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따스하고 부드러운 무엇인가가 머리를 어루만졌다. 누군가의 손이었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넘기는 감촉에 눈물이 솟아올랐다. 의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표정 변화를 오해했는지 손길이 멀어졌다.
‘아니야, 가지 마.’
의준은 손을 덥석 잡았다.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만큼 큰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의준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곧 상대도 의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안 가.”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손을 더 꽉 잡는 의준을 향해 손의 주인은 재차 말했다.
“옆에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쉬어.”
“…….”
일그러졌던 의준의 얼굴이 서서히 펴지더니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어렸다. 도헌은 의준의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차마 입가에 손을 대지 못한 채 손을 거두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다.
“…….”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초점을 맞추려고 눈을 깜박이는 사이 귓가에 작게 톡톡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대 전화 자판 소리였다. 의준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도헌이 보였다.
꿈일까.
의준은 입을 열었다.
“…헌이 형.”
도헌이 그를 바라보았다.
“의준 씨, 정신이 듭니까?”
“……? …어.”
의준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진짜 서도헌이 눈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의준 자신은… 어째서 누워 있는 것일까. 여기는 어디인가.
일단 일어나려고 손을 짚었다. 따끔하고 손목이 아팠다. 고정 테이프가 붙은 손과 그 테이프 사이로 이어진 투명한 줄이 보였다. 줄의 끝은 링거팩에 이어져 있었다.
“어….”
어리둥절해하는 의준에게 도헌이 말했다.
“누워 있어요. 갑자기 일어나면 좋지 않습니다.”
“…전무님, 제가…. …여기는 어딥니까?”
“회사 건물 2층에 있는 내과입니다.”
내과. 병원…? 어째서. 의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왜….”
“기절했으니까요. …기억 안 납니까?”
“……?!”
그 말을 듣자마자 기억이 확 되살아났다. 회의실. 자료를 가지고 들어서다가 몸이 기울어지면서 갑자기 시야가 어두컴컴해졌다. 그리고… 그리고 기억이 없었다.
“아….”
사과를 하려고 입을 열다 말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를 몇 분 앞둔 시간이었다. 회의 도중에 쓰러지고 거의 세 시간을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의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회의를 망쳐서, 게다가 점심시간이…. 죄송합니다.”
“다들 놀랐지만 회의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도헌은 이렇게 말한 후에 시간을 확인했다.
“의준 씨를 병원에 데려온 책임도 있고 과로인 것 같다는 진단에 미안한 마음도 들어서 옆에 있었습니다. 내가 그러기로 했으니 의준 씨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의준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고개를 숙였다. 도헌은 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준 씨는 나와 대화만 나누면 꼭 한 번은 죄송하다고 사과하는군요. 버릇입니까? 아니면 내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나요?”
“아니요, 아닙니다. 죄소….”
의준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도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일은 사과할 필요 없다는 의미에서 한 말인데 그것조차 부담스러운가 보군요.”
“…….”
도헌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숙인 의준에게 말했다.
“오후 업무는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입원실이 아니라 보조 진료실이지만,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 두었으니 푹 쉬도록 해요.”
“전무님….”
“이야기는 퇴근 후에 들읍시다. 그때 올라와요.”
“…….”
도헌이 떠나고 홀로 남은 의준의 머릿속에 현 상황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한 마디가 떠올랐다.
망했다.
야근은커녕 과로한 적도 없는데 업무 시간에 수면 부족으로 기절하다니.
‘어떻게 하지….’
절망감이 솟아올랐다. 의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퇴근 시간 5분 전에 의준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김하나를 비롯한 비서실 동료들은 그를 반기고 괜찮은지 걱정을 해 주었다. 폐를 끼쳤다고 사과하는 의준에게 그들은 그런 말 말라며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다. 좋은 동료들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큰 사고를 쳤으니, 잘리겠지?’
오후 내내 걱정을 반복했다. 잠은커녕 눕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잘리겠지.’
퇴근 10분 전에 병원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로 올라오는 동안 마음을 가다듬었다. 임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기절한 데다 상사인 도헌과 김하나에게 말도 안 되는 폐를 끼쳤으니 잘려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김하나는 괜찮다며 미소를 지었지만 흘깃 전무실을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는 말과는 다른 불안함이 어려 있었다.
‘잘릴 거야.’
전무실 앞에 섰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도헌이 손짓했다.
“앉아요.”
의준은 소파에 앉았다. 도헌은 노트북 화면을 응시한 채 물었다.
“좀 잤습니까?”
“…네.”
도헌은 흘깃 의준을 보았다. 병원에서 보았을 때보다 창백하고 눈가는 붉게 부어 있었다.
‘거짓말이군. 눈도 붙이지 못한 얼굴이야.’
도헌은 입을 열었다.
“얼마나 못 잤습니까? 오늘 말고, 그동안.”
넘겨짚어 던진 질문에 의준은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이번 주… 아니, 지난주 목요일 즈음부터… 제대로 못 잤습니다.”
“…일주일 가까이 잠을 못 잤다고요?”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에 도헌은 놀랐다.
“왜 잠을 못 잤습니까?”
“…어머니가… 입원 중이십니다. 간병을 위해서 병원에서 숙식하다 보니….”
의준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도헌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일주일이나 병원에서 잤다고요? 요즘은 병원 측에서 간병까지 맡는 걸로 아는데요.”
“의식이 있고 최소한 거동이 가능한 경우에만 그렇고… 저희 어머니처럼 의식이 오가는 분은 간병인을 고용하거나 보호자가 직접 돌봐야 합니다.”
“왜 간병인을 고용하지 않았습니까?”
돌려 말할 수 없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의준은 짧게 대답했다.
“돈이 없었습니다.”
“…….”
“이번 달까지는 고용하기 어려웠습니다. 월급이 나오면… 다음 달부터는 고용하려고….”
“그때까지 직접 간병하며 병원 생활을 할 생각이었습니까?”
도헌이 물었다. 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신용카드는 오래전에 거래가 중지되었고 오랜 구직 생활로 여윳돈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동생인 소영이에게만 간병을 맡길 수도 없었고 말이다.
“업무에 지장이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작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고 간병했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과신했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듣자고 한 질문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의준 씨.”
도헌이 불쾌한 투로 이름을 불렀다. 의준은 벌떡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자르지만 말아 주세요!”
“…….”
“월급이 나와야 어머니 병원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습니다. 간병인도…. 동생이 휴학하지 않도록 간병인도 고용할 수 있고요.”
여기를 나가면 또다시 일을 구하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생활을 반복하게 될 터였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뭐든,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제발….”
의준은 비참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제발… 계속 일하게 해 주세요.”
“…….”
도헌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이는 의준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에 입을 열었다.
“이의준 씨. ‘뭐든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도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준에게로 걸어왔다. 의준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좀 쉬라고 혼자 두고 올라왔더니, 그사이에 쓸데없이 고민만 늘렸던 모양이군요.”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도헌은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진행할 대화에 오해가 없도록 말해 두겠습니다. 나는 이의준 씨에게 사직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고요.”
“…….”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묻는 의준에게 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 후에 보자고 한 이유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이유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룻밤을 새운 정도로 쓰러질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역효과였군요.”
도헌은 말을 이었다.
“사원이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원인을 확인해서 개선하도록 돕는 것이 상사입니다. 무조건 사원 개인의 탓을 하기 전에 회사에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아야 옳으니까.”
의준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 말 듣고 있습니까?”
“네, 아니요, …네. 저기….”
의준은 더듬거렸다.
“죄송합니다. 듣고 있는데 무슨 말씀인지… 제가 처음 듣는 말이라서 이해하기에 어려워서요.”
“상식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만….”
도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에 말을 이었다.
“요컨대, 혼자 떠안을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
의준은 눈을 크게 뜨자 도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의준에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의준의 뺨에 닿았다. 흠칫하고 어깨를 움츠리는 의준을 향해 도헌은 입을 열었다.
“울기까지 할 말입니까?”
“…아.”
그제야 의준은 자기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입을 열기 무섭게 고였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의준은 황급히 손등으로 뺨을 닦았다. 눈을 깜박여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 왜 이러지,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죄송합니다.”
도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사과를 잘하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요. 밀린 사과를 하루 만에 다 받은 기분이 듭니다.”
“예?”
의준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도헌이 그를 끌어안았다.
“……?!”
티셔츠 위로도 느껴지는 탄탄하고 부드러운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게 된 의준은 놀라서 숨을 들이마셨다. 따스하고 좋은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그동안 이의준 씨가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봅니다.”
토닥, 토닥 하고 등을 두드리면서 도헌이 말했다. 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저는….”
눈물이 솟아올라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의준은 도헌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흑….”
가슴 안쪽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깨문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윽… 윽….”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있을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달리 힘들었다. 겨우 삶이 제대로 돌아가나 싶다가 고꾸라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매만 남게 될까 봐 무서웠다. 매번 다시 일어서서 헤쳐 나가자고 스스로 다독이고 힘을 냈었다. 그러고 싶지 않을 때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희망이 없어도 삶은 계속되니까. …그렇게밖에는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
“윽… 윽….”
몸을 웅크리고 떨면서 우는 의준을 도헌은 말없이 토닥였다.
‘잘리지 않았어.’
이 회사에 입사하고 한 달 동안 무척 즐거웠다. 과거사를 접어 두고 업무적으로 공정하게 대해 주는 도헌은 물론 낯선 업무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김하나와 스스럼없이 대해 주는 동료들이 고마웠다. 점점 다가오는 월급날이 기대되는 만큼 매일이 즐거웠다. 돈을 벌면서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계속 다닐 수 있어.’
즐거운 직장을 빼앗기지 않았다. 월급도 받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마치 앞으로의 삶에 조금 더 희망을 품어도 괜찮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흑….”
의지할 상대가 있다는 것이 이토록 마음 든든해지는 일이었던가.
도헌은 훌쩍이는 의준을 묵묵히 안아 주었다. 의준이 가슴에 얼굴을 비비자 그는 의준의 등을 차분하고 다정하게 토닥였다.
“괜찮아.”
부드러운 목소리가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진정해, 괜찮으니까.”
반말로 건네는 그 말이 의준의 마음에 달콤하게 스며들었다.
‘도헌이 형.’
코를 훌쩍이면서 고개를 들었다. 도헌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회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가늘어지는 모습을 보며 의준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렸다.
입술 위로 숨결이 스쳤다. 입술이 겹쳐지기 직전, 체온과 숨결이 전해지려던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
화들짝 놀란 의준이 눈을 떴다. 도헌은 고개를 돌렸다. 집무 책상 위의 내선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그는 의준을 두고 책상으로 향했다.
“여보세요.”
도헌이 전화를 받는 사이 의준은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뺨이 화끈거리며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내가 왜 그랬지?’
자연스럽게 키스를 바라며 고개를 들던 자신을 떠올리자 민망함이 솟아올랐다. 의준은 눈물에 젖어 축축하고 따끈한 뺨을 세차게 문질렀다.
“…그렇군요. 늦게까지 알아보느라 고생했습니다. 고마워요.”
짧은 통화를 마친 도헌은 의준을 바라보았다.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예…?”
의준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도헌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상의를 집으며 말을 이었다.
“회사에 정사원의 부양가족에게 의료비를 지원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인사팀에 의준 씨가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죠.”
담당자는 수습 기간인 이번 달에는 어려워도 정사원이 되는 다음 달부터는 내규에 준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렸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간병인을 구하는 데는 보탬이 될 겁니다.”
“…그런….”
“실망했습니까?”
“아니요!”
의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실망이라니… 너무 놀라서요.”
월급 외에도 의료비를 따로 지원받다니. 그런 일이 가능한가. 의준은 얼떨떨해서 눈만 깜박였다.
“문제는 남은 기간 동안 간병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군요.”
도헌이 중얼거렸다. 의준은 급히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그 사이에는 제가 어떻게든….”
“또 밤을 새워서 무리하다 쓰러질 생각입니까?”
“아니, 요….”
의준은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도헌은 말을 이었다.
“업무에 지장을 주면 곤란합니다. 다음 주에는 외부 모임도 많으니까요.”
“…네….”
의준은 막막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고민하는 의준을 두고 도헌은 상의를 걸쳤다.
“그러니 상황을 함께 개선해 봅시다.”
“예?”
의준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도헌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전무실 문을 열었다.
“전…무님. 어디로 가십니까?”
얼떨결에 도헌을 따라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의준은 이렇게 물었다. 도헌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병원에 갑니다.”
의준이 어느 병원이냐고 묻기도 전에 도헌은 말을 이었다.
“어머님이 입원한 병원으로 안내하세요.”
왜?
떠오른 의문을 내뱉지 못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의준은 조수석에 탔고 도헌이 뒷자리에 타는 사이에 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렸다. 밀리는 간선 도로를 타고 30분을 달려 병원에 도착한 후에도 의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왜 나를 도와주지?’
입원 병동으로 향하는 길에 도헌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 도중에 그는 의준을 향해 이렇게 지시했다.
“우선 1인 병실부터 알아봅시다.”
“예? 어… 남는 병실은 없을 겁니다.”
“병실은 있습니다. 늘 한 곳 정도는 비어 있어요.”
“설령 비어 있어도… 옮길 돈이….”
“알아보세요.”
도헌은 의준의 말을 자른 후에 통화를 시작했다. 의준은 어쩔 수 없이 너스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있습니까?”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보호자 휴게실로 들어가 통화를 계속했던 도헌이 다가왔다. 때마침 검색을 마친 간호사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죠, 보호자님. 저희 병동에 비어 있는 1인실은 없어요.”
“네….”
“다른 병동에는 있습니까?”
도헌이 끼어들었다. 간호사는 다른 병동 1인실은 이용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도헌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특실은요?”
“특실이요?”
“특실 말씀인가요?”
의준과 간호사의 되물음이 겹쳐졌다.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뜬 의준을 무시하고 도헌이 대답했다.
“예. 특실이 비어 있는지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간호사가 그러겠다고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의준은 도헌에게로 몸을 돌렸다.
“전무님, 특실이라니요. 저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하룻밤에 한 달 생활비를 날릴 수는 없었다. 창백해진 의준에게 도헌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1인실이 빌 때까지만 머무는 걸로 합시다. 지불은 내가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예?”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전무님이 왜….”
“내가 병실을 옮기자고 제안했으니까요.”
“말도 안 됩니다.”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전무님께서 사비를 써서까지 저를 도울 이유는…. 그런 빚을 질 수는 없어요. 저는….”
“이의준 씨.”
도헌은 의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함께 상황을 개선하자고 했지요.”
“…….”
“난 실질적인 지원을 결심하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위로와 격려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니까요.”
의준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죄송해할 필요 없습니다. ‘원활한 업무 수행을 위한 투자’ 정도로 받아들이세요.”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날 즉시 의준의 모친은 빈 특실로 이동했다.
병실에 있던 소영은 의준의 설명을 듣고 기뻐했다.
‘오빠, 보호자용 침대랑 샤워실도 있어. 소파도 따로 있고… 인터넷도 된대. 여기서 엄마 보면서 과제도 할 수 있겠어.’
병실 이동을 마치고 소영에게 양해를 구한 후 의준은 수납처로 내려왔다. 때마침 병실 수속과 비용 지불을 마친 도헌이 의준을 향해 말했다.
“아는 간병인에게 연락했습니다. 내일 오전부터 와 주겠다더군요. 전직 간호사였고 관련 회사를 운영하는 분이니 믿고 맡겨도 됩니다.”
“…….”
“비용은 내가 지불했으니 신경 쓰지 말고.”
도헌은 시간을 확인한 후에 몸을 돌렸다.
“그럼 내일 봅시다.”
“전무님!”
도헌은 걸음을 떼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뭡니까?”
“저….”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의준은 숨을 삼켰다.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미안해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사과해도 지금 심경을 전부 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과보다 먼저, 반드시 전해야 하는 말은 달리 있었다.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왕래객이 드문 조용한 로비에 의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전무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정말 고맙습니다!”
의준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도헌은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 다니는 데서 뭐 하는 겁니까.”
무심한 대꾸가 들려오는 바람에 의준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아, 그게….”
도헌과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의준은 말을 멈췄다. 도헌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인사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닙니다만, 죄송하다는 말보다는 듣기 좋군요.”
“…….”
도헌은 멍하니 서 있던 의준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어머님 곁에 머뭅니까?”
“…네. 소영이, 여동생은 내일 아침 일찍 강의가 있어서… 집에 보내려고요.”
“그렇군요.”
도헌은 의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특실의 보호자용 침대는 쓸 만할 겁니다.”
“…네, 푹신해 보였어요.”
의준은 집에 있는 스프링이 꺼진 매트리스보다 더 좋아 보였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이렇게만 대답했다. 도헌은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푹 자면 좋겠군요.”
“네, 그…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심장이 두근하고 내려앉으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도헌은 손을 놓았다.
“그럼 내일 봅시다.”
“아….”
망설임 없이 떠나가는 도헌의 등을 향해 의준은 황급히 외쳤다.
“내일 뵙겠습니다!”
도헌은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병원을 나간 도헌의 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의준은 힘없이 로비 의자에 주저앉았다.
“휴우….”
긴 하루였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장 피로한 날이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어.’
돌이켜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의준은 되살아나려는 기억을 억누르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눈꺼풀에 까칠한 감촉이 느껴졌다. 손등에 붙인 밴드였다.
“…….”
손을 내려 손등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밴드 위를 어루만졌던 도헌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다정한 손길이었지.’
의준은 자기 손등을 슥 어루만졌다.
‘도헌이 형….’
저도 모르게 손등을 들어 입술에 대려다 말고 의준은 화들짝 놀랐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의준은 다른 손으로 손등을 덮어 무릎에 눌렀다.
도헌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 그가 병실과 간병인 일을 도운 이유는 직원 복지의 일환이었다.
‘…직원 복지? 사비를 털어 직원 본인도 아니고 가족을 위해 특실을 잡아 주었는데? 말도 안 되잖아.’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돼.’
서도헌은 5년 전과 다른 사람이었다. 이제 그와 의준은 직장의 상사와 부하 사이에 불과했다. 부여할 의미조차 없는 사이가 아니던가.
‘나를 버렸던 사람이야.’
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다시 호감을 품을 턱이 없잖아?’
변한 것은 도헌만이 아니었다. 의준도 이제 희망찬 미래를 꿈꾸던 대학생이 아니었다.
사랑을 믿었던 시절은 지나갔다.
‘사소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마. 기대도 하지 마.’
의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떠난 후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이 뜨끔하고 아팠다. 밴드 위로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퍼졌다.
한번 떠났던 사람이 두 번 떠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 왜….’
포근하게 몸을 감쌌던 온기와 힘을 떠올렸다. 귓가에 스며들었던 부드러운 목소리도.
‘괜찮아.’
시간이 5년 전으로 되돌아간 줄 알았다.
기대하면 안 된다. 매사에 의미를 두어서도 안 된다.
‘상처받는 사람은 나일 테니까.’
핏빛으로 물든 밴드 위에 지그시 입술을 누르면서 의준은 눈을 꼭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