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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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월요일, 의준은 오전 여덟 시에 출근했다. 다른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상 청소였다. 사무실 청소는 용역 업체에서 하지만 개인 책상은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직접 하는 것이다.

청소라고 해도 정돈은 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물티슈로 책상과 집기를 닦고 모니터 위의 먼지를 쓸어 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어서 컴퓨터를 켜고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을 내려서 가지고 오면 일과 준비는 끝났다.

가장 먼저 이메일과 일정을 확인했다. 사내 시스템에 설치된 임원 일정표는 비서실 직원 모두가 열람할 수 있었다. 김하나의 조언에 따라 의준은 매일 아침 임원 모두의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웹사이트를 열어 주요 뉴스를 확인하고 회사 이름을 포함한 몇몇 키워드로 업계 소식을 검색했다. 넓고 얕은, 실시간으로 변하는 지식을 얻기에는 인터넷보다 편리한 도구가 없었다.

“의준 씨, 좋은 아침. 김 상무님이 임원 회의에 결석하신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리고 회의 시작은 10분 늦춥니다. 대표님이 늦으실 것 같대요.”

오전 8시 40분쯤 출근한 김하나가 이렇게 전했다.

“일정은 내가 업데이트할게요. 오늘 점심 예약 변경 좀 해 줄래요?”

“알겠습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런치 미팅이 있기에 도시락을 따로 주문하곤 했다. 전날 미리 주문하기는 했어도 1인분을 덜거나 더하기는 아직 가능했다.

의준은 도시락 예약을 조절한 후에 건물 1층 카페에도 연락했다. 11시로 예약한 커피 케이터링 서비스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네, 그럼 부탁합니다. 고맙습니다.”

통화를 마친 후에 의준은 서도헌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전무님, 좋은 아침입니다. 임원 회의 시작 시간이 10분 뒤로 늦춰졌습니다. 김준태 상무님은 오늘 참석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2분 정도 지나고 답장이 왔다.

---알겠습니다. 10분 뒤에 도착합니다.

답장을 확인하고 창을 닫으려던 찰나 추가 메시지가 도달했다.

---집에 지갑을 두고 갔더군요.

“헉?”

의준은 놀라서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금요일 퇴근 후에 지갑을 꺼낸 기억이 없었다.

‘토요일에는 상우가 다 냈고 일요일에는 전무님이 밥도 택시비도 대신 내 주셨으니까….’

출근할 때도 휴대 전화 교통카드 기능을 사용했기에 전혀 몰랐다. 의준은 황급히 메시지를 작성했다.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상사에게 지갑 배달을 시킨 상황이 아닌가. 의준이 대답을 고민하고 있을 때 추가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신 커피 한 잔만 미리 준비해 줘요.

의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곧장 탕비실로 향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커피를 추출하는 사이에 휴대 전화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어.”

도헌이려니 싶어 확인한 메시지 발송인은 상우였다.

---주말 잘 보냈어?

“앗….”

의준은 도헌의 집 앞에서 헤어진 뒤로 상우에게 연락하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응, 미안. …통화 가능해?’

메시지를 보내고 1분도 지나지 않아 상우로부터 전화가 왔다. 의준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우야.”

---월요일인데 아침부터 미안.

“아니, 내가 미안하지… 주말에 연락도 못 하고.”

---아~.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했어.

“…미안해.”

---괜찮아. 전무님은 별일 없었지?

“응, 괜한 걱정이었어.”

---찾아간 보람이 있었군. 다행이네.

다정한 대꾸에 미안함이 더해졌다. 의준은 말을 이었다.

“진짜 미안하다, 야. 다음에 만날 때는 내가 밥이라도 살게.”

---오, 좋지. 말이 나온 김에 오늘 저녁에 어때?

“어? 오늘 저녁?”

의준은 놀라서 되물었다.

---응. 촬영 전에 비는 시간이 오늘 뿐이라. 너 약속 있으면 다음으로 미루고.

“아니, 약속은 없는데… 병원에 가 봐야 해서.”

어제 늦는 바람에 소영에게 단단히 잔소리를 들었던 터라 오늘은 늦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병원에서 만나도 괜찮아. 구내식당이나 근처 식당도 좋고.

“야, 그건 아니지. 대접해야 하는데….”

---장소가 어디든 무슨 상관이야. 네 얼굴 보고 밥도 얻어먹는데. 난 괜찮아.

“…….”

가슴이 찡했다. 의준은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러면… 병원 근처에 전에 갔던 고깃집 괜찮아? 거기서 볼까?”

---거기서 봐도 되고 내가 회사로 데리러 가도 괜찮고.

“아니야, 피곤하게 뭣 하러 여기까지 와.”

---가는 길인데 뭐. 그편이 빨리 만나고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의준 씨.”

탕비실 밖에서 김하나가 손짓했다.

“전무님 올라오셨어요.”

“아, 네!”

의준은 황급히 상우에게 말했다.

“미안해, 상우야. 나 이제 일하러 가야겠어.”

---그래. 그러면 이따 회사로 가서 연락할게.

“어? 아, 응.”

얼떨결에 통화를 마친 의준은 밖으로 나갔다가 때마침 사무실로 들어온 도헌과 마주쳤다. 도헌은 커피를 들고 있던 의준을 보고 입을 열었다.

“내 커피입니까?”

“네? 네!”

“고마워요. 업무 전에 잠깐 봅시다.”

도헌은 커피를 받아 든 후에 이렇게 말했다. 의준은 그를 따라 전무실로 향했다.

“여기 지갑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한 표정으로 지갑을 받는 의준을 보며 도헌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제는 잘 쉬었습니까?”

“예, 배려해 주신 덕분에….”

“배려는 내가 받았지요. 나 때문에 귀한 주말을 반나절 넘게 낭비하게 해서 미안했습니다.”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과에 의준은 말을 흐렸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잊고 있었던 주말 일이 떠오르면서 얼굴이 약하게 달아올랐다.

“주말에는 제가 크게 신세를 졌습니다. 식사도 그렇고, 옷도….”

도헌에게 빌렸던 티셔츠와 바지는 곱게 접어 가지고 나왔다. 출근길에 세탁소에 맡기려고 했는데 세탁소에서 상표와 세탁 태그를 확인하더니 받지 못하겠다고 거절해서였다.

‘아유, 이거 명품이잖아. 못 해요. 우리 전에 명품 잘못 세탁했다가 큰일 난 적 있어서 아무리 드라이클리닝 된다고 해도 명품은 안 받아. 이 동네에서는 안 되니까 저기 위쪽 아파트 단지 세탁소 같은 데 가져가 봐요.’

“옷은 세탁 후에 돌려드리겠습니다.”

“천천히 돌려줘도 괜찮습니다.”

도헌은 이렇게 말한 후에 책상 앞에 앉았다. 업무 시작 준비를 하는 그를 지켜보던 의준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전무님 저는….”

“저녁에 시간 됩니까?”

“예?”

의준은 놀랐다. 도헌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퇴근하고 저녁에 시간 되면 저녁이나 함께하죠.”

“어….”

의준이 애매하게 말을 흐리자 도헌은 고개를 들었다.

“안 됩니까?”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요? 누구와?”

“상우하고요.”

“김상우 씨?”

도헌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말 일 때문에 밥을 사기로 했거든요.”

“그렇군요. 오늘 업무 일정부터 확인할까요.”

“네? 네.”

의준은 당황했다.

‘저녁 이야기는 왜 하셨지?’

갑자기 화제가 바뀌는 바람에 묻지 못한 질문을 머리에 띄운 채 의준은 입을 열었다.

“런치 미팅 이후 일정은… 오후 세 시에 대표님과 미팅, 네 시부터 외부 손님 접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퇴근 시간은 여섯 시경이 될 예정입니다.”

“퇴근 시간 전에 참석하고 싶은 타 부서 회의가 있는데. 해외투자부의 신규 투자 제안 회의입니다만.”

“오후 다섯 시로 예정된 회의 말씀이군요.”

아침에 확인했던 전체 부서 일정을 떠올리며 의준은 말을 이었다.

“외부 손님 접견 시간을 예상보다 길게 잡았으니 큰 문제가 없으면 다섯 시 전에 마치고 회의에 참석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일정을 추가해 줘요.”

“알겠습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김하나가 전무실로 들어왔다.

“전무님, 파인셀렉션 정희수 대표께서 통화를 원하시는데요.”

“연결해 줘요.”

도헌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의준을 바라보았다.

“의준 씨도 나가 보세요.”

“네. 실례하겠습니다.”

의준은 목례를 한 후에 밖으로 나왔다.

김하나에게 일정 추가를 공유하고 사내 일정표를 수정한 후에 의준은 잠깐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의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이 거울로 향했다.

‘표정이 이상하지는 않았겠지?’

도헌 앞에서 태연한 표정을 짓느라 힘들었다.

목소리도 떨리지 않도록 주의했고 시선도 차분하게 유지했다. 겉만 봐서는 지난주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헌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머리 한쪽에서는 지난 주말 일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함께 보낸 저녁, 마주 보고 눈을 뜬 아침, 그리고… 잠결에 나누었던 키스가.

최선을 다해 없던 일처럼 행동했다. 반면에 도헌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역시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보다.

‘잠결에 한 실수였겠지. …기억조차 못 할 테고.’

5년 만에 재회한 도헌은 다른 사람이었다. 의준도 예전과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도, 미래도 변했다. 모두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키스는 그대로였어.’

다정하고 따스한 숨결과 촉촉한 입술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떠올리지 마.’

도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억지로 잊으려 할수록 기억은 더욱 생생해지더군요. 자연스럽게 갑시다.’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형은 자연스럽게 잊었을지 몰라도 나는….’

찬물을 틀어 두 손으로 받았다. 가슴 한구석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던 감정에게 끼얹듯이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후우….”

물기를 말린 후에 의준은 다시 거울을 응시했다. 이어서 한결 차가워진 뺨과 가슴에 들려주듯이 조용히 속삭였다.

“예전 일에 휘둘릴 만큼 여유롭지 않잖아?”

겨우 안정된 직장을 손에 넣었다. 그래 봤자 일에 보람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월급을 받고 서너 달밖에 되지 않았다. 지난달까지 월급은 모두 빚을 갚는 데 썼고 이번 달에야 겨우 신용카드를 신청하지 않았던가.

‘정신 차려, 이의준.’

불확실한 감정보다 눈앞의 현실이 우선이었다. 의준은 표정을 다잡았다.

***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한 주의 시작점 월요일의 일과도 거의 마무리되었다.

“퇴근하죠.”

타 부서 회의 참관을 마치고 돌아온 도헌은 이렇게 말한 후에 사무실을 떴다. 퇴근 준비를 마치고 그를 기다렸던 의준은 지체 없이 그를 따라갔다. 퇴근 시간은 오후 여섯 시 반이었다.

“회의는 어떠셨습니까?”

“무난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의준이 던진 질문에 도헌은 이렇게 대답했다.

‘무난했다니… 별로 소득은 없으셨나 보네.’

수행 비서로 몇 개월간 함께 일하면서 의준은 도헌의 말버릇을 몇 가지 파악했다. 예를 들어 ‘무난했다’는 그냥 그랬다는 의미였고 ‘나쁘지 않았다’는 좋았다는 의미였다. 극찬하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었지만 대체로 신중하고 애매하게 표현하는 편이었다.

‘예전부터 그랬지.’

의준은 입을 열었다.

“내일은 열 시에 외부 회의 참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언제까지 모시러 갈까요?”

“그전에 살펴볼 서류가 좀 있으니 아홉 시까지 회사로 오겠습니다. 의준 씨도 회사로 출근하세요.”

“검토하실 서류를 말씀해 주시면 미리 준비하겠습니다만….”

“아니, 내가 개인적으로 살필 예정이니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의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시작했던 하루는 생각보다 빠르고 평온하게 마무리되었다. 오전에는 다소 힘들었지만 오후 즈음에는 태연하게 도헌을 대할 수 있었다. 시간 단위로 짜인 일정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던 덕분이었다.

“회의록을 메일로 보낼 때 이의준 씨에게도 첨부해서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메일 받으면 확인하도록 해요. 알아 둬야 할 내용입니다.”

“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출발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던 운전기사가 그들을 보고 목례한 후에 뒷좌석 문을 열었다. 도헌은 차에 올라탔다.

“그러면 내일 봅시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요. …아.”

인사를 마치고 문을 닫으려던 찰나 도헌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사무실에 태블릿을 놓고 왔군요. 집에 가서 볼 게 있었는데.”

“어디 두셨습니까? 지금 가져오겠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

도헌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책상 위에 있을 겁니다. 갈색 커버로 된.”

“예.”

의준은 재빨리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도헌은 의준의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나를 피하는군.’

업무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고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에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의준은 절묘하게 도헌의 시선을 피했고 둘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살짝 표정을 굳히기도 했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주말 일 때문이었다.

‘…키스 건을 의식하고 있겠지.’

의도한 행위는 아니었다. 도헌에게도 예상치 못한 사고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날 정도로.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군.’

통통하고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살짝 찌푸리는 표정도 여전했다.

도헌의 입술이 천천히 위로 끌려 올라가던 그때 짧은 경적 소리가 메아리쳤다. 도헌은 고개를 들었다. 은색 외제 세단 한 대가 뒤쪽에 멈춰 서더니 운전자가 창밖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도헌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김상우 씨.”

“어, 기억하시는군요.”

상우는 차에서 내려 도헌에게로 다가왔다. 도헌은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군요.”

“저도 설마 서 전무님을 먼저 뵐 줄은 몰랐네요.”

상우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주말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도헌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해결되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의준이가 너무 걱정해서 저까지 걱정될 정도였거든요.”

상우는 유쾌하게 대꾸한 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의준이는 어디 갔습니까? 설마 퇴근했나요? 그러면 안 되는데….”

“이의준 씨는 잠깐 사무실에 돌아갔습니다. 곧 내려올 겁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이 녀석, 퇴근 전에 연락 준다더니 전화도 안 받아서요.”

상우는 웃으며 덧붙였다.

“오늘 저녁 약속을 했거든요.”

“들었습니다.”

“그러세요?”

상우는 무표정한 도헌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새 영화에 주연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제작 발표회를 하고 다음 주부터 촬영에 들어가죠.”

도헌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상우는 말을 이었다.

“지방에서 촬영할 예정이라 한 달 정도는 서울에 올라오기 어렵거든요. 일정상 지난 주말 외에는 시간이 없었는데 마침 오늘 취재 하나가 취소된 덕분에 한 번 더 기회가 났네요.”

상우는 웃었다.

“부디 오늘은 ‘급한 업무 연락’이나 ‘걱정스러운 연락 두절’을 삼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말 일이 무척 원망스러운 모양이군요.”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간절해서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

도헌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만.”

“전무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의준의 목소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대화가 멈췄다. 도헌과 상우는 동시에 몸을 돌렸다. 멈춘 차를 향해 급히 걸어오던 의준은 도헌과 함께 서 있던 상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상우? 여기서 뭐 해.”

“데리러 왔지.”

상우는 웃으며 대답했다.

“시간 맞으면 데리러 오겠다고 했잖아. 메시지 확인 안 했어?”

“어, 미안.”

의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사과한 후에 도헌을 돌아보았다.

“전무님, 여기. 태블릿입니다.”

“고마워요.”

도헌은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수고했고 내일 봅시다. 김상우 씨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어, 네. 들어가세요.”

“저도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꾸벅 인사하는 의준의 어깨를 감싸며 상우가 밝게 대답했다.

도헌은 차에 올라탔다. 의준은 출발하는 차 뒤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

리어뷰미러에 의준과 상우가 비쳤다. 상우가 의준을 끌어안은 모습이 보였다.

“…쯧.”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도헌은 입술을 꾹 다물며 시선을 돌렸다.

***

해가 기운 후에도 하늘에는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물들이는 노을 옆으로 반짝이는 차량 불빛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퇴근 시간대,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 안에서 의준은 사라져 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일이 힘들었나 봐?”

갑자기 들려온 질문에 의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어? 왜?”

“계속 한숨을 쉬고 있잖아.”

상우는 웃으며 지적했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야. 그냥….”

의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태블릿 가지고 내려왔을 때 전무님 표정이 굳어져 있던 게 신경 쓰여서.”

오후 내내 기분이 좋지 않기는 했다. 서도헌은 부하 직원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는 타입은 아니었고 업무 진행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보좌하는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왜 기분이 나쁘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고….’

의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을 몇 번이나 더듬었지만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은 없었다. 임원회의 때 이사 한 명과 업무 처리 방식을 놓고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는 들었지만 그 정도로 감정이 흔들릴 사람은 아니었다.

“혹시 내가 사무실에 다녀온 사이에 전무님하고 무슨 일이 있었어?”

“…그다지? 인사만 나누고 말았는데.”

“하긴 그렇겠지.”

다시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상우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왜 그렇게 신경 써?”

“뭘?”

“서 전무 말이야.”

상우는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보통 직장 상사가 기분이 좀 나빠 보였다고 퇴근 후에까지 고민하고 그러나?”

“…걱정이 되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왜 걱정을 하느냐고.”

“수행 비서니까. 너희 매니저 형 같은 역할을 하니까 그래. 알잖아, 그런 거.”

“우리 매니저 형이 날 잘 챙기기는 하지만 퇴근해서까지 내 걱정만 하지는 않아.”

“…….”

의준은 입을 다물었다. 상우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가족도 친구도 아니고, 직장 상사잖아. 아니, 다 떠나서 몇 달이나 알고 지냈다고 그렇게까지 걱정을 해? 내 걱정을 그렇게 해 봐라, 인마.”

“너한테 걱정할 일이 어디 있어.”

“왜 없어? 새 작품 들어가기 전이라 스트레스도 받고, 이사 문제로 속도 썩고 있고….”

“그랬어? 몰랐어.”

“이 자식, 서운하게. 야, 서 전무 걱정할 시간 반만 나에게 기울여 봐라. 내가 얼마나… 애인도 아니고 직장 상사에게 밀린 거야, 내가?”

“아니야.”

의준은 난처하게 웃었다. 상우는 얼굴을 슬쩍 찡그렸다.

“너 그 사람 신경 쓰는 거 보면 평범한 상사와 부하 수준이 아니야. 꼭 애인 사이 같다고.”

“……!”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그건 아니지. 그렇게까지는….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건 좀… 그런데.”

“……? 뭘 그렇게 당황해? 잠깐만, 너… 설마?”

상우는 황당한 투로 되묻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진짜로 서 전무하고 사귀는 거야?!”

“아니야!”

의준은 황급히 부정했다.

“사귀지 않아. 지금은 아니고….”

“지금은?”

“아.”

쓸데없는 한 마디를 덧붙였음을 깨달은 의준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상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금은 아니라니, 예전에 사귀기라도 했어?”

“그게….”

“진짜야?”

부정하기에는 늦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대학생 때.”

“대학생 때라니, 너 그때 남자 친구 있었잖아. …잠깐만, 그때 남자 친구가 설마?”

상우는 겨우 상황을 파악했다.

“서 전무가 옛 남자 친구라고?”

“맞아.”

의준은 체념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대체 어떻게 다시 만나서, 아니, 어쩌다가 옛 남자 친구 밑에서 일하게 된 거야?”

“…….”

의준은 한숨을 내쉰 후에 도헌과 만난 경위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상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우연히 만나서 일자리를 제안하기에 덥석 받아들였다 이거야?”

“좋은 조건이었으니까.”

의준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연봉도 근무 조건도 좋았고 어머니 입원에 대해서도 배려해 줬어. 다른 직장에서는 받지 못했던 대우였어. 아, 로드 매니저를 할 때 빼고.”

“…….”

상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의준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화났어?”

“아니. 좀 놀랐을 뿐이야.”

앞차가 움직였다. 상우는 천천히 액셀을 밟으며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서 전무를 걱정하고 신경 썼는지 이제 알겠어.”

“아니야, 그건…. 지금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까 원래는 그럴 필요 없는데.”

변명하다 말고 의준은 말을 멈췄다.

“…미안, 솔직히 그래서 더 걱정하기는 했어. 주말 일도… 그 사람이 친가 쪽 친척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

“그렇다면 당연히 걱정되지.”

“이해해 주다니 고마워.”

“고마울 일도 미안할 일도 아니야.”

상우는 말했다.

“한때 사귀었던 사람과 이별 후에도 공적인 관계를 맺는 일은 드물지 않아. 연예계에도 그런 사람들은 많으니까. 그 일 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끼어들기 차선에서 대기하는 틈을 타 상우는 의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겠어?”

“뭐가?”

“서 전무는 널 버렸던 사람이잖아.”

“…….”

의준은 마주 잡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연락이 끊긴 채 흐지부지 이별했지.”

“그게 그거 아냐?”

“…….”

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기는 힘들지 않겠어? 뭣하면 우리 회사에 자리 있는지 알아봐 줄까?”

“아니야, 지금 회사가 좋아.”

지금까지 다양한 업종에 종사했다. 월급만 제대로 주면 어디서든 일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이력서에 짧으면 두세 달 길어 봤자 일 년 남짓한 이직 경력이 차곡차곡 쌓인 후에야 문제를 깨달았다.

“자격증이나 교육도 지원하니까 차분히 준비해서 경력을 쌓으려고. 만일 다시 이직을 하더라도 같은 분야로, 경력도 인정받고 싶으니까.”

상우는 흘깃 의준을 바라보았다.

“전 애인 밑에서 일하기 불편하지 않아?”

“내가 사서 걱정을 해서 그렇지, 업무적으로는 불편한 점 없어. 배울 것도 많고.”

의준은 웃었다.

“도헌이 형, 아니, 전무님은 유능한 사람이야. 같이 일해 보니 알겠더라.”

5개 국어에 능통하다거나 MBA 석사에 업무 관련 자격증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거나 회사를 대표해 장관 표창을 받았다는 등의 드러난 경력만이 아니었다. 서도헌은 업무 능력뿐 아니라 인맥과 리더십도 뛰어났다. 서른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다른 임원진과 대등하게 한 부서를 책임질 정도로 말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잘난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때는 너도 그 사람도 학생이었잖아.”

“말이 같은 학생이지, 그때도 이미 달랐지, 뭐.”

의준은 대학생이었지만 서도헌은 대학원생이었다. 명문대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중이었고 박사 과정도 준비할 예정이었다. 갑자기 해외 유학을 결정한 후에는 수습할 일도 많고 준비할 일도 많았을 텐데 한 번도 의준에게 바쁘거나 힘든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의준의 앞에서 그는 늘 연락하면 언제나 시간을 내 주는 상냥하고 다정한 애인이었다.

“배려를 배려인 줄도 모르고 받기만 했어.”

의준은 어렸고 늘 주변으로부터 그만큼 배려를 받고 살았다.

“지금은 네가 배려하고 있잖아.”

“비서니까.”

“업무 이상으로.”

“수행 비서는 그게 업무야.”

의준은 이렇게 대꾸한 후에 어깨를 으쓱했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제는 그때 일을 돌아보며 반성할 만큼 철이 들었고.”

“나이 들었다는 말을 그렇게 멋진 척 하기야?”

“하하하.”

의준의 웃음을 끝으로 대화는 끊겼다. 때마침 차 안에는 차분한 발라드 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2절에 접어들 즈음 상우가 입을 열었다.

“서 전무에게 물어본 적 있어?”

“……? 뭘?”

“왜 널… 아니, 일방적으로 너와 헤어졌는지.”

“안 물어봤고 물어볼 생각도 없어.”

예상치 못한 대답에 상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유가 궁금했던 때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별만큼 답답한 마음에 상처도 받았다. 시간 덕에 봉합된 상처를 이제 와서 굳이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의준은 웃었다.

“끝난 일이잖아. 이제 와서 이유를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

대교를 내려서 겨우 도로에 접어든 차가 신호 대기로 멈췄다. 상우는 의준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 사람과 다시 잘해 보려는 생각은 안 들어?”

“…불가능하지.”

의준은 낮게 웃었다.

“그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한번 찼던 남자를 다시 사귀겠어.”

“내 말은 서 전무가 아니라….”

도중에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상우는 말을 멈추었다. 의준이 자기 휴대 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어, 소영이다. 잠깐만. …여보세요? 어, 가는 중이야, 왜?”

의준은 당황한 어조로 동생에게 물었다.

“…피자? 병원 근처에 유명한 데가 있다고? 잠깐만, 너도 나오게? 아니, 그게 아니라….”

의준과 시선이 마주친 상우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준은 입술만 움직여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에 여동생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어머니의 상태와 병원 상황을 묻는 의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상우는 차를 발진시켰다.

‘서 전무가 그 남자였다니.’

의준이 사귀었던 상대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은 이미 헤어진 상태였다. 상우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의준이 밝히지 않아서였다.

아는 점은 첫사랑이자 첫 애인이었다는 사실 뿐. 의준은 갑작스러운 실연의 고통을 혼자 떠안았다. 상우는 도울 길 없이 그를 위로하기만 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를 테지.’

덕분에 생각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인생에서 가장 지워 버리고 싶은 시간이었다.

‘어떤 녀석이기에 그런 짓을 했나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기도 하네.’

상우는 의준을 흘깃 바라보았다.

끝난 일이라며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대화 내내 의준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선을 외면한 채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던 모습은 5년 전, 실연 사실을 고백했던 때와 똑같았다.

‘말로는 끝났다면서 전혀 끝나지 않은 표정이나 짓고.’

5년 전에는 그저 위로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상대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도 알았다.

이번에야말로.

“…너 만날 때 혼자 만나지 말고 연락하라고 야단을 치네. 소영이 얘는 진짜… 설마 얘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민망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의준에게 상우는 웃으며 대꾸했다.

“소영이는 예전부터 내 팬이었잖아. 걱정 마, 비록 오빠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여동생일지라도 프로답게 팬서비스 하도록 할게.”

“하하하….”

의준은 웃었다. 차를 탄 후 처음 보는 밝은 얼굴이었다.

‘그 남자 생각만 안 하면 이렇게 밝은 녀석인데.’

의준의 인생에 서도헌은 필요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 사실을 받아들일까?’

서도헌과 공적인 관계일 뿐이라고 선을 그은 의준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남자 쪽에 경고를 하는 수밖에.’

앞으로 의준과의 관계를 계획대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도 거리낄 요소는 미리 제거하는 편이 나았다. 상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핸들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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