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기 예보에 따라 비가 내리기 시작한 수요일 오전, 비서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수요일 오전에 열리는 임원 회의를 10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준이 참석 임원 수에 맞춰 출력한 회의 자료를 자리마다 놓는 사이에 다른 비서가 음료수와 간식을 챙겨 보조 테이블 위에 두었다. 김하나는 프로젝터를 예열하고 프레젠테이션용 노트북이 잘 연결되었는지, 파일은 제대로 열리고 내용에는 이상이 없는지 확인을 마쳤다.
“의준 씨, 전무님에게 회의 준비가 끝났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의준은 전무실로 향했다.
“전무님, 회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하던 도헌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어디 아픕니까?”
문을 잡고 서 있던 의준은 도헌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라기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요. 어제도 그랬는데 오늘은 더.”
안색만 창백한 게 아니었다. 의준의 눈 밑은 잔뜩 흐린 비구름보다 더 검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지난주 수요일,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여동생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한 차례 고비를 넘긴 뒤였지만 의사는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단 검사를 몇 개 해 봅시다. 보호자 동의가 필요한 상황이 올 수 있으니 가족이 곁에 머무르시면 좋겠군요.’
소영은 대학 강의를 포기하고 낮에 간병을 맡았다. 대신 의준은 퇴근 후에 밤에 간병을 하기로 했다.
모친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었다. 이번 주부터는 보호자가 24시간 붙어 있지 않아도 되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의준은 병원과 회사를 오가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개인 사정을 업무에 끌어들이면 좋지 않았다. 예전에 그 이유로 잘린 적도 있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어제 잠을 좀 설쳐서… 그렇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젯밤에는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가 급한 처치를 받느라 밤새 병실이 시끄러워서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전날에도 두 시간 정도 잤었다. 그러고 보니 주말에도 두세 시간 정도.
“설친 정도가 아니라 잠을 전혀 못 잔 얼굴인데요.”
“…아닙니다.”
추궁하는 듯한 질문을 듣자 짜증이 솟아올랐다. 의준은 표정을 굳혔다.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습니다.”
도헌은 시간을 확인한 후에 전무실을 나섰다. 뒤따르는 의준의 귀에 그의 말이 날아들었다.
“내가 허락할 테니 회의 끝날 때까지 휴게실에서 눈이라도 붙여요.”
“…….”
도헌은 의준의 대답을 듣지 않고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김하나와 비서실 사람들이 듣도록 말한 이유는 정말로 그래도 좋다는 의미에서였으리라. 하지만 의준은 아직 수습사원이었다. 정식 계약을 일주일 남기고 그런 간 큰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괜찮아.’
도헌은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마다 혼자 시간을 보냈다. 그 말은 수행 비서인 의준에게도 두 시간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의미였다.
이 회사의 직원 휴게실에는 칸막이가 쳐진 간이 수면실이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사람이 붐볐지만 밥을 포기하고 달려가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점심에 잠깐 자면 업무에 지장이 없을 거야.’
회의가 시작되었다. 점심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의준은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숨을 가다듬었다.
“…….”
도헌은 회의실에서 의준을 흘깃 바라보았다. 앉아서 눈 좀 붙이라던 도헌의 말을 무시하고 이리저리 오가는 중이었다. 의준은 눈치가 빠르고 일 처리도 꼼꼼해서 평이 좋은 편이었다. 덕분에 입사하고 한 달이 되지 않았음에도 정사원처럼 일하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아야 하는데.’
본인은 간밤에 잠을 설쳐서라고 변명했지만 안색은 며칠 전부터 나빴다. 원래 마른 체형이지만 며칠 사이에 더 여윈 느낌도 들었다.
잠을 설친 이유가 알고 싶었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 이상 간섭할 수도 없고 이유를 캐물을 권리도 없었지만 신경이 쓰였다.
‘회의를 빨리 끝내고 점심시간을 더 줘야겠군.’
도헌은 프레젠테이션을 들으며 자료를 확인했다. 도중에 그는 옆에 앉아 있던 김하나에게 물었다.
“김 과장, 2페이지에 첨부한 표의 원본 데이터를 볼 수 있을까?”
“네, 전무님.”
김하나는 빠르고도 조용히 일어나서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의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과장님,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아, 의준 씨. 미안한데, 회의 자료 2페이지에 첨부된 표의 원본 데이터 한 부만 출력해 주겠어요? 전무님이 필요하시대요.”
“알겠습니다.”
복도에서 가까운 자리에 설치된 공용 프린터가 움직였다. 의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엇….’
눈앞이 잠깐 캄캄했다가 밝아졌다. 의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멀쩡해진 후에 의준은 출력물을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똑똑. 회의실 문을 두드리자 앞에 서 있던 김하나가 문을 열었다. 의준은 틈새로 자료를 건넸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김하나가 자료를 도헌에게로 가져갔다. 도헌은 자료보다 먼저 의준을 바라보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도헌이 눈살을 팍 찌푸렸다.
‘왜 저러시지? 자료가 뭐 잘못되었나?’
도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은 그의 콧대가 일그러졌다.
‘어라?’
의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째서 저 곧고 높은 콧날이 에스자로 뒤틀릴까. 지나치게 불쾌하면 이목구비가 모두 일그러지기라도 하는…
“…어…?”
무릎이 풀썩 꺾였다. 갑자기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의준 씨!”
김하나의 비명 같은 외침과 동시에 큰 손이 의준의 머리를 감쌌다. 김하나가 아니었다.
‘누구?’
큰 손이 그를 끌어당겼다. 얼굴이 어딘가에 파묻혔다. 질 좋은 셔츠의 감촉과 함께 좋은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아….’
누가 그를 감쌌는지 알았다.
서도헌.
의준은 정신을 잃었다.