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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의준 씨,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난 직후에 의준은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향해 힘차게 숨을 불었다. 촛불이 모두 꺼지고 박수 소리가 메아리쳤다.
“축하해요, 의준 씨.”
“축하해.”
“고맙습니다.”
얼떨떨하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의준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비 오는 수요일, 의준의 생일을 맞아 비서실 동료들은 오전 회의 전에 회의실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 주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축하를 받기는 오랜만이어서 어색했지만 기쁘기도 했다.
“그런데 의준 씨가 서른이야?”
케이크에 꽂혔던 초를 빼며 김하나가 중얼거렸다.
“우리 회사에 입사하고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신입 사원 느낌이었는데.”
“하하하….”
“의준 씨는 동안이라 그렇죠. 저도 나이 듣고 놀랐다니까요.”
“맞아, 나도 놀랐어. 설마 나보다 나이가 많을 줄은.”
“다들 왜 그러세요.”
의준은 민망하게 웃었다. 좋은 동료들이었다. 회사에서 이런 식으로 스스럼없는 동료 관계를 맺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점심 같이 먹으면 좋은데. …오늘 전무님 일정이 있었죠?”
김하나가 물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점심시간에 걸쳐서 대표님과 회의가 있고 오후에는 곧장 외부 일정이 있으십니다.”
“외부 일정이 그 뷔페 레스토랑 일정이던가요? 새로 오픈하는.”
“맞습니다.”
의준의 회사는 셰프 출신의 유명한 외식 사업가가 여는 새 뷔페 레스토랑 프랜차이즈 사업에 투자했다. 요식업 투자 전문가인 임원이 추진했던, 서도헌과는 관계없는 사업이었지만 그 임원이 해외 출장 중이어서 대신 개업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개업 행사는 처음이라 긴장됩니다.”
의준이 솔직하게 말하자 김하나는 웃었다.
“다른 행사와 마찬가지예요. 전무님 보좌 잘하고, 다른 비서들과 인맥 쌓아 두고. 다른 점이라면 음식이 곁들여진다는 정도일까?”
다른 동료도 끼어들었다.
“그분이 직접 운영하던 레스토랑은 평이 좋았어요. 프랜차이즈 뷔페 레스토랑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의준 씨, 부러워. 나중에 음식 맛이 어땠는지 들려줘요.”
“예, 그럴게요.”
의준이 웃으며 대답하던 그때였다. 쿠르르릉, 회의실이 흔들렸다.
“헉!”
서 있던 직원이 급히 테이블을 짚었다. 한 직원이 비명을 질렀다. 의준도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지? 지진?”
“천둥 친 것 같은데요.”
“천둥? 이렇게 큰데?”
다시 우르르릉 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창문이 있는 다른 회의실에 가서 확인하고 돌아온 직원이 비가 내린다고 알렸다.
“많이 오네요. 폭우 수준이에요.”
“웬일이야. 예보가 있었던가?”
“이렇게 많이 내린다는 얘긴 없었는데요.”
다들 수군거리는 가운데 김하나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의준을 바라보았다.
“오늘 외근 성가시겠네, 힘내요.”
“네….”
출퇴근길은 성가셔도 외근은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차를 타고 주차장에서 주차장으로 이동하니까 말이다. 문제는 퇴근길이었다.
‘밤 열 시 넘어서야 끝날 테니까 버스는 붐비지 않을 테고, 비만 그쳐 주면 되겠네. …아, 그렇지, 소영이 얘… 우산 가지고 갔나? 전세 버스로 움직이면 상관없을까?’
소영은 현장 강의 때문에 과 사람들과 1박 2일 예정으로 지방에 내려갔다. 의준은 동생이 어머니 간병 때문에 지금까지 그런 종류의 행사에 불참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리포트나 사유서로 대체 가능한 현장 강의는 빠졌는데 이번엔 힘들 것 같대서. …간병인 선생님 계시니까 하룻밤 정도 다녀오면 안 될까?’
당연히 그러라고 했다. 모르는 데서 나름 자기를 희생했던 여동생에게 미안해서 용돈도 쥐여 주었다. 의준도 오늘은 늦게 퇴근하기에 곧장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몇 달 전이었다면 꿈도 못 꾸었을 여유였다.
‘이보다 더 즐거운 날은 없을 거야.’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아무리 쏟아져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
잘못 생각했다.
‘하루가 어떠했는지는 그날이 다 지나고 판단해야 했는데….’
저녁 0시. 하루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일정인 레스토랑 개업식을 지켜보며 의준은 여기 오기 전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점심시간, 회의는 예정보다 길어졌다. 대표 이사와 전무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사이에 태평하게 식사를 하러 나갈 수 없었던 의준과 대표 이사 비서는 점심을 굶었다. 오후 일정 전에 잠시 짬을 내서 빵이라도 먹으려 했는데 이번에는 사내 인트라넷 서버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사무실 전체에 난리가 났다. 서버는 빠르게 복구되었지만 외근 전에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했던 의준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예상치 못한 일은 있을 수 있고 결과가 좋으면 뭐든 잊을 수 있지 않던가. 그런데 마지막 일정인 레스토랑 개업식 직전에 그 일이 일어났다.
건물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서려다 물웅덩이를 힘차게 밟아 버린 것이다.
다행히 물웅덩이는 깊지 않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의준은 구두에 물이 흠뻑 스며들었음을 깨달았다.
‘으으, 찝찝해.’
아무렇지 않은 척 도헌과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한차례 손님들과 인사를 마치고, 조촐한 개업식 행사가 시작되었을 때 슬쩍 화장실에 다녀왔다. 완전히 젖은 양말을 벗어 버리고 구두 밑창 아래에 휴지를 넣어 물기를 뺀 후에 맨발에 신은 채 돌아왔다.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아무도 그가 양말 없이 젖은 구두만 신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와 함께 행동한 서도헌도 마찬가지였다.
행사를 마치고 손님들이 식사를 시작했을 때, 의준은 도헌과 떨어져 수행원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로 향했다.
“…휴우….”
의자에 앉기 무섭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실내 행사라 만만하게 봤었는데 무척 많이 걸었다. 어쩌면 구두가 불편해서 발에 부담이 더 가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배는 고픈데 움직이고 싶지 않아….’
구두가 발에 들러붙은 것 같았다. 의준은 욱신거리는 발을 천천히 펴며 테이블 위에 있던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옆에서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여자가 서 있었다.
‘대찬 기업 사장님 비서….’
의준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여자는 웃으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비었어요?”
“아, 네. 앉으세요.”
“고마워요.”
여자는 자리에 앉더니 의준을 향해 생긋 웃었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 뭐가 말입니까?”
“개인 투자가 분, 이름 알려 주셨잖아요.”
“아.”
의준은 서도헌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투자가를 바라보았다. 서도헌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다가온 대찬 기업 사장에게 그는 자기소개 대신 대뜸 자기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다른 행사에서 만난 적이 있다며 말이다. 사장은 헛기침을 하며 비서에게 귀를 기울였지만 비서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준은 휴대 전화에 저장했던 초대객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 슬쩍 비서에게 보여 주었다.
“짓궂은 분이시죠. 저도 첫 대면에 같은 질문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어휴, 정말 십년감수했어요.”
여자와 의준은 마주 보고 웃었다.
“어쨌든 덕분에 저희 사장님도 저도 무안당하지 않고 넘겼네요.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의준은 얼떨결에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
서도헌은 흘깃 의준을 바라보았다. 대찬 기업 사장 비서가 지나치게 의준 가까이 다가앉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의준은 몰라도 그녀는 분명히 그에게 호감이 있었다.
‘…상관없는 일이지만.’
도헌은 와인을 비웠다.
“새 비서죠?”
옆자리에 앉아 있던 요식업 전문 투자 회사의 대표가 웃으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의준에게로 향했다.
“신입 사원이라더니, 똑똑하던데요. 우리 회사 정보도 다 꿰고 있고. 전무님은 비서 복이 있네요.”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아 보여요. 우리 회사 연혁과 그간 성사시킨 사업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니 감동받았어요. 서도헌 전무님이 많이 가르치셨나 봐요?”
“제 전문 분야가 아닌데 뭘 가르치겠습니까. 본인이 행사 전에 미리 예습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도헌은 소믈리에가 새로 따른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덧붙였다.
“아버님께서 요식 사업에 종사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요? 식당 오너? 아니면 물류 공급?”
“세준푸드라고 지금은 도산해서 없어진 회사입니다.”
“세준푸드? …이정훈 사장님네 회사?”
“…아시는 회사입니까?”
“알죠. 식자재 유통으로 유명한 회사였는데. 세상에, 이정훈 사장님 아드님이셨구나.”
대표의 시선이 다시 의준에게로 향했다.
“하루아침에 회사가 도산하고… 아버님은 그렇게 떠나시고, 고생 많았겠네요, 아드님도.”
“…….”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도헌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대표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추스르며 살았을까요. 동생이 미성년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고 하셨습니까?”
도헌이 되물었다. 대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인께서는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교통사고였죠.”
이어서 대표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그런데 그 사고가, 여러모로 미심쩍었거든요.”
회사가 도산하기 직전 이정훈 사장은 회사 소유가 아닌 개인 소유 차를 몰고 거래처를 방문한다며 나섰다. 그리고 도로 옆 난간을 들이받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적한 도로였고 종종 야생 동물이 출몰하기로 유명한 지역이었기에 경찰은 동물을 피해 갑자기 핸들을 꺾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 도로가 거래처나 회사 그리고 집과는 전혀 이어지지 않은 도로였거든요. 게다가 사고 몇 달 전에 부인과 아들 앞으로 생명 보험을 들었다고… 그래서 보험 회사가 이의를 제기하고 소송도 했다고 들었는데. 어디까지나 업계 소문이지만요.”
“…….”
도헌은 입을 다물었다. 대표는 한숨을 내쉰 후에 의준을 바라보았다.
“사고 직후 어머님이 뇌출혈인가로 쓰러졌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건강하시려나 모르겠네요. 아드님이 대학생이고 따님은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이었을 텐데….”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 후에 모친의 병. 미성년자 여동생과 함께 남은 이십 대 전반의 청년. 아는 사실이었는데 타인의 입을 통해 들으니 한층 충격적으로 와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친이 사고사가 아니라 자살을 의심받았다면 더욱 충격이 컸겠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역경이 아니었을까. 도헌은 의준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의준은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던 참이었다.
“……?”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살짝 절뚝거리며 뷔페 테이블로 향하는 그를 보던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행사가 끝나고 손님들이 귀가하기 시작했다. 의준은 붐비는 로비에서 차가 건물 앞에 도착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준 씨, 갑시다.”
레스토랑 오너와 인사를 마친 도헌이 의준을 불렀다.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전무님, 아직 차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차는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갑시다.”
“네? 어, 최 실장님께 연락받지 못했는데.”
“내가 방금 지시했습니다.”
의준은 놀랐지만 말없이 도헌을 따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자 바로 앞에 대기 중인 검은 세단이 보였다. 운전기사가 그들을 향해 목례를 한 후에 뒷좌석 문을 열었다.
“타시죠.”
운전기사는 도헌에게 한 말이었지만 도헌은 의준을 향해 타라고 손짓했다.
“전무님…?”
“빨리 앉아요.”
“……?”
의준은 얼떨결에 뒷좌석에 앉았다. 도헌이 말했다.
“다리 넣지 말고.”
“예? …앗, 전무님?”
도헌이 갑자기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 바람에 의준은 놀랐다.
“전무님, 왜 이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구두 벗어요.”
도헌은 의준의 말을 가로막으며 지시했다. 의준은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망설이는 의준을 본 도헌은 의준의 한쪽 발목을 잡아 자기 무릎 위로 올렸다.
“전…. …윽.”
최대한 조심스럽게 구두를 벗겼음에도 불구하고 의준은 얼굴을 찌푸렸다. 도헌은 물기에 퉁퉁 부은 발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최 실장님, 차에 구급상자가 있었지요? 꺼내 주십시오. 그리고 슬리퍼도.”
“알겠습니다, 전무님.”
운전기사가 트렁크를 열어 구급상자를 꺼내 도헌 옆에 놓은 후에 차 안에서 구두를 벗고 이동하는 임원들을 위해 마련해 두는 슬리퍼를 꺼냈다. 의준은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전무님,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어요.”
뒤축은 생각보다 많이 까진 상태였다. 도헌은 얼굴을 찡그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발이 이렇게 될 때까지 내버려 두면 어떻게 합니까.”
“…좀 까진 정도라서….”
“아파서 절뚝거렸으면서 말은 잘하는군요.”
“…죄송합니다.”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보고 있었나 보다. 의준은 대꾸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 사이에 도헌은 의준의 발을 소독하고 밴드를 붙여 주었다. 한껏 찌푸린 표정과는 달리 퉁퉁 불은 발을 어루만지는 도헌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치료한 발을 준비한 슬리퍼 위에 내려놓고 도헌은 다른 발을 다시 무릎에 올렸다. 긴장해서 웅크린 발가락과 불은 발은 희고 차가웠다.
“됐습니다. 슬리퍼 신고 들어가요.”
“네….”
의준은 슬리퍼를 신고 뒷좌석 안으로 다리를 넣었다. 도헌은 차 문을 닫은 후에 반대편 좌석으로 돌아갔다.
“출발합시다.”
차에 탄 후 도헌이 기사에게 지시했다.
“오늘도 병원으로 갑니까? 아니면 집?”
“네? 어, 집으로….”
“이의준 씨 집 주소로 갑시다.”
도헌이 말했다. 의준은 당황했다.
“네? 아닙니다. 내려서 버스 타면 되는데요.”
“그 발로 어떻게 걷습니까. 다시 저 구두 신을 겁니까?”
차마 그러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의준은 슬그머니 제안했다.
“저… 하다못해 전무님 먼저 들어가시고 나서 제가 귀가하면 어떨까요?”
“내가 먼저 내리면 최 실장에게 말해서 버스 정류장에 내려 달라고 할 생각이겠죠.”
“윽….”
“데려다주고 집에 갈 테니 얌전히 앉아 있어요.”
의준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차가 천천히 출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도헌의 눈치를 보며 의준은 그들 사이에 놓인 플라스틱 박스를 바라보았다. 원래 차내에서 신던 슬리퍼가 들어 있었던 박스 안에는 의준의 낡고 젖은 구두가 담겨 있었다.
나름 아껴 신던 구두였는데 수명이 다한 모양이었다. 도헌에게 신세를 졌던 민망함만큼이나 구두에 대한 아쉬움도 솟아났다.
“전에도 그 구두 아니었습니까?”
“네?”
갑자기 들려온 질문에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도헌이 플라스틱 박스 안의 구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결혼식장에서. 그때도 피가 났잖습니까.”
“아… 맞아요, 그랬죠.”
도헌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린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두는 이거 한 족뿐이어서요.”
“의미 있는 구두입니까?”
“…무슨 의미이신지….”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신을 만큼 중요한, 누가 선물로 줬다거나, 그런 구두인지 물은 겁니다.”
“아.”
질문의 뜻을 이해한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그냥 몇 년 전에 면접 때문에 급히 인터넷 쇼핑몰에서 샀던 구두입니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신었어요. 새로 살 돈도 없었고요.”
“동생 생일 선물을 사는 김에 본인 구두도 사지 그랬습니까.”
도헌의 말에 의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생각도 했는데요… 아직 멀쩡하다 싶기도 했고… 뭐랄까, 제 구두를 사려니 돈이 아깝더라고요. …이상하죠? 동생 가방은 몇백만 원짜리도 턱 샀는데….”
핀잔이 날아올까. 아니면 같이 웃어넘길까. 이런 생각을 떠올리던 의준의 귀에 생각지도 못한 말이 스며들었다.
“남들을 우선해 버릇해서 스스로를 위하는 방법을 잊은 겁니다.”
“…….”
의준은 말을 잃었다. 도헌은 의준의 표정을 확인하고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의준 씨가 열심히 남을 위해 살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런가요.”
겨우 구두 한 족을 몇 년 신었던 정도로 이런 칭찬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의준은 왠지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스스로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로 듣기는 처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솟아오르나 보다.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발을 그렇게 엉망으로 만든 점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도헌은 이렇게 받은 후에 옆에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헌과 의준 사이의 플라스틱 케이스 위에 놓인 그것은 직사각형 모양의 상자가 든 종이봉투였다.
“받아요.”
의준은 얼떨결에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 봐요.”
의준은 종이봉투에서 상자를 꺼냈다. 단단한 뚜껑을 열자 희고 부드러운 종이 사이로 형태를 드러낸 그것은… 구두였다.
짙은 밤색, 은은하게 윤기가 도는 부드러운 가죽 정장 구두. 종이봉투와 박스에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던 명품 브랜드의 로고를 보지 않아도 고급품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미리 사 뒀습니다. 내 일정 때문에 당일에 준비하기는 무리 같아서.”
“미리라니… 대체 언제….”
이번 주에 도헌은 일정이 꽉 차 있었다. 수요일인 오늘 점심시간에 가지던 개인 휴식도 쓰지 못했을 정도였다.
“지난주에 의준 씨 바래다주고 다시 백화점에 들렀어요.”
“……!”
“기왕이면 맞춤 구두점에 데려가서 구두를 맞추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까지는 없어서. 급한 대로 내가 신어 본 중에 제일 편한 브랜드에서 구했습니다.”
도헌은 말을 이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건네주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생일 선물입니다.”
의준은 도헌의 얼굴과 구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헌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듭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어서.”
“받는다고 큰일 나지 않아요.”
도헌은 피식 웃었다.
“단순한 생일 선물입니다. 다른 의미는 없어요.”
다른 의미는 없다는 말이 의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헌은 옆으로 흘러내린 상자 뚜껑을 상자 위에 얹어 주며 말했다.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만 담았으니 받아요.”
“…….”
뚜껑 옆으로 내린 의준의 손에 도헌의 손이 스쳤다.
‘사실일까?’
구두 상자 아래로 치료를 마치고 슬리퍼를 신은 맨발이 보였다.
‘이렇게까지 날 챙겨 주면서 아무 의미도 없다고? 정말?’
기분이 묘했다.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를 바라보던 도헌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솟아오르는 의문 위로 누군지 모를 아는 사람의 딸을 위해 몇백만 원짜리 가방을 샀던 도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에게는 이런 선물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르겠다.
“고맙습니다, 전무님.”
의준은 박스를 끌어안은 채 인사했다.
“감사히 잘 신겠습니다.”
“그래요.”
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보자 가슴이 아팠다.
‘다른 의미는 없어요.’
다친 발을 망설임 없이 무릎 위에 올려서 치료해 주고, 불편한 구두를 눈여겨보았다가 새 구두를 선물해 주었으면서 다른 의미가 없다니.
‘사람 아프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네요, 형은.’
의준은 미소를 짓는 도헌을 향해 마주 웃었다.
‘…그런 사람에게 왜 다시 이런 기분을 느낄까요? 나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의준은 구두 상자를 어루만지며 차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주머니 안쪽에서 휴대 전화 진동음이 퍼져 나갔다. 의준은 화들짝 놀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
“누굽니까?”
놀라는 의준을 보고 도헌이 물었다.
“간병인 선생님께서… 죄송합니다, 전화 좀 받겠습니다.”
의준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생님.”
---아, 보호자님. 병원으로 오셔야겠어요.
의준의 안색이 변했다. 도헌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긴급 수술이 필요하셔서 지금 응급실로 이동하셨어요.
“……!”
숨이 막혔다. 굳어진 의준을 본 도헌은 운전석을 향해 말했다.
“병원으로 갑시다. 서둘러 주세요.”
그사이에 통화를 마친 의준이 휴대 전화를 쥔 손을 좌석에 툭 내려놓았다.
“뇌혈관이… 또 터진 것 같대요.”
의준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지, 지난번에 수술하고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또 수술을 하면….”
“의준 씨.”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으실 겁니다. 마음 단단히 먹어요.”
“…….”
말과 함께 도헌은 의준의 손을 꽉 잡았다.
“괜찮으실 겁니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가 무너지려던 마음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의준은 그의 손을 힘주어 마주 잡았다.
***
병원에 도착한 직후 의준은 응급실로 달려갔다. 기다리던 간병인에게 상황을 전달받고 담당의에게 어머니의 현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의준은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수술에 동의했다.
호출을 받고 불려 나온 전문가들과 담당의가 급히 수술실로 향했다. 의준은 응급실에서 아주 잠깐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산소 호흡기를 쓰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의식이 없는 지금 상태가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걱정과 고통은 멀쩡한 자신이 전부 떠안으면 되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제발….”
어머니를 실은 침대가 수술실 문을 지날 때 의준은 의료진을 향해 간절하게 빌었다. 마음속으로는 어머니에게 애원하면서.
‘엄마, 제발… 죽지 마.’
수술실 문이 닫혔다. 그래도 차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던 의준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도헌이 서 있었다.
“전무님.”
그제야 의준은 병원까지 함께 왔던 도헌이 떠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대기실에서 기다립시다. 이리 와요.”
도헌은 의준을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다른 환자의 보호자들도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이 시간대에 수술 중인 환자가 더 있다니. 동지 의식과 함께 슬픔이 밀려들었다.
도헌은 의준을 쿠션 있는 의자에 앉히고 맞은편 벤치에 앉았다.
“유 선생님이 동생에게도 연락했다고 합니다. 새벽에 기차로 올라오겠다더군요.”
도헌이 간병인의 이름을 언급했다.
“시간 맞춰서 서울역으로 차를 보내겠습니다. 최 실장님이 안전하게 병원으로 데려올 겁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은커녕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의준은 고개를 숙였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도헌은 의준의 얼굴을 응시했다. 핏기 없이 창백하고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은 평소보다 더 메마르고 초췌해 보였다.
“어머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네….”
의준은 입술 양쪽 끝을 억지로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전무님까지 병원에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집에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일정도 늦게까지 있었으니 쉬셔야 내일….”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도헌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어도 의준 씨 지금 얼굴을 보고 그냥 두고 갈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제 얼굴이… 그렇게 심한가요?”
아마도 웃으려 했으리라. 하지만 불안감이 범벅이 되는 바람에 표정은 이상하게 일그러질 뿐이었다.
도헌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의준이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상의를 벗어 들고 의준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괜찮아요.”
의준의 어깨에 상의를 걸쳐 주면서 한 팔로 그를 안았다.
“어머님은 이겨 내실 겁니다. 괜찮아요.”
“…윽….”
울컥하고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의준은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터져 나오기 직전에 삼킨 신음이 눈시울로 방향을 틀었다. 부릅뜬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움켜쥔 주먹 위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다시 한 방울, 또 한 방울. 연달아 떨어진 눈물이 주먹을 타고 흘러내려 바지를 적셨다.
‘엄마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가사 도우미로 일하던 집에서 처음 쓰러졌던 이후 모친은 병원과 집을 들락날락했다. 작년에는 아예 병원에서 살았고 말이다. 의식을 잃은 모친은 남매가 지금 살고 있는 반지하 빌라가 어디인지도, 소영이 어느 대학을 다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 건 나중에라도 알려 주면 되니까 말이다.
‘엄마가 이대로 우리 곁을 떠나면….’
이대로 모친의 삶이 그들 남매와 완전히 갈라져 다시 하나가 되지 못할까 봐 무서웠다.
밀린 병원비나 앞이 막막한 간병의 세월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주변의 차가운 시선이나 모멸적인 언사도 참을 수 있으니 제발….
도헌은 의준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젖은 얼굴이 도헌의 어깨에 닿았다. 곧은 어깨를 감싼 셔츠에 순식간에 눈물 자국이 번져 나갔다.
“…흐윽….”
의준은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도헌은 의준의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윽….”
의준의 어깨가 애처롭게 떨렸다. 그토록 꿋꿋하고 밝게 버텨 왔던 남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병원비를 지원하고 간병에 도움을 주기는 했어도 도헌은 의준의 모친이 정확히 어떤 병으로 사경을 헤매는지 몰랐다. 관심도 없었다. 의준이 자기에게 고마워하고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도헌은 그녀가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세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이 남자는 무너질 터였다. 그러니까.
‘…부디 수술이 성공하기를.’
도헌은 진심으로 빌었다.
동이 틀 무렵에 수술은 끝났다. 예정보다 두 시간 늦게 수술실에서 나온 담당의는 체격보다 큰 정장 상의를 어깨에 걸치고 발에는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던 환자 보호자에게 수술이 성공적이었다고 전했다.
“우선 중환자실로 옮겨서 상태를 봅시다.”
“고맙습니다!”
의준은 꾸벅 인사했다. 담당의 뒤로 수술실을 나온 학과장을 본 도헌도 고개를 숙였다.
중환자실 면회는 정해진 시간에만 가능했기에 의준은 우선 병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미용 티슈 박스가 발에 채였다. 환자를 급히 수술실로 옮겼던 흔적이 병실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병실부터 치워야겠네….”
이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굽히려던 의준을 도헌이 가로막았다.
“나중에 하고 우선 쉬어요.”
“저는 괜찮아요.”
“밤을 꼬박 새고 앉아 있던 사람이 괜찮을 리 있습니까.”
도헌은 의준의 팔을 잡고 소파로 향했다. 침대로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소파 위에는 얇은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간병인이 자려고 준비했으리라.
“마침 잘됐군요. 동생이 오기 전까지 눈 좀 붙여 둬요.”
도헌은 이렇게 말한 후에 의준을 소파에 앉혔다.
“오늘은 출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외에 필요한 게 더 있으면 나에게든 아니면 김하나 과장에게든 연락해요.”
말과 함께 도헌은 의준의 팔을 놓았다. 의준은 떨어져 나가는 도헌의 손을 다급히 붙잡았다.
“가시게요?”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의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아… 죄송합니다.”
의준이 손을 놓자 이번에는 도헌이 그 손을 움켜쥐었다. 놀란 의준을 향해 도헌은 입을 열었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까?”
“…….”
의준은 대답 대신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곧 오전 일곱 시. 도헌은 슬슬 출근 준비를 위해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목요일이었고 도헌은 오전부터 한 시간 단위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최소한 아홉 시 반까지는 출근해야….
‘아니야.’
의준이 망설이는 이유는 업무 때문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곁에 있어 주면 좋겠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였다.
이 마음은 옳지 않았다. 상사에게 요구해서는 안 되는 욕망이었다. 그러니까 억눌러야 한다. 억누르고 억눌러서 티를 내지 않고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하는 마음이었다.
‘왜?’
단단한 결심 사이로 의문이 솟아올랐다. 의준은 그의 손을 잡은 도헌의 손을 바라보았다. 서로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 이토록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편했다.
‘왜 놓아야 하지?’
이 온기를 놓으면 아무도 없는 병실에 홀로 남아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이 남자를 떠나보내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었다.
“제가 여기 있어 달라고 하면… 남아 주시나요?”
“…그래요.”
“왜요?”
의준은 천천히 시선을 위로 향했다.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무님은 왜 저에게 이렇게 잘해 주시죠?”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 주셨어요.”
생일은 이력서에 썼어도 발 사이즈를 쓴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헌이 선물한 브랜드 구두 박스에는 정확한 사이즈가 표기되어 있었다.
“저를 위해 주말을 할애해 주셨죠.”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항의하기보다 속으로 억눌러 버릇했던 의준 대신 항의해서 사과를 받았다. 같이 영화를 보고 바래다주기까지 했다.
“엄마 간병에 도움을 주셨고요.”
담당의가 별일도 없고 회진 시간도 아닌데 병실에 찾아와 모친의 상태를 살피기는 처음이었다.
“필요할 때 곁에 머물러 주셨어요.”
어깨를 빌려주었다. 손을 잡아 주었다. 온기는 힘이 되었고 동시에 잊고 있던 기억을 일깨워 주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체온을 느끼면 두근거렸고 몸이 닿으면 기뻤다.
“…저에게 키스도 하셨어요.”
잠결이었고 직후에 도헌은 기억나지 않는 듯이 행동했었다. 하지만 의준의 말에 입을 다무는 도헌을 보며 의준은 그가 기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저에게 키스하셨어요?”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야경을 보았던 그날, 어렴풋이 되살아가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입술이 마주 닿았던 아침에는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공과 사를 구분하자고 선을 그었던 분도, 그 뒤에 새로운 관계가 반드시 공적인 의미만은 아니라고 말한 분도 전무님이셨죠.”
도헌의 태도가 혼란스러웠다. 그에게 휘둘리는 자신이 괴로웠다.
“왜요?”
달콤했지만 쓰게 끝났던 첫사랑은 막 고개를 든 참이었다. 아직 억누르기에는 늦지 않았다.
“아무에게나 그러시나요?”
희망을 끊어 주면 좋겠다.
‘아니야. 나는….’
절망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이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을 뿐이야.’
의준은 도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실을 말해 주세요.”
도헌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의준의 곧은 시선이 심장을 꿰뚫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의준 씨는 놀랄 겁니다.”
도헌은 의준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의준의 손을 입술에 댔다. 손등에 부드럽게 들러붙는 입술 감촉에 의준은 흠칫 놀랐다.
“전무님.”
“한 가지만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도헌은 의준의 손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잠결에 한 키스가 아니었습니다.”
“…….”
“의준 씨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키스했습니다.”
왜냐고 묻기보다 먼저 입술 위에 뜨거운 숨결이 밀려들었다. 놀라서 크게 뜬 의준의 눈에 가늘어진 회색 눈동자가 비쳤다.
“…읍….”
코가 스치고 입술이 밀착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던 짧은 신음이 뜨거운 숨결에 녹아 사라졌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면서 크고 따스한 두 손이 의준의 뺨을 감쌌다. 숨결이 스칠 만큼 가까이에서 도헌이 속삭였다.
“너에게 키스하고 싶었어. 그날도, 오늘도. 아니, 계속.”
“…….”
“의준아.”
경칭이 붙지 않은 이름을 들은 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헌은 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무너지듯 그의 품에 안긴 의준의 귓가에 작은 혼잣말이 스며들었다.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전무님하고 저는… 이제 어떤 사이인가요?”
약한 경계심이 남아 있는 의준의 눈빛을 보며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사이라고 말하기를 바라지?”
“…내가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의준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짧고 빠르게 숨을 들이마신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대답하려고요?”
“…내가 그렇게 상냥한 사람으로 보였나?”
“…….”
“네 바람과 상관없이 내 대답은 정해져 있어.”
도헌은 의준의 입술을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마도 그 대답이 마음에 들 거야.”
“…말을 이상하게 하시네요. 그래서 그 대답이 뭔데요?”
“알 텐데.”
“모르겠는데요.”
“알아.”
도헌은 단언한 직후 씩 웃었다. 의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전무님, 저는….”
“의준아.”
도헌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은 다른 호칭이 듣고 싶어.”
“……!”
의준의 눈동자가 한껏 커졌다. 다정한 도헌의 얼굴을 머금은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입술이 가까워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도헌이… 형.”
입사한 후 처음으로 부른 호칭은 밀착한 입술 안으로 부드럽게 빨려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