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16/33)

16.

월요일 아침 일곱 시. 출근한 김하나는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고 비서실 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깜짝 놀랐다.

“…의준 씨?”

“아, 과장님. 일찍 오셨네요.”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의준은 김하나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김하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언제 출근했어요?”

“아… 다서 시에요.”

“다섯 시? 아니, 왜…?”

“전무님께서 필요한 자료가 있다고 하셔서요.”

김하나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새벽 다섯 시에 출근을….”

차마 상사인 서도헌을 욕하지 못하고 말을 아끼는 김하나를 보며 의준은 민망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지난주에 이틀이나 쉬었는걸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 그렇지. 어머님은 좀 어떠세요?”

“많이 호전되셨어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지난주 수요일, 의준의 모친은 긴급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중환자실에서 순조롭게 회복 중이었다.

“너무 자주 연차를 내서 죄송합니다.”

의준이 사과했다. 김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그리고 의준 씨는 수행 비서니까 전무님만 괜찮다시면 아무 문제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김하나는 프린터로 뽑은 자료를 의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렇게 새벽 출근도 하고 주말도 일하고 그러는데 주어진 연차 좀 쓰면 어때. 자, 여기, 자료.”

“고맙습니다.”

김하나에게 밝히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회의에 필요한 자료는 어제 집에서 작성을 마쳤다. 출근해서 확인하고 출력하기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 출근한 이유는 서도헌을 일찍 만나기 위해서였다.

‘…30분 전에 출발하셨으니 곧 도착하시겠지.’

지난주에 병원에 함께 있었던 뒤로 나흘이 지났다. 그 사이에 모친은 중환자실에 머물렀고 의준은 여동생과 함께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갔다. 밥을 먹으러 갈 때 잠깐 통화를 하고 휴게실에서 메시지 교환을 하기는 했지만 얼굴을 볼 시간은 없었다.

덕분에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정말로 그와 도헌은 감정을 확인했던가. 혹시 별것 아닌 대화를 의준이 희망적으로 왜곡해 기억하지는 않았던가.

그렇다기엔 무수히 키스를 나누었다. 동이 틀 때까지 서로 어깨를 맞대고 머리를 기댄 채 온기를 나누었다.

‘꿈은 아니었어.’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지기를 기도하며 보낸 며칠 동안 머리 한구석에는 계속 그 기억이 남아 있었다. 급히 달려온 소영을 위로하고, 하루 두 차례의 중환자실 면회를 포함한 병원 생활을 하고, 담당의의 상태 설명을 듣고 수술비와 추가 치료 비용에 한숨을 쉬며 줄곧 도헌을 생각했다.

어젯밤에는 잠도 설쳤다. 출근길은 유달리 길었고 시간은 너무 느렸다. 김하나를 도헌으로 착각하고 벌떡 일어서서 맞이할 뻔했다. 모든 정신과 감정이 곧 나타날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진정하자. 왜 이래, 연애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찰나 휴대 전화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전무님 올라가셨습니다.

운전기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의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 밖으로 나간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층 표시 불빛이 깜박깜박 조금씩 이동했다. 사무실 층에 불빛이 도달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기다리던 사람이 내렸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찬 손을 들려던 그를 향해 의준은 첫마디를 내뱉었다.

“오셨습니까, 전무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요.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를 마친 후 의준은 사무실 자동문 앞에 출입증을 대며 말을 이었다.

“요청하셨던 자료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내 프레젠테이션 형식에 맞춰 정리했으니 검토 부탁드립니다. 형식은 변경 가능하니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러지요.”

도헌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셨어요, 전무님.”

김하나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드는 바람에 대화는 멈췄다.

“자료는 곧 검토하겠습니다. 미안하지만 그 사이에 커피 한 잔만 가져다주겠습니까? 평소보다 진하게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전무님.”

의준은 탕비실로 들어갔다. 직원용 커피 머신은 꺼져 있었다. 전원을 넣고 예열되기를 기다리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평소처럼 대했어.’

얼굴을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만날 장소가 회사이니 너무 감정을 드러내면 서로 곤란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무실은 병실과 달리 사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김하나도 일찍 출근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최대한 평소처럼 표정을 굳히고 사무적인 용건만 전달하는 것으로 첫 대화를 마쳤다.

‘도헌이 형… 아니, 전무님도 평소와 같은 태도였지.’

도헌도 의준과 같은 생각을 했을까.

‘들떴던 사람은 나뿐일 수도 있고.’

의준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위쪽 수납장에서 종이컵을 꺼냈다. 도중에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몸을 돌린 의준은 도헌을 발견했다.

“어, 도허… 전무님.”

의준은 놀라서 입을 열었다.

“커피 가지러 오셨습니까? 지금 기계 예열중이라서….”

도헌은 대답 대신 의준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뺨에 닿자 의준은 깜짝 놀랐다.

“표정이 왜 그래요?”

“네? 어….”

의준은 망설이며 도헌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괜찮습니다. 김하나 과장은 휴게실에 갔어요. 잠깐 자겠다고.”

“어… 네.”

의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경이 온통 뺨에 닿은 도헌의 손에 집중되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지난주 병실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준 씨. 이의준 씨.”

“네!”

의준은 화들짝 놀랐다. 도헌은 수상쩍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까?”

“네, 네….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어머님?”

뜬금없는 되물음에 의준은 당황했다. 이윽고 그 말이 병원에 있는 의준의 모친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떠올린 사람은 지난주의 도헌이었지만 장소는 병원이었으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님은 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지셨어요.”

주말까지는 의준도 소영도 모두 병원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에 상태가 안정된 모친이 다시 일인 병실로 이동했기 때문에 간병인과 소영에게 맡기고 출근할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예후가 좋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쩌면 의식 회복 가능성도 있으니 지켜보자시더군요.”

“잘되었군요.”

도헌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의준의 안색을 살폈다.

“병원에 계속 묵었죠? 잠은 잤습니까?”

“네, 그럭저럭요.”

“밥은 먹었고요?”

“먹었습니다. 하루 두 끼, 아주 잘. 전무님이 전화로 신신당부하신 그대로요.”

뺨을 어루만지는 도헌의 손이 신경 쓰였다. 도헌은 의준의 뺨에서 턱으로 손을 움직이며 엄지손가락으로 의준의 아랫입술을 슬쩍 어루만졌다.

“전….”

의준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도헌은 입을 열었다.

“오늘처럼 긴장해서 출근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

“지난주에 있었던 일이 현실 같지 않았거든요.”

의준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도헌은 굳어진 그의 표정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도 그런 생각을 해서요.”

의준은 다급히 말했다.

“돌이켜 볼수록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그, 혹시 제가 멋대로 좋게 해석한 건가 싶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현실감이 떨어져서 꿈인가 싶지 않던가요?”

“맞아요. 그랬습니다. …앗.”

맞장구친 직후 의준은 민망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귓속에서 심장 박동이 시끄럽게 메아리쳤다. 얼굴뿐만 아니라 목덜미 아니 온몸이 새빨갛게 변했으리라. 도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을 때, 의준 씨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여서 좀 놀랐습니다.”

도헌의 시선이 의준의 입술로 향했다. 손가락으로 도톰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나만 의식하고 있나 싶어서 정신적인 타격도 입었고요.”

“저를… 의식하셨어요?”

“그야 물론.”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키스했던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 그건, 그렇…. …그렇, 겠네요.”

의준은 더듬거리며 동의했다.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부드럽게 휘어진 도헌의 눈이 보였다. 이렇게 부드럽고 친밀하게 웃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그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정말로 이 사람과 내가 다시….’

심장이 지끈하고 아팠다. 달콤한 고통이 빠르게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의준 씨.”

의준을 바라보던 도헌이 입을 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키스하고 싶어지니까.”

“……?!”

깜짝 놀라서 굳어지는 의준을 본 도헌은 또다시 웃었다.

“농담입니다. 안 해요. 여기는 회사이니까.”

그야 그렇다. 의준은 안도하듯 숨을 내뱉었다. 도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대놓고 안도하면 기분이 묘해지는데.”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헌은 의준의 뺨에서 손을 뗐다.

“오늘은 점심에 회의가 없었죠?”

“네… 맞습니다.”

“점심 식사 같이합시다. 먹고 싶은 메뉴 골라서 식당 예약해 둬요. 개인실 있는 곳으로.”

“…네.”

도헌이 먼저 탕비실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의준은 길게 숨을 뱉었다.

“깜짝 놀랐네.”

꿈이 아니었다.

“저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꿈이 아니었다.

“맙소사.”

의준은 입을 손으로 가리며 돌아섰다. 마주했을 때보다 더한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전신을 휩쓸었다.

‘형하고 내가 정말로… 우리가 정말로 다시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지난 5년간 생사조차 모르던 남남이었던, 지난주 월요일까지만 해도 상사와 부하라는 공적인 관계에 불과했는데.

‘기분이 이상하네.’

커피를 잔에 담아 들고 탕비실을 나섰다.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전무실에서 누군가와 통화 중인 도헌의 모습이 보였다.

도헌은 의준을 발견하자 살짝 미소를 띠었다. 그 얼굴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감정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같은 세상도 이토록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니 처음 알았다. 5년 전에조차 이렇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당연했기에 실감하지 못했다.

다시 주어진 인연을 소중히 이어 나가고 싶었다.

‘이번에는 저 사람이 나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거야.’

가슴 깊숙한 곳에 잠든 상처가 아릿한 통증을 호소했다. 의준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뗐다.

***

정오를 5분 정도 앞둔 시각, 비서실 사람들은 하나둘 오전 업무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서들은 임원 회의에 이어 점심 회의가 있는 월요일에는 각자 수행하는 임원에게 맞춰 점심 일정을 잡곤 했지만 오늘은 점심 회의가 취소되는 바람에 여유가 생겼다.

“의준 씨는 전무님하고 식사 간댔죠?”

“네.”

김하나의 질문에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보고 마치고 돌아오시면 나가려고요.”

“좋겠네. 맛있는 거 얻어먹어요.”

“하하,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의준은 일어서서 김하나를 배웅했다. 열두 시 정각이 되자 비서실 사람들은 물론 같은 층의 사람들도 우르르 빠져나갔다. 같은 층을 사용하는 재무팀과 인사팀은 오늘 점심 회식이 있었다. 평소에 회의실에 모여 도시락을 먹던 직원들도 전부 나가는 모양이었다.

‘와… 나만 남았네?’

의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10분. 도헌의 점심시간은 두 시까지이니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오시기 전까지 메일 확인이나 할까.’

의준이 이렇게 생각하며 메일 프로그램을 열던 그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의준은 웃으며 일어섰다.

“전무님, 일찍 오셨네요. 회의 고생 많으셨….”

의준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서도헌이 아니었다.

“야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낯선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으며 의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직원은 아니었다. 종종 들르는 업자나 건물 관리인도 아니었다.

‘대체 누구지?’

남자는 임시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출입증은 회사 내부에서 누군가가 신원 보증을 해 줘야 건물 로비 보안팀에서 발행해 주는 물건이었다.

‘손님? 오늘 점심시간에 방문 예정인 손님은 없으신데.’

의준은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어느 분을 찾아오셨습니까? 성함을 말씀해 주시면 확인하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친절하시네.”

남자는 껄껄 웃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말은 친절한데 표정이 영 굳으셨네. …갑자기 수상한 놈이 들이닥쳐서 이상합니까?”

“…….”

속내를 읽힌 듯한 질문에 의준은 말문이 막혔다. 남자는 가늘게 뜬 눈으로 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뒤늦게 의준은 그가 입가에만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의준은 흘깃 책상 위의 휴대 전화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의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씩 웃었다.

“서영제입니다.”

남자는 갑자기 이름을 밝혔다.

“여 전무로 있는 서도헌이… 서도헌 전무 만나러 왔습니다.”

“서도헌 전무님을요? …만나기로 약속하셨습니까?”

“도헌이 놈이 말 안 한 모양이네.”

서영제는 웃었다.

“마, 다짜고짜 찾아온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스스로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의준은 사과했다. 미리 듣지 못했지만 서도헌의 손님에게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혹시라도 까다로운 손님이라면 야단을 맞을 수도 있었다.

“뭘 사과까지 합니까.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수상한 건 사실이고.”

서영제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렇게 말한 후에 의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쪽 이름이 뭡니까?”

“예? 아, 죄송합니다. 저는 이의준이라고 합니다. 서도헌 전무님의 수행 비서입니다.”

“이의준?”

이름을 들은 서영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의준을 위아래로 훑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어, 동명이인인가.”

“…예?”

“서울에서는 유행하는 이름인가 보네. 좋은 이름이라 그런가?”

“글…쎄요. 제 주변에 같은 이름은 없었는데….”

30년 전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붙은 이름이라 유행 여부까지는 알 길이 없었기에 의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십니까? 아, 같은 이름이 많다고 하면 실례겠구나. 미안합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이의준이라고 있어서. 아이지. 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인데….”

서영제는 말을 멈추더니 의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김상우라고 압니까? 배우하는.”

“상우요?”

낯선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온 낯익은 이름에 의준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배우 김상우 말씀이시라면, 제 친구인데요.”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서영제는 웃었다.

“동명이인이 아니라 그쪽 이의준이 여 이의준이구만.”

아는 사람이란 상우였나 보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상우의 친구일까. 혹은 업무적인 지인? 의준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영제는 상우 정도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홑꺼풀 아래 빛나는 눈동자는 작고 또렷했고 입술은 얇지만 끝이 위로 말려 올라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상우와 아는 사이인 분이 도헌이 형과는 무슨 일로….’

이런 생각을 떠올리던 의준은 문득 그와 도헌의 성이 같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작은아버지 됩니다.”

서영제가 갑자기 말하는 바람에 의준은 놀랐다. 서영제는 웃었다.

“지금 속으로 ‘김상우랑 아는 사인데 서도헌이하고는 또 어떻게 아는 사이지?’ 생각하셨지요?”

“…….”

“서도헌이의 아버지와 형제. 서도헌이는 내 조카. 그니까 나는 서도헌이의 작은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젊어 보여서 생각지도 못했다.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그때였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안에서 뭐 하는 거야.”

의준과 영제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도헌을 본 의준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어렸다.

“밖에 앉을 데 하나 없더만. 그냥 서 있기 그래서 들어왔지. 뭐 그렇게 따지노, 따지기는. 내가 뭐 훔쳐 가기라도 할라고?”

“외부인이 약속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오면 놀라잖나.”

“누가 놀라노? 아무도 없던데. 아, 이의준 씨가? 이의준 씨, 내가 놀래켰습니까?”

“네? 아닙니다.”

“아니라잖아.”

“그렇게 물으면 누구나 아니라고 하지.”

도헌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나 없는 데서 억지로 통성명까지 하다니.”

“거, 말이 심하네.”

서영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헌은 전무실 문을 열었다.

“들어가 있어.”

서영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도헌은 문을 닫고 의준을 바라보았다.

“점심 일정은 미뤄야겠습니다. 식사하고 와요.”

“네. …전무님은 식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녀석 보내고 간단히 때우면 됩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어… 그러면 가기 전에 커피라도 가져다드리고….”

“내가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요.”

도헌은 이렇게 말한 후에 의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혼자 밥 먹게 해서 미안해.”

생각지도 못한 사과에 의준은 웃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의준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에 몸을 돌렸다. 그가 사무실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본 후에 도헌은 전무실로 들어갔다.

“귀엽게 생겼네.”

영제는 소파 옆의 작은 음료수 냉장고에서 탄산음료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서울 머스마들은 유전자가 뭐 다른가? 어째 저래 다 이쁘장하고 애비게 생깄노. 손목 좀 씨게 잡으면 콱 부러지것다.”

“내 비서 손목을 잡을 일은 없을 테니 상관 마.”

도헌은 이렇게 대꾸한 후에 영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남의 비서 외모를 평가하려고 찾아온 건 아닐 테지. 무슨 일이야?”

“아, 행님이 사고를 쫌 칬다.”

영제는 캔을 따며 대답했다. 도헌은 후, 하고 짧게 숨을 뱉으며 눈을 꾹 감았다. 영제가 회사까지 찾아왔으니 보통 일은 아니리라 짐작했던 터였다.

“어떤 사고를 쳤기에.”

“뭐부터 들을래? 골고루 있는데.”

“가장 심각한 건만 말해 봐.”

“돈 사고를 거하게 칬지. 총 30억 정도. 해외 투자 명목으로 오만 데서 긁어모았더만.”

영제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행님 인맥은 알아줘야 한다. 몇 년 전에 거하게 말아먹은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행님을 믿고 돈 주는 사람이 있다니.”

“30억 정도로 나에게 푸념하러 오지는 않았을 테고, 다른 문제가 있나?”

“눈치 이빠이네. 이래서 내가 행님보다 니를 좋아한다니까.”

영제는 웃었다.

“행님이 말아먹은 돈 중에, 일부가 영 삐리한 놈들한테서 왔다.”

“어디?”

“홍콩 쪽 사금융.”

“…설마 폭력단 쪽 자금은 아니겠지.”

“그쪽이 90% 이상 출자한 국내 법인 자금.”

도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영제는 말을 이었다.

“돈놀이하는 놈들 중에 대가리 똑바로 박힌 놈들은 없다지만, 그쪽은 영 별나거든. 돈만큼 자존심도 중요한 놈들이라 돈 안 갚는 걸 지들 무시한다고 한다이가.”

“…….”

도헌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내가 뭘 도와야 하는데?”

“없어.”

영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도헌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왜 나를 찾아왔지?”

“니 아버지가 이렇게 내를 고생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하소연하고 겸사겸사 경고도 하려고.”

“경고?”

“그래.”

영제는 캔을 내려놓고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도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분간 밤길 조심해라.”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도헌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영제는 말을 이었다.

“행님은 잠적 중이다. 얼마나 잘 숨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우리야 못 찾으면 그만인데 저짝은 아이다. 행님 찾아서 돈 갚게 안 하면 지네 자존심이고 명예고 뭐고 싹 다 나가리 되게 생겼그든. 그니까 그놈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행님을 찾겠지.”

서영술을 찾아내 돈을 갚게 만들고 사죄시키지 않으면 자존심이고 명예고 모두 엉망이 될 상황이었다. 당연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찾아내려 할 것이다.

“이미 행님 주변 조사는 다 끝냈을 테니 너에 대해서도 알 기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으니까.”

“아버지의 빚쟁이가 나를 찾아올 가능성이 있다 이거군.”

“얌전히 방문해서 정중하게 돈을 갚아 달라고 요청할 놈들은 아니니까.”

영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분간 모르는 사람의 초대나 낯선 모임은 자제하고, 가급적 혼자 다니지 마. 말이 밤길이지 대낮이라고 덜 위험한 것도 아니니까 늘 신경 쓰고.”

“…….”

“부산이면 우리 애들 깔았는데. 서울은 그럴 수가 없으니까 니가 조심해야 된다.”

도헌은 혀를 차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성가시게 하는군, 정말.”

“내 말이.”

영제도 한숨을 내쉬었다.

“회장님은 니한테 일 없게 하라제, 엄마는 일 해결될 때까지 오지 마라하제… 와, 다들 진짜 내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가?”

“믿는다는 의미잖아, 후계자님.”

“데다, 데.”

영제는 웃었다.

“그래도 전 행수님은 해외에 계시고, 니도 홀몸이라 경고로 끝나니까 을마나 다행이고. 만일 니한테 아나 와이프라도 있었으면 걔들은 어떻게 지킬지 골머리 썩었을걸.”

말을 마친 후 영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갈게. 필요하면 전화하고.”

도헌은 전무실 문을 열어 주며 입을 열었다.

“당분간 서울에 있겠군. …어디 묵고 있어?”

“대충 여 어디에. 나오지 마라. 알아서 갈게.”

영제는 손을 내저어 작별 인사를 대신한 후에 회사 출입구로 향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도헌은 몸을 돌렸다.

“후우….”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개과천선까지는 바란 적도 없었다. 그저 더 큰 사고만 치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휘말려 들게 만들다니.

‘어째서 남의 인생을 이런 식으로 휘두르는 거야?’

불쾌하고 짜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헌은 영제가 두고 간 빈 음료 캔을 거칠게 쓰레기통에 던졌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이 철제 쓰레기통 안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빌어먹을.”

그때였다. 유리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도헌은 험악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문을 열던 의준이 흠칫하고 멈춰 섰다.

“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생전 처음 보는 도헌의 표정에 기가 눌린 의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점심… 드실 걸 좀… 사 왔는데….”

도헌의 시선이 의준이 들고 있는 종이백으로 향했다. 회사 근처의 유명한 수제 햄버거집 이름이 적힌 봉투 안에서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조금 이따 다시 올까요?”

여전히 굳어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도헌을 향해 의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들어와요.”

“…네.”

의준은 전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용 테이블 위에 종이백을 내려놓는 그를 향해 도헌은 입을 열었다.

“사무실에 또 누가 있습니까?”

“아니요, 오늘은 모든 부서가 점심 회식이라…. 다들 나갔습니다. 조금 더 있어야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의준 씨와 나뿐이라는 말이군요.”

“네? …네.”

의준은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전무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사전 약속 없이 찾아왔던 손님은 어디로 갔을까. 20분도 머물지 않고 돌아간 것일까. …그 손님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

“의준 씨.”

“네?”

“공사 혼동을 해도 됩니까?”

“…네?”

도헌은 되묻는 의준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의준은 숨을 멈췄다.

“전무님…? 무슨 일이 있었나요?”

갑자기 찾아왔다 가 버린 손님과 싸웠을까. 손님은 친척이었다. 혹시.

“아니면 댁에 무슨 일이라도….”

“아무 일도 없어.”

속삭임과 숨결이 의준의 목덜미를 스쳤다. 도헌은 의준의 등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거짓말.’

무슨 일이 생겼음이 분명했다. 의준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신 후에 두 손을 도헌의 등허리에 댔다.

토닥, 토닥. 조심스러운 손길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괜찮아요.”

목덜미에 밀착한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의준은 헛기침을 한 후에 재차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잘 풀릴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

만일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근거 없는 희망론을 내뱉는 사람은 질색이었다.

의준은 달랐다.

“괜찮을 거예요.”

다정한 배려가 듬뿍 묻은 한마디가 기분 좋게 귓가에 스며들었다. 날카롭게 가시가 돋쳤던 마음이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겨우 이 정도로…?’

의준의 목덜미에서 섬유 유연제 냄새와 희미한 땀 냄새가 났다. 도헌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후에 고개를 들었다.

의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심장이 저릿했다.

‘…언제나, 이 녀석만은 달랐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직도 그랬다.

‘이의준이니까.’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표정 풀어요.”

“…정말로 괜찮으세요?”

“그래요.”

도헌은 흐트러진 의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의준 씨가 괜찮을 거라고 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놀리려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죠?”

도헌을 위로하고 싶어서 한 말이었지만 근거는 없었다. 도헌의 성격상 그런 말을 쉽게 믿지는 않을 텐데….

“내가 왜 의준 씨를 놀립니까.”

도헌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가볍게 의준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의준은 깜짝 놀라서 숨을 멈췄다.

“도… 아니, 전무님!”

의준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뒤늦게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여기는 사무실인데…!”

“괜찮아요, 아무도 못 봤으니까.”

도헌은 이렇게 대꾸한 후에 의준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뗐다.

“공사 혼동은 여기까지만 하죠.”

“윽….”

“식사나 합시다. 의준 씨 몫도 사 왔습니까?”

몸을 돌리며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묻는 도헌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의준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사실은 손님 몫까지 3인분 사 왔습니다만.”

“손님은 갔으니 둘이 1.5인분씩 해치워야겠군요. 혹시 모자라다 싶으면 의준 씨가 2인분을 먹어도 됩니다.”

“아뇨, 여기 버거는 커서 그렇게는 좀….”

“감자튀김은 2인분도 금방 먹지 않습니까.”

“그야 사이드 메뉴가 들어가는 배는 따로 있으니까요.”

“하하하.”

화기애애한 대화와 웃음소리가 텅 빈 사무실 끝까지 퍼져 나갔다.

“…이거 참.”

탕비실의 사각지대에 서 있던 서영제는 찝찝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는 도헌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가 잊어버린 말을 떠올리고 되돌아왔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전무실에는 의준이 있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몰랐지만 무엇을 했는지는 보고 말았다.

‘회장님 앞에서 그렇게 결혼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니만… 그런 거였군.’

두 사람이 소파에 앉은 틈을 타서 영제는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일단 회장님께는 입 다물어야겠고….”

가뜩이나 장남 일로 앓아누운 노인에게 근심거리를 더할 필요는 없었다. 서도헌 본인에게는 더더욱 밝힐 생각이 없었다. 서도헌은 사생활 침해를 싫어했다. 지금 그와 척을 져서 이득을 볼 게 없었다.

건물 맞은편에서 영제를 기다리던 부하가 검은 중형 세단 문을 열었다.

“부산 사모님께서 연락 달라십니다.”

“알았다. 부산에 다른 소식은?”

“아직 이렇다 할 건 없습니다만… 포항에서 알 만한 사람을 찾았다고 합니다.”

“잘 구슬리라고 해.”

차에 오르려는 찰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영제는 화면에 표시된 이름을 보고 피식 웃었다. 통화 거부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은 후에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김상우의 이의준이 아니라 서도헌의 이의준이었다니.”

“……? 사장님, 뭐라고 하셨는지 못 들었습니다.”

“아이다, 아이다. 출발해.”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영제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상황이 더 재미있을 것 같기는 했다.

‘남의 일이니 느긋하게 지켜볼까?’

재미없는 일투성이던 서울 나들이에 즐거운 일이 끼어들 모양이었다. 영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