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12/33)

12.

모든 직장인이 반기는 그날, 월급날이 찾아왔다.

“어?!”

오후 업무 시작을 10분 정도 앞둔 점심시간의 끄트머리. 뒤늦게 은행 앱 알림을 확인한 의준은 깜짝 놀랐다.

“의준 씨, 무슨 일이에요?”

김하나가 급히 앱을 여는 의준에게 물었다. 의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월급이 이상해서요.”

“이상하다니? 혹시 덜 들어왔어요? 그럴 리는 없는데.”

“아니요, 그게 아니라… 더 들어와서요.”

이달 월급으로 입금된 금액은 평소보다 90만 원 정도 많았다. 급여 통장에는 잔고가 없었기에 헷갈릴 일도 없었다.

“이렇게 많은 돈이 잘못 지급되다니 이상하네요.”

“잘못 들어간 게 아니라 특별 상여금 같은데?”

의준의 뒷자리에 앉아 있던 대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특별 상여금이요?”

“아, 그러네. 금액도 맞아.”

김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월급 명세서 확인해 봐요. 이달에 특별 상여금 항목이 있을 거예요.”

“어… 잠시만요.”

의준은 급히 메일 창을 열었다. 급여 명세서는 폴더를 따로 만들어 관리했지만 매번 확인하지는 않았다. 읽지 않음 상태였던 이달의 급여 명세서를 열자 김하나가 말한 항목이 보였다.

“특별 상여금 맞죠?”

“네. …그런데, 특별 상여금이 뭔가요?”

“경리부에서 메일 안 보냈던가요?”

그 메일은 없었다. 누락된 모양이네, 라고 중얼거린 후에 김하나는 말을 이었다.

“계약된 상여금 외에 비정기적으로 특별 상여금이 나와요. 사실 상여금이라기보다 금일봉에 가깝기는 한데….”

투자 회사는 보유하고 있거나 융통한 자금을 사업에 투자해서 돈을 벌었다. 당연히 투자한 사업이 잘되면 이득을 보고 실패하면 손해를 보았다.

“지난해부터 투자가 순조로웠거든요. 새로운 투자처도 늘었고.”

김하나는 말했다.

“예상보다 회사 수입이 높았을 때 회사 구성원들에게 환원하는 의미에서 지급하죠. …전에는 언제 받았더라?”

“재작년 초 아닌가요? 과장님 그때 마침 결혼기념일 여행 준비하셨는데 여행 경비 하셨다던 기억이 나는데.”

“아, 맞다, 그랬지.”

김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년 나오는 상여금과는 별도이고 금액도 정해져 있지 않고. 어쩌다 한번? 나도 입사하고 두 번째로 받아 보네요. 최 대리는 몇 번째더라?”

“저는 처음 받습니다. 작년 입사라. 의준 씨가 운이 좋네요. 딱 맞춰 입사해서.”

“그러네.”

의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동료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김하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투자 관련 실무진은 조금 더 받기도 해요.”

“이의준 씨.”

그때 의준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의준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서실 파티션 옆을 지나던 도헌이 말했다.

“잠깐 봅시다.”

“네, 전무님.”

의준은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도헌을 따라 전무실로 들어갔다.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의준은 문을 닫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도헌은 책상이 있는 쪽으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좋았습니다. 대표님도 마음에 들어 하셨고요.”

“다행이네요.”

의준의 표정이 환해졌다. 오늘 점심에 서도헌은 대표 이사와 식사를 했다. 어제 급히 잡힌 일정이었다. 의준은 대표 이사의 비서와 의논해서 대표 이사의 식성과 여러 조건을 고려해 식당을 정하고 예약했다. 별것 아닌 업무였지만 최종적으로 식당을 선택한 사람이 본인이어서 걱정하던 참이었다.

‘다행이야.’

특별 상여금도 받았고 업무적으로 칭찬도 받았으니 최고의 날이었다.

“참, 저녁 일정 말인데 변경 사항이 생겼습니다.”

도헌은 화제를 바꾸었다. 의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녁 일정이라시면…. 오후 네 시 반으로 예정된 투자가 포럼 영상 회의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저녁 여덟 시부터 있을….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의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에 말한다는 걸 깜박했군요. 저녁 여덟 시에 논현동 임페리얼 팰리스에서 열릴 영화 제작 발표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제작 발표회… 저희 쪽에서 투자하는 영화사의 신작입니까?”

“회사 투자가 아니라 개인 투자입니다. 내가 아니라 아는 사람이 투자했는데 지인 자격으로 초대를 받았어요.”

“그러시군요.”

원래 일정이 없었던 차라 일정이 꼬일 일은 없었기에 의준은 안도했다. 단지 의준의 퇴근 시간이 늦어질 뿐이었다.

“제가 따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도헌은 고개를 저었다.

“개인 일정이니까요. 아, 의준 씨도 동행할 필요 없습니다. 정시 퇴근해요.”

“네? 하지만….”

“괜찮습니다.”

도헌이 말했다.

“어차피 나도 잠깐 얼굴만 내밀었다 돌아갈 겁니다. 초대를 거절할 수 없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아요.”

“…네.”

도헌이 억지로 참석하게 만들다니 대체 초대한 사람은 누굴까.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른 채 의준은 입을 열었다.

“그러시면 오후 일정과 내일 일정에는 변동이 없는 것으로 알아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아, 그렇지.”

도헌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모르니 내일 아침에… 한 여덟 시쯤에 전화를 주겠습니까? 못 일어날 수도 있으니.”

“……?”

의준은 놀랐다. 입사 이래 도헌이 모닝콜을 부탁하기는 처음이었다.

“아까 말했던 지인이 아무래도 집에 쳐들어와서 술판을 벌일 기세라서요.”

“전무님 댁에… 말입니까?”

도헌의 집 풍경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야경과 텅 빈 공간.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 덜렁 놓여 있을 뿐인 그 집에 다른 사람이?

‘설마 묵고 가는 걸까?’

대체 누구일까. 차마 물을 수 없는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혹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 고개를 들려던 그때 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척입니다.”

“예?!”

의준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도헌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그러니 의준 씨는 신경 쓰지 말고 정시에 퇴근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거.”

도헌이 의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연한 베이지색 고급 봉투를 받은 의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 봐요.”

봉투를 열고 안에 든 내용물을 본 의준은 깜짝 놀랐다. 안에는 현금이 들어있었다. 5만 원짜리 신권. 한두 장이 아니었다.

“40장입니다. 내가 주는 보너스입니다.”

5만 원권이 40장이면 200만 원. …잠깐만, 뭐라고? 보너스? 깜짝 놀란 의준이 고개를 들기 무섭게 도헌이 덧붙였다.

“사실은 대표님에게 받은 돈입니다.”

“대표님…요?”

어리둥절해하는 의준에게 도헌은 짧게 설명했다.

“작년에 내가 성사시킨 거래 덕분에 회사가 예상을 크게 웃도는 이득을 봤습니다. 전 사원에게 특별 상여금을 지급해도 티가 안 날 정도로요.”

“…….”

“내가 단독으로 추진해서 성사시킨 거래였습니다. 대표님은 그 점을 높이 사셨는데, 오늘 식사를 한 후에 따로 주시더군요.”

의준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돈을 왜 저에게….”

“이 회사 임원들은 그렇게 받은 포상금을 직속 부하들과 나눕니다. 회사 문화라고 할까, 관행에 가깝지요.”

도헌은 말을 이었다.

“내 직속 부하는 수행 비서인 이의준 씨 한 명뿐이니까 전부 주는 겁니다.”

“저는 그때 회사에 없었습니다. 전무님 일을 돕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큰돈을 받을 수는….”

“받아 둬요.”

도헌은 의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의준 씨는 앞으로 내가 할 모든 일을 보좌할 겁니다. 그때 열심히 해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돼요.”

“…….”

의준은 복잡한 심경으로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200만 원. 회사 대표는 밥이나 한 끼 하라며 선뜻 건넬 수 있고 서도헌은 고스란히 부하 직원에게 넘겨줄 수 있는 돈.

의준은 이 돈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저금, 병원비 지불, 여동생 용돈. 머릿속에 지출 우선 항목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돈을 주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

의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도헌이 말했다.

“그 돈은 의준 씨 본인을 위해서 쓰세요.”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영화를 보든, 외식을 하든, 가지고 싶었던 물건을 사든, 혹은 여행을 가든 상관없습니다. 의준 씨가 여유가 있었다면 하고 싶었던 걸 해 보세요.”

“전무님….”

“공돈은 원래 그렇게 쓰는 겁니다.”

의준을 향한 도헌의 눈매는 부드러웠다. 의준은 감정에 따라 무너지려던 표정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이어서 의준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도헌은 노트북으로 시선을 향했다.

“포상금을 전달하자마자 이런 부탁을 하려니 민망하지만, 커피 한 잔만 가져다주겠습니까?”

“네! 아메리카노 진하게, 최고로 맛있게 뽑아 오겠습니다.”

의준은 힘차게 대답한 후에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던 도헌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

영화 제작 과정 중에 제일 귀찮은 일정을 꼽으라면 제작 발표회를 비롯한 홍보 행사라고 답하는 배우도 종종 있었지만 김상우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작품만큼 홍보 행사를 좋아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시각 예술의 경쟁 상대가 게임이나 인터넷을 포함한 취미 산업 전반으로 확대된 요즘 시대에 홍보는 필수였다. 작품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배우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는 데도 말이다.

모든 취미 산업이 그러하듯 영화 역시 자본주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투자가들은 투자한 만큼 이득을 보고 싶어 하고 제작사는 보다 큰 이득을 얻기 위해서 여러모로 애를 썼다. 고품질 작품의 기획, 유명 감독의 이름값, 그리고 기본 수요를 갖춘 배우의 캐스팅까지. 영화 한 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협력자이자 경쟁자였다.

“상우 씨.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어휴, 김상우 씨 아주… 질문마다 안 빼고 대답 잘해서 아주 좋아, 정말.”

“기사 잘 나갈 겁니다, 걱정 말아요.”

“수고했어요.”

제작 발표회를 순조롭게 마친 후 상우는 언제나 그러듯 칭찬과 감사를 받았다. 그는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이지만 지각한 상대 배우와 준주연급으로 캐스팅된 가수 출신 배우의 서툰 대응과 비교된 모양이었다.

약간 지루하지만 무난한 제작 발표회였다. 이어서 저녁에 열린 스폰서 행사도 비슷했다. 스폰서 행사는 제작사에서 투자자 및 관계자들에게 감독 및 배우들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제작 발표회가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제작 소식을 알리는 자리라면 스폰서 행사는 업계 투자자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자리였다.

제작 발표회와는 달리 스폰서 행사의 주역은 상대 배우였다. 남자가 대부분인 스폰서들에게는 동성 배우보다는 이성 배우와 신인 가수가 훨씬 인기가 좋았다.

‘각자 잘하는 분야가 있는 법이니까.’

신인이라면 몰라도 상우 정도 되면 굳이 주목을 끌기 위해 나설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제작 발표회에서 역할을 다했다.

오늘 저녁, 상우는 가끔 인사나 주고받으며 촬영 전 마지막 호텔 뷔페와 칵테일을 즐길 생각이었다. 그 남자가 뒤늦게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서도헌 전무님?”

“김상우 씨.”

상우만큼 도헌도 놀란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상우가 할 말이었다. 악수를 나눈 후에 상우는 입을 열었다.

“전무님께서 관계자이실 줄은 몰랐는데요. 스폰서셨습니까?”

“아니요, 내가 아니라 아는 사람이….”

“도헌아!”

상우의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우는 고개를 돌렸다. 젊은 남자가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 남자… 누구였더라?’

행사 전에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상우가 이름을 떠올리려던 사이에 그는 도헌을 덥석 끌어안았다.

“뭐 한다고 한 시간이나 늦노. 기 왔나?”

“회의가 길어졌어.”

도헌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상우에게 시선을 향했다. 상우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서영제 대표님과 아는 사이셨군요.”

“친척입니다.”

“내 조카지.”

도헌과 영제의 말이 겹쳤다. 도헌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고 영제는 웃었다.

“친척은 무슨. 가족이지. 어이, 조카. 내가 부끄럽나?”

“…삼촌이면 친척이 맞아.”

“또 또 따지네.”

도헌의 말을 가볍게 일축한 후 영제는 상우를 돌아보았다.

“근데 눈데?”

“……?”

상우는 당황했다. 스폰서의 밤 행사를 시작하자마자 단상에서 한차례 자기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나를 기억 못 하지?’

당황한 상우 대신 도헌이 입을 열었다.

“배우 김상우 씨. 아마도 오늘 이 행사의 주역일 텐데… 주최자인 네가 누구냐고 묻는 건 이상하지 않나?”

“아, 여배우한테만 관심이 있어서.”

서영제는 태연하게 대꾸한 후에 상우를 향해 씩 웃었다.

“남자가 남자한테 관심 둬서 어따 씁니까. 안 그랍니까?”

“…….”

상우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영제는 태연하게 도헌에게 손짓했다.

“온나. 소개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밥이나 먹고 놀다 가라더니, 누굴 소개하려고?”

“기왕 온 김에 얼굴도장 찍으면 좋잖아.”

영제가 어깨동무를 하자 도헌은 상우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네.”

상우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향한 곳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있었다. 제작사 대표와 업계에서 손꼽히는 투자사 임원 그리고 해외 배급사 대표였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드는 서도헌의 모습을 보며 상우는 들고 있던 칵테일을 단숨에 비웠다.

이곳에서 서도헌을 만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좋은 기회였다. 상우는 주의 깊게 지켜보다가 그가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가 되었을 때 말을 걸었다.

“의준이는 함께 안 왔나 보네요.”

웃으며 서 있던 상우를 발견한 도헌은 입을 열었다.

“이의준 씨는 퇴근했습니다.”

“전무님 일정이 있는데 수행 비서가 먼저 퇴근을 해요?”

“갑작스럽게 잡혔고 이의준 씨를 동반할 필요 없는 개인 일정이니까요.”

“좋은 상사시네요.”

상우는 이렇게 대꾸한 후에 고개를 돌렸다.

“이런 곳에는 자주 오십니까?”

“이런 곳이 연예계 쪽 행사를 의미한다면 처음입니다. 나와는 관계없는 업계라서요.”

“서영제 대표님은 영화 쪽에는 유명한 투자자신데 의외네요.”

“영제… 서 대표의 회사에는 지분을 좀 가지고 있습니다.”

대화 도중에 한 남자가 도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지나갔다. 영제의 소개로 인사를 나눈 영화사 대표였다. 도헌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남자는 이어서 상우에게도 알은척을 하고 곧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상우가 입을 열었다.

“의준이를 데려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내가 김상우 씨의 친구를 강제로 야근시켰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상우는 도헌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방금 인사하고 지나가신, 아까 전무님과 말씀을 나누었던 저분은 의준이를 알아보셨을 겁니다. 의준이네 아버님 생전에 두 분이 친하셨거든요.”

“…….”

“우리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저분 따님은 같은 재단 중학교에 다녔는데, 장래에 그 애와 의준이를 결혼시키겠다고 농담도 하셨어요.”

도헌은 들고 있던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다면 더욱 의준 씨를 데려오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왜요?”

“의준 씨는 과거 일을 돌이키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상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딱 잘라 말하시네요. 근거가 있습니까? 반가워할 수도 있죠.”

“…….”

도헌의 머릿속에 의준과 마주쳤던 결혼식장의 기억이 떠올랐다. 스스럼없이 다가서던 의준과 달리 어색하게 그를 대하던 동창들. 그리고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했던 그를 뒤에서 비웃던 자칭 친구들. 도헌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닐 겁니다.”

“의준이 생각을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누구나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인연이 있을 테니 하는 말일 뿐입니다.”

상우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전무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상하군요.”

“뭐가 말입니까?”

“의준이에게 제일 돌이키고 싶지 않을 과거라면 전무님일 테니까요.”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상우는 도헌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 들었습니다. 전무님과 의준이가 예전에 어떤 사이였는지.”

상우는 말을 이었다.

“남자와 사귀었다는 사실은 예전에 알았습니다. 의준이는 상대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어요. 며칠 전에야 우연히 그게 전무님이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

“듣고 나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전무님이 그렇게 저를 견제하셨구나, 하고.”

“견제?”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김상우 씨를 왜 견제합니까?”

“전무님과 의준이 사이에 끼어들었으니까요.”

상우의 대답에 도헌은 피식 웃었다.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요. 나와 이의준 씨는 상사와 부하 관계일 뿐입니다. 과거야 어찌되었든 지금은요.”

“…….”

“그렇기에 김상우 씨를 견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의준 씨와 김상우 씨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없고요.”

“거짓말을 하셨네요.”

“…내가 말입니까?”

“저와 의준이 사이에 끼어들 생각이 있고 없고는 접어 두고, 절 견제할 이유가 없다는 말은 명백하게 거짓말이죠. 왜냐하면… 제가 한 말에 의문을 표시하기보다 먼저 화를 내고 계시잖아요?”

도헌은 눈썹을 움찔하고 떨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보기보다 취했군요. 사람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은 좋은 술버릇이 아닙니다.”

도헌은 몸을 돌렸다. 상우가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저한테는 처음 찾아온 기회입니다.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걸음을 멈춘 도헌은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무슨 기회 말입니까?”

“의준이에게 접근할 기회죠.”

상우가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일단, 한때 의준이와 사귀었던 분이니까.”

“…….”

도헌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와 상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의준이와 저는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습니다. 아니, 의준이는 우정이었지만 전 제법 오래 전부터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어요. 그때는 의준이가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고 숨겼는데… 어느 날 남자와 사귀었다고 말하더군요.”

연예인과 대학생 사이다 보니 평소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일 년에 네다섯 번은 보고 거의 매일 메시지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몰랐다.

“이름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경쟁자를 질투했지만 참았습니다. 의준이가 행복해 보였으니까요.”

상우는 도헌을 노려보았다.

“의준이가 행복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친구로 남았던 겁니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 감정을 짓밟는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의준 씨를 짓밟았다고요?”

“의준이가 가장 힘들 때 그를 떠났잖아요.”

“…….”

도헌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신이 떠나고 의준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괴로운 삶을 살았는지 압니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느라 학교도 포기했어요.”

“이의준 씨의 가정 형편이 기울어졌던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만, 내 탓은 아닙니다.”

도헌은 냉정하게 대꾸한 후에 상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의 탓을 할 시간에 친구로서 재정적인 지원이라도 하지 그랬습니까? 그저 마음만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보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

상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군요, 서도헌 전무님.”

도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상우는 그를 노려보았다.

“제가 의준이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지 못했던 이유는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의준도 유복한 삶을 살았다. 상우를 포함한 학교 친구들 역시 비슷비슷한 경제 상황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급격히 가세가 기운 후에도 의준은 친구들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돈이 없는 인생을 경험한 적 없는 친구들에게 자기 현실을 설명하는 일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였다.

“의준이는 저에게 신세를 지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그런 녀석에게 베풀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니저로 고용해서 월급을 좀 넉넉히 주는 정도였죠. 어머님 간병 때문에 일을 그만둔 후에는 그조차 불가능했고요.”

상우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저도 설마 의준이가 그렇게까지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로드 매니저로 일할 때 의준이 살았던 3층 빌라의 보증금은 병원비로 날아갔다고 들었다. 보증금이 적은 반지하 월세로 옮겼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배우로 자리 잡느라 바빠서 의준이 일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잠깐 연락을 소홀히 한 사이에 연락처가 바뀌었다. 급히 여동생을 통해 연락해서 상황을 알고 도우려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선수를 빼앗겼다.

바로 눈앞의 이 남자에게 말이다.

“전무님께서 밀린 병원비를 지원하고 입원실과 간병인까지 알아봐 주셨다면서요?”

1인실 장기 입원에 전직 간호사 출신 전담 간병인을 두었으니 매달 엄청난 비용이 들 터였다. 그 점을 은근히 걱정하던 상우에게 의준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서 지원을 받았어. 일부는 직원 복지 의료비고, 나머지는 무이자 대출이야.’

“입사하고 1년도 안 된 신입사원에게 무이자로 몇 천만 원을 대출해 주는 회사라니, 처음 들었습니다.”

“김상우 씨가 처음 들었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 제도는 전 사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나 보지요?”

“…….”

도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상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역시 의준이에게 특혜를 베푸셨군요?”

“회사에 존재하는 대출 제도에 내가 상환 보증을 섰을 뿐입니다.”

“의준이도 그 사실을 아나요?”

“이의준 씨가 알 필요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도헌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못 박았다. 상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고자질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봤자 전무님 주가만 상승할 텐데요.”

“할 이야기는 끝났습니까?”

질문을 던지기 무섭게 몸을 돌리려던 도헌을 보며 상우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

“전무님 덕분에 저도 의준이에게 마음 편히 지원해 줄 수 있게 되었거든요.”

상우는 웃었다.

“직장 상사의, 어떤 속내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지원을 받아 놓고 친구인 제 도움을 거부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의준이 성격상.”

“…빈정대는 겁니까?”

“대놓고 항의한 겁니다.”

상우가 도헌에게 다가섰다.

“백화점에서 만났을 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의준이에게 치근대는 남자려니 했는데 설마 옛 남자 친구였을 줄은.”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에 얼굴을 마주 댄 탓에 눈동자에 어린 불쾌한 기운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상우는 말을 이었다.

“의준이가 제일 힘들 때 버리고 떠나서 절망하게 만들었던 놈이 다시 의준이를 휘두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 처신 잘하십시오.”

무표정하게 상우를 응시하던 도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버리고 떠나? 내가? 이의준을?”

도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입술에 비웃음이 어렸다.

“나는 이의준을 버린 적이 없어. 이의준이 나를 버렸지.”

“……?”

상우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어렸다.

“뭐 하노?”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서영제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먼저 갈 테니 나중에 오든가.”

“니네 집 안 갈기다. 침대 하나 딸랑 있는 집에 가서 뭐 어쩌라고.”

“마음대로 해.”

도헌은 영제의 옆을 지나 건물 출입구로 향했다. 뒤에서 영제가 뭐라고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공공연히 선전포고를 당했다.

뱃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건방진 태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인 김상우가 아니라 도헌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그렇게 티가 났다고?’

아무도 모르게 시작해서 조용히 관계를 발전시킬 계획이었다. 그래야 복수를 마무리 짓기에도 편할 터였다. 신중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한눈에 간파할 정도로 드러났었단 말인가.’

자신만만하게 할 말을 내뱉던 김상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도헌은 혀를 찼다.

“…쯧.”

이의준은 성실하고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외모도 준수한 편이었다.

호감을 품는 사람이 한두 명 정도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남자가 아니던가.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만일 김상우가 보다 빨리 용기를 내서 마음을 고백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의준은 지금쯤 그와 사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

도헌은 얼굴을 찌푸린 채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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