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택시 한 대가 어둑어둑해진 도로를 올라와 맨션 현관 가까운 곳에서 멈췄다. 도헌은 택시에서 내려 현관으로 향하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현관 옆에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이의준 씨?”
“아, 전무님.”
누군가와 통화 중이던 의준은 급히 통화를 마무리한 후에 도헌에게 다가섰다.
“어서 오세요. 생각보다 많이 안 늦으셨네요. 차가 덜 밀렸나 봐요.”
차가 밀리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헌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의준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뭐 하고 있습니까?”
“전무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솟아오르는 짧은 의문을 억누르며 도헌은 입을 열었다.
“강릉에 놀러 가지 않았습니까? 통화할 때 그랬잖아요.”
“네, 그랬는데… 빨리 돌아왔어요. 친구가 사정을 듣고 서울까지 데려다줬거든요.”
“…김상우 씨가요?”
도헌은 되물으며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 상우는 돌아갔어요.”
순순히 돌아가지는 않았다. 맨션 앞에는 차를 댈 곳이 없었기에 먼저 가라던 의준에게 상우는 멀리 떨어진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와서라도 함께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 없어. 내일 일정도 있다면서.’
‘그렇다고 널 여기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잖아.’
결국 의준은 자정 전까지만 기다리기로 약속했다. 상우는 자정에 전화해서 확인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후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기다린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오셨네요.”
“왜 날 기다렸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웃는 의준에게 도헌은 불쑥 물었다.
열차 안에서 올라가는 중이라고만 말했다. 곧장 집으로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만일 도헌이 단골 바에 들렀거나 변덕스럽게 다른 곳으로 떠나기라도 했다면 의준은 맨션 앞에서 꼬박 세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연락도 하지 않고 사람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막연한 상황 아닙니까?”
“어…. 일단 찾아뵙겠다고 문자를 드리긴 했는데요.”
의준의 말에 도헌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통화 후에 몇 차례 문자 알림이 왔지만 확인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역시 확인 안 하셨구나.”
의준은 민망하게 웃었다.
“오래 기다릴 각오는 하고 왔어요. 밤을 새울 용기까지는 없었지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걱정이 되어서요.”
도헌의 말 위로 의준의 말이 겹쳐졌다. 그를 향하는 도헌의 눈을 바라보며 의준은 말을 이었다.
“예정보다 일찍 귀성한다고 연락 주셨을 때, 전무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느껴졌어요. 무슨 일이 있나 싶었죠.”
“…….”
“예전에도 한 번 할아버님과 다투고 며칠간 힘들어한 적이 있으시잖아요. 그때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도헌의 눈썹이 움찔하고 떨렸다.
조부가 도헌을 집안의 장손으로 여기고 애지중지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조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업을 계속하고 싶었던 도헌에게 다소 강압적으로 결혼을 권했고 도헌은 반발했다.
‘애인은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6년 전, 의준과 한참 사귀던 당시의 일이었다. 커밍아웃은 하지 않았지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경솔하게 밝힌 덕분에 그 뒤로도 꽤 시달렸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는데요.”
“문득 생각이 났어요. 죄송합니다, 잊자고 하셨던 예전 일을 끄집어내서.”
“…아닙니다.”
기분이 이상했다. 감정을 곱씹던 도헌의 귀에 의준의 말이 들려왔다.
“혹시 이번에도 마음 상한 일이 있으셨을까 해서… 전무님이 괜찮으신지 알고 싶었어요.”
도헌은 의준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의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제가 전무님의 사적인 부분에 너무 파고든 것 같기도 하네요. 주제넘은 짓이라 불쾌하셨다면….”
“사생활이니 부하 직원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기는 합니다.”
도헌의 말에 의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못다 내뱉었던 사과를 위해 그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도헌이 그의 손을 잡았다.
“와 줘서 고맙습니다.”
“네?! 엇, 아, 네.”
놀란 나머지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은 직후 의준은 황급히 대답했다. 도헌은 잡고 있던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불쾌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친이 자신을 이용하려 들었던 사실에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일상적인 잔소리를 하던 조부도, 사실을 알면서도 참으라고 달래는 영제에게도 화가 났다.
집안을 위해서 혹은 자기 자리를 위해서. 다들 도헌을 구슬리려 했다. 아무도 도헌부터 걱정하고 위로해 주지 않았다.
곱씹을수록 강해졌던 분노의 이유에는 혼자서 상황을 감내해야 했던 답답함도 섞여 있었음을, 도헌은 뒤늦게 깨달았다.
‘유치하게….’
도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의준의 손이 움찔하고 떨리는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도헌은 입을 열었다.
“잠깐 시간 됩니까?”
“네?”
“올라가서 술이나 한잔하죠.”
“어….”
의준은 당황했다.
“전…무님 댁에요?”
“오래 붙들지 않겠습니다.”
도헌은 그렇게 말한 후에 의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혼자 마시고 싶지 않은 날이라 그럽니다.”
“…….”
그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헌은 의준의 손을 잡은 채 현관으로 향하려 했다.
“아, 저기, 잠깐만요. 전무님.”
의준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 친구… 상우에게 연락 좀 할게요.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휴대 전화를 사용하기 편하도록 손을 놓아준 후에 도헌은 자연스럽게 의준의 등에 손을 댔다. 의준은 몸에 힘을 주었다. 신경이 등에 닿은 따스하고 큰 손에 집중되었다.
상우에게 연락하는 김에 소영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그 사이에 도헌은 줄곧 의준의 등에 손을 댄 채 길 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의준이 연락을 마치자 그는 의준을 먼저 현관 안으로 들여보냈다.
서도헌의 맨션은 7층에 있었다. 한 층에 한 집만 있는 총 7층 규모의 이 맨션에는 총 7가구가 거주 중이었다. 그중에 한강 야경이 보이는 이 실평수 50평대의 맨션에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은 서도헌뿐이었다.
“들어가요.”
“아, 네. …헉.”
집에 들어서자마자 의준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50평이라는 숫자가 구체화된 공간은 넓었고 현관에서 곧장 보이는 널찍한 거실과 전면 창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한강 야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의준이 놀란 이유는 달리 있었다.
넓은 거실에는 가구가 없었다. 흔히 거실 가구라 부르는 소파나 커피 테이블은 물론이고 에어컨이나 텔레비전 같은 가전제품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러그 한 장조차 깔려 있지 않은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는 야경 빛을 보면서 의준은 입을 열었다.
“이사하신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1년 좀 넘었습니다.”
“예?!”
의준은 놀랐다.
“아니, 그런데 집이 왜 이렇게….”
차마 ‘휑하다’는 표현을 입에 담지 못하고 말을 흐리던 의준에게 도헌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옵션이 없는 집이었습니다. 살면서 가구를 들여놓으려 했는데 일이 바쁘기도 했고, 와도 잠만 자고 나가는 곳이라 굳이 불편하지 않아서요.”
“…….”
부엌도 거실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스템 키친과 냉장고가 자리 잡고 있어서 휑한 느낌은 덜했지만 물기 하나 없는 개수대와 접시 한 장 나와 있지 않은 건조대에서는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댁에서 식사는 안 하시나 봐요.”
“일정상 대체로 외식이고 아닐 때는 테이크아웃을 이용합니다.”
도헌은 이렇게 대답한 후에 냉장고를 가리켰다.
“안에 음료수가 있습니다. 간단한 안줏거리도 있고. 먼저 마시고 있어요.”
“전무님은 어딜 가시게요?”
“바닷바람을 쐬었더니 몸이 끈적끈적해서 좀 씻어야겠습니다.”
“…예?”
의준은 당황했다.
“곧 돌아올 테니 기다려요.”
도헌은 의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의준은 복도의 간접 조명만 켜져 있는 어둑어둑하고 고요한 공간에 홀로 남았다.
“…휴우.”
황당하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할 시간이 주어져서 안도감도 들었다. 그냥 서 있기도 뭣했던 의준은 냉장고로 다가갔다.
‘집주인이 열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냉장고 문을 연 의준은 깜짝 놀랐다.
“…오오.”
일회용 용기에 담긴 이름 모를 음식들과 맥주 그리고 이런저런 음료수들. 그리고 소분해서 먹은 흔적이 있는 견과류와 치즈, 그리고 요거트와 사과 몇 알. 입주 직전의 새집같이 텅 빈 이 집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는 모두 냉장고에 모여 있었다.
‘음료수를 종류별로 높이 맞춰서 세워 놓은 건 좀 유별나지만….’
의준은 중간 칸 맨 앞에 놓여 있던 라임향 탄산수 병을 꺼낸 후에 냉장고 문을 닫았다. 병뚜껑을 땄지만 쓰레기통을 찾지 못한 탓에 한 손에는 병 그리고 다른 손에는 병뚜껑을 든 채 부엌을 벗어났다.
어두컴컴한 거실의 전면 창 너머로 반짝이는 빛이 가득한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의준은 홀린 듯이 야경을 응시하며 탄산수를 한 모금 마셨다.
“야경이 마음에 듭니까?”
“…읍?!”
뒤에서 갑자기 질문이 들려오는 바람에 의준은 깜짝 놀라 머금고 있던 탄산수를 억지로 삼켰다. 목이 따끔거려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아, 전무님, 콜록, 빨리 오셨….”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다 말고 의준은 몸을 굳혔다. 도헌은 아래에 검은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있었지만 위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왜 벗고 있어?’
의준이 받은 충격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도헌은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느슨하게 걸친 바지 위로 드러난 복근이 움직였다. 의준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전무님.”
“예.”
“…옷… 입으시면 안 됩니까?”
“…….”
도헌은 의준을 바라보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의준의 귀와 살짝 찌푸린 눈매를 보며 도헌은 한 팔에 걸치고 있던 흰 티셔츠를 펼쳤다.
“그렇게 불쾌해할 줄은 몰랐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요, 그게….”
불쾌하기보다 당황스러웠다고 대답하기도 뭣해서 의준은 말을 흐렸다. 도헌은 티셔츠를 입은 후에 다시 물었다.
“야경을 좋아합니까?”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
“저는 주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리를 건널 때 야경을 봤거든요.”
밤늦게 퇴근하면서 한강을 건널 때면 강 양옆으로 늘어선 아파트 불빛과 그 아래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승용차 불빛을 멍하니 응시하곤 했다. 무수하고 아름다운 불빛들 중에 의준이 가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 사실이 슬펐고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게 된 스스로가 비참했다.
“야경에는 죄가 없는데 말이죠.”
의준은 웃었다.
“집에서 보는 야경은 정말 아름답네요. 이런 야경이라면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도헌은 의준과 나란히 서서 야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침실에서도 야경이 보입니다. 창이 크거든요. ---거기서 보는 야경도 꽤 근사하지요.”
그 말에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그의 태연한 옆얼굴에서는 감정은커녕 발화의 의도조차 읽어낼 수 없었다.
“…그건, 저더러 함께 침실로 가자는 의미이십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군요.”
“…….”
그러면 그런 거지 그렇다고 할 수 있다는 또 뭔가.
‘괜히 집에 따라 들어왔나.’
어찌 되었건 제대로 거절해야 할 제안이었다. 의준은 입을 열었다.
“전무님, 저는 그럴 생각으로 댁에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만일 오해하셨다면….”
“오해?”
도헌은 의준을 바라보았다. 경계 어린 그의 눈빛을 감지한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아, 오해를 할 만한 발언이었군요. 아닙니다.”
“…예?”
“내가 침실로 가자고 한 이유는 의준 씨가 오해하듯 그런 이유가 아니고…. 여기에 비해 침실에는 앉을 자리라도 있어서였습니다.”
도헌은 이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침대가 있거든요.”
“…침대에 앉아서 야경을 보자는 말씀이세요?”
의준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거대로 좀 그렇습니다만.”
“말하고 나니 좀 그렇기는 하군요.”
도헌은 빠르게 수긍하더니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면… 바닥에 앉아야겠군요.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침대에 나란히 앉아서 야경을 보며 술을 마시느니 바닥에 술판을 벌이는 편이 백배 나았다.
“그래요. 그럼 편하게… 어디든 앉아 있어요. 술하고 안주 좀 챙겨 올 테니까.”
“아, 도울까요?”
“괜찮습니다.”
도헌은 부엌으로 향했다. 의준은 어색하게 야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와! 실수할 뻔했어!’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침실로 가자는 말에 괜한 상상을 했다.
‘…좀 그런 말이긴 했잖아. 내가 괜히 의식해서만은 아니라고.’
몸을 씻고 상반신을 훤히 드러낸 채 나타난 남자가 침실로 가자는 소리를 하면 누구라도 오해했을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 여자분이 들었다면 오해하다 못해 위기감을 느꼈을걸?’
의준은 생각을 멈췄다. 스스로 떠올린 ‘여자분’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쿡 박혔다.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널찍한 창에 부엌에서 움직이는 도헌의 모습이 비쳤다.
‘이 집에 다른 사람을 데려온 적이 있겠지?’
이사하고 1년이 지났다고 했다. 적어도 한국에 자리를 잡고 1년은 지났다는 의미였다.
‘난 귀국한 줄도 몰랐는데….’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모른 채 살았으리라. 마주친 후에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누군가와 만나는 일은 희박한 가능성을 몇 줄기씩 엮은 후에야 가능한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기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사람의 몫일지라도 말이다.
‘도헌이 형과 나.’
과거를 없던 셈 치기로 약속한 옛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래 기다렸습니다.”
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의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도헌은 한 손에 양주병을 들고 다른 손에는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괜찮은 술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만, 취향이 어떨지 몰라서 와인과 맥주도 꺼냈습니다. 소주는 없지만 냉장고에 중국술은 있는데….”
“아니요, 한 종류면 됩니다. …섞어 마시면 숙취가 심해져서요.”
“술이 약합니까?”
“술이 세도 섞어 마시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하긴 가볍게 마시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죠. 그럼 마시고 싶은 걸로 골라요.”
도헌은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의준은 그를 따라 앉으며 슬쩍 맥주를 가리켰다.
“저는 맥주 마시겠습니다.”
도헌은 아이스 버킷에서 얼음을 꺼내 온 더 록 잔에 넣었다. 그가 위스키를 잔에 따르는 사이에 의준은 맥주 캔을 땄다. 익숙한 소리와 향이 공간에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은 별말 없이 가볍게 잔과 캔을 마주쳤다.
야경을 바라보며 말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도헌이 입을 열었다.
“먼저 묻지 않을 겁니까?”
“네?”
의준은 도헌을 돌아보았다.
“내가 걱정되어서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려 주었던 사람치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는군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도헌의 말에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저도 사람인데.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기에는… 좀 그래서요.”
전무님과 수행 비서 사이니까요. 의준이 생략한 말을 이해한 도헌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군요.”
“그것뿐만은 아니고….”
혹시라도 도헌이 민망해할까 싶어서 의준은 급히 덧붙였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혼자 있기 싫은 경험은 저도 있어서요. 전무님도 그러신 걸까 싶어서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도헌은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의준 씨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네? 아… 네.”
의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헌은 술잔을 천천히 돌리며 입을 열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의준 씨가 고마울 일이 아니라 내가 미안해할 일이죠.”
도헌은 다시 야경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선을 볼 뻔했습니다.”
“예?”
의준은 놀라서 되물었다.
“부산에서라면… 할아버님께서?”
“아버지였습니다.”
도헌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에 짧게 부산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의준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와.”
이야기의 끝에 의준은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마음이 배어나는 작은 감탄사를 들은 도헌은 피식 웃었다.
“할아버지도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옛 어른이시고, 결혼 압박은 친가에서도 외가에서도 종종 받았지만 이런 식으로 속여서 선 자리에 내보내려던 사람은 없었는데. 친아버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싶더군요.”
“…….”
“생각은 자유지만 강요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자꾸 당신 생각을 강요하면 영원히 보지 않겠다고 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셨군요.”
의준은 잔에 위스키를 따르는 도헌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무님은 결혼 생각이… 아예 없으십니까?”
얼음을 집던 도헌의 손이 멈췄다. 조각 얼음이 덜그럭하고 다시 아이스 버킷 안으로 떨어졌다. 도헌은 다시 얼음을 집어 잔으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의준 씨가 그렇게 물으니 이상하군요.”
“예?”
“내가 결혼 못 할 사람이라는 사실은 의준 씨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의준은 말문이 막혔다.
‘나하고 사귀었던 일을 말하는 건가? 그게 왜?’
의준이 알기로 도헌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의준과 사귀기 전에 사귄다던 소문이 있었던 상대는 음대에서 소문난 미녀였고 말이다.
‘너라면 남자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처음 입맞춤을 나눈 날 들었던 달콤했던 말을 떠올리자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모르던 사이에….’
의준은 입을 열었다.
“달리… 사귀었던 남자분이 더 있으셨습니까?”
도헌이 대답하기보다 먼저 의준은 황급히 덧붙였다.
“사, 사생활을 추궁하려던 게 아니라 그… 여자분에게 관심이 없어지셨나 싶어서. 그러니까….”
“---내가 동성애자가 ‘되었냐’고 묻고 싶은 모양이군요.”
“…….”
정곡을 찔린 의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헌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이성에게 흥미는 있습니다. 오히려 동성보다는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딸그랑, 하고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유일하게 사귀었던 사람은 남자 한 명뿐입니다.”
“……?!”
생각지도 않은 말에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도헌은 말없이 맥주 캔을 입에 대는 의준을 바라보았다.
“누구였는지 안 물어봅니까?”
“저는….”
의준은 도헌의 입가에 어린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야.’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떠올릴 필요가 없는 추억이어서요.”
“…….”
도헌은 눈썹을 위로 올렸다. 술을 한 모금 마신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공사 구분이 명확하군요. 감탄했습니다.”
비웃음당한 기분에 의준은 도헌을 가볍게 노려보았다.
“그러자고 하셨던 분은 전무님이신데요.”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예?”
놀란 의준을 보며 도헌은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과거 일을 되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지금은 지금이니까요.”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표정으로 드러난 의준의 반박에 도헌은 웃었다.
“예전 일은 접어 두고 새로운 관계를 맺자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 아닙니까?”
“…그….”
그런 의미로 하셨던 말입니까?
혀끝까지 치밀어 오른 질문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있던 의준의 눈앞에 도헌의 얼굴이 다가왔다.
“……?!”
의준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도헌은 의준을 지그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의준 씨.”
술 향이 섞인 숨결이 입술을 스쳤다. 의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전무님, 저기!”
챙그랑.
다소 둔탁한 소리가 그들 사이에서 메아리쳤다. 크리스털 잔과 맥주 캔이 부딪치면서 난 소리였다.
“억지로 잊으려 할수록 기억은 더욱 생생해지더군요.”
도헌이 말했다.
“자연스럽게 갑시다. 지금까지처럼.”
“…….”
울컥하는 감정이 쓸데없는 말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의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당신을 자연스럽게 대하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알기는 할까?’
빈 캔을 내려놓았다. 비어 있던, 다른 크리스털 잔을 잡고 도헌을 향해 내밀었다.
“저도 한잔 주십시오.”
도헌이 얼음을 먼저 잔에 덜고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의준은 바닥에 깔린 연한 갈색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가 화끈 달아올랐다. 입안을 휩쓸고 코를 통해 빠져나간 강렬한 알코올 향은 도헌에게서 난 향과 같았다
얼음만 남았던 잔에 다시 위스키가 차올랐다. 의준은 잔을 들고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검은 강 옆으로 자동차 불빛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어둠에 물든 진짜 강보다 더 아름다운 불빛의 강을 응시하며 의준은 입을 열었다.
“야경이 정말 예쁘네요.”
무수한 불빛으로 이루어진 풍경. 아침이 오면 사라진다는 점에서 야경은 꿈과 비슷했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도.’
의준은 도헌을 곁눈질했다. 도헌은 느긋하게 뒤로 몸을 기울인 채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옆얼굴이 기억 속의 얼굴과 겹쳐졌다.
시간이 영원한 줄 알던 때가 있었다. 함께라는 표현이 당연하던 때도 있었다. 그 시간이 흘러가 버린 뒤에야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도헌이 형.’
소리 내어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날 떠났어요?’
물을 수 없었던, 지금도 묻기 무서운 질문을 속으로 던졌다.
무수한 불빛이 만든 꿈같은 풍경이 창밖을 흐르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사라져 버릴 아름답고 허무한 야경을 응시하며 의준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