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감았던 눈 위로 빛이 드리웠다. 깜박, 깜박, 흔들리는 빛이 성가셔서 눈살을 찌푸렸다. 손으로 가려 보아도 잠깐 그늘이 질 뿐, 손가락 사이로 끈질기게 스며드는 빛을 막을 수가 없었다.
“…으응….”
빛을 피해 돌아누웠다. 움직임 사이로 스며든 공기가 서늘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어깨 위로 스르륵 이불이 올라왔다. 매끈한 천이 턱밑을 스치고 이어서 따스한 팔이 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팔?’
누구의?
의준은 눈을 번쩍 떴다. 코앞에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헉.’
서도헌이었다.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누워 있던 그의 모습을 보기 무섭게 잠들기 직전까지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간밤에 의준은 위스키를 열 잔 넘게 마셨다. 처음에는 온 더 록으로 그리고 얼음이 녹은 후에는 스트레이트로. 바닥에 깔릴 정도만 따르는 원칙을 무시하고 잔을 반 가까이 채워 달라고 졸라 물처럼 들이켰다.
‘괜찮습니까?’
도헌이 물었던 기억이 났다. 걱정이 되어 물었을 질문에 의준은 발끈했다.
‘괜찮습니다. 아~주 멀쩡해요. 보세요, 멀쩡히 걸을 수 있….’
걷기는커녕 일어서지도 못해서 비틀거린 의준을 도헌이 부축했다. 도헌은 의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고 다른 팔로 의준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그만 마십시다. 오늘은 자고 가요.’
‘전무님 댁에서요? 하하, 아무것도 없는 데 어디서 자요. 바닥에 옷 깔고요?’
‘…침실에 침대가 있습니다.’
‘전무님 침실 말씀인가요? …그러면 전무님은 어디서 주무시고요.’
‘제 침대는 넓어요.’
‘저랑 같이 주무시게요? 하하하.’
의준은 도헌의 티셔츠를 움켜쥐며 웃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전무님, 공사 구분 못 하시네요?’
으아아아악. 여기까지 떠올린 직후 의준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만취하기는 처음이어서 알 수 없지만 원래 이렇게 기억이 선명한 법인가. 보통 필름이 끊겨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지 않았던가.
‘맙소사,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당장 굴을 파서 숨고 싶었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자. 그 뒤에 수습할 방법을 생각해야겠어.’
의준은 되도록 도헌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몸을 틀었다. 이불을 들어 올리며 한쪽 다리를 침대 밖으로 뻗으려던 그때였다.
도헌이 의준을 힘껏 끌어안았다.
“헉.”
의준의 코가 도헌의 목덜미에 닿았다. 부드러운 옷깃의 감촉과 따스한 체온이 전해졌다. 숨을 들이마시자 도헌의 체취가 스며들었다. 깔끔하고 연한, 레몬과 이름 모를 꽃의 향기. 의준은 도헌이 어제 집에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비누나 로션 향기일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의준은 슬며시 고개를 숙여 자기 어깨에 코를 가까이하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다른 냄새는 모르겠지만 술 냄새만은 진하게 났다.
‘윽….’
창피해진 의준은 얼굴을 붉혔다. 그때 머리 위에서 도헌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준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셨….”
의준은 말을 멈췄다. 도헌은 아직 잠든 채였다.
감은 눈, 자연스러운 입매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잠든 그의 얼굴은 평온하면서도 어려 보였다.
‘예전에는 이렇게 앞머리를 내렸었지.’
대학원 시절에 도헌은 앞머리를 길게 내리고 도수 높은 안경을 썼었다. 그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종종 그가 안경을 벗고 앞머리를 올려야 드러나던 이목구비에 깜짝 놀라곤 했었다. 의준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때 같네.’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첫 만남을 떠올리며 의준은 저도 모르게 도헌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의준의 손이 뺨에 닿기 직전 도헌이 눈을 떴다. 의준은 깜짝 놀라 손을 멈췄다.
“아.”
“…….”
도헌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의준을 바라보았다. 당황해서 입을 열던 의준의 뒤통수에 도헌의 손이 닿았다. 동시에 의준의 코에 도헌의 코가 스치고 따스한 숨결과 체온이 입술에 밀착했다.
“……!”
반사적으로 도헌의 가슴을 손으로 밀었지만 도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헌의 팔이 의준의 등과 머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아….’
체온과 숨결만큼이나 익숙한 감촉이 의준을 휘감았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의준은 도헌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응….”
낮은 신음에 대답하듯 뜨거운 숨결이 밀려들었다. 의준은 눈을 감았다. 의준의 등을 감쌌던 도헌의 팔이 조금씩 아래로 향했다.
“도헌… 아니, 전무님!”
의준은 도헌을 밀어냈다. 도헌이 눈을 깜박이며 의준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의준, 씨?”
그 표정을 본 순간 의혹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했나?’
심장이 뜨끔하고 아팠다. 의준은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전무님도 잠이 덜 깨셨나 봐요.”
“…….”
도헌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멍하군요. 과음 탓인가 봅니다.”
“제가 더 많이 마셨죠.”
의준은 웃었다.
“저 때문에 어제 고생 많으셨죠?”
도헌은 놀란 듯이 의준을 바라보았다.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까?”
“네? 어….”
눈을 뜨자마자 떠올렸던 술주정의 면면이 되살아났다. 의준은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니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왠지 폐를 끼친 것 같아서요.”
“…….”
자신을 향한 도헌의 시선이 묘해서 의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기억 못 하는 추태가 있는 걸까. 의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렇게… 심하게 무례했나요?”
“…아닙니다.”
도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나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기억을 되살리고 싶기도 하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한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11시가 넘었군요.”
“예? 11시요?”
의준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머리를 짚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으… 안 되는데.”
“약속이라도 있습니까?”
“어머니 병원에 가야 해서요. …윽.”
말만 했는데도 머리가 울렸다. 잠이 완전히 깬 탓인지 아니면 일어나 앉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차를 타면 멀미로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한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의준은 머리를 두 손으로 누른 채 고개를 들었다. 도헌이 옷장에서 티셔츠와 바지를 꺼내 침대에 놓았다.
“씻고 갈아입어요.”
“어.”
사양하려다 말고 의준은 팔을 들어 코에 댔다. 도헌이 말했다.
“옷에 술 냄새가 배었을 겁니다. 어제 바지에 술 쏟았어요.”
“그, 그랬나요?”
기억에 없었다. 당황한 의준과 달리 도헌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발 부근에요. 양말은 완전히 젖어서 벗겼는데, 바지는 벗기기에는 애매해서 수건으로 말리고 접었습니다.”
“앗….”
의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렇게까지 민폐를 끼쳤을 줄은….”
“민폐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도헌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의준 씨 덕분에 나도 꽤 마셨어요. 그 점은 책임을 지우고 싶군요.”
“책임…이라시면.”
“씻고 해장하러 갑시다.”
도헌은 옷장에서 셔츠와 바지 한 벌을 더 꺼내며 대답했다.
“해장국 잘하는 집이 근처에 있습니다. 밥 먹고 커피도 한잔하죠. 그러면 머리도 덜 아프고 차를 타도 멀미가 안 날 겁니다.”
“…….”
마치 현 상태를 꿰뚫어 본 듯 이렇게 말하는 도헌에게 의준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도헌은 옷을 든 채 침실 문으로 향했다.
“의준 씨는 이쪽 욕실을 쓰도록 해요.”
“어….”
“20분 뒤에 봅시다.”
도헌은 이 말을 남기고 침실을 떠났다. 의준은 옷가지를 들고 일어섰다.
눈부시고 맑은 날이었다.
불빛의 강이 사라진 자리에는 햇살을 머금은 푸른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