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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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토요일 아침, 알람은 정확히 7시에 울렸다. 의준은 시간을 확인하고 기지개를 켠 후에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보일러의 온수 버튼을 누르고 침실을 나선 후에는 배를 긁적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물을 틀기 전에 거울을 보자 유달리 번드르르하고 통통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와… 어제저녁에 먹은 한정식이 죄다 얼굴 기름으로 변했나 봐….”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밖으로 나왔다. 부엌에 들러 냉장고에서 커피 우유 팩을 꺼냈다.

“어? 유통기한 지났네?”

마시는 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알고 있던 터라 개의치 않고 따서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침실로 가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7시 40분. 옷을 입고 로션을 발랐다. 머리는 대충 마르도록 툭툭 턴 후에 텔레비전을 켰다. 공중파 방송만 이어져 있어서 채널 선택권은 얼마 없었지만 일단 뉴스가 나오는 채널을 틀어 두고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최 실장님, 이의준입니다. 네, 출발하셨나 해서. 네,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전무님께 그렇게 연락드릴게요. 네, 고맙습니다.”

통화 상대는 임원 직속 운전기사였다. 일정에 따라 오전 8시까지 서도헌을 마중 나가기로 했던 그는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상태라고 했다.

‘전…무님, 좋은, 아침, 입니다. 차가… 8시, 까지… 지하, 주차장, 에 도착할, 예정, 입니다. 기차, 시간은, 8시, 40분, 입…니다. 좌석, 은, 동일하게 3호차, 7A 석, 입니다.’

매달 마지막 주 주말에 서도헌은 부산에 있는 친가를 방문했다. 지난달까지는 김하나가 기차 예약을 했지만 이번 달부터는 의준이 그 일을 맡았다. 그래 봤자 늘 같은 시각에 출발하는 열차의 같은 특실 좌석을 예약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메시지 전송을 마치고 잠깐 젖은 수건을 펴서 옷걸이에 걸고 있을 때 수신음이 들렸다. 의준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고마워요.

짧은 도헌의 답장을 확인한 후에 의준은 다시 메시지를 작성했다.

‘잘, 다녀, 오십시오, 좋은, 주말 되시기, 바랍, 니다.’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창을 열었다. 도로에 인접한 창을 통해 햇살과 함께 마른 공기가 스며들었다. 외출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점심에 만나자. 식사하고 드라이브 어때? 가수 친구가 다른 친구 몇 명하고 강릉 쪽 별장에 초대했거든. 같이 가서 느긋하게 놀다가 저녁에 돌아오자고. 내가 다 준비할 테니까 넌 따라만 오면 돼. 기분 전환 하자.’

어제저녁, 의준이 전화를 걸자 상우는 이렇게 말했다. 연예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기분 전환을 하자는 제안은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의준은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토요일 낮에는 간병인이 쉬기 때문에 의준이나 소영이 머물러야 해서였다.

‘토요일 낮에? 내가 있을게. 상우 오빠랑 다녀와.’

의준의 걱정과는 달리 소영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흔쾌히 승낙했다. 공부하기에는 집이나 카페보다 병실 쪽이 쾌적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오는 길에 회라도 떠다 줘. 안 되면 그 동네 명물 과자나 빵이라도.’

상우와는 11시 반에 만나기로 했다.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강릉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뭘 입지.”

몇 벌 없는 옷을 뒤적이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의준은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의준 씨도 좋은 주말 보내요.

몇 분 늦게 도달한 도헌의 답장을 확인한 의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주말의 중요한 임무를 완수했다.

이제 진짜 주말이 시작되었다. 의준은 즐거운 표정으로 옷을 집어 들었다.

***

서도헌의 친가는 부산에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았다. 조부는 원양 어선을 몇 척씩 소유하고 수산물 가공업과 도매업을 병행하는 꽤 큰 사업체의 운영자였다. 친척들도 대부분 근처 지역에서 비슷한 일들을 했다. 그 외에 뒤쪽에서 유지하는 말 못 할 사업도 있었지만 매출은 공식 사업체가 압도적이었다.

도헌은 그런 집안의 6대 독자였고 당연히 사업을 물려받으리라는 기대 속에 성장했다.

그러나 외국인이었던 모친은 이혼 후에 도헌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 버렸다. 아들에게만 집착하고 외국인인 모친을 멸시하던 집안 분위기도 싫었지만 그 안에서 아내와 아이를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던 부친을 보았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대학 입학을 계기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도헌은 친가에는 연락하지 않았다. 사실상 절연 상태였던 친가에 다시 방문하게 된 이유는 아흔이 넘은 조부가 간절히 얼굴을 보고 싶어 해서였다. 아흔이 넘어 일선에서 은퇴한 후 요양 생활 중인 노인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한 달에 한 번 방문하기로 약속한 대신 도헌은 조부에게 자기 뜻을 단호하게 전했다. 친가의 사업이나 상속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친척과는 교류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조부는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한 달에 한 번, 바다가 보이는 저택에서 요양 중인 조부와 그를 돌보는 후처 그리고 종종 집에 들르는 나이 차이 나는 후처의 아들과 식사를 하는 것이 만남의 전부였다. 해외 가공 공장 관리 책임자가 된 부친은 딱 한 번 식사에 참석했다.

그렇기에 도헌은 잊고 있었다. 그의 부친 서영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짜증 나는 사람인지 말이다.

“세상에, 아드님이 신수가 훤하시네.”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이렇게 말하며 웃는 중년 여자를 보고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옆에 있던 부친에게로 향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교회 권사님이시다. 인사드리라.”

서영술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도헌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에 수상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운대 쪽 교회의 권사라는 여자와 부산역 근처의 호텔 커피숍에서 딱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연? 그럴 리가.’

확률은 상관없었다. 눈짓을 주고받는 여자와 부친에게서 의도적인 만남의 냄새가 풀풀 났기 때문이다.

“서 사장님이 까다롭게 조건을 내걸 만하네요. 아유, 도련님이 워낙 바쁘셔서 연락도 없이 아가씨들과 약속을 잡기가 정말 어려웠답니다. 그래도 오늘 모신 분은 만족스러울 거예요. 부산에서 제일 조건 좋고 참한 아가씨랍니다.”

도헌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자자, 이러지 말고, 드가서 이야기하자.”

서영술은 대답을 피하며 도헌의 등을 출입구 쪽으로 밀었다. 도헌은 몸을 틀어 그의 팔을 뿌리쳤다.

“설명부터 듣겠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허, 이 녀석, 참.”

서영술은 난처한 표정으로 혀를 차더니 여자에게 눈짓했다. 여자는 눈치 빠르게 먼저 커피숍 안으로 향했다.

“이리 온나.”

서영술은 커피숍 옆의 휴게 공간으로 도헌을 데리고 갔다.

“김 여사, 아니, 권사님이 부업으로 중매 일을 하는데…. 네 이야기 듣고 마침 딱 맞는 아가씨가 있다 캐서 한 번 만나 보라꼬 이야기를 한 게 말이다.”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선 자리를 마련했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니까, 네가 워---낙 바쁘고….”

도헌은 몸을 돌렸다. 서영술은 자리를 뜨려는 도헌의 팔을 잡았다.

“어디 가노. 안에서 기다리시는데.”

“제가 알 바 아닙니다.”

도헌은 부친을 노려보았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할아버지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어? 어어… 그게, 아직….”

“할아버지도 저도 모르게, 아버지 멋대로 자리를 만들었다는 얘기군요?”

“멋대로라니, 인마. 이게 다 널 위해서….”

“제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서겠지요.”

도헌은 내뱉듯이 대꾸했다.

“직접 마중을 나오셨기에 이상하기는 했습니다. 할아버지를 뵈러 가기 전에 둘만 할 이야기가 있다며 호텔로 데려왔을 때도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왔더니… 선을 잡아요? 할아버지 몰래,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그것도 모자라서 대체 무슨 조건을 내걸었기에 초면인 중매쟁이가 얼굴에 대고 까다롭다 운운합니까?!”

“중매쟁이라니, 어디 어른한테….”

“중매쟁이인지 교회 권사인지 아버지 내연녀인지 알 바 아닙니다.”

도헌은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시 이런 일을 벌이면 그때는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리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줄 아십시오.”

“야, 도헌아.”

로비를 가로지르는 도헌의 뒤로 서영술의 다급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도헌아, 회장님한테는 말하지 마라. 응? 알았제?”

빌어먹을.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겨우 억누르며 도헌은 택시에 올라탔다.

수평선 위로 해가 고요히 내려앉았다. 오렌지빛 석양이 사방을 물들이는 시간, 손자가 떠날 차비를 시작하자 서운해진 노인은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홀로 현관에 남겨진 노부인만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다음 달에 또 보입시다. 그때는 갈비찜도 마이 해 둘게.”

“잘 대접받고 갑니다. 쉬세요.”

도헌은 깍듯이 인사하고 문 안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할아버지, 저 갑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헌은 서운한 기색 없이 문을 나섰다.

오늘 그를 역으로 데려다줄 운전기사는 이미 대문 밖에 자기 애차에 시동을 건 채 대기 중이었다. 요란한 소음을 내는 외제 차를 본 도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데도 아니고 부산에서 이 차를 모는 의미가 있나?”

호화로운 오렌지색 스포츠카 운전석에 앉아 있던 초록 머리의 남자는 유쾌하게 웃었다.

“의미가 뭐 있나, 타고 싶어서 샀지.”

“낭비벽은 여전하군, 서영제.”

“니 돈도 아인데 뭐 이래 잔소리가 많노.”

녹색 머리 남자의 이름은 서영제였다. 서도헌의 조부가 늘그막에 얻은 아들로 도헌의 부친 서영술과는 이복형제이며 도헌에게는 작은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갑이었기 때문에 둘만 있을 때는 말을 놓고 지내는 중이었다.

“---행님이 사고 칬다고?”

부웅하는 배기음과 함께 차가 출발한 직후 서영제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소문이 빠르군. 할아버지도 아시나?”

“일단 내만 안다. 회장님은 모르시는 편이 낫다 싶어 말씀 안 드맀다.”

영제의 대답을 들은 도헌은 입을 열었다.

“교회 권사인지 뭔지 하는 여자에게 내 선 자리를 주선시켰어. 할아버지도 모르게.”

“아, 김 여사? 이 짝에서 유명한 중매쟁이지. 부탁한다고 아무나 주선하는 사람이 아인데 행님이 잘 구슬맀나 보네. 을매나 들이부었을라나. 주식 배당금 나온 거 다 털린 거 아인가 모르겠네.”

영제는 흘깃 도헌을 바라보았다.

“상대가 별로가?”

“누군지도 몰라. 들어가지도 않았으니까.”

“저런. 김 여사가 진땀 좀 뺐겠는데.”

영제는 웃었지만 도헌은 웃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상한 짓을 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대뜸 선 자리라니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결혼에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알 텐데, 그것도 그렇게 만든 양반이 주선하는 선을 순순히 보리라 생각한 건가?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나?”

“그래도 아버지한테 그런 신랄한 소리는 좀 그렇지 않나?”

영제는 느긋하게 지적한 후에 말을 이었다.

“뭐, 행님을 두둔하려는 건 아인데, 왜 그런지는 알 것 같다. 요즘 집안 내에서 행님 입지가 점점 좁아져가 초조했겠지.”

서영술은 지난달에 동남아에 있는 수산물 가공 공장의 관리자 직을 그만두었다.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퇴사 이유는 횡령이었다.

“새벽에 회장님 찾아와가, 마당에 무릎 꿇고 선주 수업받고 싶다고 하드라. 회장님이 처음에는 화를 내셨는데 아들이니까 내칠 수는 없고…. 일부터 경험하라고 현장에 보냈는데, 그게 또… 영 잘되는 게 아니라서.”

선주는 그저 배의 소유자가 아니라 거대한 배 안팎에 엮여 있는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이자 부의 분배자였다. 당연히 하고 싶다고 될 수도 없거니와 되었어도 안심할 수 없는 자리였다.

서영술은 선주가 되지 못했다. 그럴 그릇조차 되지 못했다.

“겨우 한 달 만에? 웃음도 안 나오는군.”

기가 막혀 하는 도헌을 보며 영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 양반들이 마 좋게 좋게 안 했던 탓도 있다. 행님이 보기보다 맴이 여리잖아.”

“…마음이 여린 게 아니야.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거지.”

“어쨌든, 그래서 행님은 지금 백수 상태로 호텔살이 중인데…. 친척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어서 말이야.”

“이상한 소문?”

서영술의 부친이자 도헌의 조부인 서 회장은 올해 구순이었다. 회사 지분도 반 넘게 보유하고 있으며 협력 업체에의 영향력은 건재했지만 작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탓에 언제 세상을 뜰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회장님이 아직 누구를 후계자 삼겠다고 안 했잖아? 아무래도 회사가 걸린 일이라 친척들이 쪼매 날카로운 차에 행님이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떠들고 다니는 거랑 뭐가 다르노. 신경 쓰이지.”

서 회장에게는 아들 둘과 손자 하나가 있었다. 장남 서영술과 차남 서영제 그리고 유일한 손자 서도헌. 서 회장은 장남을 탐탁지 않아 했고 손자와 차남이 동시에 태어난 해에 셋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도헌은 일찌감치 상속권을 포기하고 집안을 떠났다. 남은 후계자 후보는 두 명뿐이었다.

“말이 후보 세 명이지, 회장님은 일찍이 닐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거 알제?”

도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최선이었던 네가 빠지고 남은 건 최악과 차악인데, 친척들은 그나마 고르라면 차악이 낫다 카거든. 물론 그 차악은 내고.”

영제는 웃었다.

“여론이 그렇다 보니 행님도 초조할기야. 내가 후계자가 되면 유산도 제대로 못 받고 쫓겨날 수도 있겠다 싶을 테고 말이지. 회장님도 여론은 아는데 심중을 안 드러내시니까 더.”

“평생 방탕하게 놀고먹었으면서 이제 와서 후계자 자리를 노려? 인정받을 만한 성과 따위는 하나도 내지 못한 주제에 너무 뻔뻔하잖나.”

도헌이 내뱉듯이 말했다. 영제는 웃었다.

“그래도 행님은 내조차 못 이룬 큰 성과를 냉겼는데 뭐.”

“뭔데.”

“너.”

영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손이 귀한 집안에 후손을 냄겼지. …뭐, 낳기는 네 어머니, 아리따운 여장부이신 전 행수님이 낳으셨으니 큰일은 그분이 하싰고 행님은 씨만 제공했지.”

“…….”

“회장님이 행님 뒤치다꺼리 해 주는 이유는 행님이 5대 독자라서가 아이라 6대 독자인 네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서영제가 태어나면서 더 이상 독자가 아니게 된 데다 기껏 낳은 독자는 그를 버렸다. 젊은 시절에는 그럭저럭 버텼지만 나이가 들면서 인맥도 능력도 없이 배다른 동생에게 치이는 삶은 불안했으리라.

“회장님은 니를 아끼니까, 니 자식은 쌍수 들어 환영하셨을끼다. 니 아버지, 행님은 거 기대서 쪼매 더 입지를 다질라 했을끼고. 뭐, 회장님도 말을 못 해서 글치 은근히 니 결혼 기대하고 계시기는 하다. 어머니에게도 툭하면 내하고 니 둘 다 결혼 시키야 한다고….”

도헌은 물론 영제도 결혼 적령기에 속하기는 했다. 어느 쪽이건 당장 결혼해 아이를 가지거나 혹은 어느 날 아이부터 덜렁 데리고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는 의미였다.

“니 다음 달에 올 때 애 손이라도 잡고 내리오면 게임 끝인데.”

“그럴 일은 없어.”

도헌은 잘라 말한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즉, 아버지는 어울리지도 않게 세력 다툼에 끼어 보려고 아들을 이용하려 했다는 말이군.”

“실패했지만.”

차가 역 주차장에 접어들었다. 도헌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면 할아버지께 당분간 부산에 오지 않겠다고 전해 줘.”

“와.”

“이런 일은 질색이니까.”

“회장님 탓은 아니잖아.”

“그런 생각을 내비치셨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책임지셔야지.”

도헌은 문손잡이에 손을 대며 말했다.

“할아버지와 만나는 대신 집안일에는 일절 휘말려 들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어. 이건 약속 위반이야.”

도헌이 문을 열려던 찰나 갑자기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도헌이 고개를 돌리자 영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거래처 끊듯이 말하지 마라. 네 할아버지다. 손자가 이뻐서 어쩔 줄 모르는 고지식한 노인에게 화풀이할 틈이 있으면 기냥 민폐투성이인 네 아버지나 해채워라. 그쪽이 올바른 해결 방법이다.”

웃음기가 사라진 영제의 얼굴에는 살기가 흘렀다. 도헌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나더러 아버지를 죽이라는 건가?”

“아니, 내 아버지를 존중하라는 말이다.”

“…….”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영제는 정면으로 시선을 향했다. 짧은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행님은 나한테 맡기고 너는 다음 달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려와서 엄마한테 갈비찜이나 얻어먹고 올라가. 많은 거 안 바라니까.”

“…….”

“한 달에 한 번 너 보는 낙으로 사는 양반이야. 오래 못 살 노인, 서운하게 하지 말고.”

도헌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제는 씩 웃으며 차 문 잠금을 해체했다.

“다음 달 초에 서울에 갈기다. 밥이나 먹자.”

차에서 내리다 말고 도헌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쯤?”

“한 10일쯤? 결정되면 바로 연락할게.”

“알았어.”

“애인도 데리고 온나. 내가 밥 살게.”

“왜 애인이 있다는 전제로 명령을 하는 거야?”

“안 있나.”

“없어.”

“애인 되기 일보 직전인 사이라도.”

“없어.”

“그러면 짝사랑하는 상대는?”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없다니까.”

“그럼 만들지그래?”

영제는 가볍게 말했다.

“이런 일이 생길 때 방패 삼기도 좋고, 하나 있으면 세상이 아름다워지잖아.”

“생각 없어. 설령 있어도 이런 집안 사정 앞에 방패로 내세울 생각은 더더욱 없고.”

“…고지식한 놈이네. 행님 씨에서 어떻게 저런 놈이 나왔노.”

도헌은 영제의 말을 무시하고 차에서 내렸다. 역을 향해 걸음을 뗀 그의 등에 대고 영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조심해서 가라. 올라가면 회장님에게 잘 도착했다고 전화 한 통 하고.”

도헌은 역에 들어서자마자 표 파는 곳으로 향했다. 행선지를 밝히고 가장 빨리 출발하는 열차의 표를 요구하자 역무원은 10분 후에 출발하는 KTX 표를 끊어 주었다. 그는 곧장 플랫폼으로 내려가 대기하고 있던 열차에 올라탔다.

“후우….”

혼자가 되자 비로소 두통이 밀려들었다. 도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미간 주변을 손으로 집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솔직히 한 달에 한 번 조부를 만나러 내려오는 일도 편하고 좋지만은 않았다. 반나절 정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진수성찬을 대접받는 것이 일정의 전부였지만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 일까지 겹쳐 버렸다.

‘쉽게 포기할 사람은 아니니 또 나를 끌어들이려 하겠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서영술은 몰래 선 약속을 잡고 도헌을 강제로 데려갔었다. 20대 중반이었고 대학원 재학 중이었던 도헌은 상대방을 만나 차를 마셨고 자리를 파한 후에 부친에게 화를 냈었다.

‘전 애인이 있습니다. 아버지 멋대로 사람을 결혼시키려 하지 마세요.’

부친은 반성하는 기색 없이 ‘애인이 있는데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추궁했다. 한 마디 말실수로 인해 1년 가까이 시달렸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진저리가 쳐졌다.

‘애인.’

도헌은 자연스럽게 당시의 애인이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시선이 들고 있던 휴대 전화로 향했다. 이른 저녁 식사를 한 후라 시간은 아직 저녁 7시밖에 되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통화 목록을 열었다. 보기 싫은 부친의 이름 아래에 이의준의 이름이 떠 있었다. 손가락이 그의 이름에 닿았다. 화면에 그의 이름과 연락처 정보가 떠올랐다.

‘…뭐 하는 거야?’

자연스럽게 통화 버튼으로 향하던 손가락을 멈췄다.

‘전화를 걸어서 어쩌려고? …오늘 일을 푸념이라도 하게?’

5년 전, 애인 사이였을 때조차 집안일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하물며 상사와 부하 사이인 지금에 와서 그러기는 불가능했다.

갈등하는 사이에 화면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손가락을 화면에 대서 되살렸다. 손가락 바로 아래에 통화 버튼이 보였다.

‘빌어먹을.’

열차가 출발했다. 도헌은 휴대 전화를 뒤집어 쥔 채 입을 꾹 다물었다.

***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경쾌한 팝송 사이로 벨 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 소리를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던 여자 가수였다.

“전화 오는데?”

“누구 전화?”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벨 소리는 주방 아일랜드 키친 위에 놓인 가방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기, 부엌에 있는 가방 누구 거야? 전화 오는데.”

여자 가수가 문을 열고 테라스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김상우에게 가볍게 목조르기를 당하고 있던 남자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내 전화네. 상우야, 놔 봐.”

의준은 상우에게서 벗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에 도착하자마자 벨 소리가 끊겼다. 그는 가방을 열고 휴대 전화를 꺼냈다. 부재중 알림을 확인한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어….”

“누구야?”

어느새 다가온 상우가 물었다. 의준의 대답을 듣기보다 먼저 고개를 내밀어 화면을 들여다본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도헌 전무님? 전에 만난 그분이지?”

“어, 응.”

“그 사람은 주말 저녁에도 전화를 막 해?”

“쉬는 날 전화를 건 적은 없으셨는데.”

저녁 7시 30분이었다. 전화하기에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부산 할아버님 댁에 계실 시간 아닌가?’

도헌은 밤 10시 15분 열차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의준이 표를 예약했기에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지?’

전화를 걸어 봐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화면에 표시된 서도헌의 이름을 보기 무섭게 의준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전무님?”

---아.

전화기 저편에서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마치 의준의 목소리를 듣고 놀란 사람 같았다. 의준은 의아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전화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 전화기를 가방에 둬서…. 저, 무슨 일로 전화하셨는지요?”

---아. 별건 아닙니다만.

도헌이 말했다.

---예정 시간보다 일찍 서울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올라오시는 중이라면… 열차 안이십니까?”

---그래요. 7시 15분 차를 탔습니다.

일찍 기차를 탔으니 미리 예약했던 표를 취소하도록 지시하기 위해 전화했을까.

“그러시군요. 그러면 예약했던 10시 15분 표는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아까 표를 끊는 김에 직접 취소했어요.

“…네? 아, 네….”

그러면 대체 왜 전화를 했을까. 의준이 느낀 의아함이 전해졌는지 도헌이 말했다.

---내가 왜 전화했는지 궁금합니까?

“아, 그게. …네.”

“의준아!”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의준이 통화하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던 상우가 베란다 문 너머에서 접시를 들어 올렸다.

“등심 다 구워졌어. 빨리 와서 먹어.”

“어? 아… 잠깐만. ---여보세요?”

의준은 그에게 조용히 해 달라는 신호를 한 뒤에 휴대 전화에 귀를 기울였다.

---밖입니까?

“네. 친구하고 잠깐 만나서요.”

---…김상우 씨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떠들썩하군요. 다른 사람들도 있나 본데.

“아, 상우 친구가 강릉에 별장을 샀는데, 상우가 초대를 받았다고 저도 데리고 와 줘서….”

의준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쓸데없는 설명 같아서였다. 헛기침을 한 후에 의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전무님. 그래서 전화 주신 용건이….”

---끊겠습니다. 월요일에 보죠.

“네? 어… 전무님?”

전화가 끊겼다. 의준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의준아. 통화 끝났으면… 표정이 왜 그래?”

상우가 다가왔다. 의준은 화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좀 이상해서.”

“뭐가?”

“전무님이….”

막상 설명하려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왜 전화했는지 궁금합니까?’

그저 그 질문의 답을 듣지 못해서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부산에 있어야 할 시간에 올라오는 중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서도헌은 원래 친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혹시 친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그렇다 해도 의준이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휴대 전화를 귀에 대고 이어지는 신호를 들었다. 도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상우는 한층 심각해진 의준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전무님이 전화를 안 받으셔.”

“방금 통화했잖아?”

“응. 먼저 끊으셨는데….”

“그런데?”

“…끊기 전에 분위기가 이상했거든.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의준의 대답에 상우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쪽에서 무슨 일이 있다고는 안 했지?”

“…응.”

“그럼 별일 아니겠지. 큰일이라면 다시 걸지 않겠어?”

옳은 말이었다. 머리로는 의준도 동의했다.

‘하지만….’

도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던 점이 마음에 걸렸다.

“직장 상사에게 뭘 그렇게까지 신경 써?”

상우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물었다.

“업무에 관련된 일이라면 다시 전화할 테고, 아니라면 전화가 안 와도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잖아. 비서도 결국 부하 직원에 불과한데.”

“…….”

“어차피 월요일에 출근하면 다시 볼 사람이잖아. 정 용건이 궁금하면 그때 물어보면 되지. 안 그래?”

“그렇지….”

맞장구를 치는 의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상우는 의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발코니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가서 고기나 먹자. 다 뺏기겠어.”

“나 전화 한 번만 더 해 보고 갈게. 먼저 먹고 있어.”

의준은 상우의 품을 벗어나 부엌 옆의 빈방으로 향했다. 도헌의 전화번호를 선택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신호가 길게 갈 뿐 도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라도 보낼까?’

메시지 작성 창을 열었지만 막상 뭐라고 보낼지 몰라서 손가락을 멈춘 의준의 귀에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전환 하러 와서 뭐 하는 거야?”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기대어 서 있던 상우가 말을 이었다.

“전화 통화 한 번에 안절부절못하고. 서 전무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휴일을 망칠 분으로는 안 봤는데 악덕 상사네, 아주.”

“전무님은 그런 분이 아니셔.”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서도헌은 상식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배려심도 깊은 편이었다.

“평소에 그런 분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걱정이 되는 거야. 왜 전화하셨는지 신경 쓰이고.”

“걱정되고 신경 쓰이고…?”

상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직장 상사에게 말이야?”

“인간적으로 말이야!”

의준은 황급히 대꾸했다.

‘그래, 인간적으로 걱정될 만하잖아. 평소에 그러던 사람이 아니니까.’

부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째서 다시 연락을 받지 않는 걸까.

‘왜 내게 전화했을까?’

휴대 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의문과 걱정이 뒤섞이는 기분을 느끼며 의준은 입을 열었다.

“상우야, 미안한데… 나 먼저 가 볼게.”

“뭐? 어딜 가.”

“서울에….”

말을 흐리는 의준을 보며 상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서 전무님 뵈러 가려고?”

“…….”

“야, 겨우 전화 좀 안 된 거 가지고… 아니, 아까 뭐 올라오는 중이라고 안 했어? 서울에 없다는 의미 아니야? 연락도 안 되고 어디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을 무슨 수로 만나게.”

조목조목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의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이성적인 판단이 아님을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 가 봐야겠어. 넌 있다가 내일 와.”

“내 차 타고 왔잖아. 어떻게 올라가게?”

“택시 부르지, 뭐.”

“서울까지 택시 타려고? 얼마 나올 줄 알고.”

“아… 아니, 근처 터미널까지만.”

의준은 이렇게 말한 후에 방을 나서 부엌으로 돌아갔다. 가방을 둘러메고 우선 거실에 있던 여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먼저 가 볼게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이어서 베란다를 향해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열린 문을 통해 더 있다 가라는 인사치레가 들려왔다.

“벌써 가게?”

“이따가 물가에서 불꽃놀이 할 건데. 왜 지금 가.”

“죄송해요, 일이 있어서….”

“밥이라도 마저 먹고 가지 그래요.”

의준은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나중에 뵈어요!”

“나중에 봐, 다들.”

의준의 작별 인사 위로 상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의준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상우가 차 키를 쥔 채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도 가게?”

“응.”

“왜?”

“왜긴. 네가 가니까.”

상우는 태연하게 대답한 후에 앞장섰다. 의준은 얼떨결에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상우야,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기껏 쉬러 온 주말인데, 친구들하고….”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너, 여기가 어딘지 정확히 알기는 해?”

“…….”

의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도 경계선을 넘어 달리다가 국도로 빠진 후에 사유지 도로를 구불구불 올라왔던 기억만 났다.

“거 봐라.”

주차장에 한발 앞서 도착한 상우는 운전석 문을 열며 말했다.

“서울 밖으로 데리고 나온 책임을 지고 다시 데려다줄게. ---어서 타.”

“…….”

의준은 순순히 조수석에 탔다. 상우가 시동을 거는 사이에 안전벨트를 매면서 의준은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일찍 떠나네, 미안해.”

“어차피 한두 시간 뒤에는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뭐.”

상우는 의준의 옆얼굴을 흘깃 살폈다.

“표정 펴. 상사가 전화 좀 안 받았다고 그렇게까지 절망할 거 없잖아.”

“…내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아?”

“어, 아주.”

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애인이 잠수 이별 하려던 걸 눈치챈 사람 같아.”

조수석 의자에서 덜컥하는 소리가 났다. 상우는 놀라서 의준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괜찮냐?”

“아, 응.”

“……? 안색이 나쁜데? 왜….”

상우는 도중에 말을 멈췄다.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

“하하… 아니야. 그냥 좀… 놀라서.”

도헌과 사귀었던 일은 비밀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도헌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도헌이 형과 내 사이를 알 리가 없는 상우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내가 이상하게 굴었다는 뜻이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민망함만큼이나 초조함이 강하게 솟아올랐다.

‘빨리 도착하면 좋겠다.’

의준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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