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김하나가 출근했을 때 시간은 오전 7시 반이었고 사무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어?”
이 시간에 출근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던 김하나는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파티션 위로 불쑥 솟은 작은 머리를 발견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의준 씨, 일찍 왔네요.”
“오셨어요, 과장님.”
의준은 김하나를 향해 밝게 인사했다.
“전무님께서 오전 회의 전에 검토하고 싶은 자료가 있다고 하셨거든요. 정시에 출근하면 전무님을 기다리게 만들 것 같기에….”
비서실 입구의 공용 프린터는 부지런히 자료를 출력 중이었다.
“그랬군요. 내가 뭐 도와줄까요?”
“아닙니다.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과장님은 왜 이렇게 일찍 오셨습니까?”
“아, 신랑 차를 얻어 타고 나왔더니 일찍 도착해 버렸지 뭐예요.”
“그러셨군요. 커피는 드셨어요? 제가 한 잔 내려 올까요?”
“네? 아… 그래 주면 고맙죠.”
“아메리카노죠?”
의준은 메뉴를 확인한 후에 웃으며 탕비실로 향했다. 김하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의준이 정사원으로 승격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적응이 빠르더라구요.’
‘일이 빨라요. 꼼꼼하고.’
‘표정도 밝고 대화도 편해요.’
의준에 대한 비서실 동료들의 평가는 좋았다. 수습 기간 한 달 동안 보였던 불안정함이 거짓말처럼 그는 빠르게 업무에 적응했다.
‘의준 씨도 고용이 안정되면 실력을 발휘하는 타입이 아닐까요?’
다른 비서가 농담처럼 던진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김하나는 생각했다.
“이의준 씨는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김하나는 서도헌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일머리도 있고 성격도 좋습니다. 전체적으로 잘하고 있죠.”
“그렇군요.”
서도헌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의준을 김하나의 후임으로 직접 채용한 사람이니 내심 뿌듯할 터였다.
‘쉽게 인맥으로 사람을 추천한 적이 없는 분이었기에 놀랐지만, 역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으시다니까.’
김하나는 말을 이었다.
“의준 씨가 그러고 싶어 하면 제대로 비서 업무를 가르치고 싶네요. 올해 내로 다른 신입 사원들만큼 해낼 것 같은데요.”
“지금은 내 수행 비서 역할만으로도 벅찰 겁니다. 집안 사정도 있고요.”
“반년 정도 지나서 적응을 마치면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검토해 보지요.”
서도헌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김하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늘 오후에는 외부 일정이 있으셨죠? 저녁은 의준 씨와 드시나요?”
“송산정에 갑니다.”
송산정은 회사에서 접대 시에 종종 이용하는 한정식 식당이었다. 오늘만이 아니었다. 어제는 이탈리안, 그제는 일식집. 지난주에는 예약제 원테이블 레스토랑과 퓨전 한식 식당에도 다녀왔다.
서도헌은 이의준과 거의 매일같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지난주부터 이번 주까지 의전용 식당 목록을 알차게 이용하셨네요. 이러다 다음 주에는 갈 데가 없어지겠어요.”
“접대 시에 방문하게 될 식당을 미리 둘러보는 목적이니까 빨리 끝낼수록 좋지요.”
서도헌은 무심하게 말했다.
“오후에 외부 미팅 때문에 자리를 비울 테니 오늘 내로 결재할 서류가 있으면 점심시간까지 가져오세요.”
“점심시간에 확인하시게요? 식사는요?”
“사무실에서 먹습니다. 이의준 씨에게 사다 달라고 부탁했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의준 씨도 점심시간에 일 시키시고요?”
“수행 비서니까요.”
“…….”
김하나가 수행 비서 역할을 할 때는 점심시간에 자유시간을 주던 서도헌이었다.
‘내가 임시로 일을 맡아서 그러셨나? 그만둔 전임자 때도 그랬던 것 같은데. 아니지, 그때와는 경우가 다를까.’
지난해 서도헌의 수행 비서였던 직원은 1년을 못다 채우고 퇴사했다. 표면상으로는 자진 퇴사였다. 하지만 비서실 사람들은 그녀가 인사부장으로부터 퇴사 권유를 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상사였던 서도헌을 짝사랑한 나머지 업무에 지장을 주어서였다.
잘생겼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임원 서도헌을 동경했던 여직원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상사에게 전화해서 울거나 회사명을 명시한 SNS에 상사가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서 죽겠다는 글을 남긴 사람은 전 수행 비서 한 명뿐이었다.
‘업무 특성상, 회사 외의 장소에서 함께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해했나 보군요. 나는 당신을 부하 직원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서도헌은 냉정했다. 전 수행 비서는 그날부로 사직했다. 짝사랑의 고통보다 거절당한 충격이 더 컸으리라.
‘그때는 걔를 동정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전무님이 잘 대처하셨지.’
김하나가 비록 임시로나마 수행 비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사 혼동을 싫어하는 성격이 서도헌과 맞았기 때문이었다.
“전무님. 점심 사 왔습니다.”
의준이 전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김하나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김하나를 보고 웃으며 묵례를 했다. 김하나도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전무님, 결재 서류는 곧 출력해서 올리겠습니다.”
“그래요.”
도헌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의준에게 손짓했다.
“밥은 거기 두고 잠깐 오십시오.”
“아, 예.”
의준은 커피 테이블 위에 종이봉투를 내려놓고 급히 도헌에게로 향했다. 도헌이 화면에 표시된 이메일을 가리켰다.
“내가 지시한 업무 메일은 비서실 전체에 참조해 답장할 필요 없습니다. 김 과장만 참조하세요. 그리고 메일 내용. 이럴 때는….”
김하나는 의준에게 설명하는 도헌을 바라보았다. 의준을 대하는 도헌의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고개를 돌리면 코가 닿겠네. 저렇게 가까이 사람을 두던 분이 아닌데.’
도헌은 어떤 직원과도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일했다. 지난 수행 비서는 물론 김하나조차 전무실 집무 책상 너머에 발을 들여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역시 동성간에는 오해의 소지가 적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 아는 사이셔서 스스럼이 없으신가?’
이유가 어떻든 의준이 다른 직원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전무님이 편애도 할 줄 아는 분이셨구나.’
이런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도헌이 의준을 야단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직원들에게 하듯이 화를 내는 대신 평소와 같은 말투로 냉정하게 지적하는 도헌에게 의준은 빠르게 사과하고 그 자리에서 실수를 수습했다.
‘…편애라고 불평하기 어렵게 일도 철저하게 시키시지만.’
사직한 수행 비서 일이 있은 후로 도헌은 전보다 더 철저히 몸가짐을 조심했다. 그전에는 종종 회식에도 참여하고 사내 소모임에도 어울렸지만 그 뒤로는 사외에서의 만남을 철저히 끊어 버렸다. 김하나에게는 그런 도헌의 모습이 약간 안쓰럽게 비치기도 했다.
‘마음을 터놓을 정도는 아니어도 잠깐 긴장을 풀고 대할 만한 사람이 한 명 정도 있으면 좋지.’
의준이 수정을 마친 메일을 확인한 후 도헌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하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도헌이 미소를 짓지 않아도 회사 업무에는 지장이 없지만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아서 나쁠 일도 없었다.
‘의준 씨 덕에 전무님도 편해지고 내 일도 줄었으니 일석이조지, 뭐.’
김하나는 조용히 전무실을 뒤로했다.
***
깨끗한 도기 접시에 깔끔하게 담겨 나온 냉채를 젓가락으로 한입에 들어갈 만큼만 집었다. 아래에 손을 받치면서 냉채를 입안에 넣었다. 입을 다물고 씹기 시작하자 오독오독하는 소리와 함께 알싸한 겨자 향과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맛있네요.”
음식을 삼킨 후에 의준은 입을 열었다.
“양념과 재료가 잘 어우러졌어요. 씹히는 정도도 좋고… 너무 알싸하거나 시지 않고 뒷맛이 깔끔해서 좋아요. 살짝 도는 단맛이 평범한 설탕 같지는 않은데… 뭘 넣었는지 물어보고 싶어지네요. 가게에서 대답해 줄까요?”
“평범한 해파리냉채입니다.”
도헌이 지적했다.
“그렇게까지 분석할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런 음식이 나온다 정도만 알면 됩니다.”
“아, 네. 그래도… 저에게는 공부니까요.”
의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며칠째 이어지는 식당 탐방 목적은 ‘거래처 및 손님들을 대접할 식당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수행 비서인 의준은 손님에게 직접 음식 설명을 할 일이 없을 테지만 도헌은 접대 상황에 따라 식당을 선정하고 예약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무님 말씀이 맞네요. 같은 재료라도 조리법에 따라 식감도 달라지고… 매실청과 대추의 단맛이 이렇게 다르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순서에 따라 다른 요리를 가지고 들어온 종업원에게 결국 단맛을 낸 재료를 물어보고 만족스러워하는 의준을 보며 도헌은 메뉴를 펼쳤다.
“단품도 하나 시켜 보죠.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네? 더 시키시게요?”
예약 시에 미리 코스 요리를 주문했고 아직 요리는 다 나오지 않았다.
“전부 먹지 않아도 됩니다. 다양하게 맛보는 데 의의를 두죠.”
도헌은 메뉴를 의준에게 건넸다.
“골라 봐요.”
“네….”
오늘 코스 요리에 포함된 요리를 떠올리며 겹치지 않는 단품 요리를 확인한 후에 의준은 입을 열었다.
“복분자 장어구이를 드셔 보셨나요?”
“여기 올 때마다 먹었습니다.”
“……? 좋아하시나 봐요.”
“손님들이 좋아하시죠.”
의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헌은 의준에게 메뉴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재료가 재료 아닙니까, ‘복분자’와 ‘장어’. 의학적 효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좋아하시더군요.”
“…아.”
의준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자주 드셨군요.”
그 말에 도헌은 살짝 눈썹을 위로 올렸다.
“내가 아닙니다. 손님들이 즐겼죠.”
“네? 네.”
“…….”
도헌은 의준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의준 씨 표정이….”
“표정이요?”
“…아닙니다.”
의준은 웃음을 참았다. 도헌 같은 남자도 하반신과 관련된 이야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다니 왠지 우스워서였다.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걸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식탁에 가려진 자신과 도헌의 하반신을 상상했다.
5년 전, 단 한 번 도헌과 관계를 맺었다.
좁은 방의 싱글 침대 위에서 서로 그곳을 마주했었다. 돌이켜 보면 관계를 맺었다기보다 서로의 손을 빌린 것에 가까웠다.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럴까?’
얼굴이 붉어졌다.
“이 정도 대화에 그렇게 얼굴을 붉히면 능청스러운 분들의 놀림감이 되기 쉽습니다.”
도헌의 말이 들려왔다. 의준은 헛기침을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내리깐 눈꺼풀이 달아오른 뺨 위로 흐릿하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헛기침을 하느라 오므렸던 입술도 유달리 붉고 촉촉했다.
“…….”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헌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저런 표정을 보이면 능구렁이 같은 노인들은 더욱 놀려 대리라. 의준처럼 어리고 순진하게 생긴 남자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안주 삼아 분위기를 흥겹게 끌어올릴 것이다. 대학 시절에도 그랬다. 그때도 그런 선배들과 교수들이 싫었다. 은근슬쩍 의준에게 집적댔던 놈도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다른 걸로 시키죠.”
도헌은 메뉴를 대충 보고 호출 벨을 눌렀다. 의준은 도헌의 표정을 살폈다.
“전무님.”
“화 안 났습니다.”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제 눈치를 봤잖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시기에 확인했을 뿐입니다.”
“눈치를 보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무서울 때나 눈치를 보죠… 지금 전무님이 무섭지는 않거든요.”
도헌은 의준을 바라보았다.
“상사와의 식사 자리인데 꽤 솔직하군요.”
“불쾌하셨다면 고치겠습니다.”
“…….”
침묵이 흐르고 도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하겠습니다. 내가 억지를 부렸어요. 미안해요.”
의준은 대답 대신 도헌의 안색을 살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서 진심을 느끼기보다 의구심이 먼저 솟아올랐으리라. 도헌은 입을 열었다.
“내가 사적으로 의준 씨를 도왔던 일이나, 예전… 관계 때문에 의준 씨가 괜히 부담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눈치를 주거나 불편하게 할까 봐 줄곧 신경 썼어요. …그러느라 예민해졌나 봅니다.”
여기까지 말한 후 도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화 도중에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상사’라고 지칭한 것부터 잘못인데 신경을 써서 예민해졌다는 말은 변명이군요.”
“…….”
“내가 속 좁게 굴었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하지요.”
사과를 들은 의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고맙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의준의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흘러나온 바람에 도헌은 이렇게 되물었다. 의준은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정정하고 사과해 주셔서요.”
“사과를 하고 감사받기는 처음이군요.”
“사과할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다는 걸 아니까요.”
“의미심장한 말이군요. …예전의 행동에 대한 지적입니까?”
“예?”
놀란 의준을 향해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의 나는 사과할 줄 모르는 남자였으니까요.”
“…그게.”
의준은 난처해져서 말을 흐렸다. 도헌은 낮게 웃었다.
“고집 세고 철없던 시절이었지요. 그때는 먼저 사과를 하면 왠지 모두 내 잘못이 될 것 같았습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과하지 않았던 적도 있어요. …의준 씨에게도 꽤 고집을 부렸었지요.”
“…아닙니다.”
도헌은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많이 참았겠지요. 혹은 무시했거나. 그때는 오냐오냐 자란 남자를 상대하느라 고생했을 겁니다.”
“…….”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는 의준을 향해 도헌이 말했다.
“그때와는 달라졌습니다.”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에 회색 눈동자만 진지하게 빛났다.
“적어도 예전에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만큼은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내가 속 좁게 굴거나 납득이 안 가는 행동을 하면 참거나 넘기지 말고 지적해 줘요. 그러면 돌아보고 고칠 테니까.”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의준은 당황했다. 어째서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는가. 이래서야 마치….
“수행 비서는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이니 그런 역할도 맡아 주어야 합니다.”
수행 비서이자 동료. 의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거 일을 들먹이는 바람에 당황했지만 도헌은 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의준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도헌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의준 씨?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습니까?”
“네? 아, 아닙니다!”
의준은 황급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말씀이셔서….”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일일이 감시하다가 지적하라는 이야기도 아니니까.”
가벼운 어조로 이렇게 덧붙인 후에 도헌은 말을 이었다.
“나는 의준 씨가 예전과는 다른 나를 제대로 보아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의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오해하기로 작정하면 끝없이 오해할 발언을 연달아 내뱉는 도헌이 낯설었다. 예전에는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를 내뱉는 데만도 한 달이 넘게 걸렸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저렇게 태연히 노래 가사 같은 말을 내뱉다니.
“예전과 달라지셨다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도 이해했어요.”
관계도 사람도 변했다. 당연히 감정도 변했을 것이다.
배우만 같을 뿐 배역도 이야기도 다르다면 별개의 영화가 아니던가.
“전무님과 제 관계가 예전과는 다르다고만 생각했는데, 말씀을 듣고 나니 아예 새로운 관계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겠다 싶네요.”
의준은 차분하게 말한 후에 미소를 지었다.
“저도 수행 비서이자 동료로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탐색하듯 의준의 얼굴을 응시하던 도헌의 회색 눈동자에 얼핏 부드러운 빛이 어렸다.
“의준 씨도 변했군요.”
“제가요?”
의준은 예상했던 말이기에 놀라지 않고 되물었다.
“그래요. 예전의 의준 씨는 이렇게….”
도헌은 말을 멈추었다. 시선이 의준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홍조가 옅게 어린 뺨에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위로 살짝 올라간 입 끝. 생김새는 예전과 다르지 않은데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무엇보다 눈빛이 틀렸다.
‘이렇게 벽을 칠 줄 아는 녀석이었나.’
5년 전, 의준은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곤 했었다. 사소한 말다툼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여리고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리숙한 스무 살 후배였다.
‘변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는 의미겠지.’
상대에게 변한 자신을 달리 대해 달라 요구했으니 상대가 같은 요구를 하면 받아들여야 옳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씁쓸할까.
‘이 녀석은 변하지 않았기를 바랐나?’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이기적인 마음에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도헌은 고개를 돌렸다.
“전무님?”
의아한 어조로 그를 부르는 의준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도헌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새롭게 시작하기로 합의한 셈이군요.”
“네? 아, 네.”
의준은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헌은 의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동료이자 임원과 비서로서 서로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의준은 도헌의 손을 잡았다. 도헌은 꾹 하고 한 차례 힘을 준 후에 손을 놓았다.
식사는 계속되었다. 대화는 즐거웠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도헌과 헤어진 후 의준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밤 10시에 가까웠다.
“오빠.”
입원실에 있던 소영이 로비로 내려왔다. 다인실과는 달리 1인실에는 면회 시간에 융통성이 있었지만 출입을 하려면 보호자 카드가 필요했다. 오늘은 수업이 없던 소영이 병원에 머물라고 했기 때문에 카드는 그녀가 가지고 있었다.
“고생했네. 엄마 옆에 있기 힘들지 않았어?”
“간병은 전문가가 다 하시는걸. 난 그냥 소파에 앉아서 과제만 했어. 솔직히 병실에 있으면 편해.”
습도와 기온이 조절되고 청결한 데다 인터넷도 사용 가능하니 반지하 셋방은 물론 카페보다도 낫다며 소영은 웃었다.
“엄마는 좀 어떠셔?”
“여전하지, 뭐.”
그 말은 아직도 의식이 없지만 위급 상황 없이 하루를 넘겼다는 의미였다. 의준은 다행이네, 라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는 오늘 회식이었어?”
“응? 아, 전무님하고 잠깐. 왜? …술 냄새 나?”
“아니, 안 나. 그게 아니라 전화를 안 받는대서.”
“전화? 전화했었어?”
의준이 놀라서 되묻자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나 말고, 상우 오빠가.”
“상우?”
“응, 아까 왔다 갔어. 꽃이랑 되게 비싼 과자 들고.”
“병원에 왔었다고?”
금시초문이었다. 어리둥절한 의준에게 소영은 이렇게 말했다.
“일 끝나고 연락 가능하면 오늘 내로 전화 달라고 했어. 엄마 보고 얼른 전화해.”
“알았어.”
병실에 도착한 의준은 간병인과 인사를 나눈 후 어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예전 같았으면 밀려 있던 뒤처리나 빨래 등으로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을 테지만 간병인이 상시 지키고 있는 지금은 할 일이 없다시피 했다. 의준은 새삼 전문가에게 맡기면 편해진다던 도헌의 말을 실감했다.
“소영아, 나 잠깐 휴게실 가서 전화하고 올게.”
“여기서 하지, 왜?”
“엄마 주무시잖아.”
의식이 없는 어머니가 깰 리는 없어도 괜히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의준은 휴게실로 향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고 간병인과 보호자 몇 명이 드문드문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휴게실 한쪽에서 의준은 휴대 전화를 꺼냈다. 착신 목록에 상우의 연락처가 보였다.
‘아, 차로 이동하던 시간에 전화했구나.’
의준은 상우의 연락처를 눌러 전화를 걸려다가 멈췄다. 시선이 아래쪽 착신 이력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어제 점심때 업무 관계로 연락했던 서도헌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그건… 선 긋기였지.’
저녁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태연하게 도헌의 말을 받아넘겨서 다행이었다. 솔직히 의준도 본인이 그렇게까지 침착하게 대응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놀랐다. 도헌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남은 의준은, 아마도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쉽게 받던 철없던 스물 초반의 대학생일 테니 이해가 갔다.
이별한 사이에 의준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도헌이 형에게도 그랬겠지.’
일자리를 주고 어머니 일에 도움을 주는 바람에 착각했었다. 지금의 서도헌과 예전의 그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다.
‘나도 모르게 추억을 현재에 덧씌우고 있었어.’
5년 전에 서도헌은 그를 떠났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다가올 이유가 없잖아?’
리셋하자고 했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자고도 했다. 현명한 제안이었다. 의준을 위한 판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가슴이 답답할까.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답이 없는 의문은 고민할 가치도 없어. 무시하고 나아가야 옳아.’
서도헌 일로 고민하고 가슴 아파하던 시절은 이미 과거에 속해 있었다. 그 고통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전무님과 나는 남이야.’
도헌은 한 번도 ‘우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어휘는 사람의 심경을 드러내는 법이었다.
‘전무님과 내가 다시 우리로 엮이는 일은 없어.’
의준은 김상우의 연락처를 터치하며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