 후에 도헌은 만족스럽게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