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김하나가 비서실 전원에게 꼭 보라고 추천했던 영화는 유명한 차량 액션물이었다. 속편이 세 편 이상 나왔으며 등장하는 배우들은 조연 주연 가릴 것 없이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계절에 어울리는, 그리고 어느 수준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요소로 이루어진 영화였다.
“네? 매진요?”
“네, 고객님. 사전 예매가 종료된 회차라서요.”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유명한 영화에 주말 황금 시간대였다. 매진되지 않는 편이 이상할 터였다.
“다른 시간대에도 없나요?”
“오늘은 저녁 7시 40분 회차까지 매진입니다. 이후 회차는 여유가 있습니다.”
“아… 그건 너무 늦는데.”
의준은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입니까?”
도헌이 다가왔다.
“아, 전무님. 보려던 영화가 매진이라고 하네요.”
“그러면 다른 영화를 봐도 됩니다.”
“네? 어, 그게.”
의준은 예매처 위의 모니터에 표시되는 상영 영화 목록을 올려다보았다. 매진된 차량 액션물 외에 선택 가능한 영화는 애니메이션 두 편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또 다른 영화의 후속작이었다.
“저 영화는 어떻습니까?”
도헌은 또 다른 후속작을 가리켰다. 의준이 가장 선택하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저건 후속작인데요.”
“난 전작을 봤습니다. 의준 씨는 안 봤던가요?”
“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의문은 멍하니 되물었다.
그 영화의 전작은 6년 전에 개봉되었다. 블록버스터급은 아니었지만 제법 흥행했던 영화였다. 사건과 로맨스가 적당히 섞인, 해피 엔딩으로 끝났던 유럽 영화.
‘도헌이 형과 같이 본 마지막 영화였는데.’
도헌은 그 사실을 잊었을까. 의준은 심장이 따끔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봤습니다.”
“그럼 저걸로 하죠.”
두 번째로 고른 영화는 좌석이 넉넉했다. 그들은 표를 끊고 상영 시간이 10분 남은 시점에 입장해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좌석에 여유가 있었지만 중앙 부분 좌석에는 관객들이 모여 있었다. 의준과 도헌의 양옆에도 이미 관객이 앉아 있었다.
‘우와, 하필이면 양쪽이 다 커플이네.’
자리에 앉은 후 영화가 시작되기 전 도헌이 상체를 슬쩍 의준 쪽으로 기울였다. 어깨와 팔이 닿는 바람에 의준은 놀랐다.
“미안합니다.”
도헌은 사과한 후에 자세를 바로 했다. 도헌의 어깨는 좌석 등받이보다 넓었다. 좌석이 팔걸이로 구분되어 있어도 어깨가 닿을 정도였다. 옆 좌석의 여자 관객에게 몸이 닿지 않도록 어깨를 약간 움츠린 도헌을 보고 의준은 작게 속삭였다.
“전무님, 자리 바꿀까요?”
“아닙니다. 그쪽으로 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의준의 옆자리에는 남자 관객이 앉아 있었다. 체격 조건상 더 불편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의준은 다시 말했다.
“제 쪽으로 기울이셔도 됩니다. 저는 여유가 있으니까요.”
“고마워요.”
도헌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팔걸이에 팔을 기댔다. 그의 어깨가 의준의 어깨에 닿았다.
‘체격이 좋으시구나.’
예전에도 이랬던가. 몇 년 전 체격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때도 밀착해 앉기는 했었다. 지금과는 달리 그렇게 앉는 데 이유가 필요 없던 시절이었다.
‘괜히 영화를 보자고 했나. 이렇게 밀착하게 될 줄은….’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어깨와 팔에 신경이 집중되었다. 냉방 탓에 서늘해진 몸에 상대의 체온이 유달리 뜨겁게 느껴졌다.
‘의식하지 말자.’
의준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연스럽게 영화만 보면 돼.’
사적으로 백화점 일을 도와주었고 포상금까지 준 상사에 대한 약소한 보답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비록 선택한 영화가 몇 년 전, 그 상사와 사적으로 깊은 관계였을 때 보았던 영화의 속편이기는 해도.
‘…잠깐만, 이거… 생각보다 더 미묘한 상황이 아닐까?’
의준은 흘깃 도헌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도헌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집중한 기색이 역력했다.
‘맞다, 이 영화는… 이 사람 취향이었지.’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만 상황을 의식하고 있구나.’
의준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신 후에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영화를 보러 왔으니 영화를 봐야겠다. 다른 데 신경 쓸수록 추억만 되살아날 테니 말이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등장인물이나 배경 상황은 같았지만 주연 배우는 첫 작품과 달랐다. 게다가 미묘하게 이야기 전개가 늘어지고 몰입도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몇 년 만에 내놓은 후속작치고는 실망스럽군.’
도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입부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는데 한 시간여가 흐른 지금, 더 앉아 있는 것이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혼자 왔다면 당장 나갔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옆자리에는 동반자인 의준이 있었다. 그는 영화가 시작된 뒤로 꼼짝도 하지 않고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 영화가 취향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첫 작을 보았을 때는 졸았으면서.’
보려던 영화가 매진되고 선택지가 달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고르지 못하고 망설였던 의준이 떠올랐다. 혹시 전작을 보았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러나 싶어서 모른 척해 보자 의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오해한 표정이었지.’
낯설었다.
도헌이 아는 의준은 그런 식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상대의 표정을 살피던 사람이 아니었다. 불쾌하면 화를 냈고 기쁘면 환하게 웃었다. 이의준은 희로애락이 분명하고 천진난만한, 악의 없이 이기적이던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그런 이의준이 자기보다 우선했던 사람은 서도헌뿐이었다.
‘형 취향이라기에 나도 보고 싶었어요.’
실컷 졸고 나와서 이렇게 변명한 후에 씩 웃던 의준을 기억했다. 그런 그를 좋아했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지난 일이야.’
5년이 지난 지금, 도헌과 의준은 변했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물론 관계도 변했다. 당연히 감정도 그대로일 리가 없었다.
‘그런 걸 바라고 시작한 관계가 아니니까.’
어깨에 묵직하게 체중이 얹히는 느낌이 드는 바람에 도헌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의준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집중해서 보나 싶었는데. 하긴….’
전작이 취향이 아니었는데 후속작이 마음에 드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면은 예전과 다르지 않군.’
보다 편하게 기대도록 어깨에 힘을 뺐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도헌의 코끝을 스쳤다.
도헌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가 났다. 샴푸일까, 아니면 향수?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곱게 감긴 의준의 눈꺼풀과 긴 속눈썹이 보였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
갑자기 브랜드 매장에서 불편하고 주눅 들어 하던 얼굴과 매표소 앞에서 도헌의 눈치를 살피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나 대신 선택한 삶이라면 훨씬 좋았어야 하잖아.’
처음 재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친구의 험담을 듣고 나서도 그는 태연하게 웃었다. 마치 그런 취급에 익숙한 사람처럼 말이다.
‘대체 5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떠나지 않는 의문 속에서 도헌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향기가 스며들었다.
도헌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머리카락 사이에 닿은 순간 시선이 느껴졌다. 의준 옆자리의 관객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헌과 시선이 마주친 관객은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뻔했어.’
도헌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
해가 제법 기울어진 늦은 오후, 의준은 병원에 도착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무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주말 잘 보내요.”
“네, 전무님도….”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에 도헌은 차를 돌렸다. 검은 세단이 병원을 빠져나가 대로에 접어든 후 의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으아악.”
한숨 사이로 신음과 비명의 중간 정도 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 버렸다.
먼저 같이 영화를 보자고 해 놓고, 옆에 앉았던 도헌의 어깨에 기대서 한 시간 넘게 푹 자 버렸다.
‘아무리 영화가 재미없었어도 그렇지, 그 사람이 옆에 있는데….’
잠에서 깼을 때는 엔드롤이 올라가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의준에게 도헌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너무 푹 자기에 깨울 수 없었습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놓친 게 아쉬울 만큼 훌륭하지도 않았어요.’
의준은 사과했다. 도헌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침도 안 흘리고 코도 안 골았으니 괜찮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없는 쥐구멍이라도 만들어서 숨었을 것이다.
“미쳤지, 진짜… 아니, 평소엔 밤잠도 설치면서 하필….”
어떻게 그 자리를 마무리했는지 모르겠다. 늦은 점심 메뉴도, 도헌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오던 30여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있었던 일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두 가지만은 기억했다.
어깨에 닿은 머리를 통해 전해지던 체온과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던 부드러운 숨결을.
‘꿈이었을까.’
잠결이었기에 오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숨결과 탄식에 이어 살짝 닿았던 입술의 감촉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오해도 꿈도 아니었다.
‘…나에게 키스했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달아오른 귓속에서 두근거리는 박동 소리가 메아리쳤다.
‘어째서?’
도헌이 바라는 새로운 관계는 공적이고 업무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수행 비서라는 직업 특성상 다소 사적인 요인이 끼어들기는 해도, 거기에 연애 감정이나 접촉이 포함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불합리한 일을 당한 의준을 발 벗고 도와주었다.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았다. 직장 상사와 주말 오후를 그런 식으로 보낸 부하 직원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김상우가 보았다면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라고 단언했을 것이다. 의준과 도헌은 그런 오후를 보냈다.
‘전무님… 도헌이 형이 생각하는 새로운 관계는 내 생각과는 다른 걸까?’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기대감도 솟아올랐다.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타인에게 과한 기대는 금물이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친절에 속아서는 안 되었다. 고인이 된 그의 부친도 그리고 남은 가족들도 그로 인해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지 않았던가.
‘나에게 좋을 대로 상황을 해석해서는 안 돼.’
의준은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입원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낯익은 의료진과 인사를 하고 병실에 도착해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간병인 외에 예상치 못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엇…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 보호자님, 안녕하세요.”
1년 넘게 간병 생활을 했지만 주말에 거의 본 적 없었던 담당의가 어머니의 병상 발치 쪽에 차트를 들고 서 있었다. 의준은 당황해서 종이봉투를 보호자 침대에 내려놓고 병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로… 저희 어머니가 어디 안 좋으신가요?”
“아니요, 어머님 상태는 특별히 나쁘지 않습니다.”
놀라서 목소리까지 떨리는 의준과 달리 담당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오늘 당직이어서요. 시간이 잠깐 난 김에 상태 확인차 와 봤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의준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담당의는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어머님 상태를 자주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필요한 처치도 적극적으로 도우라고도 하시더군요.”
“…네? 누가….”
“학과장님께서요.”
의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담당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학과장님과 아는 사이시라던데.”
“제가…요?”
“학과장님과 보호자님 두 분 다 서도헌 전무님과 친분이 있으시죠.”
간병인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담당의는 관심 없는 투로 그렇습니까, 라고 대꾸한 후에 차트를 다시 꽂았다.
“상태는 안정적입니다. 월요일에 회진 돌 때 다시 뵙지요. 만일 그사이에 제가 필요하다 싶으면 연락하시고요.”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의준 대신 간병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의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서는 의사를 바라보았다.
“…연락 달라는 말은 처음 들어 봐요.”
“보호자분들께는 잘 말하지 않죠. 바쁜 분들이고, 별일 아니어도 연락하는 경우도 많아서요.”
의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간병인은 웃었다.
“물론 학과장님 연락을 받아서 더 신경 쓰는 면도 없지 않겠지요.”
“역시 그런가요?”
“오해를 살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아무래도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죠.”
그녀는 환자의 이불을 반듯하게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서규민 교수님이시라고… 서도헌 전무님의 외가 친척 되시는 분이 여기 학과장님의 의대 선배 되십니다. 전에는 교수님도 여기서 근무하셨죠. 저도 그때 같이 근무한 인연으로 아직 알고 지내는 사이고요.”
그녀는 전직 간호사이자 간병 전문 회사의 대표였다. 그런 그녀를 파격적으로 저렴한 시급으로 고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도헌이 직접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병실 이동 문제도 그렇고 간병인에 담당의까지…. 모두 전무님이 배려해 주신 결과구나.’
의준은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일인실로 옮긴 후로 그녀는 한 번도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여전히 의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색도 좋아졌고 말이다.
어머니만이 아니라 의준과 소영 남매의 상황도 나아졌다.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훨씬 여유가 생긴 덕분이었다.
“어, 왔어?”
소영이 병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의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밥 먹고 왔어?”
“응, 휴게실에서 도시락.”
“편의점 도시락? 식당 가서 먹으라니까.”
“여긴 비싸고 양이 많아서 그래.”
이렇게 대답하며 들어왔던 소영은 소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뭐야?”
“응? 어.”
소파 위에는 의준이 던져 둔 브랜드 봉투가 놓여 있었다.
“네 생일 선물. 약속했잖아.”
“내 거?”
소영은 깜짝 놀라더니 봉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봉투만 명품인 거지? 안에 뭐 넣었어? 초코파이?”
“뭐래는 거야. 열어 봐.”
“…….”
소영은 봉투에서 박스를 꺼냈다. 봉투를 곱게 접어 소파 등받이에 기대 두고 박스의 리본을 푼 소영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미쳤어.”
더스트백 안에 들어 있는 가방을 확인한 소영은 재차 중얼거렸다.
“미쳤어. …이거 진짜야? 가품 아니고?”
“야, 오빠가 일부러 주말 아침에 백화점까지 가서 사 왔는데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의준이 불평했지만 흥분한 소영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미쳤나 봐… 보증서도 있네? 뭐야, 진짜 내 거야? …내 선물이라고?”
의준을 향한 소영의 눈은 지금까지 본 적 없을 만큼 반짝이고 있었다. 의준은 짐짓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래, 인마.”
“어떻게 된 거야. 이걸 어떻게… 오빠가 샀어?”
“안 샀어. 오다 주웠지.”
“뭐래, 진짜. 정말 어떻게 된 거야?”
차마 가방을 꺼내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소영을 보며 의준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내가 모시는 상사분이 포상금 주셨다고 했잖아. 그걸로 샀어. 작년에 너 생일 못 챙기기도 했고….”
작년 이맘때 전세금을 빼서 병원비로 썼기 때문에 소영이의 생일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소영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케이크 한 조각 사 주지 못한 오빠의 입장은 그보다 더 비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큰맘 먹고 질렀어. 요즘 유행한다며, 그 가방.”
“미쳤어. 그렇다고 그 큰돈을 한 방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영은 환한 표정이었다. 의준은 웃었다.
“빨리 꺼내 봐.”
의준의 말이 떨어지기 소영은 가방을 꺼냈다. 안에 든 종이 뭉치를 꺼내 박스에 두고 가방을 어깨에 걸친 후에 그녀는 의준을 향해 보란 듯이 가방을 내밀었다.
“어, 좋네.”
의준이 대꾸하자 소영은 신난 표정으로 병상으로 향했다. 의식이 없는 어머니 옆에 가방을 내밀며 재잘재잘 자랑하기 시작하는 동생을 보던 의준의 표정에도 기쁨이 어렸다.
‘사 준 보람이 있네.’
비록 가방은 의준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걸 선물해서 얻은 기쁨은 그의 몫이었으니 이 정도면 도헌의 말대로 의준 자신을 위해 돈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이리라.
‘이것도 전무님 덕분이야.’
마음이 따스해졌다. 의준은 선물용 박스를 옆으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
‘아, 그렇지. 전무님에게 오늘 감사했다는 메시지나 보낼까?’
이렇게 생각하며 휴대 전화를 꺼내 들자마자 메시지 앱의 알림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상우가 보낸 메시지였다.
---지금 지방으로 내려가는 중. 차가 밀려서 힘들다. 어디야?
‘고생 많네. 나는 병원.’
5분 전에 보낸 메시지에 이렇게 대답하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어머니 잘 지내셔? 지금 혼자야?
‘엄마는 여전하지. 아니야, 소영이랑 간병사 선생님 계셔.’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우가 물었다.
---그러면 잠깐 통화 가능해?
“…….”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간병인이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그러세요.”
“소영아, 소파 정리 좀 해.”
“알았어~.”
기분 좋게 대답하는 소영을 두고 병실을 나선 의준은 휴게실로 향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응, 지금 휴게실로 가는 중이야.’
메시지를 발송하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의준은 서둘러 휴게실로 들어선 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우야, 웬일이야.”
---웬일은,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했지.
“뭐야, 징그럽게.”
의준의 말에 상우는 웃었다.
---아, 그런데 너 생일 수요일이지? 어쩌냐? 내가 지방 내려와서 챙기지도 못하고.
“새삼스럽게 뭘. 괜찮아. 어차피 평일이고 저녁에 전무님 일정 잡혀 있어서 시간도 없어.”
---생일에 야근을 해? 전무님도 너무하시네.
“전무님 잘못이 아니라 일정이 그렇게 잡혔다니까.”
---무슨 일정인데.
유명한 셰프이자 요식 사업가가 새로 연 고급 뷔페 레스토랑의 개업식이라는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었기에 의준은 화제를 돌렸다.
“내 생일 걱정은 말고 촬영 잘하고 와. 대하사극 주연이라니, 좋은 기회잖아.”
---그래야지. 아, 그래도 세 달이나 같은 사람들만 볼 생각을 하니 우울해진다, 진짜.
“하하하….”
---그러니까 주말에는 시간 내. 이 형님 위로 좀 해 주라.
“이번 주말? 너 거기 있을 거잖아.”
---어제 급히 취재 일정이 잡혔거든. 겸사겸사 새집 계약도 마치고.
“새집?”
의준은 놀라서 되물었다.
---내가 얘기 안 했나? 나 집 샀어. 서초동에.
“그랬구나, 축하해.”
---고마워. 드라마 계약금 들어온 김에 크게 질렀어. 앞으로 열심히 대출을 갚기는 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제 부모님 간섭 없이 쉴 공간이 생겼어.
상우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 후에 말했다.
---그러니까 주말에 집들이 하자. 반나절 정도만 시간 내.
“그래. 선물 뭐 필요한 거 있어? 집들이 선물은 역시 휴지려나?”
---앞으로 두세 달은 살지도 못할 집에 무슨 휴지야. 맥주나 한 박스 사 와라, 집에서 고기나 구워 먹자.
“새집에 고기 냄새 밸 텐데… 맥주 한 박스, 알았어.”
의준은 흔쾌히 수락했다. 상우는 한숨을 내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야, 벌써 그립다.
“서울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서울 말고.
“……? 뭐가?”
의아하게 되묻는 의준의 귀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주말에 보자. 주소는 메시지로 보낼게.
“……? 그래, 알았어. 조심해서 내려가.”
---쉬어.
통화를 마치고 따끈해진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려던 그때 새로 온 메시지 알림이 보였다. 의준은 메시지 어플리케이션을 열었다.
---차 많이 안 밀렸습니다. 집입니다. 쉬어요.
“…아.”
자신을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에 차가 밀려서 도헌이 고생할까 봐 걱정했던 기억이 났다. 의준은 급히 답장을 보냈다.
‘잘 들어가셔서 다행입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발송 버튼을 누른 직후 의준은 가장 중요한 말을 잊었음을 깨닫고 급히 추가 메시지를 작성했다.
‘오늘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두 메시지에 읽음 표시가 떴다. 이어서 답장이 돌아왔다.
---천만에요.
“…후후후.”
메시지가 목소리로 들리는 것 같아서 의준은 웃었다.
마음에 상처를 받으며 시작했던 하루였지만 웃으며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의준은 기분 좋게 창을 닫았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