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13/33)

13.

화창한 주말 오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동향이었던 반지하 맨션 창문으로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날 옥상에 빨래를 널면 기분 좋은 햇살 냄새를 가득 머금고 빳빳하게 마를 것이다.

하지만 의준의 마음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날씨로 표현하자면 묵직한 저기압 아래 검은 구름이 꾸물거리고 가끔 천둥 번개가 치는, 그런 상황이었다.

어젯밤에 의준은 소영과 싸웠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었던 남매 싸움의 원인은 의준에게 있었다. 수행 비서로 취직한 뒤로 간병을 종종 소영에게 미루거나 교대 시간에 늦었는데 참다못한 소영이 폭발한 것이다.

‘오빠가 나랑 엄마 부양하느라 힘들게 일한 만큼 나도 내 앞가림하려고 노력했어. 아르바이트하면서 공부 게을리 안 하고, 엄마 병간호도 했다고. 나도 힘들어. 나도 오빠처럼 친구 만나서 바람도 쐬고 여행도 가고 싶단 말야.’

맞는 말이었다. 받아들이고 사과했지만 소영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낭비할 줄 몰라서 아르바이트 월급 고스란히 오빠에게 주는 것 같아? 나도 낭비할 수 있어! 돈만 있으면 명품도 사고 화장품도 세일 안 할 때 고르고 싶다고!’

갑자기 가세가 기울면서 확 변한 환경에 갑자기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사람은 의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여동생은 중학생이었고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예민한 십 대 시절에 집안에 큰일이 연달아 생겼는데도 엇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하지만 고마움과는 별개로 여동생의 바람이나 속내에는 무심했다. 너무 늦게, 그것도 싸운 후에야 실감했다.

‘다 내 잘못이야.’

말싸움 끝에 의준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소영은 마지못해 사과를 받았지만 부루퉁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으리라.

그래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던 의준은 백화점에 왔다.

저녁 약속 전까지 병실에서 공부하고 있겠다던 여동생 몰래, 곧 다가올 그녀의 생일 선물을 미리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돈으로 잘못을 무마하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미안함과 고마움의 마음을 생일을 핑계로 선물에 담아 전하고 싶었다.

밤늦게까지 고민한 끝에 결정한 선물은 가방이었다.

학교를 다닐 때 사용하기 좋은, 크고 관리가 편한 가방. 늘 들고 다니던 에코백이 아닌 명품으로.

늘 소영에게는 근사한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예상치 못한 여유 자금이 손에 들어온 지금이 바람을 이룰 기회였다.

“…좋았어.”

의준은 굳은 표정으로 백화점에 들어섰다.

어느 브랜드 매장으로 갈지는 정해져 있었다. 지난번 도헌과 함께 들렀던 곳이었다. 도헌은 아는 사람의 20대 딸에게 줄 선물을 샀었다. 생일 선물을 가방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그때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좋아.”

의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매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를 보안 요원이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네?”

깜짝 놀란 의준에게 보안 요원은 정중하게 말했다.

“매장이 붐비는 관계로 순서대로 안내해 드리고 있습니다.”

“……?”

의준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보안 요원은 매장 옆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 죄송해요.”

의준은 얼굴을 붉히며 줄 끝으로 향했다.

‘안에 들어가는 데도 줄을 서야 하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집안이 기울기 전에는 백화점에 종종 쇼핑을 하러 왔었지만 그때는 명품 매장에 이렇게 사람이 붐빈 적이 없었다. 전세계적으로 불황이라더니 그런 것과 상관없이 소비하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었다.

의준 앞에 줄을 섰던 사람들이 차례로 매장으로 들어갔고 드디어 의준 차례가 왔다. 의준은 긴장한 채 매장 안에 들어섰다.

매장 안은 붐볐다. 투명 유리 매대 앞마다 손님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직원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기.”

“네, 고객님.”

의준은 그의 앞을 가로지르던 직원을 불러 세웠다. 직원은 미소 띤 얼굴로 의준을 바라보았다.

“도와드릴까요?”

질문과 함께 직원의 시선이 빠르게 의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입을 열었다.

“저, 가방을 찾는데요.”

“그러십니까? 어떤 가방을 찾으시는지요?”

“아, 그게.”

의준은 휴대 전화를 꺼내 사진 한 장을 화면에 띄웠다.

“이 모델인데요.”

“아….”

직원은 휴대 전화 화면을 가득 채운, 인터넷 쇼핑몰에서 캡처한 가방 모델을 확인한 후에 애매한 감탄사를 냈다.

“고객님, 이 모델은 이 금액으로 살 수 없는데요.”

“네? 아… 아뇨, 이건 사진을 보여 드리려고….”

“그러십니까. 그런데 저희 매장에는 이 가방이 없습니다.”

“……? 없다고요? 안 들어왔나요?”

“인기 모델이라 들어오는 즉시 나가서요.”

직원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빠르게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다른 손님을 응대하던 중이라….”

“네? 어….”

직원은 빠르게 떠나갔다. 의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품절이라는 거지?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발언이 있었다.

‘나는 돈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왜 먼저….’

다른 직원 한 명이 의준 앞을 지나갔다. 그는 아예 의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의준은 매장 안쪽으로 향했다. 도헌과 왔을 때 매장 매니저가 안내했던, 휴게 공간 앞의 매대가 비어 있었다. 의준은 매대 앞에 섰다. 옆에서 다른 손님에게 상품을 선보이던 직원은 의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곧 응대할 직원이 올 테니 기다려 주세요.”

“네, 고맙습니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

5분, 10분. 의준은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불쾌한 예감이 확신으로 변할 즈음 옆 매대의 직원이 보다 못해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지금 담당자를 부르겠습니다. ---이준형 씨, 고객님 응대 좀 부탁해요.”

“네. …아.”

“…….”

물건 창고에서 나온 직원은 방금 전 매장 입구에서 의준을 응대했던 직원이었다. 의준을 알아본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매대 앞에 섰다.

“무슨 상품을 찾으시는지요?”

“가방을 찾습니다.”

의준은 다소 딱딱하게 대답했다.

“찾던 상품이 품절인 모양이라서, 추천을 받았으면 하는데요.”

“어떤 걸로 보여드릴까요?”

“글쎄요. …20대 여대생이 메고 다닐 가방을 찾는데.”

“선물용을 찾으시는군요. 가방 크기는 어떤 정도를 원하실지요?”

“어… 노트북이나 책을 넣고 다닐 정도면 좋겠는데요.”

대답과 함께 의준은 두 손으로 허공에 대충 소영이 가지고 다니던 에코백 크기를 그렸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몸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직원을 보며 의준은 안도했다. 아무래도 아까는 그가 오해를 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무시할 리가 있겠어.’

직원은 빠르고 능숙하게 가방 몇 개를 꺼내 매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중에 한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의준은 그 가방을 향해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이 가방은….”

“아, 고객님. 만지지 마시고요.”

“……?”

의준은 손을 멈췄다. 직원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내부를 보고 싶으시면 제가 열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쉽게 상처가 나는 재질이어서요….”

“…그러면 열어서 보여 주세요.”

직원은 가방 지퍼를 열었다. 안을 채운 부드러운 종이 뭉치를 꺼내지도 않고 대충 가방을 기울여 보여 준 후에 그는 빠르게 가방 지퍼를 닫았다.

“…….”

이 정도면 눈치채지 못하는 편이 바보인 수준이었다. 의준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가격이 얼마인가요?”

“247만 원입니다.”

“헉.”

사려던 가방보다 다소 높은 가격을 들은 의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직원이 낮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의준은 즉시 몸을 돌렸다.

중저가 스파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어서였을까. 액정이 깨진 몇 년 전 휴대 전화를 들고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매장 안의 다른 손님들과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을까.

매장을 나서기 전에 한 청년이 가격도 묻지 않고 디스플레이 된 가방을 가리키며 사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의준보다 훨씬 어려 보이던 그의 옆에는 기뻐하는 여자 친구가 함께 있었다.

기분이 나빴다. 의준은 빠르게 백화점 밖으로 나왔다.

“…휴우….”

백화점 앞 휴식 공간을 벗어나기 전에 걸음을 멈춘 의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바닥을 향해 숨을 내뱉은 후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정하자.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잖아.’

자신을 다독이려는데 불쑥 분노가 솟아올랐다.

‘아니, 그래도 그런 태도는 아니지.’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도, 병원 수납처에서도 숱하게 마주했던 눈빛이었고 태도였다. 매번 웃으며 넘겼지만 마음에는 선명하게 상처가 남았다. 그 위로 새로운 상처가 더해졌다. 하지만 비참하기보다는 화가 났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가방을 살 돈이 있는데 무시당해서 화가 난 거야.’

월급 외에 특별 상여금으로 100만 원과 서도헌으로부터 건네받은 포상금 200만 원. 의준의 현금 카드에는 도합 300만 원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원래 소영에게 선물하려던 가방 가격은 200만 원 이하였지만 조금 넘어도 상관없었다.

‘…큰마음 먹고 왔는데.’

의준은 고개를 들어 백화점을 바라보았다. 한 매장에서 한 사람에게 무시당한 정도로 이렇게 의기소침해지다니.

‘다른 세상에 거부당한 기분이야.’

다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른 백화점에 가거나 정 안 되면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백화점 앞을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휴대 전화 벨이 울렸다.

“어.”

서도헌의 이름을 확인한 의준은 즉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무님.”

---이의준 씨, 휴일에 미안합니다. 잠깐 통화 괜찮습니까?

“네,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사내 공유 일정 프로그램이 에러가 나서 확인할 수가 없는데, 다음 주 일정 하나를 변경하고 싶어서요. 화요일에 있을 외부 미팅, 다른 요일로 옮길 수 있습니까?

의준은 기억을 더듬어 일정을 떠올리고 대답했다.

“그쪽에서 두 날짜를 제안했고 그중에 전무님 일정과 맞는 날로 정했었는데요, 어제저녁에 정했으니 연락해서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부탁을… 아니지, 내가 조절하지요. 연락처를 알려 주겠습니까?

“네? 직접 하시게요?”

---의준 씨는 휴일이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잠시만요.”

의준은 출입증을 겸한 사원증은 지갑 안에 들어 있음을 확인한 후에 말을 이었다.

“제가 잠깐 회사에 들러서 조정하겠습니다.”

---이 일 때문에 굳이 멀리서 출근할 필요 없습니다.

“아닙니다, 마침 회사 근처라서요. 지금 백화점 앞이니까 10분 내로 도착할 수 있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의준은 걸음을 뗐다.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생겨서 다행이라니….’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안도감이 씁쓸했다.

길을 건너 한적한 오피스 빌딩 사이로 걸어갔다. 평소보다 조도가 낮은 건물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향했다.

휴일의 사무실은 조용했고 평소보다 어두웠다. 평일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실내를 밝히는 조명을 모두 끈 탓이었다. 의준은 평소와 분위기가 다른 사무실을 조용히 가로질러 전무실에 도착했다.

전무실 문은 열려 있었고 서도헌은 심각한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전무님, 저 왔습니다.”

“아, 이의준 씨.”

도헌은 고개를 들었다.

“휴일에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저, 말씀하신 일정부터 조정하겠습니다.”

의준은 곧장 자기 자리로 향했다. 도헌은 열린 문 너머로 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무님, 변경될 것 같습니다. 금요일 오전의 내부 일정을 변경해도 되겠습니까?”

일정을 확인하고 상대 쪽 담당자와 통화한 후에 의준은 이렇게 물었다. 도헌은 그러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 변경을 마치고 의준은 다시 전무실로 돌아왔다.

“그쪽 담당자가 토요일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 처리가 빨랐습니다. 마침 일정 확정 전이었대요.”

“다행이군요. 수고했습니다.”

“아닙니다.”

“휴일 근무 수당 신청하도록 해요.”

“네? 아닙니다. 겨우 30분… 아니, 20분 일했는데요.”

“결제하고 퇴근하게 빨리 작성하세요.”

“아, 네!”

의준은 급히 돌아가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 비서실 파티션 입구에 서 있는 도헌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부터 백화점에는 무슨 일로 왔습니까? 쇼핑?”

“아, 네. 여동생 생일 선물을 살까 해서요.”

잠시 잊고 있던 브랜드 매장 일이 떠오르는 바람에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동생도 같이 왔습니까?”

“아니요. 소영이… 동생은 지금 병원에 있고요. 오후에 교대하기로 해서 혼자 쇼핑할까 했는데….”

“…내가 불러서 일을 시키는 바람에 일정을 망쳤군요.”

“네? 아닙니다!”

의준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도헌은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앗, 네.”

의준은 얼굴을 붉혔다. 도헌은 의준 쪽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짐이 없는 걸 보니 쇼핑 전이었군요. 선물은 정했습니까?”

“어… 그게. 가방을 사 주려고 했는데요.”

“대학생이라고 했지요? 전에 같이 갔던 매장에 가 봤습니까? 요즘 인기라던데.”

“네. 거기에 갔다 왔는데….”

의준은 말을 흐렸다.

“다른 데서 사야 할 것 같아요.”

“……?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도헌이 물었다.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른 데도 둘러볼까 해서요. 오늘 반드시 사지 않아도 괜찮고요.’

머릿속에 무난한 대답이 떠올랐다. 그러나 막상 입을 열자 의준 본인도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매장에서 불편한 일이 있었어요.”

“불편한 일?”

“…….”

입을 다물기에는 늦었다. 눈빛으로 재촉하는 도헌을 이기지 못한 의준은 어쩔 수 없이 오전 일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던 도헌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무례한 사람이군.”

도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짧은 한마디가 위로가 되어 마음에 스며들었다. 의준은 웃었다.

“유행하는 브랜드고 동생이 좋아할 거 같으니 다음에 다른 매장으로 가 보죠, 뭐.”

내일 퇴근한 후에 정장 차림으로 방문하면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의준은 서류 작성을 시작했다. 도헌은 집중한 의준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뒤에 시간 됩니까?”

“더 시키실 일이 있나요? 오후 네 시 전까지는 괜찮습니다. 그 뒤에는 병원에 가야 해서요.”

“일은 없고, 나하고 다시 갑시다.”

“예? 어디를요?”

“그 매장에요.”

무슨 매장을 말하는지 이해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의준은 당황했다.

“가방 매장에요? 왜….”

“그냥 넘기기에 불쾌하니까요.”

도헌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몸을 돌렸다.

“서류 발송하고 나갑시다.”

“…….”

의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전무실로 들어가는 도헌을 바라보았다. 그가 휴대 전화와 차키를 챙기는 모습을 보고 의준은 황급히 문서 작성을 마무리했다.

‘진짜 가게?’

도헌을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도헌의 차를 타고 건물 주차장을 빠져나와 백화점으로 향했다.

‘정말로?’

주차를 마치고 지하 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의준은 흘깃 도헌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는 옆얼굴에서 감정을 읽어 내기는 어려웠다.

‘…왜?’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 의준을 먼저 내리게 하고 뒤따라 내린 도헌은 휴대 전화를 귀에 대며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갑시다.”

의준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걸음을 뗐다. 아직 매장 직원의 표정과 태도가 생생했다. 얼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장이 보였다. 아까보다 줄 선 손님 수가 더 많았다. 저렇게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아까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줄 서기 싫다….’

이렇게 생각하며 줄 끝을 향해 몸을 돌리던 의준의 어깨를 도헌이 붙잡았다. 의준은 도헌을 돌아보았다.

“전무님?”

“서도헌 님, 오셨어요?”

입구에 대기 중이던 매장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도헌에게 인사했다. 도헌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후에 입을 열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해요. 지난번에 선물로 구매하셨던 가방은 어떠셨나요?”

“마음에 들어 하더군요.”

그 질문에 의준은 그녀를 기억해 냈다. 도헌이 아는 사람의 딸 생일 선물로 가방을 살 때 전문 쇼퍼가 소개했던 매장 매니저였다.

“오늘도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매니저는 앞장서서 매장 안으로 향했다. 도헌은 의준을 돌아보았다.

“갑시다.”

“네? 네.”

얼떨결에 의준은 앞장서서 매장으로 향했다. 줄을 무시하고 입장하는데도 불구하고 낯익은 보안 요원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매장이 좀 혼잡하죠? 번거롭지 않도록 안쪽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쪽으로….”

“그 전에 찾을 사람이 있는데.”

“네?”

매니저는 놀라서 되물었다. 도헌은 의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오전에 매장에 들렀는데, 여기서 불쾌한 응대를 받았더군요.”

“……! 전….”

의준은 놀라서 입을 열었다. 도헌은 눈짓으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대응을 할 매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어느 직원이 그랬는지 확인할 겸 물었는데, 이 친구가 배려하느라 말을 안 합니다. 그래서 직접 만나러 왔습니다.”

“아니… 저기, 그런 일이….”

매니저는 당황한 표정으로 도헌과 의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고객님께서 오해하셨다면….”

“이 친구는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도헌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매니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 친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대하고 무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니까 불쾌했는데도 그 자리에서 따지지 않고 매장을 떠난 겁니다. 이 친구다운 행동입니다만.”

도헌은 흘깃 의준에게 시선을 두었다.

“나는 그런 취급을 용납 못 하겠습니다.”

“……!”

다시 매니저에게로 향한 도헌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매니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가 의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고객님. 어느 직원인지 말씀해 주시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아, 아니요. 그건 좀….”

당황해서 고개를 내젓던 그때 매니저의 뒤로 지나가던 직원과 의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의준은 어깨를 움찔하고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도헌의 시선이 매니저 뒤의 직원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을 눈치챈 매니저는 고개를 돌렸다. 매니저의 표정을 본 직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객님.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매니저는 다시 의준에게로 몸을 돌려 사과했다.

“매장을 책임진 매니저로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철저히 교육을 실시하겠습니다. 원하시면 교육 및 처벌 결과도 알려 드리도록 하겠으니, 불쾌하셨던 마음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뇨, 아뇨.”

의준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처벌이라니… 그렇게까지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이후의 일은 알아서 처리해 주시고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친구가 부담을 느낄 테니까요.”

도헌은 의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의준은 당황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처벌까지 할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앞으로 조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매니저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쇼핑은 제가 직접 돕겠습니다. 물론 고객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헌이 의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의준은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도헌의 손길을 신경 쓰며 입을 열었다.

“어…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까 찾던 가방이 여기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어떤 가방 말씀이신지요?”

매니저가 물었다.

“저희 매장에 재고가 없어도 다른 매장 재고 상황을 확인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근처 매장에 있다면 이곳으로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도 되나요?”

“그럼요. 고객님이 원하신다면야.”

매니저는 웃으며 대답했다. 의준은 급히 휴대 전화를 꺼냈다. 쇼핑몰의 상품 상세 화면에서 저장한 이미지를 본 매니저는 비웃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인기 모델이네요. 색도 사진과 같은 걸로 준비할까요?”

“네, 있다면요.”

“재고 확인하고 돌아오겠으니 편히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매니저는 이렇게 말한 후에 빠르게 근처 매대로 향했다. 도헌은 의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앉지.”

“네? 네.”

의준은 작은 티 테이블 앞의 2인용 소파에 도헌과 나란히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직원이 다가왔다.

“고객님, 기다리시는 동안 차라도 한잔 올릴까요?”

“예?”

매장에서 차라니. 당황한 의준과 달리 도헌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커피 주십시오. 아메리카노로.”

“따뜻한 걸로 괜찮으십니까?”

이어서 그는 의준을 바라보았다.

“아,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두 분 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맞으시지요? 곧 가져오겠습니다.”

“…….”

의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직원의 등을 바라보았다.

“매장에서 음료도 주는군요. 처음 알았어요.”

“맛은 기대하지 말도록 해요. 평범한 수준이니까.”

“하하.”

도헌은 웃는 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의준이 고개를 돌리자 도헌은 입을 열었다.

“괜찮겠습니까?”

“뭐가요?”

“불쾌하게 만든 당사자에게 직접 사과를 받지 못했지 않습니까.”

“아….”

의준은 말을 흐리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 직원은 어느새 모습을 감춘 뒤였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반성하겠죠.”

당사자에게 직접 사과를 받아도 이미 벌어진 일을 무마할 수는 없었다. 상처받은 마음이 아무는 데 필요한 것은 사과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 사람도 월급쟁이일 텐데, 괜히 이런 일로 고과라도 깎이면 좋지 않을 테니까.’

의준은 이런 생각을 하며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전무님.”

“감사 인사를 들을 만큼 큰일은 안 했습니다만.”

“여기까지 와서 저 대신 항의해 주셨는데요? 충분히 큰일 하셨어요.”

의준은 웃었다.

“덕분에 사과도 받고 커피도 얻어 마시고, 매진돼서 못 산다던 가방 재고도 앉아서 찾게 되었잖아요.”

도헌은 물끄러미 의준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예?”

“지난번에 나에게 불쾌한 일이 있었을 때는 의준 씨가 달려와 주었죠. 그때의 답례라고 생각하십시오.”

그 말을 듣자 어느 주말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원하고 어두운 거실에서 술을 홀짝이며 내려다보던 아름다운 야경과 침실에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마주했던 도헌의 잠든 얼굴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어서 잠결에 나누었던….

‘헉.’

의준은 얼굴을 붉혔다. 부적절한 기억을 일깨우고 말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매니저가 돌아왔다.

“고객님, 마침 찾으시는 상품이 근처 팝업 스토어에 있었습니다. 가져와서 보여 드릴까요?”

“네? 어….”

“그래 주십시오.”

생각에서 깨어나 허둥대는 의준 대신 도헌이 대답했다.

“오래 걸립니까?”

“그쪽에 연락해서 직원에게 가지고 오도록 부탁하면 2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때마침 직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매니저는 웃으며 덧붙였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고맙습니다.”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인 커피 잔을 본 후에야 의준은 간과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헉… 전무님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잖아?’

비어 있던 맞은편 1인용 소파가 보였다. 도헌이 어깨를 감쌌던 일에 신경이 쏠려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매장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았을까. 의준은 흘깃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와서 건너편 자리로 옮기기엔… 어색하겠지?’

이렇게 된 이상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행동해야겠다. 의준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역시 인맥은 좋네요. 백화점에서도 인맥이 필요할 줄은 몰랐지만요.”

“원칙적으로는 고객이 누구이건 동등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옳겠지만, 브랜드 VIP 명함은 이럴 때 쓰기 좋지요.”

“브랜드 VIP요?”

“백화점 VIP 같은 겁니다.”

도헌이 말했다.

“매년 몇몇 브랜드에 크레디트를 지불하고 VIP 회원으로 등록하지요.”

크레디트는 선불 계약 제도를 의미했다. 일정 기간 동안 일정 금액을 미리 예치해 두고 쇼핑을 하는 것이다. 예치 금액 단위가 크기 때문에 크레디트 회원에게는 사은품 제공은 물론 프라이빗 스토어 쇼핑이나 특별 초대 행사 등이 제공된다고 했다.

“가까이에 이 브랜드를 좋아하는 분이 계셔서 작년부터 크레디트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아….”

지난번 아는 사람의 선물을 구매했을 때 도헌이 달리 돈을 지불하지 않았던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가까이에… 이 브랜드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여자일까?’

도헌은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네? 어, 어머님요?”

의준은 깜짝 놀랐다. 도헌은 그래요, 라고 덧붙인 후에 커피를 마셨다.

‘표정에 드러났나?’

의준은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만일 드러났어도… 묻지 않았는데 굳이 오해를 풀어 주실 필요는 없는데.’

의준을 배려했을까. 그러면 어떤 의미의 배려였을까. 생각이 복잡해졌다. 의준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본인 선물은 안 삽니까?”

도헌의 질문이 들려오는 바람에 의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제 선물이요? 아니요, 제가 왜….”

“곧 생일이지 않습니까.”

의준은 놀랐다.

“…제 생일을 아세요?”

“다음 주 수요일이었죠.”

도헌이 대답했다. 의준은 더욱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내가 의준 씨 생일을 알고 있으면 안됩니까?”

“그게 아니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거든요.”

“3개월 전에 이력서를 봤으니 당연히 기억합니다.”

“아.”

의준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 그렇죠. 그러네요.”

“…….”

도헌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는 의준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선물할 테니까.”

도헌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전에 명함 지갑을 오래 봤던 것 같은데, 가서 다시 보고….”

“아닙니다, 전무님.”

의준은 도헌의 팔을 잡았다.

“직장 상사 분께 비싼 선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

도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준 씨 입장에서는 곤란할 수도 있겠군요.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닙니다….”

의준은 고개를 저은 후에 슬쩍 손을 놓았다. 도헌은 다시 옆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부하 직원의 생일은 축하해 주고 싶으니, 필요한 게 생기면 말하도록 해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그래서 의준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끊겼다.

매니저가 배달받은 가방을 가져왔다. 상품 확인을 마치고 결제한 후에 선물용 포장을 마친 가방을 받아 들고 의준과 도헌은 매니저의 배웅을 받으며 매장을 뒤로했다.

“집으로 갑니까?”

도헌이 물었다.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병원에…. 여동생과 교대하기로 해서요.”

“바래다주죠.”

“아닙니다.”

의준은 황급히 거절했다.

“지하철을 타면 금방 갑니다.”

“그걸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불편할 텐데요.”

도헌은 의준이 들고 있던 부피가 크고 묵직한 브랜드 종이 가방을 가리켰다.

“이리저리 치이면 가방도 구겨질 테고… 기왕이면 깔끔한 상태로 선물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의준은 말을 흐렸다.

“전무님도 휴일이신데 저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실 것 같아서요.”

“할 일이 없어서 회사에 나왔던 사람입니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도헌은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말했다.

“갑시다.”

의준은 도헌을 따라 걸음을 뗐다. 큰 종이가방을 덜그럭거리며 뒤따르던 그를 돌아본 도헌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가방을 받아 들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지하 3층 눌러 줘요.”

“아, 네.”

얼떨결에 지시에 따른 직후 의준은 민망한 표정으로 도헌을 돌아보았다. 그때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밀려들었다.

“엇.”

의준은 사람들에게 밀려 뒷걸음질 쳤다. 도헌이 의준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습니까?”

“네.”

어깨와 등을 통해 도헌의 체온이 느껴졌다. 몇 사람이 더 올라타고 공간은 더욱 좁아졌다. 의준의 등이 완전히 도헌의 가슴에 밀착했다.

‘윽….’

심장 박동이 들렸다. 점점 빨라지는 자신의 박동 사이로 다른 박동이 섞였다. 도헌의 심장 박동이 몸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느리지만 힘찬 박동을 느끼며 의준은 얼굴을 붉혔다.

‘뭘 당황하고 그래. 전무님은 아무렇지 않은데….’

애써 가라앉히려 할수록 박동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런데 그 사이로 스며드는 도헌의 박동도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설마. 의준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몸을 틀 수 없어서 도헌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의준이 움직이자 도헌이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기척이 났다.

‘아니야, 설마.’

도헌도 그를 의식하고 있을까. 의준은 애써 침착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전무님은.’

층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엘리베이터 안에 둘만 남았다. 의준이 몸을 바로 하자 도헌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의준은 그의 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무님.”

“……?”

도헌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지금부터 시간 되십니까?”

“달리 일정은 없습니다만, 왜요?”

“그러시면….”

의준은 잠시 망설였다. 이래도 괜찮을까.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 직후 그는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였다.

“저랑 영화 보러 가시죠!”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던 남녀가 안에서 들려온 우렁찬 소리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으악.’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민망해진 의준은 고개를 숙인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도헌의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웬 영화입니까?”

도헌이 물었다. 의준은 당황했다.

“어… 그냥, 주말이니까요.”

내뱉고 나니 어이가 없어서 의준은 필사적으로 덧붙였다.

“포상금 주시면서 저를 위해 쓰라고 하셨잖아요? 그 뒤에 생각해 봤는데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건 문화생활이었어요.”

대학을 중퇴한 이후로 영화관에는 가 본 적이 없었다. 요즘은 스트리밍 서비스도 다양했지만 따로 결제하기가 망설여져서 포기했다. 유명한 블록버스터도 공중파에서 방송할 때에 겨우 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좋아했다. 볼 여유가 사라진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보러 가도 되긴 하는데, 포상금은 전무님이 주신 돈이고 마침 주말에 뵈었고… 쇼핑도 도와주셨으니까요….”

변명을 내뱉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윽고 의준은 슬쩍 도헌을 올려다보았다.

“…안 될까요?”

도헌은 무표정했다.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내켜 하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 싶어진 의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다시 생각해 보니….”

“뭘 보고 싶습니까?”

도헌이 물었다. 의준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영화… 보시게요? 정말로요?”

“……? 의준 씨가 같이 보자고 말했잖아요. 인사치레였습니까?”

“아뇨, 아뇨! 같이 보고 싶어요!”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차에 짐 넣어 두고 근처 영화관으로 가죠.”

도헌은 이렇게 말한 후에 차로 향했다. 의준은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무슨 영화를 볼 겁니까?”

“김 과장님이 추천한 영화가 있는데, 재미있어 보였어요. 액션물이라는데… 괜찮으세요?”

“뭐든 좋습니다.”

도헌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의준을 돌아보았다.

“의준 씨가 보고 싶은 영화로 해요.”

의준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도헌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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